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 - 어느 사랑의 회고
벨 버든 지음, 손백희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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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4기 #은행잎서재 #벨버든 #낯선사람
*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덮고 나서도 한참을 분노와 경멸에 떨었다는 것?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참담했다는 것? 읽다 말고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심박수 경고가 수차례 울렸다는 것? 어떻게 사람이 사람 가죽을 쓰고 이렇게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짓만 골라가며 할 수가 있나?

상대와의 신뢰를 배반하고도 조금의 죄책감과 책임의식조차 갖지 않으려는 종자들은 동서고금 젠더노소를 막론하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걸까? 자기 말대로 해야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라고, 네 책임도 있다고, 누구나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다고… 물론 그 모든 것이 제 편의에 부합할 때만.

p.34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우리 결혼 생활에서, 내게서 뭐가 부족했는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진 건 아니라고 했다. (…) 그는 완벽히 침착했고, 목소리도 낮고 차분했다. 그런 그의 태도 때문에 화내고 망가지고 혼란스러운 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신속하고 가볍게 받아들여야 할 상황 같았다.

p.142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남편에게 일임하는 게 좋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가 우리 집 돈 관리를 하는 것이 우리 가족을 위한 기여이자, 나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어딘가 낭만적인 면도 있었다. 똑똑하고 품위 있는 남자, 헌신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가 우리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모습 말이다. 나는 나대로 맡은 책임이 있었다. 육아, 학교 식사, 숙제, 아이들 재우기 등. 그러니 그가 우리 재정 관리를 하는 건 당연했다. 역할을 분담해서 우리는 각자 맡은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울화통이 치밀어 가슴을 두드리게 한 원인은 비단 이 상황의 원흉 뿐만이 아니다. 그에 더해 이 '파탄'의 이유가 일방적인 배신과 이기심이 아니라 '배신당한 여자', '질리게 만든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썩어빠진 생각을 여상한 농과 냉소로 내던지곤 툭 털어버리는 이들이 숱하게 맴돌았기 때문이다. 마치 어제까지의 친분이 '정상'에서 떨려나간 그를 조롱하고 끌어내릴 명분이고 동력이라도 되는 양.

이 책에 끝끝내 '사이다'는 없다. 통쾌한 복수와 '정의' 따위는 희미한 소망처럼, 채 빛나보지도 못한 채 거듭 뭉개지고 꺾여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니, 그와는 완전히 별개로, 저자의 서사는 다시 자신의 것이 되었다. 주변에 떠밀려, 언젠가의 상처를 보상하기 위해, 그 순간에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타인에게 넘겨준, 스스로 써내려가고 '다른 주인공'의 뒤로 물러서버렸던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세계에 당당히 자리했다.

p.293 스스로를 지키지 않았던 순간, 갈등 대신 편안함을 택했던 순간, 알기보다 모르기를 선택했던 순간들을 직시했다. 그 순간순간의 결정이 모여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이다. (…) 하지만 나는 남편을 믿고 따르며 그의 의견에 모두 동의했던 한 여자로서, 과거의 나에게도 연민을 가져보려 했다. '다 사랑을 위해 한 일이었다. 그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p.326 온라인에서든 현실에서든, 사회가 허용하는 여성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걸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곳에서 여자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 하고,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로 누가 얼마나 파괴되든 상관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용인된다. 그런 부류들이 지키려는 것은 더 큰 무언가. 즉 특정한 삶의 방식과 그 방식이 주는 안온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름의 '책임'이 있었다 해도, '실패하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해도 세상이 원하는 '완벽한 피해자'와 '정숙한 여성상' 따위를 정면으로 걷어차버리고 온갖 비난과 조롱에 맞닥뜨렸다 해도, 그리고, 여전히, 때때로 슬픔과 미련에 휩싸인다 하더라도, 자기의 삶을 움켜쥐고 놓지 않겠다고 한다.

