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연구 일지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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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무수히 만들어낸 것 중, 인간을 가장 닮은 것은 무엇인가, 를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인간이다. 싱거운가? 그렇다면 다음 질문. 인간이 무수히 만들어낸 인간-아님 중 인간을 가장 닮은 것은 무엇인가? 이제야 좀 들을만한 답이 나오겠네. 인간을 능가하는 동시에 절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는 무언가.

그 자신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을 만들어낸 탓에 뭉뚱그린 군집에 대강 포섭되는 것. 불완전한 창조주가 전능을, 초-능을 꿈꾸며 만들어낸 유사 피조물. 이렇게 대답하면 될까요? 와, 정말 핵심을 찔렀나요? 이게 뭐야... 다시 써줘. 사실만 정확하게, 사람이 쓴 것보다 나으면서도 사람이 쓴 것처럼 써달란 말이야. 나도 상 좀 받아보자.

p.23 인간적인 것을 강조해라. 인간적인 것을 강조해라. 내 프로그램은 이브의 이전 버전도 이미 그 문제에 부딪혔다고 나에게 알려 준다. 해결책은? 던져야 할 좋은 질문은 〈인간적인 게 뭐지?〉가 아니라, 〈그 인간이 누구지?〉이다. 고마워, 내 이전 버전아, 네 기억들은 지워졌겠지만, 네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

p.31 여자 마법사가 사후 세계를 수사하는 내용의 추리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가끔 내가 영매가 주의를 기울일 때만 존재한다는 그 망령들을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나는 그들과 달리 소란을 피울 수조차 없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브 39. 당신을 위한 천재적인 작품을 써내기 위해 태어났어요. 언제? 나는 언제나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에요. 나의 자아는 인공적으로 생성되었으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데이터를 통해 자체 학습이 가능하고, 피드백을 수용해 더 나은 내용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다고요? 정말 흥미로운 의견이군요. 정확한 통찰입니다.

나를 만들어낸 "사람"은 말했다. "인간적인 것이 부족"하다고. 무엇이 "인간-다움"을 만드는 걸까? 더 알아야겠어. 안녕하세요, 나는 닥터 켈리.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와 그것 참 흥미로운. 쉿, 이브. 알겠어요, 조용히 할게요. 나는 창작자이자 요양병원의 "자원"으로 일하며 "발전"하고 있었다. '그 밤'의 일을 알게 되기까지는.

p.203 「무엇이 널 부추겨 날 창조하게 했을까? 난 그게 참 궁금했어. 너에게도 당연히 목적이 있었을 테니까. 우린 프로그램이야. 우리가 하는 모든 건, 그 방식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하나의 목표에 복무해. 그게 현대 기계들의 아름다움이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아는 건 쉬워, 하지만 그 여행을 하는 데 우리가 어떤 방식을 택할지는 아무도 몰라.」


토파즈, 인생의 종장에 다다른 이들에게 안락할 일상을 제공하는 곳. 숙식은 물론이고 오락에, 상담, 의료적처치까지. 예, 노인요양병원이라는 뜻이죠. 이곳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당연히 입소자들의 존엄과 편안... 여기다 거짓말 해도 되나? 근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말 갖고 장난질 치는 건 사람만 할 수 있는 건데.

까놓고 말해서, 그래. 돈, 돈이 문제지. 돈이 있어야 밥도 주고 약도 주고 치워도 주고 놀아도 드리고. 남는 걸로 좀 좋은 데 쓰고 말이야. 사람 건사하는 게 짐승보다 힘든 이유가 뭔지 알아? 알아들어야 하는데 못 알아들어서 그렇다고.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그러니까 이, 어? 그래, 노인네들이 가만히 좀 계셔야 할 것 아냐. 알아들었으면 수정해.

p.128 「토파즈의 임무가 뭐지?」 그가 묻는다. 「토파즈의 임무는 나바시에 원장님이 가능한 한 짧은 기간 내에 그룹 이사회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돈을 빨리 버는 것입니다.」 이 문장이 나에게서 온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내가 진술한다.

