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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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같은 가정에서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한쪽은 매사에 안달복달하고 '관리자' 역할에 노상 진이 쭉 빠진 것처럼 느낄까? '가사'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영역을 담당하는 사람은 왜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사는 걸까? 왜 양육자 모두가 육아에 참여한대도 한쪽이 더 큰 부담을 지는 형국이 될까. 가정경제와 가족관계의 전반적 관리를 포함하는 가사 부담의 불평등에 으레 따라 나오는 반응은 '엄마/아내가 가장 큰 결정권자'거나 '각자 잘하는 일을 한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관계는 평등하고 공평하다고. 과연 그럴까? 가정 경제 규모 관리, 가족 성원의 일상 전반, 하다못해 빨래와 식사에 필요한 순서와 준비물, 가족 행사 챙기기는 누가 맡는가? '같이' 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실패'는 누구의 탓으로 돌려지는가? 자녀에게, 연로한 부모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연락을 받고 누가 부양하며, 매일 입고 쓰는 물건과 각종 공과금 등은 누가 책임지는가?

p.8 (추천사) 이 책은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을 기존의 기계적 분담 논리에서, '가사와 육아가 누구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시킨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대개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들 남성들은 가사노동을 평생 '머리에 이고' 살지는 않는다. (...) 남성들은 자신이 가사노동에 서투른 모습을 반복적으로 증명함으로써, 가사 책임을 회피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보통 자기 남편의 '무능력'을 남편의 비겁함보다는 그의 천성 탓으로 돌리곤 한다.

p.86 한번의 인지노동은 약간 성가신 소소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작은' 행동 혹은 찰나의 생각들이 쌓이면 그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왜 누구는 혼자서도 잘 살고 멀쩡히 사회생활을 하다가도 가사 문제엔 얼이 빠져서 '상세한 지시와 칭찬'을 요구하고, 누구는 장단기 계획을 도맡고도 '큰 일'엔 서투르다 여겨지는가? 왜 동등한 주체가 만나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서도 한쪽은 퇴근 없는 직장을 오가고, 누군가는 휴식과 출근을 분리할 수 있는가? 물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 진정 그가 그 일에 적합한 성격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의도된 나태함일까? '적성에 맞는 일'의 결과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설령 '잘 하는 일'을 맡아 나눈다 하더라도, 부담은 편중되어 있다. 누군가 준비부터 뒷처리에 실행을 맡고, 누군가는 결정만 내리면 된다면, 또한 그 결과의 책임이 한쪽에 편중되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를 평등이라 할 수 없다. 수직-업무적 위계 관계가 아니고서야 더더욱. 저자가 말하는 인지노동의 단계적 분담이 진실로 '분담'이 아닌 이유다. 개인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편만 급작스레 무능력자가 될 일이 없으니.

p.117 커플들의 합동 결정은, 결정 단계에 이르는 데 필요한 동이한 수준의 준비 작업에 남성이 참여하지도 않고, 혹은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동일한 중압감을 남성이 경험하지도 않으면서 가정생활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점수'를 따는 경우가 많았다. (…) 결정하기는 상대적으로 이득이 높은 인지노동이다. 예상하기나 지켜보기보다 눈에 잘 띄고, 많은 경우에 커플이 제한된 자원을 사용하거나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p.280 인지노동은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도 여성에게 크게 편중된 가사노동의 한 차원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는 우리가 통상 가사노동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시간 기반 지표로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 이성 커플 다수에서 여성들은 더 무거운 인지적 부하를 떠안고 있었고, 그것도 상대적으로 부담은 크지만 보상은 적은 활동들에 불균형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다만 그것이 과연 개인만의 전략이고 의도겠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사회가 어떻게 오래된 방기를 조장하고, 어떤 면에선 누군가를 집 안으로 '묶어 치워버릴' 수밖에 없게 하는지. 어떻게 이 차별이 성격과 현실의 이름으로 '합리적 선택'으로 탈바꿈되는지. 모든 노동이 얼마나 젠더-수행에 밀착되어 있는지, '정상 사회'가 얼마나 많은 비가시노동을 전제하는지를 생각해보라.