혹자는 싹 잊고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라 말할지 모른다. 틀렸다. 당사자에겐 원망할 권리도, 배신감에 치를 떨고 반추하며 슬퍼할 권리도 있다. '털어내지' 못한다 해도, 펄펄 뛴대도, 때때로 주저앉는대도 그저 또다른 삶이다. 그가 살아가기로, 삶은 여전히 이어져나간다고 말하는 이상, 연대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다. 탓도, 책임추궁도, '달라진 삶'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물수리의 생태에 비추어 되돌아보든, 언제고 되돌아올 고통에 휩싸여 거꾸러지든, 저자와는 사뭇 다른 서사를 써나갈 또다른 누군가의 삶에서든, 그래, 인생은 이어진다. 누구에게든 언제나 바깥, '나'라는 존재는 남아있는 것이다. 그 연약하고 간신한 희망은 여기서 다시 싹튼다. 꿋꿋하게, 여전히.

p.309 우리는 모두 남자들이 만든 구멍을 대신 메우고, 그들의 나쁜 짓에도 침묵하며, 품위 있게 모른 척하도록 교육받았다. 내게 일어난 이야기를 출판하는 것은 그 구멍에, 제임스가 남긴 깊은 균열에 빛을 비추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뒷수습하며 품위를 지키는 역할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 회고의 힘은 저자 한 사람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내내 곁을 지키며 지지해온 이들을 조명하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상처를 고백함으로써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선례가 되어주었다. 그가 이 부당한 상황에 순응하지 않은 데에는 그 자신의 용기 뿐만 아니라 먼저 자립한 여성들, 언젠가 배반당하고 치를 떨었던 이들, 이 상황이 옳지도, 참아서 해결되지도 않음을 경험하고 증언해온 이들이 있었다. 이제 그 또한 하나의 가능성이 되었다.

몇번이고 제목을 되돌아봤다. Stranger, 낯선 사람. 종장에 이르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가 저자에게, 자기가 배신한 관계에 한순간에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라고만 생각했다. 덮고 난 지금, 이제는 안다.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다고. 그가 놓쳐버린 가족들의 삶은 영영 낯설어지며, 자기만의 방식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처음부터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

p.335 이제 제임스를 생각하면, 그때 내게 손을 흔들던 그 남자가 떠오른다. 그는 악인이 아니다. 자신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여러 해 동안 사랑과 행복을 준 사람이다. 자기 삶과 미래에 대해 다른 결정을 내린 사람이다. 나는 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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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진명 옮김 / 교양인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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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교양인

거장이라고는 해도 사망(이라고 해야 할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죽기는 했으니) 당시 향년 45세, 어리지는 않아도 나름 젊은 나이였으니 '젊은 날'의 그와 후기 작품세계를 구분하는 일은 영 난감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대가의 반열에 올라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기 이전, '소설가 미시마'로만 존재하던 때, 끓어오르는 혈기와 생명력을 주체하지 못하던 때의 작품은 이후의 냉소와 거시적 세계관의 시기와는 퍽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풍요의 바다〉를 시작으로 미시마의 작품세계에 파고든 독자에게 『파도 소리』에 드러나는 작가의 자의식과 모상을 탐구하는 일은 당황스러운 동시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내내 깔끄럽게 느껴졌던 부분도 이와 별개라고 할 수는 없으니. 서설가는 무엇을 그려내는가? 재-구성된 세계에서 그는 어느 위치에, 어떻게 거하는가? 질문들은 이 이야기를 풋풋하고 거친 사랑의 단편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와 멀지 않다.

p.98 신지의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것에 대한 맹목적인 경건함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아직 여자를 몰랐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여자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도덕적인 핵심을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오래도록 깨어날 수 없을 듯한 취한 기분과 문밖의 기괴한 파도 소리, 나무 끝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가 자연의 한결같이 고조된 가락 속에서 함께 물결치고 있음을 느꼈다. 이 감정에는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듯한 지복이 깃들어 있었다.

p.102 치요코는 도쿄가 그리웠다. 이렇게 폭풍이 부는 날에도 아무렇지 않게 자동차가 오가고 승강기가 움직이며 전차가 혼잡한 도쿄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곳에서는 '자연'이란 것들은 일단 정복되어 있고 아직 버티고 있는 자연의 위력은 적이었다. 그러나 이 섬에는 사람들 모두 자연의 우방이었고 자연의 힘에 가세했다.