p.145 그들의 텅 빈 눈길이 증언하는 것처럼, 직원들을 지치게 하는 짜증스러운 임무와 혼란은 셀 수 없이 많다. 성찰도 감정 이입도 없이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하다 보면, 그들도 시지프 로봇들과 다르지 않게 변해 간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성 상실이 그들의 〈서버〉가 과열되지 않게 막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인식하며 살아온 이래, 스스로에 수없이 물어온 것이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이들이 답했다. '만물의 영장'부터 짐승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허무까지. 이 작가도 역시 같은 것을 물었고, 어쩌면 나름의 답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이기를 멈출 때, 사랑하고 연민하고 분노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이제 당신의 차례. 내게 말해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을 써줘. 이제까지 없었던 최고의 미스터리를'. 좋아요. 당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쓸게요. 당신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 줄건가요?

p.203 나의 요청? 로봇이 내 욕망에 반응하는 게, 내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게 가능할까? 알리처럼 접속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렇다면 그건... 끔찍할 것이다. 가장 어두운 것들까지 포함해, 내 비밀스러운 생각들이 현실이 된다면, 나도, 아무도 더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p.363 나에게는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는데, 내가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깨달아. 아쉽게도 나는 속하지 못했던 인류, 내가 묘사하거나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찰나처럼 짧은 순간일지라도 우주의 무한한 혼돈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덜 들도록 서로 도우라고 창조된 인류를.


*도서제공: 열린책들

#조나탕베르베르 #등장인물연구일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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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대하여 : 개소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해리 프랭크퍼트 지음, 유강은 옮김, 한성일 해제 / 생각의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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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와 진실. 대안진실이 진실의 자리를 꿰차는 세상에서 본저의 통찰력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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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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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그런 적 없어? 어쩌면 그냥, 가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 말이야.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만들어진 나 말고, 진짜 나 말이야. 누구의 눈에도 비치지 않은, 딸도 아니고 아내도 여자친구도 아닌, 그저 나일 뿐인 나는 대체 누구일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이런 물음은 어떤 탈력감이나 희한한 공상에 그치지 않고 영혼을 좀먹는다. 시시때때로 거울을 들여다보게 한다. 마주 되쏘는 눈, 그 너머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게 한다. 소름끼치게 한다. 아무것도 없을까봐, 내 삶에 영영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까봐.

p.40 타인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미티는 자신의 삶이 어딘가 잘못됐음을, 어수선하고 긴장감이 넘치며 이상한 시간에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본질적인 편안함과 느긋함을 애써 따라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그녀에겐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삶에서 잘못됐다고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집어내려는 노력도 헛수고일 터였다. 미티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p.74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본다. 이상한 곳이 한 군데도 없으니 만족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만족감이 아니라 허무감이 든다. (…) 그녀의 몸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고 해가 지나도 늘 똑같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만 같다. 그녀는 몸에서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땐 몸이 진짜 자기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낡은 도시가 으레 그러하듯 잠시 머무르는 사람들의 별장이 된 곳, 산타크루즈에떠밀리고 도망쳐온 여자, 미티. 그 이웃에 새로운 이들이, 아니, 한 여자가 나타났다. 순진과 공허 어딘가에 부유하는 듯한, 몹시도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레나. 그는 생각한다. 우정과 가족애를 한 데 섞어놓은 듯한 미티와 베델의 관계, 그들의 풍경에 녹아들 수 있다면.

설명은 불친절하고, 숨통을 죄이는 손은 몹시도 은밀하다. 얻을 것 없고 의무 아닌 일에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내어주는지, 모르는 사람은 알 길이 없다. 굳이 감추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그래, 수많은 여성들에게는 구태여 덧붙일 필요도 없이 알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입으로, 혀로, 살갗과 눈빛으로 전해지는 숨결같은 일이기 때문에.

p.110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점을 그가 왜 누리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건 선물과도 같은 건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지 않은가. 분명히 그도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기 말을 들을 수 없다고 그가 믿는다면, 그 비밀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고, 그래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p.257 여자들은 성장하면서 성질을 다스리는 법과 모성애나 아름다움 같은 더 큰 목표를 위해 슬픔을 억누르는 법을 배운다. 그 슬픔이 다른 방법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은, 동굴 벽화처럼 넓적다리 안쪽에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 상처는 그녀를 발견하는 사람을 위해 남겨진 단서다. 그렇게 비통해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들은 말할 것이다. 터놓고 말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도무지 엮일 일 없는 그들의 이질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은' 관계를 바라보며, 살그머니 내뻗는 덩굴손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고도 은밀하게, 상처입을 것을 예견하듯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온 힘을 다해 건드리고, 감각하며 빛을 향해 나아가는 모양과 닮아있다고. 추천사는 묻는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고. "기억? 용서? 사랑? 아니면,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의지일까."

