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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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글은 양심을 정면으로 찔러들어오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처음 읽었던 그의 책 제목은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였더란다. 그때는 어느정도 심상히 넘긴 감이 없지 않았다. 생각을 글로 써내는 일이 업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당시, 대선 후로 반년쯤 지난 때에, 나는 그간의 삶이 부끄러웠다. 아는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알지 못하고 흘려버린 것들, 눈 감고 귀 막아 등돌린 이들에 속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해가 네 번 바뀐 지금, 말할 때도 아니고 글로만 정의롭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텍스트 뒤로 숨어서만 입바른 소리를 떠들곤 이내 흘려버린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적기엔 해묵은 악수들이 극단적 형태로 얽혀버린 경우에 불과하다. 어떤 일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거나 잊혔으며, 심지어 더 나빠졌다. 어떤 일상은 여전히 회복되지도, 상상되지도 않는다. 앎과 삶 사이는 여전히 멀찍이 데면데면하다.

p.29 동정도 숭배도 불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감정이다. 그래서 자칫 모욕이 된다. 차별 없는 평등이 답이다. (...) 서로 다른 정체성들은 교차해야 하고, 쟁점들은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다중화되어야 한다. 서로 혐오해서는 존엄해질 수 없다.

p.209 사실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위태롭고 불안정한 생계에 묶여 싸우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싸울 이유가 가장 절실한 이들은 바로 그 이유 탓에 싸우지 못한다.


사회 곳곳의 걷잡을 수 없는 균열에 '새로운 정의'가 들어섰다. 굴러떨어지는 이들은 대강 공백인 셈 치고 어떻게든 패를 갈라 그 간극을 벌리려 애쓴다. 이건 정치도 뭣도 아니다. 패싸움이고 땅따먹기지. 사람이 살기 위해 모인 사회가 누군가를 사람 바깥으로 밀어내야만 동력을 얻는다.

소수의 권력을 탓하기엔 당장의 삶에 급급한 평범한 이들이 절대 다수다. 침묵과 외면은 적극적인 동조가 된다. '나도 힘들다'는 말의 모순에 눈 막고 귀 감아 자리를 뜬다. 수사와 편가르기를 떠나 '무결하고 죄 없는 시민'은 어디에도 없다. 등돌려진 책임만이 덩그러니 남아 던져질 돌이 된다. 죄인 찾아라. 일단 우리는 아니겠지만.

p.141 시험도 안 거친 비정규직이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받는 건 못 보겠다는 '민주 시민'도 드물지 않다. 연대를 외치던 입으로 차별을 옹호한다. 그렇게 함께 지옥을 만든다.

p.264 지금은 내란 막기에 힘을 모아야 하니 '탄핵 이후의 세상'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들 한다. (...) 내란을 막자면서 왜 부자가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지 모르겠다. 내란을 막자면서 왜 당신들이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윤석열은 나쁘지만, 세상의 고통이 모두 그의 탓은 아니다. 어떤 슬픔들은 당신들에게서 나온다.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우리의 응원을 받으며.


저자의 첫 책에 "부끄러웠던 자만이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는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사는 세상을,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자리와 관점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고 남겼었다. 지금의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다. 오래도록 그래왔듯이.

앞서 말했듯, 앎과 삶 사이는 허허벌판마냥 황량히 동떨어져있다. 그 사이에 놓인 건 '어쩌면'이나 '예외들'이 아닌 실재하는 이들이다. 우리들이다. 일상이어서는 안 될 평범들이다. 손을 뻗는다.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풀로 뒤덮인, '최초의 악수'를 위해. 하지 않음보다 늦는 것은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

p.68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한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333 약하고 사소한 존재들은 각자의 모양대로 세상에 '구멍'을 남긴다. 구멍은 그들의 죽음 후에도 뚫린 채 남아 세상에 균열을 내고 무언가를 남긴다. 그 구멍 속에 '작은 것들의 신'이 있다. 작가는 '세상의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고, 그 연관성이 어떻게 인간 삶을 형성하며 인간관계를 결정짓는지를 보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밝힌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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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왜곡의 역사 - 증보판
바트 어만 지음, 민경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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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다'는 책, 성경. 통독이야 교인도 쉽지 않다 쳐도 존재 자체나 그것이 신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만들어진' 이래, 때마다 철마다 진리처럼 불려나오는 이 오래된 텍스트는 과연 교리처럼 완벽불변하는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는 걸까?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익히 알려진 성서무오설이니 축자영감설이니, 거창한 수사를 빌지 않더라도 전능한 유일신의 '말씀'이 시대에 따라 다르고 사람에 따라 달리 말해진다고, 쉽사리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외로 눙치기엔 너무 많다.

