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언젠가는 누군가의 땅이었고, 또 언젠가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이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모든 것을 파헤친 후에 떠나갔으며, 지금은 겪어본 적 없는 비바람과 파도에 조금씩 사라져가는 섬이 있다. 그곳에 살아가는 원주민, 이방인, 혼혈 혹은 흔적... 무엇으로도 불리고, 어떻게도 불릴 수 없는 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또다른 지구 어딘가의 작은 섬, 와요와요. 그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말과 노래로 소통하는 사람들, 신화와 노래로 이어지는 기억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오래된 율법에 따라 장자 아닌 남자는 섬을 떠나라. 그렇게 아트레유는 차남들의 운명, 바다로 알 수 없는 길을 떠난다. 죽음의 목전에 당도한 곳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쓰레기섬.

p.36 지진은 생명을 앗아가지 않고도 아주 쉽게 사람을 극한의 공포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삶에서 어떤 것을 빼앗거나, 그것을 말라 쪼그라들게 하면 된다.

p.171 한편 아트리에는 자기 몸이 점점 변하는 걸 느꼈다. 잇몸에서 자주 피가 나고 관절도 아팠다. 수영할 때 전처럼 몸이 자유롭지 않았고 때때로 현기증이 나서 다시 물으로 돌아온 건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 썩은 내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뒤섞인 악취에 계속 구토가 나와 몸이 더 약해졌다. 게다가 벌레도 많아져 곳곳에 파리와 모기가 들끓고 해류도 불안정했다.


그곳은 알지 못하는 세계의 무덤이다. 형형색색의 쓰레기들이 수만년의 소멸을 유예당한 시취의 공간이다. 거대한 무덤, 망각된 세계에 실려 아트레유는 타이완에 도달해 앨리스를 만난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영영 기다리고만 있는 그 사람을. 살아야 할 이유를 상실해버린 그는 아트레유로 인해 다시금 삶의 궤적으로 돌아온다.

우연으로 도래한 낯선 이를 살리기 위해, 이 소년을 살리기 위해서는 살아야 했기에. 서로에게 완전히 낯선 언어와 문화, 그 장벽은 노래와 시선을 주고받음에 따라 서서히 허물어진다. 그들 각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두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혼자가 아닐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

p.208 " 이 섬에 있는 모든 소각장과 매립지, 최첨단 분해 시설을 동원해도 그 쓰레기를 다 감당할 수 없어. 그렇다고 이란이나 타이베이가 쓰레기를 받아줄 것 같아? 빌어먹을, 일본과 중국은 책임을 떠넘긴 지 오래야. 하지만 쓰레기는 아주 공평하지. 쓰레기 소용돌이가 해류에 쪼개져 흩어졌으니까 각자 자기 몫의 쓰레기를 떠안게 될 거야."

p.216 뭘 쓰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앨리스는 이야기라고 했다. "이야기를 써서 뭣 하려고요?" "사람을 구하려고." 앨리스가 이렇게 말한 것 같았다.


우밍이의 소설은 그 일이 있은 후에, 그 일이 지나간 후의, 그 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선 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세계에는 수많은 고통과 비극이 있다. 연약한 인간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휩쓸리고, 어떤 상실은 도저히 메워질 수 없다. 만남은 순간이고, 헤어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혹은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잠시 포개졌던 땅이 버려진 것들로 이뤄진 쓰레기 산이었다 해도 우리는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추천사는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의 이야기 속 세계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무력의 진창에서도 살아간다. 기억이, 말이, 마주치는 눈이 세계를 부수고 태어나게 한다. 개발이 파멸이 되어 돌아오는 세계를 이다지도 장엄한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감은 눈 너머의 세계를 본다. 너의 의미를 기억해.

p.373 "하지만 파도가 언젠가는 떠나가듯이 기억과 상상은 언젠가는 분리될 수밖에 없어. 그러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지." 복안인이 말했다. "이건 대부분의 생물이 문자로 기억을 저장할 수 없는 것과 달리, 유일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존재,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야."

p.391 "앨리스, 날 위해 기도해줄 수 있어요?" (...) "기도가 도움이 될까?" "아마 안 될 거예요. 바다의 현자... 내 아버지는 바다가 갑자기 무엇을 가져갈지, 무엇을 가져다줄지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게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예요."