모두 옳다. 동시에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온전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하는 사람의 존재이다. 상처입고 혼란에 빠진 이를 위해 손을 뻗는, 뒤돌아선 이가 저 멀리 작아질 때까지 믿고 지켜보는 사람의 존재다. 어깨를 내리누르고 팔목을 잡아채는 손이 아니라. 완벽한 여자를 전시하는 이가 아니라.

p.278 "왜 항상 나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죠? (...) 당신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면서." 미티는 레나의 머릿속을 흘러 다니던 단편적인 생각들이 이제 하나로 합쳐져 확신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말문이 막힌다. "레나, 당신이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난 그냥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p.319 "내 걱정은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 나만의 생각을 가진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녀가 말한다. "내가 한 생각들은 사실 그의 생각이거나." 그녀는 방을, 서배스천의 두뇌라는 보이지 않는 은하계를 손짓으로 가리킨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에요."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괜찮을 수 있다고, 어떤 일이 영원한 절망이 아님을 말하고 또 말하는 이가 사람을 사람으로 남게 한다. 의심없이 눈을 맞추고 숨을 나누는 이가 우리를 사람으로 만든다. 서로의 눈동자에 담긴 모습이 사람의 그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미티에게, 베델과 레나에게 그들 서로가 그러했듯이.

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교유에 맞닥뜨린 이들 모두가 서로의 손을 단단히 잡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내 가야 할 곳으로, 그 자신도 모르는 길로 향하는 등을 살며시 밀어주기를 바란다. 어리고 약한 우리가 상처투성이의 낯선 세계로 내딛는 발걸음까지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계속 걸어갈테니.

p.299 레나는 자신이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모든 일을 생각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서배스천이 그녀를 대신해 처리한 모든 것은 그녀가 침묵하는 동안에 결정되었다.

p.327 "서배스천이 당신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떡할 거예요?" "그럼 계속 걸어야죠." 레나의 얼굴은 평온하다. 미티에게는 생소한 모습이다. 차분한 모습은 늘 보았지만, 자유를 꿈꾸며 긴장을 푼 모습을 보니 이제까지 그녀가 얼마나 팽팽하게 감겨 있었는지, 숨 막히는 공손함에 얼마나 단단히 얽매여 있었는지 깨닫는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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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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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초연결의 시대, 각종 커뮤니티의 단꿈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전염병의 범람으로부터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세상이 반은 변하고도 남았을 지금, 격리와 단절의 기억은 전생처럼 희미하다. 다만 지워지지 못할 상처가 남았을 뿐이다. 연대는 희미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잠재적 감염원 이상으로 여기지 못하게 되었다. 안전을 위해.

고립과 격리의 시간동안 끊임없이 주어진 메세지 탓일지 모른다. 멀어질 것, 엮이지 말 것. '보장된' 격리와 무균의 경계 내에 머무를 것. '언택트'를 주창하며 벽과 가리개 너머로 타인을 관람하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급기야 서로가 서로를 관음하기에 이르렀다.

p.131 "제가 거기서 목격하고자 한 건 재난이 그들의 삶을 얼마나 파괴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혹은 얼마나 용감하게 재난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해나갔는지가 아니었어요. 그저 재난, 그 자체를 보고 싶었어요." (...) 재난의 생생한 표정이 궁금했으나 기준이 목격한 건 재난을 통과한 사람들의 얼굴에 남은 재난의 그림자뿐이었다.

p.159 소름은 집 밖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었다. 소름은 소년의 몸 안에 있었다. 자신이 곧 전쟁이고 소름이었다. 자신과 닿은 사람은 누구든지 소름을 경험하게 된다. 소년은 몸 안의 소름이 자신을 덮칠까 두려운 듯, 자기 안의 소름으로부터 도망치듯 재빨리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구라도 들으라는 듯 또다시 중얼거렸다. 소름이 끼쳤으면. 제발 소름이 좀 끼쳤으면..


