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왜 - 우리를 무대로 이끄는 물음들
성수연 지음, 김신중 사진 / 북트리거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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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대 안팎의 이야기, 라고 쓰려다 지웠다. 어쩌면, 아니, 사실, 무대는 입체이지 않은가. 대개 관객은 조명과 소품이 있고 배우가 행위하는 공간으로서의 '좁은 무대'를 경험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대사 한 마디가 극장에 울려퍼지기까지의 모든 과정, 그 세계를 열어보이는 일에 이어진 모든 곳이 무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대에 이어진, 무대 곳곳에서 지켜보고, 만들고, 듣고 쓰고 말하며 시공간으로서의 무대 곳곳을 가로지르는 이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미증유에 버금가는 코로나 팬데과 정치사회적 충격을 겪어낸 이들의 증언이다. 제목의 세 물음으로 이어지는.

p.125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작업에는 무거운 고민이 따르고, 그 과정에서 '기대' 나 '설렘' 같은 감정과 점점 멀어지기도 하지요. 그럴수록 고민을 나눌 동료가 필요합니다. (...) 저는 문득 그와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가 돌려준 질문은, 싸워야 하는 현실 속에서도 설레는 미래를 그려 보게 했어요. 한윤미는 여전히 그런 동료였습니다.

p.352 (직업 관객 배서현) 보는 것이 저의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공연을 선택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저를 보여 주는 것도 맞아요. 그래서 저는 취향과 정체성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 공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와 '이 공연은 내 취향이 아니야'는 분명 다르거든요.


저자는 네 장에 걸쳐 곳곳의 이름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묻는다. 무엇을, 어떻게, 왜. 그들은 답하고,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는, 이것을, 어떻게, 왜. 그 안에 교차하고 미끄러지는 세계가 언뜻 스쳐보인다. 찰나에 드러났다 이내 흩어지는 말들을 지면에 고정하려는 시도는 막 내린 극을 회상하는 일과 닮지 않았나.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들,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과도.

그것은 책이기 전에 기록이고, 그에 앞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귀 기울여 듣는 시간이고, 그 안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의 삶이 담겨있었다.

p.175 (수어통역사 김홍남) 우리는 수어가 제스처나 마임이 아닌 언어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무대 위에서 통역사가 춤을 추거나 배우의 움직임을 동일하 게 해야 할 때는 농인 관객에게 그것이 극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게 돕거나 관객 모두가 동일하게 느끼는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거죠.

p.423 다른 사람의 안전을 챙기는 일은 결국 내 안전을 챙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의 안전을 일상적으로 살피는 문화는,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박진아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 덕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여 주는 태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그 감각을 배우고, 다시 박진아 역시 그 덕분에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오롯이 환상과 기쁨만이 담기지는 않았다. 혹자는 고통을, 누군가는 고발과 증언을, 또다른 이는 전복과 비정형을 말한다. 그것들은 모두 현실과 유리된 것은 없었다. 결국 연극도, 무대도, 이야기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것까지도 이것을, 어떻게든, 이유를 묻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다고, 여기에, 그곳에 사람이 있다, 고 말하는 일이 아닐까. 빈 자리를, 말과 말 사이의 공간을 지켜내는 일처럼.

p,222 그때 느낀 슬픔을 완전하게 표현할 말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슬픔, 책을 덮을 수 없는 슬픔, 문을 닫을 수 없는 슬픔'이라고 이름 붙여 보고 싶어요. 저는 이제 이 불완전한 세계에 슬픈 일이 얼나 흔하게, 그러나 매번 고통스럽게 일어나곤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펼쳐 둔 제 오래된 슬픔을 가끔 들여다보며, 문을 닫지 못한 누군가의 슬픔에 머무르는 일을 연습합니다.

p.467 주체를 옮긴다는 건 '내가 없다'라기보다는 '나는 최대한 저 존재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에 가까울 수도 있겠어요. 그런 노력 속에서 그 존재가 만나는 세계를 배열해 보고, 마치 내가 그 존재를 다 안다는 듯이 연기하지 않는 것이요. 그래서 단위와 단위 사이를 의지적으로 연결하지 않는 것일지도요.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의 눈을 깊이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귀 기울여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노상 말로는 세상에 같은 사람 하나 없고, 머리수만큼 다양한 세계가 있다고 그래왔으면서도. 사람이 싫어 발버둥치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사람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건 상상만 해도 기가 쭉 빨리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의 말에 경청하고, 삶을 녹여낸 진한 이야기를, 그가 사랑하는 세계에 얼마간 초대받는 일은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참 귀하다. 마지막 대화가 끝난 자리, 침묵으로 책을 덮으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주, 오랜만에.

