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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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이름은 의미를 담는다. 이름은 인간이 무언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의미로 가득한 말이다. 이름은 대상 없이는 붙여지지 않는다. 불러질 대상이 없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이든, 부재로 떠나갔든, 무엇으로 빗대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그리고 호명하는 이 스스로에게 존재의 존재-함을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의 세계에 '이름'의 존재를 명확히 자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만일, 이름이 그 주인에게서 뜯겨나갔다면, 불릴 사람이 이름을 두고 떠나버렸다면, 갈 곳 잃은 부름만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나돌아다닌다면, 존재하되 이름으로 불릴 일이 없다면, 눈 앞에 멀쩡히 있는데도 이름이 없으므로 부를 수도, 지칭할 수도 없다면. 이름의 빈자리에 무엇이 놓이는가. 이름과 존재의 틈 사이에는 무엇이 깃드는가. 또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이름이되 이름이 아닌 것, 그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오롯한 자기이기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무엇인가.

p.40 〈프랑켄슈타인〉 그는 창조주라면 주어야 할 애정, 관심과 사랑부터 먹을 것과 보호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해줘야 하는 첫 번째 일,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크리처가 괴물이 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

p.54 〈시녀이야기〉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고 불러주는 행위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 부여이자 애정 표현이다. 이름을 지어 호명하고 지칭하면서 관계가 결속된다. 마음의 밀도를 보여줄 수 있는 고도의 정성이 깃든 의례이기도 하다.


그들이 진짜 이름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빈 자리에는 무엇이 고이고, 흐르며, 스쳐지나갈까. 저자는 영화와 소설, 드라마를 오가며 창작물 속 이름 없는 존재의 형상을 불러낸다. 그 빈 자리, 이름을 뺏겼고 이름의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부재로 취급되는 존재들과 이름에서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이들에게서 내가 비춰본 것은 이름 대신 '무언가'로 붙박여버린 이들의 모습이었다. 그 이름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다시금 이름의 의미를 고민한다. 불리지 못할 이름을, 답할 이 없는 이름을 떠올리며 곱씹는 그 의미는 필경 한 존재를 세상에 자리하게 하는 힘이자 존재하도록 마련된 자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이… 그것들은 모두 한 존재를 그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이 무슨 처참이란 말인가.

p.168 〈그 여자는 화가 난다〉 그녀가 어렵사리 친부모를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춘복'이나 '마야 리'가 엄마를 아빠를 언니를 마침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리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거라 생각한다. (…) 책장을 덮으며 그녀에게 들릴 리 없는 한마디를 포옹처럼 보냈다. 춘복이를 버려요.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말아요.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어요.

p.247 〈허공에의 질주〉 아서도 '나의 인생'을 찾고 싶은 것이다. 자꾸만 변하고 바뀌는 이름과 정체성에서 지쳐버린 것이다. 결국 살려고, 살아가려고 여러 번이나 죽은 남의 이름을 주워 달아 붙이고 살았지만, 원래의 자기 이름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르고 싶은 것이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주정처럼 난장을 치면서도 진짜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것이다.


이는 곧 진짜 이름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나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감각, 이름이 곧 족쇄가 되는 삶이 있다. 모멸을, 맞지 않음을 이름이라 여기기를 강요받는 이들이 있다. 같은 세상에서 제각기의 투쟁에 존재 자체를 걸고 맞서는 이들을 생각한다. 빼앗길 수 없는 이름, 호명-됨의 의의를 생각한다.

온당한 이름-됨을 고민하는 지금, 몹시도 사랑해 마지않는 구절의 의미를 깨닫는다. 선언이자 정의인 그 말을. 내가 여기, '이 자'로 있노라, 나를 이렇게 부르라. 당신의 세계에 이로써 거하겠다는 말, 무엇으로도 부서질 수 없는 '것'의 상징일지 모른다. 이 무겁고 찬란하며 뜨거운 의미를 누군가는이렇게 말했다. Call me Ismael. 세계는 여기서 시작된다.

p.67 〈비바리움〉 마틴은 마틴을 죽이고 마틴이 되어 똑같은 삶을 살아 영생을 누리지만 젬마와 톰은 미로에 같혀 살았어도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떠나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검은 봉투에 이름 없이 담겨졌어도 젬마와 톰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p.250 〈허공에의 질주〉 "내 이름은 대니, 피아노에 목숨 건 녀석이지." (...) 처음으로 제대로, 잘 버려진 것이다. 자신의 진짜 이름과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랑하는 사람과 진짜 피아노와 함께. 대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인생과 함께.


