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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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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읽는 사람'으로 살아오며 수없이 맞닥뜨린(이라기보단 시도때도 없이 처해졌던) 물음 중 독보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왜 읽는가', 그리고, '읽기는 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 일 것이다. 한때는 이 물음에, 완전한 이해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바닥까지 파헤쳐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삼켜버리고 싶었으므로 읽었다. 완전해지고 싶어서, 공백과 균열을 메워 완벽에 닿기 위해.
읽을수록, 채울수록 더 많은 '모름'을 보았다. 그럼에도 탐욕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은 읽기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문득, 멈춰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이 아니었을까. 위험만큼 존재를 선명하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21)."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세계를 안전하고 공고히 하는 읽기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높고 깊은 벽을 부숴 그 너머의 타자를, 절대적인 낯섦을, 존재한 적 없는 선-존재를 보게 하는 읽기야말로 나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고.
p.7 〈프롤로그: H로 시작하기〉 책 속에 있는 그들과 책 너머에 잇는 이들과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우리'라는 주어를 망설임 없이 쓴다. 우리는 진실을 향해 한 칸씩 내려가는 사람들. 끝없이 내려가 저 밑바닥에 닿아 마침내 진실을 둘러싼 막을 마주한 사람들. 자기 안에 가장 날카롭고 매서운 무언가로 그 막을 부수려는 사람들. 우리들, 나는 내가 통과한 책들을 통해서만 나의 '우리'를 만난다. 책 속에 그리고 책 너머의 당신들을.
p.89 〈다니엘 페나크〉 인간은 무엇보다 몸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도 없다. (...) 어쩌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몸의 언어를 해독하는 일이 아닐까.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말했다. 인간은 세계를 생각으로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사는 존재라고.
어느 정도는, 위험해지려고, 더 모르고, 낯설어지고, 실패하려고 읽는다고. 이상적인 전능은 곧 무능이다. 조금의 모자람도 돌이킬 수 없는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완전-세계는 곧 아무것도 태어날 수 없고, 변할 수 없으며, 어디로도 확장되고 이동하고 파고들 수 없는 고립이다. 나를 균열낸다. 쓰기는 나를 배신한다. 말과 글은 필연히 미끄러지고 '본질'에 명중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빗나감이고, 철회-됨이자, 뒤처짐일 것이다. '나의 언어'로부터 완전히 내쳐진 적은 없다 하더라도.
이 빈 틈, 한계, 균열, 빗나갈 겨냥과 주소 잃은 서신이다. 쓸모랄지, 가치랄지, 문학에 일말의 증명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이 불완전함이다. 그것은 필연히 인간성의 문제로 직결된다. 한강은 물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야기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사람이 이야기가 된 장소, 사람,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있고 배가 고파오는, 허기를 느끼고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그렇게 먹는다는 것엔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고(85).
p.67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를 둘러싸던 맥락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모든 근거가 사라진 후에도 '나'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망명자는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한다. 말은 언제나 늦고, 감정은 반토막이 난 채 전달되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면, 말로 하지 못해 사라져버린 일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p.117 〈밀란 쿤데라〉 "매일 개연성 없는 소설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 소설이 과연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 소설은 그저 모든 판단과 결론을 미뤄둘 수 있는 유예의 장소를 허락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존재에 대한 실험을 감행해도 누구도 다치지 않고, 진실이나 진리의 엄격한 잣대에 주눅 들지 않고 삶의 하찮음을 말할 수 있다. 의미 없는 것들의 의미를 말하는 일. 소설가는 내게 소설의 쓸모는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세상은 다정스레 말한다.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하라'고(97). 그렇다. 읽기는, 쓰기는 언제나 현실에 조금 뒤처지고 벗어나, 적어도 그 당시에 살아 있는 몸과 정신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너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말과 글로 남겨 전할 수 있다면, 적어도 '목격한 일'에 파괴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몸이고, 정신이고, 이유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갖지 못한 존엄과 특권이 아니라 오로지 책무와 우연, 생존 그 자체와 증언일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말로, 기억으로, 몸짓과 문장으로 전해지는, 깨지기 쉬운 무언가처럼. 무엇이지 않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기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114)".
p.100 〈가엘 파유〉 "소설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가엘 파유의 말이다. 소설이 사라진 장소, 사라진 사람, 사라진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을까.
p.151 〈카멜 다우드〉 어떤 죽음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이야기는 고통을 대신 설명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문학의 몫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은 질문할 뿐이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과 폭력, 이해되지 않는 죽음이 너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신과 예술, 그 무엇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오롯이 인간이 해결할 몫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어쩌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살아가기 위해 다시-쓰고 토해내어야만 하는 글이,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이, 쓰기가, 읽기가 고발과 목격의 반복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을 도구에 한정짓는 것만큼 문학-하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오독-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읽기와 쓰기 모두 지금 여기의 나에서 조금 떨어진 혹은 떨어져 보려는 태도다. 듣기와 다르지 않다.
한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방식이 곧 문학이라면, 읽기와 쓰기는 그를 바라보려는 시도이자 방식이 아니겠는가.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의 혼란한 뒤섞임은 결국 이 말을 하기위함이었다. 읽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고, 그것이 곧 삶이자 이유라고. 해석될 수 없는 고통과흔적을 켜켜이 쌓아 파괴하고 또 공존하기 위함이라고. 이제는 물을 수 있다. 무엇이 당신을 균열-하겠습니까. 당신의 언어를 나의 세계에 뻗어주겠습니까.
p.166 〈조르주 페렉〉 '산다는 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삶은 임시적 정착과 이동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동하는 모든 걸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누군가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저장된 공간은 존재의 시간이 쌓이는 장소가 된다. 시간이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문학은 한 인간이 세상 속에 머무는 방식, 즉 거주의 예술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