저자의 말처럼 "문화적인 힘들이 어떻게 여성을 몰아가서 가정이란 맥락에서 그러한 기술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하는지(19)"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라, 그것은 정말 무능과 재능의 문제였는지. 가정이 관리자와 이용자로 나누어진 공간은 아니었는지. 질문에 답할 때쯤엔 이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같이 살아가는' 일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p.282 이러한 서사가 호소력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나 반세기 동안의 '젠더 혁명'이 불균형적으로 행위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복해서 여성들에게 그들 또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왔으면, 여기서 '무엇이든'은 주로 직업적 성취의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왔다. 이는 중요한 진전인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젠더를 '한다'는 것에는 행동뿐 아니라 사고방식과 정신적 습관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p.293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과 커플에게 변화의 주체로서의 힘을 되돌려주는 것과, 인지노동 문제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자기계발서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커플을 향한 권고로 가득하다. (…) 즉, 문제의 핵심을 남성과 여성 개인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혹은 무엇을 하고 있지 않은지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은 개인들의 선택지를 제한하고 그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힘들을 간과하는 데 있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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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대연쇄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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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이 작가를 진심으로 우려했더랜다. 굳이 따지자면 우려 반, 경악 반, 해방감 반으로 이루어진 도합 150%쯤의 침묵이었는데, 정말이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언제고 '모 소설가, 신흥종교 교주가 되었다고 선언해… 누리꾼들, 그럴 줄 알았다' 따위의 속보가 뜨더라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어떤 거대한 구조, 어쩌면 세계 자체가 나의 의지나 능력과는 무관히 돌아가는 감각을 아는가? 무엇이 인간인지 물은 적이 있는가? 진종일 얼굴 흉내를 내다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인 적이 있는가? 신의 의지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또 존재의 바닥까지 싹 뜯어 관찰하고 싶었던 적이 없는가? 당연한 '안돼'는 왜 안 되어야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결국 포기해버린 적이 있는가?

p.15 〈사랑하는 신의 생일〉 이토록 복잡다단한 고통 바깥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 힘든 것도 싫어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많지 않아서, 가끔은 몸이 가볍게 한 발짝 떠오른 느낌이 드는 사람. 이대로 허공을 한 계단씩 밟아나가면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질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땅으로 짓눌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 몸이 계속 하늘로 향하려는 게 문제인 사람이고, 그게 유일한 고민이다.

p.91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러나 믿음은 실체가 없으므로 공허했고,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믿음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무한히 소급되어 불어나지만 결코 완전해지지 않는 갈망들. 가이우스는 그 공백이 기적처럼 채워지기를, 자신을 굽어살피는 신이 있기를 바랐다.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다…


언젠가의 물음을 되새겨보자. "만약 네가 세상을 끝장낼 수 있으면, 그러고 싶으냐?(『피와 기름』, 래빗홀)" '평범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안정과 순응에 대한 믿음 위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물론 여기서의 '평범'이란 내 평생 쟁취하지 못한 어떤 보편성 내지는 요구되는 인간-꼴 같은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위장과 학습이라는 양대산맥 작전, 가히 용을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버둥버둥 끝에 장렬히 실패한 그것.

이제 와서는 '이레귤러' 정도로 둘러댈 수 있게 된, 언젠가는 실패, 또 언젠가는 덜-됨이었던 기억을 이 작가가 주야장천 질리지도 않고 까발려대고 있으니 수치스럽지 않을리가, 또, 정확히 같은 이유로 부적격자이자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마주하는 쾌감을 느끼지 않을리가. 다시 말해보자. 나는 반쯤 실패했다. 빛이 있으라, 하면 예, 하고 눈 뜨고 밥 먹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움'을 획득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짜깁기로 흉내나 내는 선에 그쳤다는 말이다.

