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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평점 :
있잖아. 그런 적 없어? 어쩌면 그냥, 가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 말이야.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만들어진 나 말고, 진짜 나 말이야. 누구의 눈에도 비치지 않은, 딸도 아니고 아내도 여자친구도 아닌, 그저 나일 뿐인 나는 대체 누구일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이런 물음은 어떤 탈력감이나 희한한 공상에 그치지 않고 영혼을 좀먹는다. 시시때때로 거울을 들여다보게 한다. 마주 되쏘는 눈, 그 너머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게 한다. 소름끼치게 한다. 아무것도 없을까봐, 내 삶에 영영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까봐.
p.40 타인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미티는 자신의 삶이 어딘가 잘못됐음을, 어수선하고 긴장감이 넘치며 이상한 시간에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본질적인 편안함과 느긋함을 애써 따라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그녀에겐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삶에서 잘못됐다고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집어내려는 노력도 헛수고일 터였다. 미티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p.74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본다. 이상한 곳이 한 군데도 없으니 만족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만족감이 아니라 허무감이 든다. (…) 그녀의 몸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고 해가 지나도 늘 똑같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만 같다. 그녀는 몸에서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땐 몸이 진짜 자기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낡은 도시가 으레 그러하듯 잠시 머무르는 사람들의 별장이 된 곳, 산타크루즈에떠밀리고 도망쳐온 여자, 미티. 그 이웃에 새로운 이들이, 아니, 한 여자가 나타났다. 순진과 공허 어딘가에 부유하는 듯한, 몹시도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레나. 그는 생각한다. 우정과 가족애를 한 데 섞어놓은 듯한 미티와 베델의 관계, 그들의 풍경에 녹아들 수 있다면.
설명은 불친절하고, 숨통을 죄이는 손은 몹시도 은밀하다. 얻을 것 없고 의무 아닌 일에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내어주는지, 모르는 사람은 알 길이 없다. 굳이 감추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그래, 수많은 여성들에게는 구태여 덧붙일 필요도 없이 알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입으로, 혀로, 살갗과 눈빛으로 전해지는 숨결같은 일이기 때문에.
p.110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점을 그가 왜 누리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건 선물과도 같은 건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지 않은가. 분명히 그도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기 말을 들을 수 없다고 그가 믿는다면, 그 비밀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고, 그래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p.257 여자들은 성장하면서 성질을 다스리는 법과 모성애나 아름다움 같은 더 큰 목표를 위해 슬픔을 억누르는 법을 배운다. 그 슬픔이 다른 방법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은, 동굴 벽화처럼 넓적다리 안쪽에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 상처는 그녀를 발견하는 사람을 위해 남겨진 단서다. 그렇게 비통해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들은 말할 것이다. 터놓고 말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도무지 엮일 일 없는 그들의 이질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은' 관계를 바라보며, 살그머니 내뻗는 덩굴손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고도 은밀하게, 상처입을 것을 예견하듯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온 힘을 다해 건드리고, 감각하며 빛을 향해 나아가는 모양과 닮아있다고. 추천사는 묻는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고. "기억? 용서? 사랑? 아니면,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의지일까."
모두 옳다. 동시에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온전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하는 사람의 존재이다. 상처입고 혼란에 빠진 이를 위해 손을 뻗는, 뒤돌아선 이가 저 멀리 작아질 때까지 믿고 지켜보는 사람의 존재다. 어깨를 내리누르고 팔목을 잡아채는 손이 아니라. 완벽한 여자를 전시하는 이가 아니라.
p.278 "왜 항상 나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죠? (...) 당신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면서." 미티는 레나의 머릿속을 흘러 다니던 단편적인 생각들이 이제 하나로 합쳐져 확신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말문이 막힌다. "레나, 당신이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난 그냥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p.319 "내 걱정은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 나만의 생각을 가진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녀가 말한다. "내가 한 생각들은 사실 그의 생각이거나." 그녀는 방을, 서배스천의 두뇌라는 보이지 않는 은하계를 손짓으로 가리킨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에요."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괜찮을 수 있다고, 어떤 일이 영원한 절망이 아님을 말하고 또 말하는 이가 사람을 사람으로 남게 한다. 의심없이 눈을 맞추고 숨을 나누는 이가 우리를 사람으로 만든다. 서로의 눈동자에 담긴 모습이 사람의 그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미티에게, 베델과 레나에게 그들 서로가 그러했듯이.
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교유에 맞닥뜨린 이들 모두가 서로의 손을 단단히 잡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내 가야 할 곳으로, 그 자신도 모르는 길로 향하는 등을 살며시 밀어주기를 바란다. 어리고 약한 우리가 상처투성이의 낯선 세계로 내딛는 발걸음까지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계속 걸어갈테니.
p.299 레나는 자신이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모든 일을 생각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서배스천이 그녀를 대신해 처리한 모든 것은 그녀가 침묵하는 동안에 결정되었다.
p.327 "서배스천이 당신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떡할 거예요?" "그럼 계속 걸어야죠." 레나의 얼굴은 평온하다. 미티에게는 생소한 모습이다. 차분한 모습은 늘 보았지만, 자유를 꿈꾸며 긴장을 푼 모습을 보니 이제까지 그녀가 얼마나 팽팽하게 감겨 있었는지, 숨 막히는 공손함에 얼마나 단단히 얽매여 있었는지 깨닫는다.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