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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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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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이야기해왔다. 읽는 일은 곧 듣는 일과도 같다고. 잘 읽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하고, 잘 듣기 위해서는 나의 '자리'를 내어줄 필요가 있다고. 듣기는 말하기와 말하는 사람, 이 둘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한다.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 덜렁 놓인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고 물을 때조차 그는 듣는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고. 듣기와 말하기는 이토록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 너무도 혼자인 고독, 스스로를 쪼개 바라볼 수조차 없는 외로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스스로의 존재를 전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p.7 내가 뭔갈 듣기로 결정했다면 그건 내가 그걸 듣고, 느끼고, 변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된다. 우리는 결국 들은 것이 된다. 단지 내가 들은 내용뿐 아니라 듣는 태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듣기는 그렇게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p.87 "말하기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주체적인 외향적 행위인 반면, 듣기는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내향적 응대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듣기는 단순히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응대가 아니다. 듣기는 오히려 적극적인 상대에서만 가능하다. 귀는 입과 달리 늘 열려 있는 기관이지만 누군가의 말을 새겨 듣는다는 건 선택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최소한 스스로에게 타자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혹은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세계와 전능자는 듣기와 말하기 모두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들을 수 없고, 아무도 듣지 못하니 말하기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적막한 절멸이란 말인가.

여기서 물을 수 있다. 듣기에는 무엇이 요구되는가. 이는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듣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단단히 틀어쥐고 올라앉은 나의 자리를 말하는 이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말하는 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의 초대에 응해야 한다. 그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p.48 인터뷰를 하다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각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말하는 이의 말을 아주 정확히 듣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퍼즐 조각의 모서리가 빈 공간에 딱 들어맞은 것 같은 정확감, 내가 어찌저찌 흘러온 삶이 말하는 이의 삶과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고, 말하는 이의 감정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p.115 듣는 행위에는 이렇듯 비생산적인 구석이 있다.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잘 들으려 애쓰는 일은 생산적일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 듣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생산해낼 수 없고, 자랑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듣기에 성공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형태일 것이다. 매순간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듣는 일이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


동시에 '듣는 나'를 그 세계에서 소거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는 이를 이 장에 홀로 남겨두지 않아야만 그의 말을 허공에 던져버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듣고 말하기란, 누군가의, 나의 말을 잘 듣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각기 소리높여 '나'의 자리를 다투니 기다리고 바라볼 여유가 없다. 크고, 많고, 사나운 목소리에 작고, 약하고, 느린 말이 설 자리가 없다. 하물며 듣기의 자리란 얼마나 좁고, 얕고, 위태로울까.

저자가 인용한 판결문을 보며 김진영의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 힘껏 내뻗는 손이 있다면, 오직 단 한 사람이 또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홀로 남겨두지 않는 세상이, 귀 기울여 듣는 사람 하나만이라도 꼭 있으리란 믿음을 잃지 않는 세상이 그 한 사람을 그대로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p.105 내 안에서 이미 옳고 그름이 정리된 주제라면 어느 한쪽의 편에 서는 게 크게 주저되지 않는다. 가치중립이라는 명제 아래 어떤 목소리는 과대 대표되고 어떤 목소리는 과소 대표된다고 믿어서다. 과소 대표되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그들의 편에 선다. 어떤 목소리는 편파적일 때 더 정확하게 들린다.

p.116 나에게 잘 듣는 일이란 구체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쓸모를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증명할 수 없음으로 인해 무가치해지지는 않는 일. 그것은 잠시나마 '나'를 넓혀가는 일이다. 내가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일이다.


부디, 이 사납고 잔인한 세상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듣기 위해 눈을 마주치고, 이해하기 위해 어깨를 기울이고 가슴을 맞대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연약하고 짧은 삶, 한 명이 외로운 홀로가 아닐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뿐이리라.

p.198 듣는 사람이 없이는 말하는 사람이 없고, 말하는 사람이 없이는 듣는 사람이 없다. 이 문장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의 곁에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하는 사 람의 곁에는 듣는 사람이 있다. 두 역할은 어느 한쪽으로 고착될 새도 없이 수시로 바뀐다.

p.199 앞으로도 내내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설령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소망일지라도 계속 소망하고 싶다. 이렇게 겁도 없이 쓴 문장이 앞으로의 내 삶을 붙들어줄 족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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