p.114 〈세상의 이름은 기린〉 그 만남의 결론이란 최선의 배려는 충분할 수 없으며 여분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당연해서 나는 괴로워졌다. 다행히도 그런 괴로움의 끝에는 홀가분함이 있는 것 같다. 있어야만 한다. 홀가분하지 않으면 미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가분함은 용서가 아니며 용서일 수도 없는 것이다.

p.172 〈빛 속에〉 노트복과 월패드의 희미한 표시등이, 창 밖으로 겹겹이 쌓인 건물의 조명들이, 거기에 웅크려 있을 누군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은주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어떤 것도 놓치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밝고 환한 빛줄기가, 소름 끼치도록 선득한 빛이 묵시록의 첫 장면처럼 그녀의 안에 펼쳐졌다. 은주는 잠시 빛으로 충만했다.


그래서일까. 여섯 편의 이야기들에서 전작들에 비해 어떤 '인간성'에 한발짝 가까워진 면모가 언뜻 내비칠 때마다 말 못할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이 구덩이에서 영원히 아늑하기로 했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만년고시반에서 혼자만 합격한 N수생을 보는 게 이런 느낌일까. 동시에 찬란하고 신기해 눈을 뗄 수 없었다. 낯선 빛에 오글오글 모여드는 생물들처럼. 너무 좋아 첫 수록작부터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쯤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이 작가가 불현듯 인간 너머의 차원을 깨우쳤다고 벌떡 외쳐버릴까 진심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듯 세계를 창조하고 법칙을 틀어쥔 신이 있다면, 그 신의 변덕과 권태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영영 이해 불가능한 전능에 순종한다는 마음이 대체 무엇일지 두려워졌고, 이내 황홀경이 이런 걸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다면, 말도 못하게 변덕스럽고 또 파탄난 자이기를.

p.147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기적은 이 시대에 너무나도 흔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빛을 알고 있으며, 열화상 카메라조차 특별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지겨움을 느꼈다.

p.249 〈존재의 대연쇄〉 내 문제의식은 이거였다: (…)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전적으로 도맡는 것과 하느님께서 의도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중에서 어떤 쪽의 죄가 더 큰가? 우리의 권한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께서 의도한 바를 온전히 행하는 게 나은가, 아니면 기존의 의도를 어겨서라도 월권의 영역을 축소하는 게 나은가? 또한 적극적인 월권으로 인해 발생한 고통과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우리는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부스러지고 무너질 것인가. 어느 시인이 말했듯 쿵 소리가 아닌 조용한 흐느낌일 것인가, 아비규환의 적응형일 것인가, 천천히 삶기는 개구리마냥 어리둥절한 물음표와 말줄임표의 연속일 것인가. 그 세계에 아주 잠시나마 찬란한 순간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 작가 또한 여전히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의미로든 답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싶은 무언가에 슬쩍 발을 들여놓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한계 없이 확장하는 절망에서 따끔한 아픔, 처절한 고통을 본다. 존재의 감각, 최초에 한없이 가까운 증거를. 그렇게 여섯 절망 앞에 선 채 나름의 균열을 더듬는다. 뼈와 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묻어나는 희미한 징조를 붙든다. 무지 있으라. 시원이자 종말이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엇-나감이 현실에 있으라. 물음, 있으라.

p.73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 아픔이란, 윤리도 원칙도 없이 의무가 되는 것. 어쩌지 못할 상황을 어떻게든 현실로 이끄는 것. 역할과 상황과 거리를 뛰어넘어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 그 누군가가 나의 삶을 뒤집어놓도록 허락하는 것. 그럼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산산이 잃어버리고 다시 만드는 것.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므로 철저히 저렴하고 이기적인 것.

p.170 〈빛 속에〉 하지만 3에서 1을 빼면 2가 되고, 거기에서 또다시 1을 빼면 남는 건 다시 1뿐이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되풀이하는 것부터가 낭비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그건 낭비가 아니야. 그건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당연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 은주는 답할 말을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경욱이 계단의 어둠 속에서 흔들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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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 이건 더 베스트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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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편을 만날 수 있다면 나머지 아홉의 중복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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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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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성해나 #인비인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공포, 두렵고 무서움. 기담,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기담은 무서운 이야기인가? 이상야릇한 재미와 두렵고 무서운 마음은 무엇에 기인해 합하고 갈라지는가. 수많은 이견이 있겠으나, 일단은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두렵고 무섭고 이상야릇하고 재미난 '것'은 지와 무지의 흔들리는 경계에 있다고, 다르게 말하자면, 믿음과 믿을 수 없음에.

