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은 왜 공짜일까? - 마음을 사로잡고 경제를 움직이는 마케팅의 비밀 생각하는 10대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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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의 책장을 살펴보라고. 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사는 곳이 곧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준다고. 후자는 광고였다. 그렇지만 전자는 아니라고 할 이유가 있는가? 무언가가 나를 보여준다. 광고는 더 이상 상품을 팔지 않는다. 마케팅의 홍수 시대를 지나 모든 것이 (상업적) 광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시대에, 광고가 파는 것은 바로 감정이고 이미지다.

되고 싶은 미래, 내 것이 아닌 현재를 판다고 해도 좋으리라. 이런 시대에 일상을 가득 메운 광고들의 속내와 기전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무의식 중에 스쳐보내는 현혹과 희망, 좌절과 결핍을 이해하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p.9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시장에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기업의 전략을 파악하는 일은 곧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인간 심리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다 보면 일상 속 광고와 소비자의 선택이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p.74 네거티브 마케팅은 이목을 끌기 쉽다. 그 러나 모든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별, 마케팅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의 단점을 저격하는 전략은 오히려 성공하기보다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마케팅에 정답은 없다. 네거티브든 포지티브든, 마케팅의 성패는 형식이 아니라 소비자의 감성을 얼마나 제대로 찌르느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다루는 마케팅 전략들을 차근히 뜯어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아주 작은 부분, 그러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을 건드린다. 다름 아닌 우리 안의 본능, 사회적 존재, 그 이전에 생물로서 가지는 깊고 연약한 부분이다. 혼자이고 싶지 않다. 이전의 결정으로 형성된 사고 방식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속고 싶지 않다.

이를 이해한다면 마케팅 전략을 더 이상 단순한 판매 방식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계산이자 심리 싸움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는 흔히 기업이미지에 일종의 선악을 덧씌우고 소비자로서의 선택을 더없이 합리적인 판단으로 믿고 싶어한다. 이를 짧게 말하면 '가치'라 할 수 있겠다. 소비자는 기업과 '가치'를 주고받고, 나아가 공유하고 싶어한다. 바로 여기에서 물어야 하지 않을까.

p.117 미끼 효과와 앵커링 효과는 소비자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 당신은 현명한 소비자가 아니라, 미끼에 보기 좋게 낚인 호갱님이다. 호갱이 되지 않으려면 대니얼 카너먼이 이야기한 '깊이 숙고하기' 시스템을 잘 가동해야 한다. 마케팅은 '대충 생각하기' 시스템의 빈틈을 늘 노리기 때문이다.

p.155 냉정하게 말하면 명품 소비는 합리적인 소비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지위재가 주는 행복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이 세상에는 꽤 많다.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명품 브랜드는 상품의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는가 하면, 멀쩡한 상태의 재고를 남김없이 불태우기까지 한다. (…) 한쪽에선 명품 하나 사겠다고 새벽부터 줄을 서서 오픈런을 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남은 제품을 불태운다. 이게 정말 효율적인가?


제목처럼, 인스타그램은 왜 공짜인가? 무슨 이득이 있어 그 많은 비용을 투자해가며 유저를 불러모으고, 끊임없는 '컨텐츠' 생성과 서로 간의 노출에 안달하는가? 왜 차고 넘치는 자본 권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에 납죽 엎드리는가?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광고산업의 일부이다. 선택하지도 의문하지도 않는 순진한 소비자는 산업의 충실한 공짜 부품이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 별 수 없기에 혹은 당연히 사야 하기에 소비하고 이용하는 얌전한 돈줄이 아닌 시장의 한 축, 경제법칙이 말하는 합리적이고 능동적인 소비 주체가 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권하는 우리가 살아온 세계들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p.245 전통적 시장과 달리 양면 시장에서 고객은 두 부류(양면)로 나뉜다. 하나는 돈을 내는 진짜 고객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돈을 내는 고객을 붙잡아 둘 전략적 무기 역할을 하는 고객이다. 구글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가 대부분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양면 시장에서 일반 이용자는 돈을 내는 진짜 고객이 아니라, 돈 내는 고객을 붙잡아 둘 전략적 무기다.

p.246 티롤은 이 연구를 통해 '단면 시장과 달리 양면 시장에는 약탈 가격 금지 조항이나 독과점 방지 정책을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전략적 무기가 되는 고객에게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경쟁 기업을 죽이기 위한 술책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양면 시장 특유의 사업 모델이기 때문이다.