*도서제공: 비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디츠 - 나치 포로수용소를 뒤흔든 집요한 탈출과 생존의 기록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는 우아한 자들의 연회장이자 별장이었고 사냥터였다가 정신병원이었다가 감옥이 되었다가... 세계가 휘말린, 발 닫는 곳마다 포화의 흔적을 남기던 전쟁의시대에 포로수용소가 된 고성, 콜디츠. 수백년을 거치며 그 규모와 모습을 달리하는 내내 누군가에겐 그저 감금과 공포의 장소였던 그곳이 전쟁기에 이르러 다시금 역사의 충실한 반복이 된 것에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자고로 사람 있는 곳에 소동 없을 수가 없는 법이라. 일반 포로들과는 대우가 다른, 명예와 신사도를 아는 이들의 집합이라는 장교수용소도 다를 바 없다. 바깥에서야 높으신 분들이지, 일단 몰아다 가두고 나면 골치도 이런 골치가 없는 인간군상이라 이 생생한 투쟁기가 감동 이전에 요란, 소동, 난장판의 한복판이라 느껴졌다고 한다면, 너무한 감상일까?

p.8 콜디츠성은 무시무시한 감옥이었으나 부조리할 때가 많았고, 고통의 장소였으나 고급스러운 희극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 철조망에 둘러싸여 세상과 단절된 채 엄중한 감시를 받는 이 새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변화를 겪었다. 그동안 성 안의 삶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갔고, 밖에서는 전쟁이 가차 없이 계속되었다. 영웅적인 포로가 있었지만, 그들도 인간이었다. 강인한 동시에 약하고, 용감하지만 겁에 질린 그들은 쾌활했다가, 단호했다가, 절망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p.53 〈그곳은 유럽의 축소판이었다.〉 한 포로는 이렇게 말했다. 수감된 포로들이 명목상으로만 연합되어 있는 것도 유럽과 비슷했다. (...) 국적을 초월해서 개인적으로 강한 우정을 맺은 사람들도 있고, 언어 공부를 위해 짝을 지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판에 박힌 인식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럽 여러 나라는 서로 평화롭게 어울리며 조화를 이루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간 수많은 상상과 말들에서 콜디츠는 저항과 명예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들춰낸 기록은 그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그곳에도 인간이 있었다. 그리워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즐거워했던 이들이. 수년간의 탈출시도에서는 일종의 신념이나 광기에 가까운 감정까지 느껴진다. 돌아갈 곳을 잃지 않았다는 믿음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증명하듯이.

동시에 콜비츠의 '투지'와 '명예'는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전쟁의 시대인 동시에 계급과 인종, 민족의 시대였다. 장교는 장교, 병사는 병사, 유색인은 유색인이었으며 특권층의 '가치'는 공고했다. 국가와 집단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의 '폐쇄적인' 공간에서조차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등 '바깥 사회'의 반복이 누군가에게는 감옥 안의 감옥, 수용소 안의 수용소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p.267 전쟁이 끝난 뒤, 과거 콜디츠에 갇혔던 사람들은 그곳의 포로들이 계급을 따지지 않고 형제처럼 끈끈하게 지낸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탈출하겠다는 공통의 결의 덕분에, 바깥에서 사람들을 갈라놓는 차이와 불화가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정확히 정반대였다.

p.347 라벤더 중령은 인도가 결코 독립할 수 없는 이유와 인도인의 타락에 대해 미친 듯이 독설을 쏟아 내고 있었다. (...) 결국 마줌다르가 폭발했다. 「당신과 나의 차이는 이겁니다. 중령. 당신은 내 나라에서 25년을 살았는데 그 나라의 여러 언어 중 단 한 개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 나라에서 15년 동안 살았는데 당신네 언어를 포함해서 5개 국어를 하죠.」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는 나치즘의 특징이라는 순진한 통념을 비웃듯, 명예로운 신사들의 세계에서조차 유대인은 유대인이었다. '평범하게' 절멸의 길로 끌려간 쪽과 '운 좋게' 장교로 취급된 쪽이 있을 뿐. 그러므로 콜디츠의 포로들과 간수들이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만은 한 마음이 된 것도 낯선 일은 아니었다. 그들 모두 포로였지만, 다 '같은 포로'는 아니었다.

몇 년간 지척에 있었던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몰랐다는 포로들과 협력자들, 간수들의 증언이 썩 믿음직스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각기 명예와 신념을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신념에 모두가 평등한 사람이라는 것은 포함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p.81 콜디츠의 유대계 프랑스인 중 일부는 출신이 좋아서 이곳에 갇히게 되었지만, 팻 리드의 지적처럼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냥 유대인이라서 거기에 갇혀 있었다〉. (...) 많은 영국인은 프랑스인 중에 독일인과 똑같은 반유대주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프랑스 전체가 그렇듯이, 프랑스군 포로들도 샤를 드골과 빨리 합류해서 나치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쪽과 나치에 협력하는 비시 정권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p.422 지난 세월 동안 콜디츠에 대해 많은 사람이 많은 글을 썼지만, 이 노동 수용소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고작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을 하며 굶어 죽고 있었는데도. (...) 패배한 독일군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SS 간수들은 유대인 수감자들을 한 번에 다섯 명씩 체계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동이 트기 직전에야 총소리가 멎었다.


