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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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은행잎4기 #은행잎서재 #에두아르르베 #자화상


자서전이 아닌 자화상인 이유를 알겠다. 극도로 촘촘하게 쌓아올리는, 덧대고 선을 긋고 겹치고 덮어씌우는, 집요하고 치밀한, 어느 순간 탁 풀리는 공백이 정교한 형상으로 나타났다 사라져버린다. 몇 문장을 따라해보다 포기했다.

샅샅이 훑어내는 추격? 아니, 묘사, 그래, 묘사. 그것에 기묘한 쾌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낀다. 선 하나, 점 하나, 장면 하나가 모여 쉴새없는 반추와 회상을 소묘한다. 영사기 도는 소리가 착착착,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p.8 내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p.94 나는 가끔 특별한 이유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적인다. 나는 영화를 볼 의도 없이 지면에 실린 영화 시놉시스를 읽는다. 나는 편성표를 읽지 않고, 채널을 돌려 무작위로 TV를 본다.


읽는 내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오래, 적어도 이 생각을 완전히 회상불가능한 정도로 잊기 전에 누구도 내게 말해줄 수 없게 될 과거의 일화를 말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을 꺼내보이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일화에 온갖 장식을 덕지덕지 붙여 번쩍 들어올리고 싶었다. 언젠가 베푼 보잘것없는 친절을 죽기 직전까지 떠벌리고 싶었다. 보물처럼 모아둔 칭찬을 싹싹 닦아 늘어놓고 싶었다.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p.7 10대 때, 나는 《인생 사용법》이 사는 법을, 《자살 사용법》이 죽는 법을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했다.

p.50 소름이 돋을 때면 수 세대 전 내가 짐승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나는 시력을 잃지 않을 것이고, 청력을 잃지 않을 것이며, 팬티에 오줌을 싸지 않을 것이고, 내가 누군지 잊지 않을 것이며, 그 전에 죽을 것이다.


다시 없을 행복한 순간을 말하며 웃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아직 잃지 않은 기회에의 그리움에 엉엉 울고 싶어졌다.

이 모든 것을 빼곡히 적은 노트를 탁, 소리나게 덮어버리고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숨기고 싶었다. 얼마 안 가 꺼내보고 뒤져보다 언젠가 여는 방법을 잊어 골머리를 싸맬만한 방법으로. 언젠가 정말, 꼭 필요한 때에 딱 한 번만 꺼내보겠다는 마음으로.

p.69 나는 내 내부 장기를 전혀 본 적이 없다. 단지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몸의 어떤 부분들을 보았지만, 어떤 부분들은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도 결코 본 적이 없고 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p.143 내가 언제 죽든 열다섯 살은 내 인생의 중간이다. 나는 삶 후의 삶은 있지만 죽음 후의 죽음은 없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내가 거짓 없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번뿐이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생을 덧그리고 덧덧칠하고 덧덧덧그으면, 그 끝은 무엇이 될까. 쉴새없이 생동하는 동시에 모든 순간을 한데 모은 기묘한 상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 생의 종장을 끌어다 꽝, 찍어버린 이가 집요하고 난잡하게, 파괴적이고 사랑스럽게 그러모은 삶을 보며.

예감한다. 언젠가 삶에서 나를, 나에게서 세계를 소거하려는 결단 앞에서 이 책을 반드시 떠올리고야 말리라는.

p.142 내가 나눈 가장 아름다운 대화는 청소년기에 친구의 집에서 나눈 것이었다. 우리는 친구 어머니의 술을 무작위로 섞어 만든 칵테일을 마시며 말라르메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그 큰 집의 거실에서 해가 뜰 때까지 얘기하곤 했는데, 밤새 나는 사랑과 정치와 신과 죽음에 관한 담론을 풀어냈고, 때로는 바닥을 굴러다니며 생각해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중 단 한마디도 철회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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