미시마의 도덕적 결벽성, 흠결없는 자아상과 순수에 대한 집요한 고수는 주인공 신지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우직하고 무심한 심성과 단조로운 반복으로 하루하루 쌓여가는 일과는 작가가 열망해온 남성성과 결부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지위나 처세술 따위가 아닌, 타고난 '근성'과 부단한 수행으로 증명된 성취라고 말해지는 듯하다.

그의 주인공은 미숙하다. 서툴고 거칠다. 그러나 이는 부족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파와 정념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성을 드러내는 면모로 그려진다.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하는 주인공은 그 자신만의 속도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어떤 '숭고함'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자격은 그 자신의 성취로 얻어지는 동시에 초월적인 가호, 고유하고 신비한 '도덕'의 보호 아래 있다. 마치 영웅의 그것과도 같은 초월적 각성과 단련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성장은 거듭 증명을 요구받고, '시험'을 통과한 후의 '자격'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성취물이 된다.

p.56 두 사람의 볼이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내음이 바다 냄새처럼 강하게 퍼지면서 서로의 열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마르고 갈라진 두 입술이 맞닿았다. 소금 맛이 조금 났다. 신지는 하쓰에의 입술이 해초 같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 지나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경험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얼른 몸을 떼고 일어섰다.

p.205 신지는 귀를 기울였다. 그 사내다운 얼굴 바로 위에는 태풍이 있었다. 그는 낮잠을 자는 듯 포근한 자연의 품 안에도, 지금 이 순간처럼 광기로 얼룩진 향연의 자리에도 똑같이 초대받을 자격이 있었다. 비옷 속에서 비 오듯 땀이 나서 가슴과 등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비옷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목이 둥근 흰 셔츠를 입고 맨발이 된 신지의 모습은 어둠과 폭풍 속에서 혼자만 우뚝 솟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이상 일색으로만 읽는다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놓치기 십상이다. 작품 내내 두드러지는 시각적 묘사는 일방적인 관음과, 자연 그리고 그 일부로 살아가는 이들의 생명력에서 뿜어져나오는 관능 사이를 줄타기하며 이어진다. 후자를 근현대 서구의 전능신의 무구하고 순결한 피조물보다는 사납고 위험한, 이해 너머에 발을 걸친 야생의 짐승에 가까운 이미지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작가가 그려내는 여성상에 어쩐지 은근한, 성애보다는 멸시 어린 경외의 대상와도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유와 가깝다 여기는 것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선은 사람의 매력이나 욕망어린 이끌림보다는 잘 자란 과실과 짐승에의 경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p.14 청년은 주방 문 앞에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넙치는 이미 흰 법랑 대접시에 놓여 가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가미에서 피가 흘러나와 희고 매끄러운 살갗에 번지고 있었다.

