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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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되는 지구촌, 자유와 진보의 상징인 '서방'과 단연 빛나는 선봉인 미국의 시대는 저물었다. 나날이 쇠락하고 있다. 실각하는 권력과 그 추종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누가 이 권좌를 훔쳐갔지? 누가 감히 앞지르려 하지?

그러나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을 때야말로 이렇게 물을 때다. 누가 그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가? 적들에 의해, 그들을 물리치고 '정상'을 회복하기 위해,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혹은, 야만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으므로. 전세계적으로 목도되는 상식의 붕괴, 폭력과 적대의 일상화.

p.5 자본 축적 과정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는 전 지구적 축적 과정을 총체적으로 조절하고, 가장 뛰어난 생산력과 기술력, 생산 능력 등을 가지고, 세계 금융 시장을 주도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규칙'을 정하면서 동시에 그 담론들을 세계인들의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국가야말로 '패권 국가'입니다.

p.6 역사적으로 최초의 패권 국가는 17세기의 네덜란드였으며, 그 뒤를 이은 것은 바로 영국, 즉 19세기의 대영제국이었습니다. 1945년 이후에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바로 지금 쇠락해가고 있는 패권 국가 미국입니다.


전세계가 휘말린 전쟁, '서구 문명'의 발전과 대안 모색의 끊임없는 시도로 쌓아올려진 인간성이라는 허위가 그저 허구였음을, 지성과 문명의 대실패적 현장을 뼈저리게 까발려버린 전쟁 이후, 우리는 얄팍한 평화를 너무도 깊이, 절실하게 믿어버렸는지 모른다. 마치 이것이 정상이었다는 듯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끔찍한 과거의 지평선 너머로 안녕히, 영원히.

그런데, 정말 이 야만으로의 회귀는 전례 없는 파멸의 서막일까? 아니면 신-미국이라는 새로운 과두체제의 창발일까? 설사 누군가의 경악어린 외침이 울려퍼진대도 꿈쩍이나 할까싶다. 이 파시스트들! 이만큼 무력한 외침이 없다. 저자는 말한다. 미국 주도의 서방 일극 체제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특별하고 또 이례적인 순간이었다고.

p.164 파시즘이란 자본주의 국가의 원점, 일종의 출발점입니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국가는 위기 타개책으로 종종 각종 형태의 파시즘을 선택합니다. (...) 한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공격적 정책의 남발은, 비록 파시스트적 색채는 분명해도 아마도 히틀러 시대 독일과 같은 '질서 정연한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 할 것입니다. 트럼프의 파시스트적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정책 난맥을 가중해 오히려 역으로 미국의 위기를 더 악화시키며 그 패권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큽니다.

p.210 민주-공화 양당 사이에 대립의 강도나 진행 방식 등에 대해 차이가 있으나 중국을 전략적인 경쟁자로 보는 데 미국의 주류 정계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 단, 미국의 패권 쇠락이 심화되고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의 요구가 극단적인 만큼, 기존 정책들도 눈에 띄게 극단화됩니다.


미국의 중국 혐오와 '구역'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태도를 남한 정치권이 어떻게 흡수하고 답습하고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한반도 요참 사태를 전후해 남한 정치사회의 주된 기조는 미국을 우방이자 우상으로 섬기는 태도였다. 기십년 사이에 급부상한 일부 집단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우방을 넘어 우국충정에 가까울 지경이기까지 하니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신패권질서의 주도국 지위를 꿰차려는 미국과 그 하위-우방들의 시도는 과연 '질서'의 공고함, 절대적 격차를 공고히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을까?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좌파 운동 진영에서 미제 세력에의 대항 논리는 과연 얼마나 발전했는가? 과거의 영광이라는 허상에 매달려 현재를 등한시하고 있는 '그들'에 방심까지나 할 여유가 있는가?

p.154 이런 극우적 쇼 정치로는 이미 쇠락해 가고 있는 초강대국이 다시 위대하게 될 리가 없습니다. 단, 이런 쇼의 일환으로 한국까지 한미 동맹이라는 틀에 갇혀 한국 경제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대중국 탈동조화 등의 정책 강압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그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트럼프주의 시대 미국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적인 외교 전략은 정말 중요합니다.

p.325 문제는, 이런 접근 방법이 여러 제국들이 미 제국이 쇠락하는 틈을 타서 서로 경쟁하고 주변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현 상황의 특색, 즉 제국 간의 모순들의 심화와 경쟁의 첨예화, 미국 이외 제국들의 상대적 영향력 강화 등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 여러 제국들의 대내외 정책과 이데올로기, 야망, 이해관계의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파악이야말로 진보적인 대응을 마련할 수 있는 첫 단계입니다.