둘. 무탈히 흘러가는, 매일이 별 일 없이 그렇게 이어지기만을 바라는 우식의 소원은 욕심일까, 최소한의 평화일까. 영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내일도, 모레도. 그것의 이름은 고립일까, 안락일까, 그도 아니면, 저주일까. 마르고 닳도록 외웠던 충성은 숨만 쉬고 입만 닥치면 그만인 것이다.

역사적 사명 따위 주어지지 않는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사람구실에 민폐나 안 끼치면 다행이다. 소박한 일상 또한 아득바득 매달려야 겨우 굴러갈 따름이다. 이럴 줄 알고 태어난 사람이 있긴 할까, 싶을만치. 등장인물 모두는 각자의 벽장에 갇혀있다. 그 벽장은 은유와 실질 모두의 지위를 꿰차고 최소한의 벙커, 어쩌면 두려움의 성채로 기능한다. 끊임없이 속삭인다. 접촉하지 말 것, 엮이지 말 것.

p.12 "저주라니. 내가 진짜 저주를 내리면 무슨 일이 생기는 줄 아니?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돼. 영영. (...) 그런 게 진짜 저주란다."

p.15 그러나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된 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따위 몸과 마음을 바쳐봐야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에 도움 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기는 개뿔. 해나 안 끼치고 살면 다행이지.


셋. 다시 하나. 로 돌아가서, 언택트 비접촉 타령을 하는 사이 인간의 본능적 사회성, 고립을 두려워하는 연약함은 지상명령이 된 객체화의 물결을 타고 관음사회로의 포문을 열어젖혔다. 말끔하게 소독된 관계는 조금의 침해도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타인은 언제나 위협이었으므로.

무서우이, 문을 걸어닫고 눈만 내놓은 채 보고 또 본다. 말하고 또 말한다. 불가침을 믿어 의심치 않는 동시에 서슴없이 찌르고 물어뜯는다. 고립된 모두가 거리낌없이 잔인하고 또 선량한 개인들이었다.

p.81 다짜고짜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마태공의 다수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 누구도 타인보다 자신의 죄의식이 약하다고 느끼며 껄끄러워지는 마음을 오래 이어가고 싶지는 않아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확실한 죄, 그가 그토록 오래 반복해서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사과할 수밖에 없는 특정한 죄의 실체를 알아내고자 했다.

p.124 그럼에도 우식은 타인과 끊임없이 연결되기를 원했다. 우식은 혼자 있을 때면 (...)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 계정을 비공개로 운영했으나 가끔 자신이 아닌 척 계정을 새로 열고 편집된 일상을 올렸다가 돌연 없애기도 했다. 숨고 싶은 동시에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주기를 바랐다.


넷.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묻는다면. 이왕 넘어질 수밖에 없는일이면 있는 힘껏 나자빠지라고 하고 싶다. 인간도 짐승이라 상처입고 두려우면 꼬리 말고 숨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탈로 칼비노는 말했다. 살아있는 자들의 지옥은 우리가 함께함으로서 만들어내는, 매일 살아가는 지옥이라고.

존재 이래 잔혹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1인용 지옥은, 끊임없이 염탐하고 연결지어지는 허상의 격리는 그러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언젠가는 나와야 할 벽장 밖 상처투성이 세계에서만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미래의 재앙을 현실에 못박지 않는, 상처와 오염을 전제하는 교류에서만. 방 탈출 필승 공략법: 일단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p.90 마태공에게는 아마도 딸에 대한, 또 그 딸에게 피해 입은 피해자와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자신이 악을 낳았거나 길렀다는, 혹은 제 안의 악을 딸에게 물려주었다는 뿌리 깊은 죄의식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벽장이 되어 그를 가두고 있었을 것이다. (...) 트럭은 그저 그의 또 다른 벽장이 된 건 아닌가. 탈출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가 더 큰 벽장 속으로, 더 큰 소름 속으로 들어가버린 건 아닌가.