#권혁란 #이름의빈자리에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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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알라 알카이시 지음, 서제인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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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제에 대해 늦지 않은 책이란 없는 거겠지요. 무겁게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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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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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어김없이 돌아온 선거철, 곳곳에 익숙한 수사와 깊숙이 숙이는 미소들이 지겹게도 보인다. 이 구태의 정점이자 꽃이라 할만한 것은 이번에도 벽보와 현수막에 큼지막한 글씨로 박힌 각종 선언과 치적행사일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시민의 발이 되겠습니다. 시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공약 이행이 어떻고, 저떻고… 이에 시민들은 말한다. 뻥 치시네!

진작 물었어야 했다. 숱하게 물어온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왜 정치인들의 것이 되었는가?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만년 탁상공론에 허울대잔치가 되는가? 선거는 정말 주권행사의 장이 되고 있는가? 청장님, 시장님, 의원님, 각종 '님'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의탁하거나 넘겨주는가? 철마다 내세우는 각종 정책은 시민의 삶과 어떻게 유리되고, 그 결과 정책은 어떻게, 언제, 왜 실패하는가?

p.54 정책 의제는 단순히 '선택된 사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주체, 곧 결정자가 우월적 힘을 바탕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들이 특정 사안을 공식 의제로 설정하고 해결 과제로 선언할 때, 사회 문제는 비로소 정책 의제로서의 생명력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뜨거운 여론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도 정책 주체가 이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현상'으로 남을 뿐이다.

p.79 오늘날 국민은 정책의 결과만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고 싶어 하며,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정책의 시대는 저물었다. 국민과 함께 설계하고 검증하는 정책만이 살아남는 시대, '열린 정책 생태계'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략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자리에 국민이 주권자이자 권력의 원천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양당제로 이분된 국가, 실제 삶과의 괴리가 커져만 가는 각종 정책들, 허울뿐인 성과발표와 바닥을 치는 정치 신뢰도까지. 저자가 말하듯 정책은 선택된 아젠다인 동시에 결정권자가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정책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결정권자'의 주의와 실천 의지가 개입된 결과라는 뜻이다.

위기상황마다 발등에 불 떨어진듯 잠시 모였다 이내 심드렁한 냉소주의자로 흩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데에는 정당, 정치구조, 의사결정체와 시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뿌리깊은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말할 수 없다. 설령 누군가 진짜 국민, 진짜 성원이라는 교묘한 호도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전용한들 반박조차 쉽지 않을 뿐이다.

p.155 정당이 정책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장훈 중앙대 교수는 세 가지 구조적 원인을 짚는다. (…) 정당이 시민의 일상적인 요구와 삶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엘리트 중심의 정치 게임에 함몰되면서, 정책을 매개로 한 시민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대통령과 관료 중심의 폐쇄적 정책 결정 구조'가 정당의 입지를 좁혔다.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이 청와대와 경제 관료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구조 속에서, 정당은 정책의 주도자가 아닌 사후 추인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p.201 과연 우리 사회의 싱크탱크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권력의 입맛에 맞춘 '답정너' 식 보고서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는가? 싱크탱크는 모름지기 당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이념의 벽을 넘어 대안과 해법을 치열하게 논쟁하는 '사상의 용광로'이자 '정책의 산실'이어야 한다.


긴 겨울을 지난 이후, '권력의 추가 기운' 것이 확실해지자 거대양당과 선출직 출마자들 모두가 저마다 '빛의 혁명'을 찬사하고 포섭하려 안간힘이다. 정치권력이 인기몰이로 결정된 지 오래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반복해 말하듯 오늘날 정책이 현실성도, 정의도 잃은 채 이권놀음이 된 것은 결국 제도권의 정치와 정치의 언어, 그리고 그 필요성과 실질적 권력이 시민과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정책결정권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권력을 독점코자 하는 자들이 시민에게서 거세하고 싶어하는 것 또한 시민의 정치참여와 정책관심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철이다. 우리는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진정으로 정치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제야말로 정치를 주권자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그 지난한 과정은 여전히 시급한 일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선거가 시작되었다.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서둘러야 할 때다.