혁신이든 실리든, 그 명목이 무엇이든 간에 현 세계가 문턱에 선 '야만 시대'는 그저 오랜 역사의 반복일지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이 패악 또한 반복이라면 그를 가능케 한 시민사회의 책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테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성원 모두의 숙명적 책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유난히 길었던 지난 겨울, 민주주의는 완전히 수동이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돌았다. 끊임없이 신경써야 겨우 굴러간다고. 폭력만이 유일한 진리가 되려는 세계에서 그 말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것도 우연은 아닐 테다. 민주주의의 '민'으로 묻는다. 좋든 싫든 요동치는 세계에 놓인 지금, 무엇이 이 연쇄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의 것이 되기 위한 나와 당신의 책무란.

p.323 민주주의가 국가 정체성의 핵심인 구미권에서, 신분 하락과 상대적 빈곤화에 분노한 대중은 주류 정치에 대한 신뢰를 접고 트럼프와 같은 극우들에게 권력을 내주었고, 그 순간 민주주의도 무너졌습니다. (...) 구미권의 전반적 쇠락을 초래한 신자유주의는, 구미권의 최고 장점인 민주주의도 형해화시키고 말았습니다.

p.350 복지 국가도 그렇지만, 민주화는 일종의 조건부 사회계약입니다. 민의 자발적인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유지되는 이상 엘리트들은 싫든 좋든 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합니다. 폭동이나 혁명을 통한 민의 표현보다 투표를 통한 민의 표현이 '통치성' 차원에서 훨씬 낫기 때문이죠. 한데 민의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떨어지는 그 순간, 민주주의라는 사회계약은 자동 해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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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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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이 사실상 섬인 국가의 성원, 개중에서도 본토라고 할만한 반도 거주민으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바다는 언제나 망망대해, 열린 공간이었다. 그렇잖아도 국토라고 해봤자 손바닥만한 당일 생활권이 태반이라 더더욱. 해외가 곧 자국 바깥, 외국-집단의 동의어로 쓰이는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라는 건 뭘까. 바다 너머에 이 땅과 '이어진 대륙'이 있어 딱 잘라 이것으로 나와 그들의 경계를 그을 수 없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흑해를 그 희한한 지리의 대표 사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p.25 역사와 사회 연구에는 육지 중심의 편견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역사와 사회생활이 땅 위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예컨대 바다를 항해하거나 강을 타고 내려가는 여정은 단지 배우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펼칠 진짜 연기를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양과 바다, 강들은 단순히 통로나 경계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작용과 교류라는 독특한 이야기들의 핵심 주역으로서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p.75 다른 변경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마주친 종족들의 문화에 적응하고 심지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전기 아테네의 시인과 극작가가 상상했던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명확한 문화적 경계선은 실로 매우 흐릿해졌다.


한때는 거친 바다, 또 언젠가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환대의 바다, 이제는 검은 바다로 불리는 그것은 '동서양'의 중간지대,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백. 언젠가는 대재앙의 현장이었다가, 미개인과 '도시' 바깥의 험지였던 때를 지나, 무역의 중심지이자 갓 움트던 유럽의 개념적 연장이 되었고, 이제는 범세계적 이권다툼의 요소로 여겨진다.

야망과 생업, 죽음과 침탈의 가능성 그 자체였던 검은 바다는 세계의 끝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들끓고 있다. 여전히. 땅의 바다, 대륙의 확장. 흑해는 언제나 신과 인간, 문화와 종족의 교차로였다. 언젠가는 미지의 땅에 용을 그렸다지. 'Hic sunt dracones'. 이 바다 너머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용이 있다. 침탈과 교잡, 낯선 이름이라는 피가 흐르는 존재.

p.155 복원된 비잔티움은 해협의 제국에 불과했고, 발칸과 카프카즈의 다른 기독교 왕국과 아나톨리아의 투르코만 에미르국에 둘러싸인 비교적 작은 세력이었다. 경제와 대외 무역은 대부분 이탈리아인들 손에 남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조금만 올라가면 닿는 흑해는 이제 사실상 제국 통제권의 지평선 너머에 있었다.

p.241 흑해는 더 이상 내해, 즉 제국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 땅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물길이 아니었다. 이제 변경이 된 것이다. 1600년대 후반까지 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사를 톺아보는 작업에 어떤 도덕적 잣대로 첨언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언젠가 세계의 끝이었던 이곳에서 다채로운 문명이 꽃피고 뒤섞였음을, 수많은 역사의 시발점이자 종착이였음을 되새겨본다.