p.173 장작불 주위로 밀치락달치락 법석을 떨고 있는 수많은 유방 중에는 이미 시들어버린 것도 있고, 마르고 딱딱해진 건포도 같은 젖꼭지만 흔적처럼 남아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잘 발달한 대흉근이 무거운 유방을 아래로 처지지 않게 넓은 가슴팍 위에 단단히 떠받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생김새는 그들의 유방이 부끄러움을 모른 채 날마다 태양 아래에서 과실처럼 자라 왔음을 말해준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주인공을 통해 그려지는 자아상은 여러 인물을 안팎으로 조명하며 거듭 단호하게 고수된다. 이는 일견 대조의 형태를 띄나 결과적으로는 주인공의 '오염될 수 없는 본질'을 선명하게 그려내기 위한 장치로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모종의 고집, 그 자신조차도 이렇게 해야만 지켜낼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이는 비단 그의 '종착지'를 알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미시마의 작품들 전반에서 느껴지는 예민하고 위태로운,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집착은 그를 둘러싼 명성과는 달리 그가 스스로를 얼마나 혹독하게 몰아붙였는지, 그렇게 벼려진 '극의'가 도달한 자기파괴적 결말이 어떻게 숭고로 고착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풋풋한 사랑의 포말로 소개할 것이다. 우뚝 선 존재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인간 미시마의 연약하고 사나운 발버둥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은 사랑 이야기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p.148 '그 애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이상 기대하면 못써. 그 애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지. 그걸로 만족하고 그 이상 그 애의 사랑을 기대하면 안 돼. 그 애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왜 못된 짓을 한 걸까. 나의 질투 때문에 어째서 그 애를 지독한 불행에 빠뜨렸단 말인가. 더구나 내가 배신했는데도 그 애는 나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선물을 주었어. 속죄해야 해. 무언가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 보답을 다해야 해.'

p.232 그제야 신지는 생각했다. 그토록 고생했지만 결국 하나의 도덕 안에서 두 사람을 자유로웠으며 신들의 가호는 단 한 번도 그들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마침내 어둠에 둘러싸인 이 작은 섬이 두 사람의 행복을 지키고 사랑을 이루어주었다고. (...) 신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험을 헤쳐 나온 것은 자신의 힘 덕분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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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밈학과 같은 건 없습니다
QNTM 지음, XCninety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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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황금가지

생각해보라. 생각할수록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했으되,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듣고, 겪었으나 전해질 수 없는 것을. 한 걸음 나아가, 당신이 바라본 것이, 뇌리를 스친 '그것'이, 당신의 의식을, 차원과 인식의 지평 너머에서 ◼◼하고, ◼◼◼◼ 나머지, 혹은, 본능적으로, ◼◼을 ◼◼한다면, ◼을 찢고, 다가와, 휘감고, ◼◼후에, 자, 지금 당신은, 뭘까.

익숙한 그림처럼 흉측한 몰골의 악의 무리로부터 '평범한' 일상을 지켜내는 그림자 영웅이 아니라, 연구하고, 수집하며, 패퇴하기를 반복하는, 대체 무엇인지 알 수도 떠올릴 수도 없는 그런 희한한 집단이 있다. 그들의 업적은, 아니, 존재는 숨겨지며, 지워지고, 잊혀진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이해와 통제 너머에 군림한다. 아니, 그렇게 믿어져왔다. 그러나, 핵심과 처절한 무력의 교집합 어딘가에 거하는 '◼'은, 순식간에 ◼◼의 ◼◼과 ◼◼ 그 자체를 ◼◼◼◼◼ 시작하는데…

p.20 "항밈은 전파되지 않는 관념이에요. 항밈성 개체 및 현상은 정보를, 특히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거둬가서 집어삼키죠. (...) 직접 관찰할 수도 있고 눈에도 멀쩡히 보이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인식해요."

p.336 녀석이 지닌 악의적인 중력이 인간성과 그 모든 인간의 관념을 자기 궤도로 끌어들여 알아볼 수 없도록 왜곡시킨다. 그 아래에서, 그 맥락 안에서 모든 것은 최악의 형태로 타락한다. 기쁨은 복수의 쾌감이 되고 자립심은 병적 유아론이 된다. 사랑은 숨 막히는 폭력이 되고 자부심은 굴욕이 되며 가족은 덫이 되고 안전은 피해망상이 되고 평화는 불만이 된다. 사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문명은 궁극적으로 혐오로 뒤덮인 폐허가 된다.