p.24 정책 오작동의 핵심은 시민과의 '단절'에 있다. 투표를 마친 시민은 정작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그 빈자리를 특정 이익 집단의 논리나 관성적인 행정이 채우면서 정책은 생명력을 잃는다. 이러한 제도적 결함과 불통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투표함 너머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시민의 일상이 정책에 끊임없이 반영될 수 있는 열린 공론장을 마련하고, 단순한 다수결을 넘어 깊은 토론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357 시민이 스스로 학습하고 의견을 나누며 공동체의 미래를 직접 설계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넥스트 민주주의' 의 모습이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결정해주는 시혜적 정치는 이제 끝났다. 이제 정치는 시민이 이끌고, 권력은 그 길을 닦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는 비로소 수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의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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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
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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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아이돌 좋아하세요? 케이팝 좋아하세요? 소녀문화, 빠순이, 오빠부대… 내 가히 여자됨의 구렁텅이를 지나온 평생토록 시도했으나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케이팝, 개중에서도 아이돌 팬 흉내다. 왜 팬-되기가 아닌가, 하면, 말 그대로 흉내, 정상성 위장을 기도한 가장마저도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케이팝(과 그 요소들)에 대한 사랑은 내 마음 한구석에서 내도록 이해 불가한 열정과 한데 뭉뚱그려진 선망 반 실패 반의 흔적으로 남아왔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지 않은가? 이러게나 소비자와 그 대상을 주권과 착취의 어드메로 뒤섞어놓는 산업이 없다. 개인의 존재 자체를 이미지화해 모든 요소를 상품으로 내거는 일 또한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 아니던가. 전제왕권기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놀라운 일이다. 분석과 조롱, 상징화와 납작 눌린 일반화의 양면을 오가는 케이팝, 그리고 그 팬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p.54 케이팝 팬들은 아이돌을 향해 사랑과 영원을 맹세하고 그 충만함을 즐기며 커뮤니티를 이룬다. 동시에 그들은 그 맹세 속에 애정, 질투, 집착, 광기에 이르는 갖가지 감정을 쏟아부은 뒤 그것을 멋대로 배합해 오직 자신만 이해하는 사랑의 법칙을 만든다. 최애가 혐오 발언을 일삼을 땐 적당히 타일러서 훈방 조치를 했다가도 연애 정황이 포착되는 순간 즉시 사형선고를 내려 버리는 독재자의 율법이다. 욕망을 억압하며 만든 환상이 가장 기괴한 형태의 사랑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p.57 케이팝은 사랑과 집착, 믿음과 맹신 사이를 줄타기하는 음악이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허공이니 우리는 늘 날카롭고 예민하다 (…) 상대를 소유하거나 파괴하는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환상 뒤에 숨긴 내 질척이는 갈망과 웅크린 결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인간을 욕망한다면 그것을 더욱 세심히 돌봐야 한다. 거창한 말들로 관계를 정의하지 말고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걸 자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치심과 죄책감, 그럼에도 일상 전반에 뿌리내리는 사랑, 내 입장에서는 생판 모르는 남에 대한 그 피같고 살같은 사랑은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앞서 말한 그 여자됨의 구렁텅이를 지나오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나의 일면을 지배하는 물음이다. 어느 정도냐면, 마음 같아선 붙잡아 가둬놓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을 때까지 쥐어짜가며 물어보고 싶을 만큼.

이 물음은 필연히 케이팝 산업이 무엇을 셀링하는지, 무엇에 기반하는지, 같은 이유로 어떤 이유로 사랑받고 확산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여자아이 집단'에 온전히 소속된 적 없던 나의 두려움은 세계적 인기를 끄는 가사와 퀴어니스의 차용을 교묘히 파고드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지지 기반으로 역전되지 않았는가? 그때의, 지금의 사람들은 누구를, 무엇을, 왜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가히 사랑의 불나방.

p.110 여자임에도 여자를 흉내 내야 했던 순간들, 여자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틀린 여자'가 되었던 순간들이 자신이 '여자'임을 설명해야 하는 여자를 통해 해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수치심과 나의 수치심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여장 여자'로서 그와 같은 수치심을 공유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통해 정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계책을 세운다. 세상 모든 걸 저 좋은 대로 끌어다 쓰는 '진짜 여자'만의 얄밉고 오만한 특성대로.

p.166 자두의 무대에서 엽기적인 것은 오직 하나. 그 거추장스러운 콘셉트를 두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그의 엄청난 성량뿐이었다. (…) 맙소사. 자두는 엽기가 맞았다. 세상이 그를 엽기라 부른 것은 형광색 천 쪼가리를 두른 외형이 아닌 이 기운 때문이었겠구나. '상식적이지 않고' '거부감이 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 모든 요건을 충족한 엽기, 아니 여자로서의 기운.