*도서제공: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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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피해자의 자리와 억울함이라는 무기에 관해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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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SNS에서 본 적이 있다. 월경과 관련된 불편에 공감하는 내용의 영상 게시자가 남성이었더란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일도 아니나 댓글에서 난리가 났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모욕과 욕설이 불붙듯이 달리는 와중에 '여자가 불편하다는 얘길 하는 너도 페미 아니냐'는 억지떼가 숱하게 보였다.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거나 혐오발언을 멈추라는 댓글은 순식간에 파묻혀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주체 되는 문제는 으레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어렵다.

숙의와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존엄투쟁이 감정싸움에 휘말려 소진되기 일쑤다. 한국 사회 내 젊은 남성 집단의 이런 '깽판치기'는 사실상 하루이틀 사이의 일이 아니다. 차별과 공정의 호소는 강탈된지 오래다. 제목처럼 한국 사회의 남성들은 차별을 훔쳐가는가. 그렇다. 쥐면 꺼질세라 불면 터질세라 유사 이래 노상 사경을 헤매는 남성의 '기가 죽을까'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개개인의 '감정' 문제만으로 치부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p.38 남성 청소년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여성을 배제하거나 도구화한 '주류적인 남성문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남성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나타내는 공격성과 혐오의 표출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반영하거나 모사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p.46 판관은 결국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 심판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한계 역시 명백하다. 대체로 '사후적 징벌'에만 관심 있을 뿐, 범죄 등의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번성'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엄을 훔쳐다 쥐어주는 사회권력이 존재한다. '알아서' 생존하도록 내몰리는 성원들과 동등한 주체가 아닌, 더 우대받고 더 보호받을 존재로 추켜올림으로써 영원히 어떤 영역에서의 무지를 보장받도록, 문제의 근원을 직면할 이유를 감각하지 않도록 천진한 무능에 고착시킨다. 더 크게, 더 많이 말하라. 전부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능력으로 쟁취한 공정하고 마땅한 권력'으로의 진입은 필연히 실패로 귀결되는 환상이다. 진짜 자격, 진짜 성원, 마땅히 존귀한 '우리'의 범위를 점점 더 좁게 설정하며 생득적 존엄을 마치 능력으로 쟁취하고 침탈할 수 있는 자원으로 착각하기에 자기가 놓인 자리와 사회 전체의 역동 모두를 무시하고 기득권이 곧 정의라 믿으며 '중립기어'를 박는다.

p.79 여성들로부터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기분', 기 성세대들이 청년들의 몫까지 독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분노와 박탈감을 키운다. 또래 청년 여성이든, 중년 남성이든 모두 자신의 앞길을 막는 적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p.122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하면서, 남성들이 자신의 기존 권력을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남성이 차별받는다는 일종의 '착시 현상'을 경험하는 (…) 상황을 정치적 땔감으로 삼아 혐오를 조장한다. 문제의 원인은 청년 남성들의 인식에 있다. 그런데 자꾸 '과도한 페미니즘'이나 우리 사회가 남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선망하는 권력에 가까이 끌어올려주기를 바라며, '열등한 자들'이 사라진 자리에 넉넉한 우월의 여유가 보장되리라 믿으며. 그러나 익히 알고 있듯이 기울어진 땅의 중립은 필연히 권력에 힘입어 낮은 쪽으로 구른다. 이것은 진정 '자연스러운'가? 존엄과 평등이 사라진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에 과연 '공정'과 '성공'이 자리할 틈이 있기나 할까.