수년을 담장 너머 세계와 기약없이 격리되었던 이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들의 온갖 기상천외한 탈출 시도와 '유머러스한 저항'은 일견 시달리는 간수들이 불쌍해보이는 지경까지 몰아갔으며, 어느 정도는 경탄스럽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지독히도 비인간적인 상황, 감금된 전쟁포로의 신분조차, 심지어 탈출하는 순간조차도 유머 감각과 신념을 해칠 수 없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이 '감동'에는 슬픔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좌절하고, 끝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으며, 회복할 수 없이 부서져버렸다. 콜디츠는 정녕 모순이었다. 꺾이지 않은 의지는 일상의 괴리 앞에 형언할 수 없는 부조리의 물음이 되었다. 그곳에 인간이 있었다. 끝내 잃어진 이들, 그리고 살아남은 기억과 함께.

p.322 그는 끝내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콜디츠를 떠나던 그날 담장 밖에 서서 그는 무너졌다. (...) 그때부터 영원히 현실은 언제나 그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마침내 자유를 쟁취했으나,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을 그는 끝내 되찾지 못했다. 프랭크 플린에게 자유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p.448 그린은 자신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 이제 그는 자유를 헤쳐 나가야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갇혀 있던 사람이 갑자기 무한히 넓은 곳에 떨어졌다. 콜디츠에서 그는 다른 포로들의 이름, 그들의 목소리와 사연, 두려움, 치아, 입냄새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깨어나고 있는 이 도시의 바쁜 시민들은 그를 몰랐다. 알 수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그리고 자유로웠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의 사악한 말 - “나는 인간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다”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50개의 문장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독과 오용의 대명사이자 어쩌면 그 이름보다 저서들이 유명할 철학자. 그 어떤 맹수보다 사납고 살육자보다도 냉정한 문장들. 시대를 넘어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만큼 공격당하는 폭풍과 분란의 아이콘. 신의 죽음을 선언한 자.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철학은 여전히 어설픈 이해와 양순한 눈매로 무장한 추종자들에 돌을 던지고 있다.

언젠가의 '그'의 말처럼, 니체의 문장은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사유로 가득하다. 무수한 규율과 '상식'으로 덧대고 둥글려진 인간 내면의 본성, 욕망과 의지를 거침없이 충동질한다. 무해하고 안락한 평화에 안주하고픈 연약한 마음을 무자비하게 겨냥해 파헤친다. 인간은 무해하기 떄문에 선한 것이 아니다. 무너뜨리고 파괴하라. 의심하고 창조하라. 이빨 가진 동물, 인간이여. 지성과 이성의 힘은 그에 있으니.

p.9 니체의 말은 사악하다. 삶을 체험하도록 만들려고 오랜 기간 우리 삶의 토대가 됐던 모든 믿음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말라는 니체처럼 사악한 사상가도 없을 것이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니체를 읽지 않으려고 우리는 니체를 읽는다.

p.75 상처를 받지도 주지도 않는 무해한 사람은 겉으로 도덕적인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만약 그들이 내면의 폭력성과 싸워본 적이 없다면, 그들의 선함은 얼마나 깊은가? 무해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도 남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낫다. 무해함만 존재하는 세계에선 이해와 공감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숱한 오해와는 반대로 니체의 철학은 극한의 이기주의나 도덕적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들의 사회'가 감춘 도덕의 새로운 차원을 발굴해내는 역할을 한다. 그의 깨부수는 우상은 돌연 나타난 것이 아닌 관습과 구태가 끊임없이 반복해온 변주임에 틀림없다.

우리 본성의 이빨을, 충동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긍정할 것. 안주하고 굴복하지 말 것. 자기 자신으로 살 것. 먼지 쌓인 우아함의 굴레에서 벗어나 상승하고 솟아오르려는 의지로 충만해질 것. 유쾌와 명랑을 잃지 말 것. 저자와 함께 읽는 50개의 '사악한 문장'을 거쳐온 독자는 그 끝에서 다시 묻게 될 것이다. 인간이여, 인간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

p.133 경멸은 정체를 막고 변화를 일으키며 권력의지를 북돋운다. 경멸이 없다면 개인과 사회는 안주에 빠져 평범함에 만족하는 마지막 인간의 사회가 된다. 경멸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경멸의 능력을 제거하는 사회는 침체하고 쇠퇴해, 탁월함보다 평범함을 추구한다. 자신의 가장 높은 희망의 씨앗을 심으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자신에게서 가장 경멸하는 것은 무엇인가?

p.231 우리는 모든 게 결정된 이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 설령 우리가 모든 게 결정된 운명에 따라 사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자유의지는 이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위해 싸우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자유의지로 경험한다. (...) 니체의 운명은 전통에 대한 저항과 대립이다.