오해를 무릅쓰고 단언하자면, 케이팝 팬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친 자들이다. 광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걸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다… 견고하게 합의된 비-정상에서 안착한 자들만이 그를 향유할 자격을 갖는다. 개중 경계가 흐려지는 자와 '일코' 얼굴을 완벽히 갈아끼우는 자로 나뉠 뿐… 이라고 하면 이제 나는 전방위 공격에 두들겨맞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 치고 광적이지 않은 게 어디 있단 말인지.

게다가 그 '판'이 온전히 관심과 열정에 뿌리에 둔 자본(혹은 그 역)이라면 더더욱. 사랑해서 미치고, 미친 사랑을 한다. 모욕과 수치를 열광과 자기이해로 역전하는 희한한 세계야말로 케이팝과 그 팬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백하자면, 첫 페이지부터 기가 쫙 빨려서 전심전력으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만일 내가 좋아하는 것, 예를 들면 책을 주제로 하는 이런 책이 나오면 절대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공감성 수치와 고통을 직면할 재간이 없으므로.

p.78 혹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다시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 사랑이 만든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곧 사랑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철저히 설계된 사랑의 볼모가 되어 자책과 회피를 반복하다 몇 번이고 무너지는 사람들. 그러나 광적이고, 자멸적이며, 폭력적일지라도 결코 가짜이지 않은 그들의 사랑.

p.217 수치심을 알고 품위를 지키는 건 반론의 여지 없이 그냥 좋은 일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행동을 제어하는 건 인간다운 일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기에 수치심을 알고도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머물게 된다. 많은 사람이 '길티 플레저'라 이름 붙인 그 불쾌한 낮잠 같은 상황 말이다. 케이팝을 듣고, 케이팝을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제 발로 갇히는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을 덮으며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책으로는 이만한 도파민을 뽑아내기가 책 팔아 부자되기만큼 어려울 것이며 만약 나온다면 안 읽을 재간 또한 없어 필연히 '길티'에 몸부림치며 슬픔의 OO파티를 벌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죽박죽 감상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 시대의 사랑과 수치, 폭력은 분리되지 않는 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나 또한 어느 면에선가는 이 해괴망측하고 질척질척한 사랑에 허우적대고 있다는 말이다. 평생을 궁금해했던 어떤 '사랑'은 이런 형태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언젠가 보았던 말처럼, 사랑을 쪽팔리게 하는 OO들을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는가. 사랑하는 자여, 두려워 말고 힘차게 전진하시라. 티켓값은 비싸고 영통은 짧습니다. 우는 건 끝나고 트위터에 움짤주접까지 다 올리고 하세요...

p.26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좌절을 살피는 그의 태도는 얼마나 성숙한가? 대상이 남기고 간 분노를 어루만지는 것까지가 사랑이라니. 케이팝이 무엇인지 묻는 말에 좆같지만 사랑한다는 말로 얼버무리곤 했던 나는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수치심, 죄책감, 두려움과 마주한 한 사람의 용기 앞에서 눈부신 모멸감을 느꼈다.

p.257 실제로 케이팝은 흑독한 아카데미 시스템을 제외하면 지금 한국 사회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으며, 이미 해외 시장이 조성된 산업이 한국을 닮아야 할 이유도 없다. (…) 지금 우리에게 케이팝은 '자원'이 아니라 우리가 묵인한 사회의 병폐와 우리도 몰랐던 사회의 매력을 다양한 각도로 투영해 볼 수 있는 프리즘이다. 이 프리즘 앞에 서서 다같이 머쓱하게 웃어보자. 그것은 '가짜'가 '진짜'가 되어버린 웃지 못할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스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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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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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듣고 말해본 적이 있을 말들이 있다. 싸가지 없는 놈, 나이도 어린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노친네… 너무 쉽게 말해져 혐오라고 불리지도 않는 이 말들에는 나이라는 공통점이 도사리고 있다. '애새끼'도 모자라 '유충'에서부터 잼민이, 급식충, MZ, 아줌마, 영포티, 틀딱, 노친네까지, 우리 사회에서 멸시 어린 연령 집단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툭하면, 주로 저 마음 불편한 소리에 '갈라치기 하지 말라'며 예의 '준엄한 꾸짖음'이 횡행하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촘촘하게 규정짓고 혐오한다. 나이보다는 개인적 속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청년세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구성하는 연령주의적 제도 및 인식은 필연히 개인과 사회 수준 모두에서 충돌하고 갈등한다.