p.91 어떤 필사자가 실수로든 의도적으로든 한번 본문을 바꾸면 그 이문은 사본 속에 영원히 남게 된다. 다른 필사자가 수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이문을 담고 있는 사본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본을 만드는 필사자는, 그 이문들도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라고 믿으며 그대로 베낀다. 그런데 그뿐일까? 이 필사자 역시 새로운 이문들을 만들기 마련이다. 또 이 사본을 베끼는 후대의 필사자는 앞선 두 필사자가 만들어낸 실수에 자신만의 실수를 더한다. 이문에 이문이 덧붙는 셈이다.

p.117 중세 필사자들은 그렇게 전문적인 방식으로 베껴 쓴 사본을 어디서 구했을까? 이들은 분명히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했으며, 그 사본들 역시 그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했다. 물론 그것은 또 그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상 원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이라고 한다면,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후기의 표준화된 전문 필사본이 아니라 초기의 조잡하고 다양한 형태의 사본들일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자란 저자가 실제로 마주한, 빈번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할만큼 무수한 자기모순과 충돌의 역사에 퍽 당황할만도 하다. 무류한 말씀입네 성령으로 받아적었네 해놓고선 이렇게까지 막 주먹구구로 뜯어고쳐도 되는 건가, 싶을 지경이었으니, 읽고 쓴다는 것, 이해한 내용을 전달하고 정리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변개'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종장에서 독자는 어떤 이해에 가닿게 된다. 필사에 '연루'된 이들 모두가 사람이라는 것. 믿음의 세계, 교단의 세력 확장에 결부되는 분열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가 필연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가장 탈속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영역이야말로 지극히 세속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p.148 어떤 경우에는 필사자들이 본문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독자의 오해를 막기 위해 본문을 변개하기도 했다. (...) 때때로 필사자들은 보다 신학적인 이유로 변개하기도 했다. '이단들'이 본문을 자의적으로 이용할 수 없게 하거나, 필사자가 이해한 의미를 더 분명하게 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p.230 2세기와 3세기만 해도 이렇듯 일치된 견해가 없었다. 합의된 정경과 교리가 없었으며, 매우 다양한 모습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예수의 사도들이 썼다고 주장되는 다양한 문서를 기반으로 다양한 분파가, 다양한 신학을 주장했다.


다시, 현재, 신이 죽고도 남은 이 시대에 왜 수천년 묵은 텍스트의 변천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가, 하면, 이 성스러운 '말씀'이 기천년을 이어져온 종교의 뿌리인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신의 실재와 전능에의 믿음과는 별개로, 그 이름을 빌어 말하고 행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작이야 산꼭대기든 동산이었든 간에,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져온 말. 필연히 오류와 의지의 산물일 믿음으로 이어지는 섭리에 대해 물을 책임은 인간에게 있었다. 언제나. 신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인간의 폭력이 또다시 세계를 좀먹는 지금, 묻고 싶다. 무엇을 믿겠습니까.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어떤 세계에서 대화할 책임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p.278 요약하자면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는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으며, 간혹 이런 논쟁은 신약성서의 전승 과정에서 본문에 유입되었다. 필사자들은 때때로 성서 본문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회 내 여성의 (제한된) 역할에 더 부합하도록 본문을 변개하곤 했다.

p.324 본문을 읽으려면 그것을 마음속에서 다른 말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표현하기 위한 다른 말을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하고 (...) 살아있다는 것은 곧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온갖 요소들 즉 욕구, 갈망, 필요, 바람, 신념, 관점, 세계관, 의견, 기호, 혐오 등으로 채워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본문을 변개하는 행위이다.