어떤 경우에 이것들은 말할 수 없음, 정확히는 말해질 수 없음에 기인한다. 알고 있다, 혹은 존재한다, 보았고, 겪었다 혹은 겪도록 했다. 눈을 마주친 인간, 상대의 눈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혹은 바라봐진, 꿰뚫린 인간이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 떳떳이 공표되어 살아가질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서 오래된 생각을 불러오고자 한다. 많은 두려움, 말해질 수 없음은 죄 혹은 '뒤집힘'의 가능성에 있다고

p.22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세월이 지나 내 아들이 성장한 후에도 이 책상이 멀쩡히 보존된다면 아들에게 이것을 물려줄 것이다. (…) 아이가 커 가정을 이룬다면 그 자식에게도 전해지겠지.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p.43 〈인비인〉 몸을 숨기고, 숨을 죽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두더지가 그러듯 그것은 코끝과 귓바퀴를 움직여 제 체취와 소리를 감지했고, 어디든 따라붙었습니다. 오야지.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빠가! 저쪽으로 떨어지라고! 그러자 이렇게 답하더군요. 명 받들겠습니다. 오야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두렵고 이상한 것은 바깥에서 전해 들어온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우리' 안이 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기이한 것은 곧 낯선 것을 넘어 낯섦이고, 공포는 익숙해질지언정 절대로 친숙해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바깥, 그들, 저편에서 이쪽, 안, 우리에게로 침투해올 기회를 노린다. 그 존재를 인식 너머로 밀어내거나, 어떤 믿음, 나의 경우만은 다르리라는 알량하고 공고한 믿음 없이는 일상을 안위할 수 없는 나약한 동물인 탓인지도 모르겠다.

곁가지로 나아가, 인간과 도넛은 위상적으로 같다 하지 않는가? 뒤집어 까도 인간은 인간, 도넛은 도넛. 도넛은 인간, 인간은 도넛. 자, 여기서 문제. 안팎이 뒤집어진 인간은 무엇일까요? 그 순간 우레같은 깨달음이 들려온다면, 축하한다. 당신 또한 뒤집어진 존재입니다.

p.110 〈매일〉 굴곡도 없고 위험 부담도 적으며 노출도가 낮은 삶. 누군가의 일생을 낙찰받으러 온 사람이 원하는 건 그런 삶이라고 34번은 설명한다. (...) 보통은 인생에 곡절이 너무 많아서 오는데,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오는 사람도 있대요.

p.246 〈#유령〉 이제 0에겐 그럴 힘도, 기대도 없었다.뉴로비전 패치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1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며 0은 패치를 뜯었다. 적막한 집 안에 단조로운 파열음이 들렸고, 1이 입을 뗐다.


내-면을 드러낸. 드러나진 안-속은 마르고 부패해 죽어간다. 박박 닦아 새로운 겉으로 만들지 않는 한. 어째서인가? 이미 부패해있기 때문이다. 주저하고 뭉개는 사이 썩어문드러졌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드러낸 겉은 금세 죽습니다. 겉은 알맹이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 울음과, 분노, 죄과는 현실을 초월하거나 미끄러져 떨어져나간, 소외된 형태로 다가오지 않나. 향기와 악취가 뒤섞인 벚나무 책상, 형태 잃은 육괴. 목숨보다 중한 것, 명예, 자존심, 나의 존재를 세계에 단단히 결속하는 '연결'에 대한 믿음. 그렇게 죄, 흠, 비밀은 스며드는 음각이다. 절망이 그러하듯이.

p.79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결연했고,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다. 그들의 비슷한 외양이, 깨끗한 두루마기와 수치를 모르는 태도가 견딜 수 없었다.

p.186 〈윤회 (당한) 자들〉 감독님, 감독님은 소속이 어디예요? (...) 모르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매번 물어보잖아요. 소속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 나왔냐? 직장은 다니냐? 소속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근데 속해보니까 그래요. 찐따들이어도요, 모이면 단단해져요. 그리고 되게 웃긴 게 그 안에 있으면요. 나도 조금 쓸모 있어지는 것 같아요.