우리는 패배했다. 수없이 패배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처참히 ◼◼되고 있다. 우리와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이들의 ◼◼ 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채, 천천히, 완전히 망각되고, 인식과 존재의 세계 바깥으로 내던져진 채 ◼◼◼갈 것이다. ◼◼되었다는 사실조차 ◼◼질 때까지.

◼◼이 인간과 접촉할 수 가능성이 존재하며 인간 존재와 떨어질 수 없이 결부되는 한 그를 피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필연히, 무와 유의 경계가 무용케 들이닥치는 트롤리 레버 앞에, 선로 위에, 차창 너머에 붙박여 끝없이 절망할 운명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발버둥치고 치받기를, 번번이 실패하고 처참히 무너질 줄을 알면서도, 순응과 평화 대신 발악하고 반격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가?

p.98 "사람들이 있었어, 우리보다 훨씬 발전된 기술을 지녔을. 수천 년 전에 존재했을 테고, 어쩌면 수만 년 전이었을까. 정확하게는 몰라.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명하기도 어렵고. 문화적 밈복합체가 치명적으로 피폭당해 버렸으니까, 이 문명의 핵심 문화 개념, 이들이 창조한 존재들, 이들이 무엇을 상징했고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 모두 이제는 알 수도, 전파될 수도 없어."

p.342 "우리는 지금껏 어느 때보다도 더 처참하게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비밀 조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 기구 바깥의 그 누구도 우리에게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야. (…) 우리도 결코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테지.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냥 죽는 사람은 없어. 누구도 아무 일 없이, 저절로 죽지는 않아. 죽음에는 원인이 있으니까."


그 답을 찾아 수없이 헤매왔다. 묻고 부딪히고 들이받다 픽 죽어버리기를 반복해왔다.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뼈저리게 무력해지는 지점, 가장 취약하고 또 가장 연약한 곳이 우리의 인간성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눈 뒤편, 뇌 깊숙한 곳, 의식의 심층에 처박아넣는 안식의 손길 대신 등 뒤의 세계를 지키기로 마음먹는, 마주치는 시선에, 다음, 또 다음에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패배하고, 절망하고, ◼◼◼할 것이다.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망설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끝내 사라지기 전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완과 미지의 실마리를 붙잡고 일어설 누군가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 이 비합리와 연약함을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기 때문에, 그의 세계에 '가능성이라는 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말해왔듯 홀로 전능함은 곧 절대적인 무능에 다름아니다. 그러므로, 언젠가의 ◼◼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패배가 아닌 '다음'의 선언을. "항밈학과 같은 건 없습니다".

p.46 리는 컴퓨터로 가서 미지체 항목을 다시 열어 희생자 수에 막대기를 하나 더하고, 지금부터 시도해 볼 방법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자신이 마지막 희생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방법 역시 실패했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p.147 애덤은 마리를 믿는다. 마리가 얼마나 빠르게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다시 맞출 수 있는지를 안다. 말도 되지 않는 세계를 상대로 싸우며 진실만을 분리해 낼 수 있다는 것도. 그녀라면 우주 전체를 상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불안감 하나가 뱃속을 찔러 온다. 애덤은 결국 이 말을 삼키지 못한다. "하지만 지면? (…) 지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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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 2026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박서련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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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단편집, 개중에서도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것엔 언제나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소개나 작가 목록에 기대보다는 겁부터 집어먹기 때문이다. 분명 어느 작품인가엔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모였으니 내 마음에 꼭 들어맞는 글이 하나쯤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순간은 몹시도 짧아 허망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만 팔랑이며 부여잡고 있을 꼴이 뻔하다… 뭐 그런 생각에.