소련 붕괴 이후 그나마 오락가락하던 짧은 '평화'의 환상마저 숨통이 끊긴 지금, 전장으로 재구성되는 이 바다, 한때 변경이자 경계였던 '이 장소'를 묻는다. 죽음의 바다는 결코 자연만을 의미하지 않았으리라. 이곳은 누구의 바다인가, 혹은, '영토'인가. 공백을 공-존으로 두지 못하는 인간의 자리가 저 깊은 곳에 있겠거니, 희망과 절망의 뒤섞임을 저 아래 가라앉히며.

p.377 바다와 해안의 진정한 소유권에 관한 논쟁이 학술지와 책들의 지면에서 벌어졌다. (...) 이런 논쟁은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가의 연구가 특정 영토 합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됐고, 영토에 대한 역사적 권리 주장은 평시 실지회복 운동의 기반이었으며 종종 또 다른 전쟁의 출발점이었다.

p.435 (역자 후기) 21세기 흑해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20세기 냉전 시대의 지정학이 중첩되는 복잡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흑해가 앞으로도 국제 정치의 주요 갈등 지점이자 협력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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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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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광인, 부랑자, 사회의 온갖 문제적 존재를 한 데 쑤셔넣는 곳이었다가, 또 언젠가는 치료를 빙자해 죽을 때까지 가둬놓는 격리소였다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주립 어린이청소년 정신병원. 환자 수 천오백 이상, 한가운데엔 원장 관사. 그곳이 바로 밤이면 환자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들고 아침이면 실랑이와 발작 가운데 씩씩하게 등교하는 주인공의 집이다.

박식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시시때때로 속을 긁어놓는 두 형... 에 지지 않는 환장과 황당의 결정체같은 막내, 요세. 그가 풀어주는, 엉뚱발랄 따위의 깜찍한 수사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은, 뭐랄까. 얘야 제발. 요세, 막내야, 대체 뭐가 문제니. 진정하고 제발 말로 좀 해라. 안돼 하지마! 뭐든간에 멈춰!!!

p.131 나는 말을 떼기도 전에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 때부터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할 게 없다. 주변에서 밤마다 수천 명의 사람이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는데 나까지 울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새들이 아침의 특정 시간대에 노래하기 시작하듯 저녁 울음소리에도 일정한 논리가 있는 듯했다.

p.482 나는 그들의 무절제함, 끊임없는 소란, 그리고 내게는 너무나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던 그들의 일상적 광기가 그리웠다. 또한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분명함을 그리워했다. 수많은 환자들이 운명처럼 갇혀 있던 존재의 숨김없는 명료함을. 그리고 무엇보다 밤마다 울려 퍼지던 환자들의 무수한 절규를 그리워했다. 나를 그토록 기분 좋게 잠들게 했던 그 절규와 비명을.


꼬마에서 청년이 되기까지 자잘한 에피소드는 이따금 황당하고, 당황스럽거나 또 사랑스럽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환상적이고 치열했고, 불가해한 갈등과 미처 알지 못했던 어른의 사정들, 짜릿한 비밀 사이사이를 채우는 것은 반짝이는 순간들이다. 사랑이거나, 두려움이거나... 슬픔 같은. 자연히 묻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어쩌면 의심할 바 없이 당연하고 단단했던 불확실성의 집합으로 빨려들어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유년의 영웅이 그저 인간에 불과했음을, 때로는 어리석고 추잡하고 두려워하는,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는 한 명의 사람. 정상과 광기, 어른과 아이, 안과 밖의 다름과 동시에 인간 존재의 근원적 동일성을 납득하게 되는, 아릿한 통증.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p.248 슐라이 요트 클럽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맞았다. 이때부터 아들을 배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바람 강도 0 상태에서 조난당해 구조된 교수의 이야기가 슐레스비히 회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그것도 모두 면허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p.457 "참, 이상하지. 나는 내가 왜 소위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소위 정상적이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항상 더 편안함을 느끼는지 자주 생각했어. (...) 다른 의사들한테 부끄러워. 병든 의사라는 건 왠지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 작은 도시의 모두가 그걸 알아. 누가 병든 의사한테 자기 자식을 맡기겠니?"


종장에 다다라 그가 마주친 장면에 어떤, 아릿한 통증을 감각한다. 크으으으으게. 크게, 말고, 돌아 유리창 너머 소년의 눈동자, 흐려졌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단지 그뿐인 순간에 비로소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묻고 싶어진다. 너무 긴 포옹과 통제 불능한 존재들과 바깥의 삶은 무엇이 달랐겠느냐고.

