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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동남아 - 24가지 요리로 배우는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현시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평점 :
"You are what you eat". 꽤나 오만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말해준다니. 당장 어제 저녁 메뉴를 묻는대도 뭐였더라, 가물가물한 현대인에게는 퍽 난감하고 와닿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널리 퍼진 말들이 으레 그러하듯, 부정하기 어렵다. 음식은 그것을 먹는 사람을 말해준다. 그저 이름이 아닌, 그 음식의 맥락으로.
우리 사회에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이름보다 배달 메뉴로까지 정착한 동남아시아의 각종 음식에 익숙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말은, 우리가 그들의 역사와 맥락보다는 그저 어림짐작과 메뉴 이름으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p.8 한자 문명권으로 묶인 한국, 중국, 일본 등과 달리 동남아시아는 역사도, 민족도, 언어도, 문화도, 풍습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15세기 말부터 이 지역에 몰려든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향신료를 비롯한 희귀 작물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 20세기가 되기도 전에 현 태국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이 서유럽과 미국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식민지에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다.
p.148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음식 중 고립된 역사를 가진 것은 드물다. 나씨고렝만 해도 지역•국가 간 경계가 생기기 이전부터 육로로, 해상으로 자유롭게 전 세계를 누볐던 상인, 순례자, 탐험가, 그리고 여행객의 교류로 태어났다. 고향과 방문지에서 재료를 가져오고, 새로운 요리법을 배워오면서 풍부해진, 셀 수 없이 많은 교류와 경험의 산물이다.
그러나 실제 동남아시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바다와 산, 섬과 육지로 이루어진, 지형만큼이나 복잡한 국경과 역사를 지금도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탓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보듯, 그들의 역사는 한마디 혹은 하나의 이미지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나긴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동아시아 전쟁기엔 식민경제와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쥐어짜였고, 전후에도 내전과 경제위기로 수탈과 분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라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국토와 누가 다수 민족인지 소수 민족인지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인구 구성, 이를 반영하는 너무나도 다양한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차이"로 조용할 날 없는 땅에 살아가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p.48 '다양성 속의 통일성' 이라는 문구는 (...) 다양한 민족과 문화, 종교, 사회, 경제, 정치 구성이 장애물이 아닌 인도네시아라는 통일 국가의 발전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요소가 되기를 염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 인도네시아라는 하나의 민족 국가가 탄생하고 자리를 잡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가도가도'에 담긴 정신이 절실한 시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p.61 최근 들어 이싼 음식은 백화점 식당에서도 팔리고, '땀 타이' 처럼 그 맛과 풍미를 고급스럽게 바꾸어 내놓기에 완전히 서민 음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 하지만 내가 쁠라 라가 들어간 라오스식 쏨땀과 숩 너마이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방콕 친구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그들의 표정에서 이싼이 겪은 수백 년 핍박과 처절한 가난의 역사가 읽힌다. 이싼 음식의 모양과 맛은 바뀌고 있지만 그 역사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답은 식문화에 있다.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도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음식점이나 식료품점으로 이주노동자 분포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때마다 이를 깨닫는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익숙한 음식 하나가 무엇보다 큰 위로를 준다. 언어도 옷차림도 잊을만큼의 시간이 흘러도 식문화만큼은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그런 사람의 본성이 식문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음식의 계보를 들여다보는 것이 곧 그들의, 먹는 사람들의 역사와도 같다. 흩어지고, 살아남고, 어떻게든 모여 음식을 나누는 사람들의 역사 말이다.
p.171 치킨 라이스 한 접시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말과 음식 등 모든 게 낯설었던 하이난 출신 이주 노동자들의 애환이 배어 있다. 그들은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식비를 아끼려고 한 번 만들어서 여러 차례 배불리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하이난식 치킨 라이스에는 서러움과 어려움 속에서도 고향의 맛을 잊지 않으려 애썼던 이들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p.177 프랑스 식민 통치로 베트남 경제는 피폐해지고 메콩강 삼각주처럼 비옥한 땅에서 난 쌀은 해외로 팔려 나갔다. 특히 흉년이 오거나 가뭄, 홍수 등으로 농사로 망치면 안 그래도 가난한 농민들은 먹을 게 없었다. 그들이 부서진 쌀을 먹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식민 통치자들의 수탈과 계속된 기근이 가져온 굶주림이었다. 풍년일 때는 논밭에서 고생하는 소에게 먹이로 주던 쌀을 농민들이 쪄서 먹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에게 동남아시아는 여전히 잘 모르는, 어렴풋한 한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 우리는, 먹는 사람으로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음식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시간을 감각할 수 있다. 알면, 보인다. 가까이, 자세히 보면 다르게 보이고,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삶이 음식을 만든다. 사람이 있어야 음식 문화도 존재하고 서로의 음식을 나눌 기회가 생긴다". 이 책을 읽고 난 독자가, 입맛을 다시며 우리 주변의 동남아시아에 흥미가 아닌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더 가깝고, 알고 싶고, 친숙하게 느끼는 세계"로.
p.150 볶음밥 한 접시에는 다양한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이 녹아 있다. 시시때때로 맛과 형태를 달리했다는 뜻이다. 지금도 어떤 재료를 넣는지, 어떠한 방법으로 볶아내는지에 따라 그 종류와 이름이 달라진다. (...) 무엇이 '진짜 나씨고렝'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 자체에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p.226 한 나라, 혹은 한 공동체의 음식은 그들이 속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음식 문화는 해당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상징이다. 그렇기에 음식과 사람, 그들이 속한 환경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음식의 기원과 종주국을 가려내는 일보다 중요하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