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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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한국 문학계의 경향성, 같은 걸까? 언젠가부터 외로운 사람들의 외로운 이야기들이 별처럼 문단을 수놓는 것은. 어느 서점을 가든, 작게 속삭이는, 쓸쓸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어쩌면, 기실 그러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우리 사회가 외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꽃구경이려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 편히 읽거나 아주 짜릿한 오락을 즐기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만큼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 성급히 자란 어린 싹을 보는 마음과도 같다. 위태롭고, 안쓰럽다.

사랑은 영원한가? 적어도 순간에는 그렇게 믿는다.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고, 적어도 쉬이 변하지는 않으리란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소설(와, 지독한 블랙 코미디 같다, 어쩐지)에서처럼 꿈결같고 뜨거운, 모든 것을 이겨내리란 믿음을 주는 사랑을 원하고 또 믿는다.

삶은 본질적으로 외롭다. 물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는 그렇게 고독하다. 그 누구도 본질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존재의 경계, 알 수 없는 마음, 닿을 수 없는 심연.


그래서인지, 작중 "사람"들은 모두 외롭다. 이해를 바라고, 변하지 않으리라 믿으나, 쓸쓸하고, 버림받았다 느끼고, 지나간 것을 포기하지 못하며, 맹세는 쉬이 저버려진다. 그런데도 유달리 콕 집어 잘못한 이를 잡아내기 어렵다. 모두가 사정이 있다는,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말을 이렇게도 전할 수 있던가, 싶을 만큼.

혹자는 이를 두고 패배주의라 할지 모른다. 밑도끝도 없는, 오를 곳도 비켜날 곳도 모르고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흘러가버리는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물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그게 사는 이야기인걸, 지나가는 말로 잘 지내세요, 가볍게 점심이나 한끼 해요, 흘려보내는 말처럼.

p.23 흑회색의 거친 질감 때문인지 처음 윤주가 사진을 건넸을 때 아기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어두운 곳에 갇혀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지내는 ‘한 점’ 사람의 외로움. 사람은 시작부터가 외롭구나. 고독과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그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윤주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야 만날 수 있어, 하고 말했다.


장은진의 사람들은 외롭다. 눅눅하고 습한 외로움이 아니라 고요한 봄날, 실눈을 뜨게 하는 외로움이다. 바깥은 화창하고 해가 지면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도 한데, 이게 아닌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이 손만 쥐었다 펴는 외로움이다. 생의 끝도 하루의 마지막도 아니면서 건조하고 고요한 외로움이다.

전반적으로 덜 자란 이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랄 일도 없는데 어쩐지 서툴도 연약해,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 감추고 싶은 부분도, 나누지 못하는 부분도 채 갈무리하지 못해 쩝, 입소리나 내고 말아버리는 작은 초라함, 혹은 추레함. 계면쩍은 웃음들.

p.248 문학은 늘 삶을 노래하지만 삶은 문학으로 영위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자 문학이야말로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깨달아버린 나한테 화가 났고, 알려준 세상을 향해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p.267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쪽에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남은 자국을 지니고 살아가는 건가. 아니 우리는 결국 모두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에 불과한 걸까. 덩어리는 허상인가.


차라리 악다구니라도 쓰지.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를 안 보고 어딜 보느냐고 화라도 내지. 자존심 상한 날엔 어깃장이라도 놓고 객기라도 부리지.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오가는 길에 숱하게 마주쳤을 법한 사람들, 시선 끝에 흔적처럼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들.

어쩐지 쓸쓸한 마음이 되어 덮고 난 후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기에. 잘 지내시나요. 그래, 그래요... 의미없는 추임새나 주워섬기며 드문드문 섞여드는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다.

눈이 부시다. 화창한 날도 끝내주게 좋은 풍경도 없었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보는 듯하다. 가벼운 먼지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어쩔 수 없니, 그래, 그래요... 의미없는 안부를 묻는다는 말을, 이제 알겠다. 다시 만날지, 기약없는 주억거림으로 창을 닫는다. 이또한 언젠가 다시금 부옇게 떠오를 날이 있으리라 믿으며.

p.71 별난 인생도 없었고, 못난 인생도 없었다. 인생은 누구나 다 그냥 살다가 가는 것이었다. 단 살면서 때만 놓치지 않으면 되었다.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때 빌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는 것,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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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뒤에서
사라 델 주디체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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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어른들끼리 나누는 이야기처럼, 아빠가 숨겨둔 여자처럼 세상의 많은 비밀은 아이들에게 열리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커튼 뒤 비밀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사람들은 숨기고 싶은 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한다. 눈을 질끈 감고 천 한 장 너머로 숨어들면, 혹은 그 너머에서 숨죽이고 있게 하면, 영원히, 아무도 모를 수 있을 것처럼.