*도서제공: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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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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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께 처음 읽었던 이야기를 봄을 앞둔 추위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읽는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겨울의 끝자락, 이번만 지나면, 약속처럼 떨치는 위세에 묻는다. 삶의 의미가 뜯겨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떠나보낸 자리에, 찰나에 끝나버리지 않는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구하고 천진한 계절에서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한 풍경을 지나, 침묵 속에 다시 덮는 순간. 사람 키만큼 온다는 눈에 파묻히고 싶어졌다. 무작정 걷고 싶었다. 숲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옛날 일이 되고 싶었다. 문득 돌아본 길에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다가, 쓸려가다 만 흔적을 도로 밟아 새기고 싶었다.

p.14 어쩌면 자신, 바움가트너가 냄비에 손을 덴 바로 그 순간 플로렌스 씨도 손가락이 잘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온다. 불행의 원인은 각자 자기 자신이고, 한 사람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불행보다 훨씬 크다 해도, 그래도, 각각의 경우-

p.36 그날 오후 신들은 아직 젊은 자아가 왕성한 힘을 내뿜고 있던 아내를 그에게서 탈취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그의 팔다리가 몸에서 뜯겨 나갔다. 네 개 전부, 팔 둘과 다리 두 개가 모두 동시에. (...)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전의 기록을 읽어보았다. "삶은 통증이었다. 환상임에도 더욱 생생하고 고통스럽게 달라붙는 환지통과 같은 그리움. 이대로 안고 살겠거니, 얼마쯤 고여있는 마음을 출렁이며 꼭 하루씩을 느리게 이어가는 삶. 그에게 과거가, 아니, 여전히 현재인 기억이 숨막히게 피어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해진다".

그 아래 작게, 언제고 떼버릴 요량으로 얹어둔 메모에는 이렇게 썼더랜다. 어떤 상실은 도난-당함이다, 뜯겨나감이다. 그 바로 다음 줄에는, 환상통은 마취 없는 절단에 발병한다, 라고. 옳은지 아닌지는 몰라도. 으레 환지통으로 불리는 그것은 phantom이다. 유령처럼. 닿을 수도 헤집을 수도 없는 것.

p.77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들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버린다.

p.228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지 마라, 도로에 어수선하게 깔린 파인 곳이나 떨어진 물체를 피해 방향을 틀어라, 어떤 경우에도 다른 차와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충동적인 모험은 절대 하지 마라. 충돌은 사실 치명적일 수 있고, 일단 죽으면 영영 죽은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이 바움가트너, 이 외로운 남자의 날들을 고립과 고사 언저리에 매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이런 삶도 있다고, 볼 장 다 보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바닥났다 해도 다음 장이란 게 남아 있다고, '가만한' 위안을 남겨두고 싶어졌다. 지나간 자리에, 오래도록 머무른 흔적에.

그러니까, 여전히 두서없는 마음에 물음표가 되다 만 호선 비슷한 것을 슬쩍 두어도 좋겠다면, 묻고 싶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게 끝없는 해변을 걷는 일과 같다면,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간간이 밀려드는 그리움에 발을 적시면서도 나아갈 수 있는, 그냥 그렇게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p.245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은 이마의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채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도움을 찾아 길을 떠나고,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 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

p.254 (김연수 에세이) 인생의 후회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한밤에 잘못 걸려 온 전화를 받고는 자신이 그 사람이 맞다고 말한다면? 그때도 인생은 바뀔 테지만, 번개를 맞는 일과는 미묘하게 다를 것이다. 내가 겪지 않은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한 일에 의해서 인생은 바뀌는 것이니까.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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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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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께 처음 읽었던 이야기를 봄을 앞둔 추위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읽는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겨울의 끝자락, 이번만 지나면, 약속처럼 떨치는 위세에 묻는다. 삶의 의미가 뜯겨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떠나보낸 자리에, 찰나에 끝나버리지 않는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구하고 천진한 계절에서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한 풍경을 지나, 침묵 속에 다시 덮는 순간. 사람 키만큼 온다는 눈에 파묻히고 싶어졌다. 무작정 걷고 싶었다. 숲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옛날 일이 되고 싶었다. 문득 돌아본 길에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다가, 쓸려가다 만 흔적을 도로 밟아 새기고 싶었다.