그리고, 어째서, 이렇게나 그리운걸까. 이 정신사납고 사랑스럽고 난감한 일화들로 낱낱이 꿰인 삶을 따라가노라면 존재를 이루는 기억과 세계의 토대란 과연 이런 의미겠거니, 싶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슬픔은 단단하고 작은 조각이 된다.

어떤 순간은 잊혀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기이하고 곤란한 존재들의 형태로 마음에 남아 삶이 되고 그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남아 이어지고. 그렇게 한때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발작적으로 휩싸이던 소년은 유년의 일상이었던 불가해와 기나긴 포옹으로 하나가 된다. 찬란과 고통의 혼잡 한가운데서 독자는 그와 함께 조금 더 어른이 된다. 아침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p.479 내가 기억의 꾸러미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미래는 그 영원한 약속을 이행하고 불확실해지고, 하나의 선이 하나의 면으로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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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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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수술'이라는 말에 거리며 웹사이트를 도배하는 '이상적인 외형'의 모델들을 떠올리지 않는 이가 드물 것이다. 돈만 주면 티도 안 나게 딴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며 이리저리 긋는 절개선이며 보형물을 늘어놓는 광고를 질리도록 보고 또 보는 일상에도 익숙할 것이다.

과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가끔가다 섬뜩하게까지 느껴질 지경인, 거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성형외과에 대한 시선은 비대칭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한쪽은 다분히 미용의 영역으로서 가히 자연의 수준을 벗어난 경지를 추구하는 '사치', 반대편은 생성과 재건, 조립과 해체 등 지극히 첨예한 기술의 장으로.

p.157 그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는 환영 행진도, 악단도 없었고 예전 약혼자뿐 아니라 많은 주민이 그의 달라진 얼굴에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예전 직장을 찾아갔을 때 사장은 손님들이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으니 뒤쪽 구석에서 잡일이나 하라고 했다. 이런 푸대접에 분개한 그는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상처는 전쟁터에서만 입는 것이 아니었다.

p.328 미용 시술에 대한 관심이 역사상 가장 높아지긴 했지만 선천적 이상, 외상, 질병으로 달라진 몸을 복원하고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재건 수술은 여전히 이 분야의 주류로 남아 있다. (...) 추진력이 무엇이든 안면 이식이 일부 환자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형 음식물을 먹고, 자력으로 호흡을 하며, 더 나아가 평생 처음으로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다.


개중 후자가 압도적으로 궁핍과 과로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저자는 대량살상무기 급진보의 실험대였던 세계대전에 활약한 의사들을 중심으로 성형이 왜 외과에 속하는지, 어쩌다 학문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는지, 무엇보다도 그 필요성이 대두된 기원이 무엇이었는지를 병원 안팎의 생생한 사례를 중심으로 풀어놓는다.

그 가운데 어떤 '미용'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 앞서 제쳐둔 후자.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와 타인 모두에게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를 위한 시도들은 말 그대로 생존의 영역에 닿아있었다.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폭력에 맞닥뜨린 이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힘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의 삶을 위한 토대였다.

p.168 가면의 목표가 병사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긴 하지만, 가면 자체는 그 궁극적인 목적을 상기시키는 역할도 했다. 바로 가리는 것이다. 관람객을 위해 쓸 때가 그렇다.

p.324 길리스는 얼굴을 재건하는 일 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때와 그 뒤에 부상병의 생식기 재건 수술도 했다. (...) 길리스는 새 환자에게 급성 요도밑 열림증이라는 허위 진단서를 써주었다. 요도 구멍이 잘못된 곳에 생기는 선천성 결함이었다. 진료실에 오는 딜런이 성전환자임을 숨겨서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길리스는 몇 년에 걸쳐 딜런에게 13차례 수술을 했다.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서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매달리는 마음은 뭔지. 그리고, 그렇게 살려낸 사람을 도로 끌어가 기어코 죽여버리는 높으신 분들과 명분이란 게 대체 무엇이었을지. 수없이 죽어나간 다음에야 하나둘씩 살릴 방도를 찾아낸다는 게 과연 인류사의 진리일지.