이 책이 제목에서부터 남성권력의 문제와 기만을 지적하고 있으나 이는 물리적 생김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라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 규범이, 그를 공고히 하는 기득권자들이, 눈앞의 이득과 기대가 '남자니까'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를 부수고 더 넓은 평등,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남성 존재들이 '남자니까'의 역학을 뒤집고 그 틀을 벗어나려 애쓰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p.100 흔히 '한국은 안전한 나라'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공권력의 작동 범위나, 치안의 수준만이 '안전함'의 척도일까. '안전한 공간'이라는 외피를 둘러썼지만 실은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조롱과 탄압이 일상화되고, 능력주의 논리가 약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 곳이 지금의 한국이다.

p.167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거나, 이것부터 하고 저것은 나중에 하자는 말은 더 이상 시민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민주 정부에서도 그렇게 누군가의 삶이, 인권이 뒷전이 된 케이스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한국 사회에 반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이전부터 소수자·약자들이 외쳤던 구호에 정답이 있다.


저자의 전작을 빌어 말하고 싶다.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 우리의 궁극적 방향은 남자니까 이 정도면, 남성에게도 이득이 되기 때문에… 가 아닌 어떤 성원도 불평등한 각자도생의 '우리들의 사회'에서 행복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 애써야 한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누구도 홀로 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내가 너를, 우리가 그들을, 서로가 서로의 진정성과 무결을, '진짜 사람'을 검증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 잘 사는 우리를 위해 타인을 소모해도 좋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가 약육강식의 '야생'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더이상 무마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모두가 말해야 한다. 남성이여, 정의로운 성원이 되어라. 남자다운 남자가 아닌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라.

p.267 '불편하다'라는 말은 여전히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인 표현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사실 '불편하다'는 매우 맥락적이고 관계에 기반해 있는 말이기도 하다. (…) '불편하다'는 말은 언제나 쉽게 기각된다. 누군가의 '불편하다'는 목소리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온갖 농담과 장난과 성희롱에 왁자지껄 웃는 것이 '도리'처럼 여겨진다면, 그런 세상에선 누가 더 살기 좋은지는 명백하다.

p.276 소수자들 입장에서 기존의 주류-기득권, 차별을 숨쉬듯 하는 이들이 편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광장에서 누군가를 쫓아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 문제는 다수자들은 소수자들을 쫓아내라고 너무나 쉽게 말한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권력 차이'라고 생각한다. 연대를 유지할지 안 할지의 권한은 자신들이 갖고 있다는 생각, '우리 집단'이 '너희 집단'을 쫓아낼 힘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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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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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사회는 살만한 곳인가? 이 시대에는 희망이 있는가? 누구에게 물어도 썩 긍정적인 답이 돌아오지 않을 테다. 언젠가 지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 집 근처 학교에 아이들의 맛있는 급식을 원한다는 의미불명의 현수막이 걸렸기에 찾아보니 급식노동자 근무처우 개선 투쟁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고.

참담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며 사탕발림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어른들의 목소리로 표상되는 사회가 이 꼴인 것은, 지금 자라나는 세대를 어떻게 망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에 다름아니다.

p.27 우리 아이의 자존감을 길러주겠다는 노력은 시민적 자존감을 지켜줄 수 없는 사회 없이는 무효하다. 아무리 자식이어도 그는 내가 아닌지라 그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좇을지 부모는 알지 못한다. 자식의 미래를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부모, 결국 모든 부모가 지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p.40 사랑이 경제로 환원되면서 발생한 돌봄의 양극화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삶을 스스로 평가절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잔인하다. 사실상 반돌봄이다. (...) 우리의 탐욕은 안이 아닌 밖을 향해야 한다.


내 아이가 대단한 부도 명예도 아닌 그저 안정적인 삶과 쪼들리지는 않는 생계를 누리기를, 상처받고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한' 욕망은 우리만 살아남는 좁은 세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사랑이 탐욕이 되면 그저 무언가를 향한 갈망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를 더 좁고 작게 분열시킨다. 사회를 황폐화한다.

