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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이 간단한 사실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던 때가 있었다. 어째서 이 답할 길 없는 물음을, 나를, 남겨진 나라는 그 커다란 물음을 나와 함께 내동댕이치고 떠나버렸는지. 어떤 죽음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죽이기를 택하는 것은, 내 안의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내 묻고 싶었다. 내가 정말 쪽팔려서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대체 왜 그랬냐고. 왜 나를 두고 가버렸냐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살아있는 채로, 초라하게, 남겨두고, 그렇게, 왜, 누구 마음대로, 뺏어갔느냐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다음에는 물어봐야지. 언젠가 마주치거든 꼭 따져야지. 그렇게 다짐만 몇 번을 하고 한번도 이루어지지 못한.
부재는 말이 없다. 부재는 있-었-던 자리로 말을 한다. 흔적으로 말한다. 푹 패여 눌린 자국, 켜켜이 쌓인 먼지와 시간의 냄새로 말한다. 떠난 자는 말이 없고, 남겨진 자에겐 말할 이 없이 들어야 할 책임만이 남겨져있다.
p.28 나는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이것이 지난 10년 동안 나를 살아 있게 한 질문이었다. 지금껏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가 아닌, 아직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죽는가? 살 이유가 없을 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살아 있다면 살아지지만, 살아갈 동력이 없어진 사람은 살 수 없다. 그자리에 붙박여버린다. 어쩌면 살아 남겨진 사람은 멈춰선 사람을 두고 나아가기를, 내일로 떠밀려버리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다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따라서 모든 말은 산 사람, 살아 남겨진 사람이 짜맞추고 기워낸 결과다. 이렇게, 아니, 이렇게였지, 하고.
그들의 흠결은, 용서받을 수 없는 어떤 일들은, 살아있었다면 따져 묻거나 하다못해 멱살이라도 틀어잡았을 모든 순간들은 죽음과 함께 침묵이 된다. 저 깊이 잠겨버려 흔적도 자취도 남기지 않는 영영 닫힌 문, 덮어씌워지는 수면. 어떤 죽음은 이해마저도, 하지 않은 말조차도 살아 남겨진 이에 떠넘겨버린다.
그렇게 삶에로 떠-밀린 이들에게 사는 일은 마른 익사와도 같다. 살 이유를 알아내든 찾아내든 쥐어짜내든, 뭐든 손에 쥐이지 않는 멀끔한 꼴로 고요히 죽어가는 것이다. 살만해서, 괜찮아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건 그대로 두고, 웃기면 웃고, 좋으면 좋다 하고, 간간이 마음 저 아래서 출렁이는 소리가 나면, 그래,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게 아니라 꾹 참고 하나, 둘, 세어야 한다는 뜻이다.
p.309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도와달라고 손 내밀어야 했던 두 사람이 결국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서로의 손을 잡은 거지. 길이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아무것도, 너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허부적대며 천천히 잠겨 죽어가다 이제는 티도 안 나게 출렁, 하면 하나, 다시 하나, 둘은 영영 오지 않을 테니까, 또다시 하나… 좀처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초침처럼 주저앉는 법, 마른 땅에서 조용히 우는 법을 알아야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이 불가해한 가해를 억지로 용서의 틀에 욱여넣지 않는다. 그저, 살아-있음에 집중할 뿐. 살아 남겨진 이의 생에 여전히 긴 시간이 남아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함을, 그럴 수 있음을 말할 뿐. 그런 이유로 오랜만에 손을 잡아주고 싶은 이야기를 만났다. 그냥 말없이 꾹 잡았다 놓고 싶은 그런 마음. 이 이야기가 말하는 용서는 거창하지 않다.
남겨졌음의 수치, 상처가 단단히 달라붙어 엉긴 존재라는 모욕 대신 사랑했던 기억을 부정하지 않는 것, 오직 그뿐이다. 모든 미련을 꽁꽁 끌어안고 잠겨 죽어버리는 대신, 저 아래 둘 것은 두고, 살아있으므로 들이마실 숨을 향해 떠오르는 일. 막다른 길에 선 이에게 손을 내미는 일. 다시, 뒤늦은 회복은 결국 산 사람을 위한 일이다. 살아가야 할 시간을 막다른 길로 여기게 하지 않는 일.
p.209 눈가가 뜨거워졌다가... 엄마 귀에 대고 미안하다고 속삭였다가···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모든 비극-아님은 뻔하고 진부하다. 클라이맥스에서 장렬히 산화하지 않으니. 그러나 살아있다는 건, 살아 남겨져 기억을 되씹으며 그런 순간도 있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은 그렇게 밍밍하고 시시하다. 그래야 산다. 살아내는 일은 그 지난함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에이, 살아버렸네, 들의 손을 들어주려 한다.
그래, 살아라. 살아서… 계속 살아. 숨도 쉬고, 밥도 먹고, 어떤 날엔 숨막히게 그리워하고, 말을 하고, 웃고… 때때로 이 짓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날엔 새처럼 대가리를 처박았다가, 폐를 쥐어짜내어 숨을 토해내고 다시, 들이마시고. 그렇게 살라고, 열없이 어깨나 툭 쳐주고 싶다. 혹시 아나. 그러다 어떤 날엔 뒤늦은 알라뷰! 라도 터져나올지. 그렇게 살아지는 삶도 있는 법이다. 남겨진 마음에도.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있는 힘껏 들이키는 숨에, 기다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여기 있었다고, 잊혀지고 지워져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그런 시간이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다시, 여기 있겠노라고. 살기 위해 아래로, 더 깊이, 침잠하다 마침내 숨과 함께 떠오르는 그런 삶이. 닫힌 수면을 헤치고 나오면, 젖은 얼굴로 마주할 삶이. 세계를 관통해 단단히 맞잡아오는 손.
p.335 "떠나고 나면 내가 사랑을 줬던 순간은 다 잊고 잠시 지쳐서 했던 생각, 그 생각 하나에만 매몰되더라고요. 죄책감. 후회.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보고 싶고, 밉고. 겪어보니까 이 감정들이 모순이 아니더라고. (...) 그 일로 나까지 죽이지는 말자고 새기고 또 새기면서. 그래서 다 정리하고 여기로 온 거예요. 살려고, 살아보려고."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