p.14 어쩌면 자신, 바움가트너가 냄비에 손을 덴 바로 그 순간 플로렌스 씨도 손가락이 잘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온다. 불행의 원인은 각자 자기 자신이고, 한 사람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불행보다 훨씬 크다 해도, 그래도, 각각의 경우-

p.36 그날 오후 신들은 아직 젊은 자아가 왕성한 힘을 내뿜고 있던 아내를 그에게서 탈취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그의 팔다리가 몸에서 뜯겨 나갔다. 네 개 전부, 팔 둘과 다리 두 개가 모두 동시에. (...)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전의 기록을 읽어보았다. "삶은 통증이었다. 환상임에도 더욱 생생하고 고통스럽게 달라붙는 환지통과 같은 그리움. 이대로 안고 살겠거니, 얼마쯤 고여있는 마음을 출렁이며 꼭 하루씩을 느리게 이어가는 삶. 그에게 과거가, 아니, 여전히 현재인 기억이 숨막히게 피어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해진다".

그 아래 작게, 언제고 떼버릴 요량으로 얹어둔 메모에는 이렇게 썼더랜다. 어떤 상실은 도난-당함이다, 뜯겨나감이다. 그 바로 다음 줄에는, 환상통은 마취 없는 절단에 발병한다, 라고. 옳은지 아닌지는 몰라도. 으레 환지통으로 불리는 그것은 phantom이다. 유령처럼. 닿을 수도 헤집을 수도 없는 것.

p.77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들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버린다.

p.228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지 마라, 도로에 어수선하게 깔린 파인 곳이나 떨어진 물체를 피해 방향을 틀어라, 어떤 경우에도 다른 차와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충동적인 모험은 절대 하지 마라. 충돌은 사실 치명적일 수 있고, 일단 죽으면 영영 죽은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이 바움가트너, 이 외로운 남자의 날들을 고립과 고사 언저리에 매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이런 삶도 있다고, 볼 장 다 보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바닥났다 해도 다음 장이란 게 남아 있다고, '가만한' 위안을 남겨두고 싶어졌다. 지나간 자리에, 오래도록 머무른 흔적에.

그러니까, 여전히 두서없는 마음에 물음표가 되다 만 호선 비슷한 것을 슬쩍 두어도 좋겠다면, 묻고 싶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게 끝없는 해변을 걷는 일과 같다면,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간간이 밀려드는 그리움에 발을 적시면서도 나아갈 수 있는, 그냥 그렇게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p.245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은 이마의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채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도움을 찾아 길을 떠나고,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 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

p.254 (김연수 에세이) 인생의 후회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한밤에 잘못 걸려 온 전화를 받고는 자신이 그 사람이 맞다고 말한다면? 그때도 인생은 바뀔 테지만, 번개를 맞는 일과는 미묘하게 다를 것이다. 내가 겪지 않은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한 일에 의해서 인생은 바뀌는 것이니까.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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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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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주문


책은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지면 위에 붙박인 활자는 수 년이고 수백 년이고 정지한 채 침묵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에 들리기 전까지 그 안의 말을 품어안고 그저 가만히, 가만히 잠들어있다. 얼마나 크고 깊은 세계를 보여줄지, 그 경이를 알아봐줄 이를 기다리며.

이제 당신은 손을 뻗어 한 권의 책을 꺼내든다. 손바닥으로 등을 받치고 손가락으로 표지를 열어 제목을 지나 한 장, 한 장 넘긴다. 글이 시작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쉰 후 첫 문장을 따라간다. 오, 잿빛 종이에 바늘땀처럼 놓인 문장은 당신에게 산만한 배경소음이 아닌 완전하고도 애쓰는 관심을 요구한다.