황폐화된 사회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직업에는 귀천이 있는, 어쩔 수 없는 세상 순리가 원칙이 되고 정의가 되는 사회에서 시간과 주권은 착취와 기만의 협주 속에 불균등한 재화로 전락한다. 공동의 자원은 고갈되어 사유재산의 제로섬 쟁투만이 대두된다. 결국 무한경쟁의 잔인함에 던져진 개인만이 남는다.

p.47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아름답다고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환경은 사막이다.아는 단어를 죄다 글로만 배운 사람이라면 그 또한 사막을 지나는 이다. 더구나 이 고행은 가난과 함께 대물림되기 마련이다. 이 불모의 토지에서는 씨를 뿌려도 초목이 자라지 않고, 희망을 품어봤자 신기루에 그치고 만다. 같은 세계를 사는 시민이자 어른으로서 우리에게는 사막화를 막을 책임이 있다.

p.91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인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정치란 오직 선거뿐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밖에 없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안아 정책으로 실행하고 법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그 앞에서만 우리는 공동의 선한 의도를 가진 성숙하고 단합된 국민이 된다. 전 세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포풀리즘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


비단 유형의 자원뿐만 아니라 여유, 배려, 관용 등의 필수 가치조차 파이 싸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이 쟁투의 원인이자 목적일 사랑까지도 탐욕 앞에 무력해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으며, 국가는 성원의 존엄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공존, 함께 살아가기, 동료 성원 따위는 먼 꿈이다. 우리, 더 진짜인 우리와 적뿐이다. 안으로, 더 좁고 작은 우리에게로만 향하는 탐욕이 모든 정의에 선행하는 사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만은 잘 사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누구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저자는 성장해가는 아이와 변화된 사회적 요구에 분투하며 깨달은 바를 바깥에서 안으로, 다시 안과 바깥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사유로 펼쳐보인다. 육아와 교육, 나와 너와 수많은 타자들을 오가는 네 챕터의 글은 나와 아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 이대로여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요청에 가깝다. 그는 "돌봄의 어려움은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p.68 이종건은 《연대의 밥상》에서 연대는 "서로의 삶에 참견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 "당신의 고통이 나와 맞닿아 있기에" 도저히 방관할 수 없어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의대 오라는 태도로는 연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연대는 "결국 자기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홀로 태어나 살 수 없는 이상, 우리에게는 인간다운 인간일 책임이 있다. 나와 타자가 서로의 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타자의 생애 전체에 책임 있는 존재일 책무를 진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우리, 연약한 종으로서의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동체를 이루는 것뿐이다. 더 취약하고, 느리게 따라오고,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하는 것.

수없이 직면하는 실패와 다름을 개인의 희생으로 무마하지 않는 것, 사회 전체가 상처를 기억하고 절망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사회 전체의 하한선을 높이고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 결국, 지긋지긋하게도, 이 완전수동식 사회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고 반복해야만 하겠다. 그것도, 타자 곁에 서는 사람,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탐욕에 힘입어서만, 비로소.

p.111 앞서 우리가 배웠어야 할 것은 불신이 아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저 먼 타자의 죽음이 실은 나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공동체적 감각이다. 모든 공동체는 그 안에서 "죽어가고 태어나는 개인들의 생각들과 업적을 흡수하면서 유지"된다. 공동체가 유기체인 이유다. (...)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의 마음과 죽음을 더 많이, 더 깊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난을 대하는 자세다.