단 한 명이라도 인간됨을 지향한다 믿어지는 한 승자의 기록이라느니, 본성이 어떻다느니, 현실이니 실용이니 면피는 어떤 식으로든 두려움의 형태로 돌아와 아가리를 벌려 덤벼들 것을 믿는다. 인간의 가능성은 상상에 있다 믿는다. 타인의 눈에서 나의 삶을 떠올릴 수 있는 존재이므로. 수많은 폭력이 타자를 비인간의 지위에서 몰아내려 그토록 애써온 이유.

그런 이유로 오늘도 이렇게 곁가지를 넘어 숲으로 나아간 끝에 마주친 얼굴이 몹시도 낯설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를. 이상야릇한 감각이 닫힌 문을 열어젖히기를. 깊숙이 파묻고 통째로 불태운대도, 꺽, 넘어가는 숨에 수치와 죄책의 두려움이 스미기를.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날이 이어지기를. 슬퍼하기를. 들척지근한 수치와 도피의 냄새에 코를 박고 끝의 끝까지 도망쳐 처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기다릴게요.

p.229 〈아미고〉 그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기계적으로 장비를 세팅하고 점검한다.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던 촬영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오토 모드로 작동하는 카메라로 대체된다.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생각한다.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

p.301 〈고독〉 먹이 냄새가 밴 자리를 서성이는 짐승처럼 이익도 그것과의 라포르에 순치되어 지난 사나흘간 탕전실 걸쇠를 풀지 말지 몇 번이고 고민했었다.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익은 머뭇대다 걸쇠가 단단히 걸렸는지 확인한 뒤,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도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됐지.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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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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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신유진 #나를균열내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줄곧 '읽는 사람'으로 살아오며 수없이 맞닥뜨린(이라기보단 시도때도 없이 처해졌던) 물음 중 독보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왜 읽는가', 그리고, '읽기는 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 일 것이다. 한때는 이 물음에, 완전한 이해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바닥까지 파헤쳐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삼켜버리고 싶었으므로 읽었다. 완전해지고 싶어서, 공백과 균열을 메워 완벽에 닿기 위해.

읽을수록, 채울수록 더 많은 '모름'을 보았다. 그럼에도 탐욕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은 읽기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문득, 멈춰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이 아니었을까. 위험만큼 존재를 선명하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21)."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세계를 안전하고 공고히 하는 읽기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높고 깊은 벽을 부숴 그 너머의 타자를, 절대적인 낯섦을, 존재한 적 없는 선-존재를 보게 하는 읽기야말로 나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고.

p.7 〈프롤로그: H로 시작하기〉 책 속에 있는 그들과 책 너머에 잇는 이들과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우리'라는 주어를 망설임 없이 쓴다. 우리는 진실을 향해 한 칸씩 내려가는 사람들. 끝없이 내려가 저 밑바닥에 닿아 마침내 진실을 둘러싼 막을 마주한 사람들. 자기 안에 가장 날카롭고 매서운 무언가로 그 막을 부수려는 사람들. 우리들, 나는 내가 통과한 책들을 통해서만 나의 '우리'를 만난다. 책 속에 그리고 책 너머의 당신들을.

p.89 〈다니엘 페나크〉 인간은 무엇보다 몸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도 없다. (...) 어쩌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몸의 언어를 해독하는 일이 아닐까.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말했다. 인간은 세계를 생각으로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사는 존재라고.