기실 '커튼'이라는 것은 얼마나 연약하고 모순적인가. 바깥과 안을 가르고, 보여도 좋은 것과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을 나눈다. "숨긴다"는 의미에서, 그 안팎의 구분은 순전히 자의적이고 너무도 유동적인 것이 된다. 바람에 날리는 천자락처럼.

차마 떨리는 손을 잡아줄 수도 없았던 공포 앞에서 그 모순은 극적으로 드러난다.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더이상 밀려나고 숨을 곳도 없는데.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경계가 무너지고 최후의 '안'마저도 '밖'이 될 때, 손짓 한 번에 젖혀질 그 연약한 경계는 일상에서의 무게를 단숨에 상실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커튼이 갖는 의미를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했듯 최후의 경계, 마지막 남은 연약한 보호. 혹은, 그 너머의 존재를 알 수 없게 하는 우리의 편견.

보이지 않는 것은 무섭다. 알지 못하는 것, 실체를 마주한 적 없는 것은 너무도 쉽게 혐오와 거부의 대상이 된다. 커튼 너머의 아이들은 그렇게 "해충", "유태놈"들이 된다. '있을 것으로 상상되는 존재'에게는 항거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자리는 '이미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그러나 커튼 너머를 들여다보면, 눈을 가리는 것을, 먼지를, 사람이 만들어낸 짜임 띠위를 걷어내면, 그곳에는 그저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이.

p.83 “소피! 소피! 소피!” 누군지 모르겠지만… 소피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우리는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죽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기존에 알려진 2차세계대전 중 유대인의 피해는 주로 독일과 폴란드에 집중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의 수치, 비시 프랑스를 시대를 엿볼 수 있다. 시민의 자유, 권리의 평등 따위는 저버린 역사, 유대인 혐오와 학살 조장, 적극적인 부역의 주체였던, 나라 아닌 나라.

본문에서는 점차 조여오는 독일의 압박과 유대인 박해에 냉담해져가는 프랑스 사회의 면모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나, 현실은 훨씬 참담했다. 예상 밖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아니. 너무도 전형적이었기 때문에. 그 때 그 시기, 그 일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내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점이 있다면 모른 척 감춰졌다는 것뿐이다. 유야무야 넘겨졌을 뿐이다. 그들 스스로 "가장 심하지는"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우리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땐 다 그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p.48 아빠는 뉘른베르크 법이 지성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며 고모에게 고함쳤다. “더 이상 유태인들은 ‘아리안’ 독일인들과 결혼도 못 하게 하고, 투표할 권리를 빼앗고! 상점과 공원의 입장도 금지하고! 의사나 약사, 변호사가 될 수 없도록 하고! 학교도 못 다니게 하는 것이! 그저 안타깝게도 근시안적 사고로 ‘방향을 잃은’ 천재의 생각이라고?”


말 그대로 이전까지의 세계를 뒤흔들어놓은, 사람이 쓰레기처럼,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수 있다는 걸 무너지는 세상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 망각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전쟁 이후, 그리고 다시 이후의 세대가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는 또다시 전쟁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학살과 파괴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꼴로 반복되고 있다. 파괴되었던 이들이, 환난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더불어 또다른 피해자를 낳는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극히 제한된다. 동시에 무서울만큼 정직하게 꿰뚫어본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 이성의 실패라고 불리었던 참극이 반복되는 지금, 어른이 읽어야 할 이야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린이의 세계를 부수는 어른들, 우리 모두가.

p.127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갑자기 답이 떠올랐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에는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이렇게 간단한데… 다시 태어난다면, 나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다.


*도서제공: 바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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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구픽 콤팩트 에세이 6
남유하 지음 / 구픽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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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아니. 종자가 다르다고 하는 게 맞겠다. 쫄보 무더기에 살던 쫄보는 이 호러 마니아 작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너무 재밌게 얘기하는 통에 홀랑 넘어가 슬쩍 찍어먹고 밤새 눈을 감았다 떴다, 설치는 것까지가 쫄보의 삶이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거야 이게 다 내 얘기니까 그렇지...