p.220 결국 "인간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비참함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 이다. (...)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다 같이 쌓아 올려야 할 신뢰와 권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세계는 그렇게 인간에 의해 완성되어간다. 미추를 결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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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
주성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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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어째 평생을 가도 취향이라고 할만한 내용이 하나같이 애매한 방향으로 희한하게 생겨먹은 탓에 영화도, 배우도 메이저한 선에서 스몰토크라고 꺼내기 애매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뭐랄까, 세월의 향수 같은 이름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마음 한켠에 차오르는 슬픔, 그래, 차라리 애수라고 해도 좋을 그런 이름들. 알음알음 돌려 보던 비디오 속 영화는 불룩한 화면에 스치는 얼룩지고 흐릿한 조명들, 음울과 권태로 꽉 눌린 청춘과 불온하고 위태한 장면들로 기억된다. 클리셰임을 부정할 수 없는 판에 박힌 줄거리와 끈덕지게 따라붙던 뒷맛들과 함께.

p.10 그 감정을 자신의 절대적인 눈빛 속에 가둔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가장 큰 미덕은, 연기에서 과잉의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작품 속 인물과 관객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큰 소리로 불러서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먼저 다가오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느긋하게 지켜보고 기다린다.

p.139 "넌 꿈이 뭐야?"라는 질문에 그는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다. 춥더라도 적어도 빛은 볼 수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이처럼 〈첩혈속집〉의 양조위는 1997년 반환을 앞둔 불안한 미래 앞에서, 희망 없이 떠도는 홍콩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 편린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있다.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몰라. 그저 양조위였을 뿐. 곧은 눈썹 아래 무구하고 순한 눈매가 꼭 어린 강아지같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누구도 상처입힐 수 없는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배역을 떠나 사람이 그럴 거라고. 어리고, 순한, 둥그런 반복. 홍안의 양조위를,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뭐랄까, 그에게는 꼭, 더럽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런 얼굴에 이유 없는 악함을 부여한다는 건 어쩐지 모욕처럼 느껴질 만큼. 어느 세계에서든 그 얼굴을 믿어버리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처럼. 수줍고 깊고 외로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남자... 라는 생각에 몇 번을 속아넘어갔던가. 젠장. 가만 되짚어보면 그 손은 결코 희고 보드라운 적이 없었을텐데!

p.204 "유덕화는 배역과 끝없이 경쟁하고, 양조위는 배역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장국영은 배역을 유혹한다." 경쟁하는 유덕화에게는 불가능한 장면이고, 유혹하는 장국영에게는 비누와 수건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기에 역시 불가능하다. 오직 양조위만이 관객을 야윈 비누의 자리에 두는 마법을 발휘하며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양조위에게는 고독마저 자랑이 된다.

p.226 비교해볼수록 장국영과 유덕화처럼 세상 투명한 배우가 또 어디 있나 싶다. 그런데 유독 양조위만은 다르게 읽힌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단순히 '사려 깊고 착해 보인다'는 표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는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매번 알면서도 양조위라는 인간에게 속고 마는 것일까.


밉지 않은 배신감은 접어두기로 하고, 그의 이름과 거의 언제나 붙어다니던 감독들의 이름을 꼽아본다. 예를 들면, 이쯤 되면 거의 세트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왕가위랄지. 어렵잖게 그릴 수 있는 양조위의 필모그래피는 곧 그가 해석한 세계를 그려낸 아들이 바라본 사회와도 촘촘히 엮여 있다. 그것이 곧 역사가 아닌가.

저자는 신통기... 홍통기? 를 도열하는 대신 생애부터 작품세계까지, 배우이기 전에 인간, 양조위라는 사람을 통해 말한다. 배우의 존재의의와 그 무게를. 비련과 허무로 뭉뚱그릴 수 없는 그때, 그 사람, 그 곳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p.284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라는 제목은 과거 형처럼 들리지만, 공식 영어 제목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화양연화'를 고스란히 영어로 옮긴 'The Most Beautiful Day in Life'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적 느낌의 〈In the Mood for Love〉다.

p.285 말하자면 왕가위는 그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미 1997년 이후일지도 모를 미래의 시간을 보여준 것이다. 주 선생의 평행우주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처럼 양조위는 '왕가위의 시간'에서 모든 시간대를 산 유일한 배우라는 것을 넘어, 왕가위도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서 살아가는 배우가 되었다.