수술대 위의 존재가 더 아름다운 '용모'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 또한 여상해진 지금, 과연 누가 그 언젠가의 수술실 안팎에서 벌어지던 사투를 기억할까. 누가 '무엇'을, 어떻게,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왔는지를. 역사의 끝, 현재에서 그 기원을 다시 묻는다.

p.102 의사들은 서둘러 부상병들을 깁고 꿰매면서도, 의도치 않게 그들이 회복되면 더 강력해질 전쟁 기계에 인력을 공급하고 있었 다. (...) 〈이 통탄할 결과 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점이 하나 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전시에 의사들이 획득한 지식으로부터 인류가 혜택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격렬해질 시기에는 오로지 한 가지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하여 최대한 많은 병사를 전선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p.256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루어진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결정과 마찬가지로, 그 명령도 상부의 보이지 않는 손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클레어가 받은 명령은 새 환자들을 위해 침대를 비워 주고 전쟁 기계에 인간이라는 연료를 계속 공급하라는 것이었다. (...) 그리하여 클레어는 치료받다가 만, 멍들고 부은 상태로 다시 싸우러 갔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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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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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글은 양심을 정면으로 찔러들어오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처음 읽었던 그의 책 제목은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였더란다. 그때는 어느정도 심상히 넘긴 감이 없지 않았다. 생각을 글로 써내는 일이 업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당시, 대선 후로 반년쯤 지난 때에, 나는 그간의 삶이 부끄러웠다. 아는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알지 못하고 흘려버린 것들, 눈 감고 귀 막아 등돌린 이들에 속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해가 네 번 바뀐 지금, 말할 때도 아니고 글로만 정의롭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텍스트 뒤로 숨어서만 입바른 소리를 떠들곤 이내 흘려버린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적기엔 해묵은 악수들이 극단적 형태로 얽혀버린 경우에 불과하다. 어떤 일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거나 잊혔으며, 심지어 더 나빠졌다. 어떤 일상은 여전히 회복되지도, 상상되지도 않는다. 앎과 삶 사이는 여전히 멀찍이 데면데면하다.

p.29 동정도 숭배도 불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감정이다. 그래서 자칫 모욕이 된다. 차별 없는 평등이 답이다. (...) 서로 다른 정체성들은 교차해야 하고, 쟁점들은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다중화되어야 한다. 서로 혐오해서는 존엄해질 수 없다.

p.209 사실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위태롭고 불안정한 생계에 묶여 싸우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싸울 이유가 가장 절실한 이들은 바로 그 이유 탓에 싸우지 못한다.


사회 곳곳의 걷잡을 수 없는 균열에 '새로운 정의'가 들어섰다. 굴러떨어지는 이들은 대강 공백인 셈 치고 어떻게든 패를 갈라 그 간극을 벌리려 애쓴다. 이건 정치도 뭣도 아니다. 패싸움이고 땅따먹기지. 사람이 살기 위해 모인 사회가 누군가를 사람 바깥으로 밀어내야만 동력을 얻는다.

소수의 권력을 탓하기엔 당장의 삶에 급급한 평범한 이들이 절대 다수다. 침묵과 외면은 적극적인 동조가 된다. '나도 힘들다'는 말의 모순에 눈 막고 귀 감아 자리를 뜬다. 수사와 편가르기를 떠나 '무결하고 죄 없는 시민'은 어디에도 없다. 등돌려진 책임만이 덩그러니 남아 던져질 돌이 된다. 죄인 찾아라. 일단 우리는 아니겠지만.

p.141 시험도 안 거친 비정규직이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받는 건 못 보겠다는 '민주 시민'도 드물지 않다. 연대를 외치던 입으로 차별을 옹호한다. 그렇게 함께 지옥을 만든다.

p.264 지금은 내란 막기에 힘을 모아야 하니 '탄핵 이후의 세상'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들 한다. (...) 내란을 막자면서 왜 부자가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지 모르겠다. 내란을 막자면서 왜 당신들이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윤석열은 나쁘지만, 세상의 고통이 모두 그의 탓은 아니다. 어떤 슬픔들은 당신들에게서 나온다.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우리의 응원을 받으며.


저자의 첫 책에 "부끄러웠던 자만이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는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사는 세상을,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자리와 관점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고 남겼었다. 지금의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다. 오래도록 그래왔듯이.

앞서 말했듯, 앎과 삶 사이는 허허벌판마냥 황량히 동떨어져있다. 그 사이에 놓인 건 '어쩌면'이나 '예외들'이 아닌 실재하는 이들이다. 우리들이다. 일상이어서는 안 될 평범들이다. 손을 뻗는다.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풀로 뒤덮인, '최초의 악수'를 위해. 하지 않음보다 늦는 것은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

p.68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한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333 약하고 사소한 존재들은 각자의 모양대로 세상에 '구멍'을 남긴다. 구멍은 그들의 죽음 후에도 뚫린 채 남아 세상에 균열을 내고 무언가를 남긴다. 그 구멍 속에 '작은 것들의 신'이 있다. 작가는 '세상의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고, 그 연관성이 어떻게 인간 삶을 형성하며 인간관계를 결정짓는지를 보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밝힌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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