동시에 주관적 메이저, 객관적 약간 마이너로 분류되는 내 취향에 한마디씩 얹던 이들이 생각나는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읽는 동안 "아니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를 한 칠십 번쯤 외쳤단 뜻이다.

p.51 나도 가위에 눌리는구나! 잔뜩 기대에 찬 마음으로 그것을 기다렸다. (…)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게 느껴졌다. 가위 눌렸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p.56 은혜를 아는 귀신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관건인데, 평소에도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내가 과연 귀신 보는 눈은 있을까? 애당초 착한 귀신이건 나쁜 귀신이건 안 보이는 척 외면하는 게 답일까? 그래도 모처럼 만난 귀신을 그냥 보내기는 아쉬우니 한국말로 욕을 하면 어떨까? 욕에 반응을 보이면 한국 귀신이니 대화를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마냥 이해 못할 내용은 아닌 것이, 저자의 경험과 나름의 줏대있는 호러 예찬론(!)을 따라가다 보면 아, 이 사람도 평범한 사람이구나. 그런데 이제 조금... 뭐랄까... 쉽사리 공감받기는 어려운 취향을 가진... 싶은 순간이 많다.

굳이 따지자면 나도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다. 무섭다고 온 집안 불을 몽땅 켜둘지언정 어쩌다 마주친 괴담 시리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밤새 읽곤(혹은 보곤) 한다. 그 후의 뒷감당, 이를테면 괜시리 이불귀를 여민다든지, 가구 틈새의 어둠을 보지 않으려 애쓴다든지, 하는 것들은 내 몫이지만.

재밌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온전히 현실 너머의 것으로 즐길 수 있다면 즐거울 수 있다. 상상의 재미, 어디까지나 그 주인공이 내가 아닐 것을 확신할 수 있는 한 호러는 로맨스와 더불어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을 주는 장르가 아닌가. 그 즐거움의 이름은, 쾌감이다. 그것도 뇌가 비현실을 구분하는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진.

p.26 짧은 순간 공포 영화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죽어간 엑스트라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엑스트라로 죽고 싶진 않다. 나는 다급하게-그러나 귀신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공손하게-외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걸리는 부분이 많다. 인간은 동물이다. 동물로서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호러는 개중 가장 심부의 본능, 생존 욕구를 건드리는 장르다. 안전과 생존을 위협하는 불안을 메인으로 끌고 오는 장르가 바로 호러 아닌가.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피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을 것을 왜 찾아다니면서 보고, 읽고, 듣고, 쓰고, 상상하는 걸까? 동어반복 같지만,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상상하는 동물, 문명화 뒤로 밀려난 동물성을 되살리려 시도하는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로맨스와 호러는 필연적으로 닮은 장르인 것이다. 이성을 넘어서는 것, 의지를 꺾고 기대를 배신하는 것, 예측 밖의 존재. 이 모든 것은 절절한 사랑과 극한의 공포 모두에 발을 걸친 수식어가 아니던가.

p.91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이 심장이 되는 순간 호러요, 마음이 되는 순간 로맨스가 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당연히 상대방의 마음을 원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란 건 눈으로 볼 수가 없다. 상대방의 마음이 나만큼 간절하지는 않음을 느끼는 순간, 사랑의 감정은 분노와 집착으로 변질된다. (...) 너무 지나친 로맨스는, 호러와 서로 모른 척 등지고 사는 쌍둥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 인간은 본디 연약한 살과 부드러운 가죽으로 이루어진, 따뜻한 피가 흐른다는 것, 안전하고 확고한 세계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것, 잠시간 소름돋은 팔을 쓸어내리고 나면 무사히 현실, 안락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동물성을 부정하려 애써온 문명화의 허상을 정면으로 찌르는 쾌감은 필연 중독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워지는 계절에 슬그머니 호러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일종의 사랑 같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데, 비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책을 덮고 나면 작은 의문이 고개를 들지 모른다. 사람이 무서운 걸까, 사람 아닌 것이 무서운 걸까... 그 답은 호러에 있습니다. 오세요. 보면 알걸요.

p.115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은 어찌 보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 죽음을 망각하는 것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체계인지도 모른다.