배우로서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2027년을 코앞에 둔 지금,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날 배우 양조위와 그의 세계는 그리움일까, 절망일까. 아니면, 연약한 향수에 그치게 될까. 어쩌면 그의 세대가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홍콩배우일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었을지도.

사랑이 아닌지라, 만 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내년부로 끝맺어질 홍콩의 그 때를 기억하는지, 더는 묻지 못하게 될 날도 머지 않았겠지. 그저 한가지 확실한 건, 이 수줍고 과묵한 남자에의 애정에 불이 붙어버렸다는 것이다. 스크린 안팎, 배우 양조위와 인간 양조위 모두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러니 애수와 찬탄을 담아 오래도록 말해주기를. 아, 양조위, 그야말로 진짜배기였지.

p.387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인간 양조위'는 '배우 양조위'와 다르지 않다. 이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 이가 왕가위 감독이다. 말하려다 멈추고, 다가가려다 돌아서며, 사랑한다 외치는 대신 끝내 침묵하는 영화 속 양조위는 실제 그의 내면을 스크린에 투영한 결과다.

p.398 〈동사서독〉에서 일거리를 찾아 매일 자신을 찾아 오는 맹무살수를 두고, 사막의 인력사무소장 구양봉이 했던 흥미로운 묘사가 떠오른다. "한물간 검객이지만 생활은 규칙적이다. 술 한 잔에 밥 두 그릇. 해질녘에 떠난다." 그처럼 맹무살수, 아니 일거리를 구하지 못했어도 성실하게 다음날을 준비하는 양조위의 규칙적인 일상과 함께라면, 홍콩영화는 결코 저물지 않을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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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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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되는 지구촌, 자유와 진보의 상징인 '서방'과 단연 빛나는 선봉인 미국의 시대는 저물었다. 나날이 쇠락하고 있다. 실각하는 권력과 그 추종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누가 이 권좌를 훔쳐갔지? 누가 감히 앞지르려 하지?

그러나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을 때야말로 이렇게 물을 때다. 누가 그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가? 적들에 의해, 그들을 물리치고 '정상'을 회복하기 위해,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혹은, 야만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으므로. 전세계적으로 목도되는 상식의 붕괴, 폭력과 적대의 일상화.

p.5 자본 축적 과정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는 전 지구적 축적 과정을 총체적으로 조절하고, 가장 뛰어난 생산력과 기술력, 생산 능력 등을 가지고, 세계 금융 시장을 주도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규칙'을 정하면서 동시에 그 담론들을 세계인들의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국가야말로 '패권 국가'입니다.

p.6 역사적으로 최초의 패권 국가는 17세기의 네덜란드였으며, 그 뒤를 이은 것은 바로 영국, 즉 19세기의 대영제국이었습니다. 1945년 이후에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바로 지금 쇠락해가고 있는 패권 국가 미국입니다.


전세계가 휘말린 전쟁, '서구 문명'의 발전과 대안 모색의 끊임없는 시도로 쌓아올려진 인간성이라는 허위가 그저 허구였음을, 지성과 문명의 대실패적 현장을 뼈저리게 까발려버린 전쟁 이후, 우리는 얄팍한 평화를 너무도 깊이, 절실하게 믿어버렸는지 모른다. 마치 이것이 정상이었다는 듯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끔찍한 과거의 지평선 너머로 안녕히, 영원히.

그런데, 정말 이 야만으로의 회귀는 전례 없는 파멸의 서막일까? 아니면 신-미국이라는 새로운 과두체제의 창발일까? 설사 누군가의 경악어린 외침이 울려퍼진대도 꿈쩍이나 할까싶다. 이 파시스트들! 이만큼 무력한 외침이 없다. 저자는 말한다. 미국 주도의 서방 일극 체제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특별하고 또 이례적인 순간이었다고.