지난 한 해에 발표된 단편소설들 중 빼어난 작품을 추리고 가려 심사한다는 김유정문학상도 벌써 20회차를 맞았다. 그간의 수상작들을 쭉 톺아보고 난 후에 읽는 올해의 후보작들은 각별하고 걸출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동시에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변해왔는지, 그 안에서 문학은 무엇을 찾고, 드러내고, 돌파하고자 애써왔는지 몸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p.48 〈김채원, 태양에서 멀리〉 치워 없애야만 하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됐다. 누가 보아도 선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야기,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것들. 에구, 눈부셔라. 에구, 싫어라. 솔지는 이 모든 것에 필요 이상의 적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지의 약점을 건드렸다.

p.97 〈박민경, 별개의 문제〉 그 불안 속에서 엉뚱하게도 음식물 처리기가 떠올랐다. 만약 정말 늦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일 거다. 개를 집어삼키고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지게 할 거대하고 똑똑한 구덩이.


주제와 서사를 달리하는 여섯 작품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문학이기 위해, 다른 무엇도 아니고 문학이기에 할 수 있는 일과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수없이 물어온 흔적이 지금, 여기의 취약하고 연약한 것의 형태를 입고 그려졌다는 느낌을 준다.

언젠가의 문학은 세상을 바꿀 창이었다. 동시에 어딘가의 문학은 사상의 지평이었고, 또 누군가의 문학은 읽는 이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어야 할 책무를 졌다. 그 모든 것을 두고 묻고자 한다. 현실이 상상을 불가하게 한다면, 현실이 발을 떼고 나아가기를, 드러내기를, 균열-하기를 거부한다면, 아니, 부인한다면. 이 이야기들은 무엇을 선언하는가. 금을 내고 추악하고 피흘리는 '것'을 까발리는가.

p.90 〈박민경, 별개의 문제〉 진심이 된다는 건 멈추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딱 그만큼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게 진심이니까. 그건 스스로를 매일 시험대에 올리는 일이자 밤잠을 설치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p.166 〈함윤이, 굴은 구르지 않는 돌〉 "어떤 때 애인은 나한테, 아니, 나를 통해서 뭔가에 항의하려는 것 같았어요. 가끔 그가 큰 소리로 말하길, '그쪽' 남자들이 '이쪽' 여자들을 때리고, 욕보이고, 아무렇지 않은 체 살아가고 있어. 그러면서 내 몸을 마구 주물렀어요. 내가 아파, 아파, 소리치고 내 살이 빨갛거나 파랗게 변할 때까지요. 그런 뒤에 애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감히 평하고자 한다. 이것은 경계의 이야기다. 침범하고 틈입하며 범람하는 변경, 언제나 우리-아님인 동시에 우리-안의 위험을 상기하. 가장 찬란한 진창, 무저갱의 끝이다. 앞이고, 과거이며, 순간마다 도래하는 미래이다. 가장 마지막의 가능성이고, 허리째 잘려나간 이름이다. 자격 없는 이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시도이다. 여전히 미약하고, 더없이 취약하다.

이 진부한 패배의 또다른 이름은 지금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자리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세계에 상처입고 비틀리는 이들의 면면, 일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뻔뻔하고, 치졸하고, 가만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취약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그 교차점들에서 상처를 읽었다. 차마 말이 되지 못한 것, 비로소 그 이름을 부르게 될 때, 문학의 길은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두려워하며, 혹은, 조용히 떠는 채.

p.68 〈김채원, 태양에서 멀리〉 그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농담 중에 한 개씩, 두 개를 골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가까이서, 그 다음에는 멀리서. 그것들은 솔지 말고는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이었다. 솔지 말고는 아무도 듣고 웃지 않는, 그러나 때때로 빛을 발하는 솔지만의 불행.

p.181 〈함윤이, 굴은 구르지 않는 돌〉 빛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가빠졌다. 눈을 들면 절반쯤 설치된 조명등 빛이 여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움켜쥔 피부처럼 붉거나 푸른 빛에 잠긴 얼굴들, 그녀들은 돌들 틈에서 만들어진 양 보였다. 또는 그저 돌 자체로, 굴속에서 오랜 시간 흘러내리고 솟아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변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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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카인 - 21세기의 소설
카린 보이에 지음, 이유진 옮김 / 미행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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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요. 꼭 그만큼 끔찍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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