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앙의 책
오다 마사쿠니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도서제공: 검은숲(시공사)

**눈을 감고 그려보라. 눈을, 감고, 그려보라. 매일이 무너지는 순간을. 다시, 눈을 감고, 그려보라. 톡,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코앞에 들이밀어지는 순간을. 어떤 두려움은 지극히 현실을 닮아 연신 눈을 깜빡이게 하지만, 어떤 공포는 현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자리를 꿰차는 꼴을 보고도 손 쓸 길이 없게 한다.**

**문득 들어선 길, 교교하니 다가오는 웃음 앞에 그저 아가리 앞의 짐승처럼 목을 늘어뜨릴 뿐이다. 압도적 공포, 뼈저린 무력감, 새하얗게 끓어오르는 쾌락, 전신의 감각을 터트릴듯 채워오르는 무엇이 두렵게 하는가? 이는 필연히 오래 전 잃어버린 것, 피식자의 감각을 일깨운다. 미쳐버린다. 잡아먹힌다. 집어삼켜진다. …아!**

p.23 〈식서〉 그렇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세상을 빙 에워싸고 붕괴를 막고 있는 것이다. 책을 먹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행위의 일환이 아닐까. 책장에서 한 권을 빼서 펼치고, 한 장을 찢어 뭉친 뒤 입에 넣는다. 그 순간에 세상의 붕괴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런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느낀다면, 제 일상의 붕괴라고 해도 좋다.

p.351 〈머리카락 재앙〉 미쳤다. 모든 것이 광기에 찬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이성마저 갈아버리는 거대한 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잡아먹을 거면 차라리 빨리 잡아먹어라. 울부짖다 지친 나는 그저 벌레처럼 쪼그라든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화, 재, 앙. 제목의 셋은 퍽 다른 꼴이되 그 뜻에서 이어지는 바가 있다. 화는 문책이자 타박이다. 재앙에는 타오르는 불과 벌 받는 자의 형상이 있다. 화와 재앙에는 주는 이와 받는 자가 있다. 행위의 결과다. 바깥과 안, 이곳과 저곳이 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화란 본질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다. 도래하는 것이며, 입혀지는 것이다. 쏟아부어진다. 집어삼킨다.**

**이 말은 곧, 치미는 '화'와 다르게, 재앙으로서의 '화'는 외부 세계, 타자의 질서를 전제함으로서 가능한 존재라는 뜻이다. 화는 스쳐 보낼 수 없다. 화가 겨냥하는 이는 그 자신의 질서에서 재앙의 힘으로 뽑히고 질서-세계의 어딘가에 처박힐 위험에 처한다. 재앙에는 의도가, 방향이, 질서가 있다. 도취되든, 순응하든, 부지불식간에 흡수당하든. 자연현상의 부작용을 재앙이 아닌 재-해, 해를 입었다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p.100 〈미미모구리〉 당신은 자신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갑갑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모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데, 100가지, 1000가지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70억의 인간이 아니라, 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눈 앞에 통째로 매달려 있는데, 감질나게 혀끝으로 핥아서 맛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부당하다고 울분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p.132 〈상색기〉 그런 멸망의 꿈과 '술렁거림', 이 양 바퀴가 사회에서 낙오하여 비탄의 나날을 보내는 그를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궁지로 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따라잡히기만을 기다리며 숨을 헐떡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일곱 이야기의 인물들은 제각기의 무력에 짓눌려있다. 권태, 부전, 흡수, 동화… 표현은 달리하나 기저에는 모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듯하다. 그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그저 저 멀리서,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야기의 일부로 밀려오는 것을 맞이할 뿐이다. 시작부터 문을 닫아걸어 등지는 탓이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먹이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간신히 미끄러져 나온 현실의 틈새 앞에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 공포는 언제고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세계를,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저항할 수 없다. 매혹당한다.**

**긴 악몽의 끝, 어디가 끝이고 현실인지도 모르는 채 눈을 뜬 바로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균열로 침범하는, 권태와 초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나른하게 되뇌어지는 순종하세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세요... 이 달콤하고 환상적인 속삭임은 과연 누구의 목소리겠느냐고. 자, 눈을 감고 그려봅시다. 좁은 길, 바로 그 문을 열고 깊이 아주 깊이 이끌리노라면…**

p.223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낳아줄게. 세상이 끝나면 새로운 세상과 함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낳아줄게. 남자 같은 건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낳을 수 있으니까… (…) 남자는 이미 모든 언어를 잊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쉼 없이 몸을 꿈틀거리며 부드러운 근원의 어둠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p.354 〈머리카락 재앙〉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뭔가 원하는 게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 마음이 찢겨 나갔다. 떠오른 게 맞나? 추락한 게 아니고? 모르겠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저 멀어져가는 의식에 몸을 내맡기고, 영혼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중얼거렸다. 인간이 이런 식으로 죽을 수도 있구나…

#화재앙의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