*도서제공: 구픽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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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 키르케고르 아포리즘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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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마냥 낙관적으로 바라보기엔 삶은 고되고 구원은 요원하며 인간의 시간은 너무도 유한하다. 이런 세계에 절망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전능한 신이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면, 어째서 고통받을 권리까지도 허락했는가? 지독한 괴로움의 다른 이름은 절망. 절망하는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

p.69 아무도 죽음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한다. 아무도 울지 않고는 세상에 들어오지 못한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언제 이 세상에 들어오고 싶은지, 또 언제 이 세상에서 나가고 싶은지를.

p.81 절망이라는 질병은 완전히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그런 질병에 단 한 번도 걸린 저이 없다면, 이는 가장 심각한 불행이다. 그질병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도 그 병에 기꺼이 걸리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질병으로부터 나을 기대나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마침내 진정한 행복을 향한 문이 열린다.


인간은 희망하는 동물이다.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은 역설적으로 현재 바깥의 절망까지도 끌어다 쓰게 한다. 돌아가보자. 절망하는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이성은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그렇다, 고.

p.111 슬픔 때문에 한 사람이 미쳐 버릴 수도 있다. 이는 자명한 사실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삶은 지극히 어렵다. 하지만 사람에겐 강력한 의지가 주어져 있다. 이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그는 그 의지를 갖고 강력한 바람에 맞설 수도 있다. 때로 바람에 휘날려 이상한 존재가 된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의지는 결국 자신의 이성을 구원해 줄 것이다.

p.163 희망 속에 빠져 사는 불행한 사람은 회상 속에 빠져 사는 사람만큼 고통스럽지는 않다. 희망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은 그나마 좋은 느낌을 선사하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가장 불행한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항상 회상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삶은 유한하고,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은 너무도 짧다. 희망이 있기에 절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박차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혼란하고 고통스러운 찰나를 살아가기에, 그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흔들리기만 하는자는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는 자는 끝을 알지 못한다. 울먹이며 주저앉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미물이 아닌가. 그러나 혼란 위에 자리한다면, 그 가운데서 우뚝 설 수 있다면, 혼란의 한가운데에 스스로를 세울 수 있다면, 고통이 아닌 나 자신을 주체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면,

p.149 나는 마치 한 마리의 물새처럼 바다 위를 날아다니며 쉴 곳을 찾지만 모두 헛수고다. 바다는 끝도 없이 요동치고 있어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한 군데도 없다. 하지만 이런 흥분된 혼란이야말로 진정 나를 만드는 요소다. 나는 이 혼란 위에 나를 짓는다. 마치 물총새가 바다 위에 둥지를 틀듯이.

p.159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순간 뿐이다. 삶 속에서 마주하는 불안은 그저 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이 절망의 의미임을 새길 수 있다면, 고통에 스스로를 빼앗기기만 하지 않는다면... 그제서야 삶은 의미를 갖는다. 절망을 움켜쥐고 안팎을 뒤바꾸는 존재에게 고통은 그저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존재에게 마침내 자유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

그제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괴로워하고 내일은 죽으리. 그래도 나는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생각하리.”
고통스러운 세계, 절망을 끌어안는 인간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Life goes on. 삶은 이어진다.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p.215 이제 그대는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동안 살아왔던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이 작별 인사를 나눌 것이다. 이렇게 나는 멀리 아주 먼 곳으로 떠나노라. 나의 모자 위에는 그저 별들이 떠 있을 뿐이다.

p.218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괴로워하고 내일은 죽으리. 그래도 나는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생각하리.


*세창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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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 씨,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 노년의 심리를 이해하는 112개 키워드
사토 신이치 지음, 우윤식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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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에 더해 법적 성인이 된 지도 한참이고, 어디 가서 갓 사회 나온 초년생 취급 받을 나이도 지났다. 한 사람 몫을 다할 것을 요구받는 일에 익숙해졌고, 더이상 "어른 계시냐", "어른 불러와라" 소리를 듣지도 않는다. 급기야 때때로 부모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른이 되고 사회인으로 자리 잡는 효능감에 익숙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보호자-돌봄대상 관계가 역전되는 것의 두려움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못했다. 늙고, 약해지고, 느려지고 뒤처지는 부모와 그들을 보호하고 새로운 것에 적응하도록 돕는 역할에 나부터가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시대가 어느 땐데 젊어지는 샘물은 커녕 늙어감을 멈추는 방법마저 똑부러지게 존재하지 않는다. 억울하고 무서워 팔짝 뛸 노릇이래도 별 수가 없다. 그러니 배워야한다. 알아야 덜 무서워진다. 알아야 덜 싸운다. 내 가족뿐만 아니라 같은 사회 성원으로 살아야 하는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다.

p.17 바로 '고령자 씨'입니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 쇠약해져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풍부한 경험에 근거하여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넘은 말과 행동으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그런 뉘앙스를 담은 말입니다.