어느 정도는, 위험해지려고, 더 모르고, 낯설어지고, 실패하려고 읽는다고. 이상적인 전능은 곧 무능이다. 조금의 모자람도 돌이킬 수 없는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완전-세계는 곧 아무것도 태어날 수 없고, 변할 수 없으며, 어디로도 확장되고 이동하고 파고들 수 없는 고립이다. 나를 균열낸다. 쓰기는 나를 배신한다. 말과 글은 필연히 미끄러지고 '본질'에 명중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빗나감이고, 철회-됨이자, 뒤처짐일 것이다. '나의 언어'로부터 완전히 내쳐진 적은 없다 하더라도.

이 빈 틈, 한계, 균열, 빗나갈 겨냥과 주소 잃은 서신이다. 쓸모랄지, 가치랄지, 문학에 일말의 증명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이 불완전함이다. 그것은 필연히 인간성의 문제로 직결된다. 한강은 물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야기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사람이 이야기가 된 장소, 사람,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있고 배가 고파오는, 허기를 느끼고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그렇게 먹는다는 것엔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고(85).

p.67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를 둘러싸던 맥락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모든 근거가 사라진 후에도 '나'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망명자는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한다. 말은 언제나 늦고, 감정은 반토막이 난 채 전달되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면, 말로 하지 못해 사라져버린 일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p.117 〈밀란 쿤데라〉 "매일 개연성 없는 소설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 소설이 과연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 소설은 그저 모든 판단과 결론을 미뤄둘 수 있는 유예의 장소를 허락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존재에 대한 실험을 감행해도 누구도 다치지 않고, 진실이나 진리의 엄격한 잣대에 주눅 들지 않고 삶의 하찮음을 말할 수 있다. 의미 없는 것들의 의미를 말하는 일. 소설가는 내게 소설의 쓸모는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세상은 다정스레 말한다.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하라'고(97). 그렇다. 읽기는, 쓰기는 언제나 현실에 조금 뒤처지고 벗어나, 적어도 그 당시에 살아 있는 몸과 정신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너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말과 글로 남겨 전할 수 있다면, 적어도 '목격한 일'에 파괴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몸이고, 정신이고, 이유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갖지 못한 존엄과 특권이 아니라 오로지 책무와 우연, 생존 그 자체와 증언일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말로, 기억으로, 몸짓과 문장으로 전해지는, 깨지기 쉬운 무언가처럼. 무엇이지 않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기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114)".

p.100 〈가엘 파유〉 "소설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가엘 파유의 말이다. 소설이 사라진 장소, 사라진 사람, 사라진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을까.

p.151 〈카멜 다우드〉 어떤 죽음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이야기는 고통을 대신 설명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문학의 몫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은 질문할 뿐이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과 폭력, 이해되지 않는 죽음이 너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신과 예술, 그 무엇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오롯이 인간이 해결할 몫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어쩌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살아가기 위해 다시-쓰고 토해내어야만 하는 글이,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이, 쓰기가, 읽기가 고발과 목격의 반복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을 도구에 한정짓는 것만큼 문학-하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오독-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읽기와 쓰기 모두 지금 여기의 나에서 조금 떨어진 혹은 떨어져 보려는 태도다. 듣기와 다르지 않다.

한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방식이 곧 문학이라면, 읽기와 쓰기는 그를 바라보려는 시도이자 방식이 아니겠는가.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의 혼란한 뒤섞임은 결국 이 말을 하기위함이었다. 읽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고, 그것이 곧 삶이자 이유라고. 해석될 수 없는 고통과흔적을 켜켜이 쌓아 파괴하고 또 공존하기 위함이라고. 이제는 물을 수 있다. 무엇이 당신을 균열-하겠습니까. 당신의 언어를 나의 세계에 뻗어주겠습니까.

p.166 〈조르주 페렉〉 '산다는 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삶은 임시적 정착과 이동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동하는 모든 걸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누군가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저장된 공간은 존재의 시간이 쌓이는 장소가 된다. 시간이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문학은 한 인간이 세상 속에 머무는 방식, 즉 거주의 예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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