나를 보라고, 흘러가는 '자극'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마주하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고. 당신은 그 상냥한 명령에 기꺼이 복종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선다. 그래, 내가 여기 있다고, 가만히 숨을 죽이며 한 줄, 또 한 줄...

p.13 미안한 얘기지만, 그대는 나를 읽는 동안, 스스로를 어떤 다른 인물이 아니라 그대 자신으로밖에 여길 수 없을것이다. 좋은 책이란 그대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윽고, 어딘가의 한 줄에 도달한 당신에게 불쑥, 책이 말을 건다. 안녕? 아 잠깐만 잠깐잠깐!!! 던지지 마세요!!! 책이 말 좀 할 수도 있지!!!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농담이 아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책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집이 아니었지... 그 순간에 비명 안 지른걸 아무래도 인생 업적에 넣어야 할 것 같다는, 아무래도 작가가 독자에게 원한을 품은 게 분명하다는 의심이 첨가된 생각을 하다 이내 궁금해졌다.

p.15 나는 그대가 동화나 옛 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나를 읽어 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나는 그대의 눈을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물론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그렇다고 나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때로는 사물이 의식을 지닌 존재를 도와줄 수도 있다. 때로는 사물이 살아 움직일 수도 있다. 나는 그대의 책이다. 게다가 나는 살아 있다.

p.16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어떤 대단한 것, 언제 어디에서든 그대의 생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그대를 홀로 있게 하지 않고 늘 그대 곁에 머물면서 위급할 때는 비상구를 마련해 줄 존재, 한마디로 말해, 종이로 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앞서 말했듯 책은 정지한 채 침묵하는, 극도로 수동적인 매체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책이라는 시공을 사이에 둔 채, 독자와 세상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나서며, '말'을 걸 수 있을까? 책과 독서, 쓰는 자와 읽는 자는 유사 이래 주류였던 적이 없다. 가장 치열한 외톨이이자 수다스러운 은둔자들이면 모를까.

이 책은 에세이다. 작가가 독자에 직접 말을 걸고자 한다. 동시에 거대한 상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현실을 뚫고 관념의 세계에 잠겨들 것을 요구한다. 지금 여기에 발 묶인 이들에게 무언의 명령을 쏟아붓는다.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하라. 소리치듯이. 꿈을 꾸라. 헤엄쳐라. 날아오르라.

p.109 스스로가 낡았다는 사실을 체제는 알고 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누군가가 그대처럼 용기를 내어 새로운 것을 제안해 주기를 기다려 온 것이다. 사슬에 묶인 이들도 자기들끼리 모론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들도 그대처럼 할 수 있다고 의견을 모은다. 그들을 지원하라. 창안과 발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남은 체제는 스스로의 특권을 자꾸자꾸 포기하게 될 것이다.

p.126 돌고래들이 그대에게 장난을 치면서 함께 놀자고 한다. 그대는 그토록 즐겁게 사는 비결이 무어냐고 묻는다. 그들은 항상 꿈을 꾸며 사는 것이 그 비결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의 설명이 이어진다. 돌고래 뇌의 반쪽이 활동하는 동안 나머지 반쪽은 잠을 잔다. 그러니까 그대와 놀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책에는 지면을 넘어서는 세계가 담겨있다. 한 인간은 하나의 세계다. 이 책은 작가가 책과 에세이라는 형식을 걸고 독자에게 내건 도박이다. 단지 한 권의 얇은 책, 짧은 문장의 나열에 불과한 동시에 읽는 내내 물음표의 호선을 긋게 한다.

이쯤 되면 그의 작품들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사유와 그 접근 방식이 몹시 도전적이라는 평은 구태연한 사실기술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말할 수밖에 없다. 다른 무엇도 아닌, 책이라는 물성-장벽을 뛰어넘어 독자에게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 책이 인식적 한계를 돌파하고 읽는 이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 부딪히고 들이받으며 재차 묻고 있다고.

당신은 읽는다. 빠져든다. 지금 이 순간, 한 권의 책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안녕? 안녕. 당신은 이 솟아나는 물음에 무엇으로 응답하겠습니까?

p.163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그대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한 권의 책인 내가 그대로 하여금 경이로운 일을 하게 했다고. 그러나 진정 경이로운 것은 그것을 수행한 그대, 오직 그대뿐이다. 안녕.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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