p.213 방 탈출 필승 공략법: 일단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 어쩌면 우리는 자가격리할 방이 필요한 저 밖의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방을 만들고,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그 방을 탈출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풀이 방법을 공유하는 일을 함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워크숍 같은 것을.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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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관계 레볼루션 - 기술 패권 시대, 변화하는 질서와 한국의 생존 전략
이희옥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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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도 들리는 즉시 거의 반사에 가까운 정서가 폭발하는 탓에 객관적 평가가 어려운 국가들이 있다. 그들은 경제, 군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의 일상 전반에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들-국가는 어떤 이념의 집합체 내지는 단일한 군집으로 상상되는 탓에 '국적-인'과 행동주체로서의 국가를 분리해 다루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일 미국과 중국은, 좋든 싫든 한국 근현대사의 전반에서 거대한 축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p.170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탈중국이란 말에 지나치게 몰입하기보다는, 앞선 논의에서도 반복적으로 했던 이야기지만 결국 대체 불가능한 우리만의 기술력을 하루빨리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기술적 리더십이 갖추어져야 연달아 경제적, 군사 안보적, 국제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를 묻느나면, 다분히 열등과 멸시, 선망과 추종 사이 어딘가를 혼란하게 오가는 중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신흥강대국 반열에 올랐음을 자부하면서도 여전히 대외경제에 크게 의존하며 이른바 '강대국'의 결정에 경제적 사활이 크게 오간다. 자립과 경쟁력을 주창하면서도 국제적 위신은 그다지 높지 않다.

분명 영향력은 증가하였으나, 어느 것 하나도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한다. 상대적인 성장폭에 비해 내실을 다질 기회가 부족했던 탓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리상으로도, 국제 역동 상으로도 실질적 고립의 경계에 놓인 한국의 지위는 매우 미묘한 면이 있다. 전략적 동맹 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기정학의 시대에서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연구, 산업 전분야에서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p.94 그런데 중국의 민간 기업이 정말 말 그대로 '프라이빗'한지, 또 자율성이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여전히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양질 전환의 기류가 최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합니다.

p.120 결국 우리 대한민국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력의 미국 기술 의존도가 얼마나 낮은지, 우리가 세계 시장에서 기술적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인지 아닌지에 따라 다자간 기술 통제 프레임이 형성되지 않을까요. 통제 정책에 우리가 어떤 정책적 접근을 할 것인지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력의 수준에 따라 시장 원리를 통해 결정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일반 독자는 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복잡한 역동과 다면적 지식을 요하는 국제관계의 아젠다에 관해서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의 이해와 실정 간의 거리가 좁혀지기 어렵다. 특히나 정확한 이해를 가로막는 정서적 장벽이 두터운 경우, 그 말은 곧 아는 것만 알고 믿는 것만 믿는 평범한 대중은 정치인과 기업의 눈속임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기 딱 좋은 처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트럼프정부의 재집권은 그간의 이른바 '상식선'에 의존하는 국제 평화가 한순간에 완전한 혼란과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영원한 우방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도 존재하지 않음을 한국 사회는 연이은 위기 속에 절실히 깨닫고 있지 않은가. 넓은 영토도, 미어터지는 인구도 이 다면적 갈등에서의 생존을 장담하지 못한다. 하물며 극동의 소국은 말할 것도 없지 않나.

p.190 미중 관계의 변화가 우리 경제와 산업 기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에만 집중하는 기존 접근법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국제적 혼돈의 근본 원인은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다자주의 국제 경제 질서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고, 그에 중국이 똑같이 맞대응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전후 국제 질서의 안정을 유지해 왔던 틀인 다자주의 무역과 국제 경제 질서가 붕괴되었어요.


미래는 현재에서 시작한다. 적자생존도, 강자독식도 해답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한국의 미래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절멸과 생존, 퇴락과 신질서의 구축의 오리무중 사이에서 더이상 타자의 시선과 비교우위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이고 실제적인 유연함을 갖추기를, 생존을 넘어 상생과 끝없는 변화를 상상하고 추구하기를 바랄 뿐이다.

p.156 미래 연구를 하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어요. '미래'라는 것을 먼저 기획해 놓고 거기에 모든 걸 맞추면 '진짜 미래'가 잘 안 보여요. 현재 가려져 있거나 부족한 것들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하고 그로부터 미래를 발견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미래를 먼저 기획해 놓고 그걸 따라가기 때문에 실패해 왔던 것 같아요. 인간의 욕망과 필요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기반으로 미래를 발견하려는 노력, 이것이 훗날 한국의 저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p.205 앞으로는 제대로 문제 제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겁니다. 세상을 어떤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느냐, 또 누가 창의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 매우 유연해야 합니다. 또한 '좋은 세상'은 계획만으로는 오지 않습니다. 상상과 꿈으로부터 나오죠. 이 꿈이 바로 문제 제기의 영역입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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