전통적인 가부장, 대가족, 성장 중심 사회는 고령 사회에 대한 대처 방법이 전무한 상태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 늙으면 자연히 사회에서 물러나 익숙하고 편안한 집단, 주로 가정 내에서, "챙겨주고 떠받들어주는" 대로 받아먹다 쇠약해지고 죽는 줄로만 안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도.

그러나 요즘이 어디 그런가. 수명은 늘었으나 젊음을 유지할 방법은 없다. 과거에 비해 늙고, 아프고, 겉도는 채로 사는 기간이 늘어났을 뿐이다. 노인의 기준은 변했으나 변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대처하지는 않지만 요구는 한다. 전통적 의미의 노년기는 이미 한참 뒤로 밀려버렸다.

노인은 투표권을 뺏어야 하네, 운전면허를 박탈해야 하네… 우스개로, 분풀이로 쉽게도 말해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젊지 않고 영원히 젊은이들의 사회에서 인정받고 "기능하는" 성원일 수 없으며, "젊은이"들만 모이는 사회에서 살 수 있지 않으므로.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일시에 죽을 수 없다면 함께 살아야 한다.

세상은 변했고, 인간은 오래 살게 되었다. 늙고 병들고 "덜 기능하는"상태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빠르게 늙어가고 있으며, 나도 늙는다. 아니, 이미 늙어가는 중이다. 도마뱀 꼬리 자르듯 몸뚱이를 훌렁 벗어던지고 도망갈 방도가 있지 않은 한, 어쩔 수 없이 이 늙고 느려지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제목은 묻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그리고 설명한다. 왜 그들이 화를 내는지, 왜 느려지는지, 왜 고집을 부리고, 우기고, 과시하고 싶어하며 왜 "답답하게 구는"지, 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지. "고령자 씨"와 함께하는 이의 태도는 어때야할지.

다같이 덜 불행하려면, 사람으로 살다 죽으려면 배우는 수밖에 없다. 이런 나와도, 늙었거나 늙어갈 남과도.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은 이상이 아니기 때문에, "~해야한다"로 사람을 뜯어고칠 수 없기 때문에, "바람직한 모습"으로 "훈련시켜야만" 공존하는 게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며, 누구나 그렇게 되기 때문에.

모르면 두렵다. 안다고 두렵지 않게 되는 건 아니지만, 덜 무섭다. 준비할 수 있다면 덜 힘들 수는 있다.

p.124 나이가 들면서 신체 능력과 인지 기능은 쇠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도 늘어납니다. 자신의 유능감과 할 수 없어진 일에 대한 실망감의 간극이 클수록 스트레스를 느끼기 쉽습니다. 작은 스트레스가 계속 누적되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짜증이 쌓여 (...) 최후의 한 방울이 더해지면 컵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감정을 조절할 수 없게 되어 화가 표출되는 것입니다. 고령자 씨이기 때문에 화를 내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이상으로 단박에 뜯어고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 당장"에는 그에 맞는 해결책이 필요하다. 돌보는 사람에게도, 돌봄 받는 사람에게도 삶이 있기에, 각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과 시야가 필요하다.

돌보기 위한 배움은 함께 살기 위한 배움이다. 피할 수 없이 도래할 미래를 위한 배움이고, 지금 현재를 같이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배움이다.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면 기다려주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결국, 모두가 서로를 돌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은, 스스로가 제대로 돌봄 받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쓰인 내용이라 한국,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이상과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으나 '대체 왜 저럴까', '왜 이럴까', '나도 그도 모두가 언젠가는'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기에는 충분히 도움을 줄 만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실용서다. 일독을 권한다.

p.157 앞으로의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간접 호혜성 커뮤니티라는 사고방식이다. 장기적인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서로 서로' 지탱해 주는 공동체가 아닌, 도와준 상대와는 다른 별개의 사람과 단체로부터 그 보답을 받는 것이 가능한 공동체다. 도움을 받은 쪽이 필요 이상으로 움츠러들 필요가 없고, 도와준 쪽도 '전혀 감사해하지 않는군' 등의 불만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가볍게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그런 공동체가 실현되면 더욱 많은 고령자 돌봄이 가능해질 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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