p.164 파시즘이란 자본주의 국가의 원점, 일종의 출발점입니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국가는 위기 타개책으로 종종 각종 형태의 파시즘을 선택합니다. (...) 한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공격적 정책의 남발은, 비록 파시스트적 색채는 분명해도 아마도 히틀러 시대 독일과 같은 '질서 정연한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 할 것입니다. 트럼프의 파시스트적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정책 난맥을 가중해 오히려 역으로 미국의 위기를 더 악화시키며 그 패권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큽니다.

p.210 민주-공화 양당 사이에 대립의 강도나 진행 방식 등에 대해 차이가 있으나 중국을 전략적인 경쟁자로 보는 데 미국의 주류 정계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 단, 미국의 패권 쇠락이 심화되고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의 요구가 극단적인 만큼, 기존 정책들도 눈에 띄게 극단화됩니다.


미국의 중국 혐오와 '구역'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태도를 남한 정치권이 어떻게 흡수하고 답습하고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한반도 요참 사태를 전후해 남한 정치사회의 주된 기조는 미국을 우방이자 우상으로 섬기는 태도였다. 기십년 사이에 급부상한 일부 집단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우방을 넘어 우국충정에 가까울 지경이기까지 하니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신패권질서의 주도국 지위를 꿰차려는 미국과 그 하위-우방들의 시도는 과연 '질서'의 공고함, 절대적 격차를 공고히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을까?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좌파 운동 진영에서 미제 세력에의 대항 논리는 과연 얼마나 발전했는가? 과거의 영광이라는 허상에 매달려 현재를 등한시하고 있는 '그들'에 방심까지나 할 여유가 있는가?

p.154 이런 극우적 쇼 정치로는 이미 쇠락해 가고 있는 초강대국이 다시 위대하게 될 리가 없습니다. 단, 이런 쇼의 일환으로 한국까지 한미 동맹이라는 틀에 갇혀 한국 경제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대중국 탈동조화 등의 정책 강압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그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트럼프주의 시대 미국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적인 외교 전략은 정말 중요합니다.

p.325 문제는, 이런 접근 방법이 여러 제국들이 미 제국이 쇠락하는 틈을 타서 서로 경쟁하고 주변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현 상황의 특색, 즉 제국 간의 모순들의 심화와 경쟁의 첨예화, 미국 이외 제국들의 상대적 영향력 강화 등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 여러 제국들의 대내외 정책과 이데올로기, 야망, 이해관계의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파악이야말로 진보적인 대응을 마련할 수 있는 첫 단계입니다.


혁신이든 실리든, 그 명목이 무엇이든 간에 현 세계가 문턱에 선 '야만 시대'는 그저 오랜 역사의 반복일지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이 패악 또한 반복이라면 그를 가능케 한 시민사회의 책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테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성원 모두의 숙명적 책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유난히 길었던 지난 겨울, 민주주의는 완전히 수동이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돌았다. 끊임없이 신경써야 겨우 굴러간다고. 폭력만이 유일한 진리가 되려는 세계에서 그 말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것도 우연은 아닐 테다. 민주주의의 '민'으로 묻는다. 좋든 싫든 요동치는 세계에 놓인 지금, 무엇이 이 연쇄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의 것이 되기 위한 나와 당신의 책무란.

p.323 민주주의가 국가 정체성의 핵심인 구미권에서, 신분 하락과 상대적 빈곤화에 분노한 대중은 주류 정치에 대한 신뢰를 접고 트럼프와 같은 극우들에게 권력을 내주었고, 그 순간 민주주의도 무너졌습니다. (...) 구미권의 전반적 쇠락을 초래한 신자유주의는, 구미권의 최고 장점인 민주주의도 형해화시키고 말았습니다.

p.350 복지 국가도 그렇지만, 민주화는 일종의 조건부 사회계약입니다. 민의 자발적인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유지되는 이상 엘리트들은 싫든 좋든 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합니다. 폭동이나 혁명을 통한 민의 표현보다 투표를 통한 민의 표현이 '통치성' 차원에서 훨씬 낫기 때문이죠. 한데 민의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떨어지는 그 순간, 민주주의라는 사회계약은 자동 해약됩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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