*도서제공: 휴머니스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바운드 하트
클라이브 바커 지음, 강동혁 옮김 / 고블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자체로 증명해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한가? 역사는 승자의 말로 쓰여진다. 역시 그러한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록되는 역사, 역사로 기록된 내용은 공평하지 않다. 보이고 싶은 것과 사소한 것을 결정짓는 자는 힘 있는 자다. 목소리를 가지는 자다. 말의 지위를 부여받은 자다.

그러므로 교과서의 설명과 교양있는 말투로 전해지는 거장과 대작을 둘러싼 휘광과 명성은 모범과 체면, 흥미로운 소문과 뒤엉켜 그 뿌리를 알아채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들은 작품의 명성만큼이나 위대하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다. 만일 그들에게 지금의 '정설'을 묻는다면 십중팔구 "내가 언제...?"가 돌아오고도 남을걸.

p.40 '타히티의 고갱'은 결국 고된 현실과 이상화된 환상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신화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가 남긴 찬란한 색채와 풍경 뒤에는 병든 몸과 외로운 정신, 그리고 식민적 시선으로 형성된 왜곡된 '낙원'의 초상이 자리하고 있다. 고갱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 작품 속 타히티는 예술적 열매이자 식민적 욕망이며, 예술가를 이해하는 그간의 방식이 남긴 문제적 유산이다.

p.77 20세기 초 프랑스 제3공화국은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존중하는 공화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며 국가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 〈만종〉은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프랑스 민중에게는 산업화로 사라져가는 전통적 삶의 표상으로, 종교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이미지로, 애국자들에게는 '잃어버렸다 되찾은 국보'로 받아들여졌다.


그런가하면 우아한 교양의 세계, 매끄러운 담론에 감춰진 세계 또한 엄연히 캔버스 너머에 살아 숨쉬고 있다. 예술가는 그저 보기 좋은 것을 그리고 만들어내지 않았다. 예술품에는 단순히 의뢰받은 목적이나 겉보기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자의식, 상처와 분노 뿐만 아니라 시대와 도전이 담겨있다.

그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 이 그림은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 그 이름은 그렇게 불리는 게 옳을까. 그림과 조각은 '그곳'에 멈춰있다. 그러나 그것을 창조한 이는 한때 살아있었으며, 그의 사유는 후대에 의해 재해석되고, 발굴된다. 예술가의 시간은 죽음과 함께 정지했지만 작품의 의미와 의의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셈이다.

p.136 그의 그림은 일상의 단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구성된 시각적 조작이다. 〈폴리 베르제르 바〉는 이 전환의 결정체다. 마네는 기억과 관찰을 바탕으로 화실에서 장면을 '재조립'함으로써 단순한 현실 묘사를 넘어 근대성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번역해낸다.

p.154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을 원한의 투사로만 보지 않는다. (...) 이 작품은 카라바조로 대표되는 강렬한 명암 대비(키아로스쿠로)의 전통 안에서 여성이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는 보기 드문 바로크 회화다. 단호한 표정의 유디트, 협업하는 하녀, 제압당한 남성이라는 구성은 단순한 복수의 장면이 아니라 권력의 전복과 연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제목의 '두번째 미술사'는 기존의 상식과 '정답'을 뒤집어 '정답 아닌 것'을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즉, "예술사 안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기록되고, 누구의 존재가 지워졌는가'를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94)". 이는 비단 작품의 역사를 '발굴'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작품이 놓인 공간, 즉 전시관의 권력에 대한 재해석에까지 나아간다.

흰 벽은 정말 모든 맥락에서 벗어난 순수한 공간일까? 그렇게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은 누구의 이름으로 그려지는가? 미술관은 어떤 시선으로 구성되는가? 시공은 넘는 작품으로 말미암아 예술가는 감상하는 이와 소통한다. 예술은 결코 닫힌 벽과 박제된 순간이 아니다. 과연 이 책을 만날 독자가 여전히, 처음처럼 살아 숨쉬는 예술의 두 번쨰 막을 걷어젖힐 준비가 되어 있을지.

p.220 오늘날의 미술사는 인종적 맥락뿐 아니라 성별, 사회적 지위, 화가와 모델의 관계 등 다각도로 해석을 확장한다. (...)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이 초상화를 감상할 때 모델의 피부색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 그리고 예술가의 시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의 첫걸음이 바로 작품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다.

p.255 화이트 큐브는 단순히 미술을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라 미술의 의미를 규정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중립성'이라는 명목 아래 화이트 큐브는 특정한 형식의 미술만을 이상적으로 만든다. (...) 어떤 공간이 무엇을 이상적인 예술로 간주하느냐는 기준은 결국 그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