p.9 연령차별주의는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차별이면서 가장 잔혹한 거부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는 달리 연령차별주의 피해 당사자들은 차별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는 누구나 다 평등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연령차별주의가 너무나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제도화된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p.65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언젠가 SNS 댓글에서 본 적이 있다. 임산부 우선석에 노인이 앉아 비켜주지 않았다는 토로에 달린 내용 중 "10년만 지나면 그런 노인네들이 다 없어져서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황당하고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혐오에 있어 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의 문제가 이렇게나 뒤섞여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댓글창을 떠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초상은 배제와 구분에 다름아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한국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조롱과 혐오일 것이다. 이 둘은 극단적인 타자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져있듯 구분짓기는 혐오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혐오할 수 없다. 혐오 대상으로서의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은 타집단, 그것도,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서는 절대 내가 아닌 이들에게 전가되어야 하므로.

p.88 나이에 따른 혐오스러운 멸칭들이 각종 언론과 일상 대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이는 '일상성'을 넘어서 '사회성'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 이제는 우리 사회가 언어를 통한 탈인간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대안적 표현을 학습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p.144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노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전의 어떤 세대도 지금의 노년 세대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오랫동안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고령층은 문화적 전위 의 역할을 떠맡아 새로운 노년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노년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의 연령주의는 너무 막강하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단순히 살아온 햇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되는 역할과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금지하는 강력한 규범이자 위계로 기능한다. 이것은 탈-규범적 전위를 요구하는 동시에 '감히' 전형을 벗어나는 이레귤러를 가혹하게 조롱하고 탄압하는 모순적 사회에서 이중구속으로 기능한다. 연령주의의 폐단은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는다. 아젠다 선정에서 실질적 참정권까지, 정치-제도의 곳곳에 연령주의의 뿌리는 깊고도 촘촘하다.

예의 청년정치를 표방하는 모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무능과 도덕성은 차치하고라도, 청년유권자에 '우리'로 묶이려 시도하며 그 자신이 마치 아이콘인 것처럼 행세하는 전략이 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가 청년이라고 불릴 만큼,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정치기득권이 고령화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64 나이 멸칭은 특정한 개인들의 행태를 전체 나이대의 공통적인 특성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사회는 특정 나이대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와 이들에게 기대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자꾸 특정 나이대 사람들에게 뭘 해야 한다고 규정을 내린다. 그 규정에 어긋나면 멸칭이 만들어지고, (...) 유행이 되어 빠르게 번지고 오프라인까지 선을 넘어 퍼져 나간다.

p.321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꼽히는 것도 이런 나이에 대한 차별이 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유권자의 목소리'는 평등하게 대표되지 않는다. 소구와 '표밭'이 따로 노니 아젠다는 자연히 과시행정에 급급해진다. 고령화와 동시에 경제-기득권화 된 정치권이 호소하는 부양 부담의 증가는 과연 누구의 '억울함'인가. 그놈의 '갈라치기', 과대표와 청년 호도 정치인의 부상은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끊임없이 나 아닌 집단을 배격하는 인식은 과거와 미래, 사회와 개인 모두를 옭아맨다.

삶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리게 태어나 늙어 죽는다. 어느 순간도 삶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어려서, 젊어서, '적당한 나이'를 지났기 때문에 '임시'로 밀려나기를 요구받는 사회에서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불안하다. 결국 나이는 수로 계산될 수 없는 삶을 욱여넣지 않는, 그저 '중요한 숫자'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생의 모든 시기가 그 때만의 가치를 갖는, 제각기 어떤 사람의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04 대통령이 될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은 2030 청년세대의 정치적 역량 약화와 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고령화로 인해 선거에서 노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정치인들은 고령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공약 경쟁을 함으로써 청년을 위한 정책은 감소할 가능성이 있는데 피선거권 제한까지 더해지니 문제는 한층 심각하다.

p.243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치인이나 재벌 등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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