p.64 여러 생각과 함께 걸어갈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을까? 너의 걸음 주변에 어떤 발자국들이 남아 있어? 너는 바다에서 혼자 있을 때가 좋아,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가 좋아?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을 혼자로도 만들어 주는데. 같이 갈래? (응응.)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내가 보는 것을 너도 보고, 그럴 수 있을까? (아싸.) 너와 나는 무엇을 같이 보고 싶은 걸까.

p.569 (강수연) 아까부터 저는 비틀즈의 〈Something〉 이 자꾸 떠올라요. "너에게는 뭔가가 있어. 내가 사랑하는 그것에는 뭔가가 있어." 뭔가, 뭔가가 있다고 계속 말하잖아요. 구체적인 말로 표현할 수는 없고, 말로 표현하면 오히려 사라져버릴 것도 같은 무엇. (...) 나한테 작동하고, 나한테 와 닿는 것. 그건 예술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도서제공: 북트리거

#무엇을어떻게왜 #인터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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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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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가 부당히 탄압받는 사회에 저항하는 것. 이상하지 않은가. 무릇 사회란 사람이 모여 만들어진 가상의 공동체인데, 누군가는 사람임에도 사람의 범주 바깥으로 밀려나버리기에 애써 그 지위를 되찾으려 싸워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타인을 죽이고 가두고 때리고 착취해도 괜찮은,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누군가는 다른 이들보다 더 사람이거나 덜 사람이라는 것이. 또한,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제 삶에 앞서 타인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어 나서고야 만다는 것이.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어 절명한대도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이.

어떤 '죽음'은 죽음이 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어떤 삶은 그가 사람임을 증명하려 애쓰느라 온 생을 갈아넣어야만 한다. 이것은 부당하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처참이 당연하다 말한다. 어떤 이름은 굴종의 값으로 하사된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너무도 오래, 당연하게 이어져왔다. 그것은 익숙하기에 당연하다 말해진다. 그러므로 더욱 부당하다.

p.18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답할 말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인권운동 하는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생각 정도이다. 억지로 답을 말한다면 '사람들' 때문이다.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힘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또 하나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서다.


저자 박래군의 삶은 경청의 연속이었다. 나는 그에서 연대의 실마리를 본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어떤 이가 매맞고, 쫓겨나고, 죽임당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람됨을 부정당했다. 그들은 필연히 침묵을 강요당한다. 연대는 말해지지 못하는 말, 영영 들을 수 없게 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어떤 싸움은 너무도 패배로 기울어져 있다.

그가 섰던 현장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죽임당했다. 그러나 정녕 죽으려고 죽는 사람은 없었다. 살려달라고, 살게 해달라고 부르짖던 이들만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진면목일 것이다. '누구의 죽음도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쉽게도 말해진다. 이 말은 어떤 죽음도 그 자체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운다.

p.84 초로의 엄마, 아빠들이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의문사를 알렸다. "의문사를 아시나요?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몰라요. 군대에서, 경찰서에서, 동굴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시체로 돌아왔는데, 모두 자살이라고 해요." 낮이면 유인물을 돌리고, 마이크를 잡느라 지친 그들은 농성장 바닥에 누위 밤늦도록 아이들 얘기를 했다. "내 아들은요"로 시작되는 끝도 없는 얘기를 하다가 울었다.

p.116 기가 막힌 세월이었다. 지금도 나는 김영균의 눈물이, 그리고 천세용의 동생이 종종 생각난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진땀이 흐르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 증세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랑은 가슴을 뛰게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은 자들을 사랑한 것일까?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일까?


모든 죽음은 그, 혹은 그들의 죽음이다. 죽은 자가 있다. 죽음은 단지 드러난 사실일 뿐이다. 쉽게도 말해지는 그 말은 역설적으로 가장 '죽음'을 지우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지 않은가. 어떤 죽음은 남겨진 이를 투사로 만든다. 싸우는 사람만이 그들의 존재를 사람의 존재에서 벗겨지지 않도록 붙든다. 부당하고, 미력하나 무의미하지 않다. 적어도, 이런 세상에 누군가를 홀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지는 싸움을 질 테니 시작도 않는 싸움으로 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의 고통이 곧 그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참사는 반복되고, 유언은 유령처럼 떠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익숙한 패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에 의지해 느리고 더디게 나아가지 않는가.

p.291 시민사회의, 인권운동가들의, 그리고 나의 평화적 생존권 투쟁은 패배했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싸움에서만은 꼭 이기고 싶었다. 갯벌을 맨손으로 간척해서 만든 마을이고 들이지 않은가. 질 줄 알면서도 하는 싸움, 나는 늘 지는 싸움만 하는 것 같다.

p.437 내가 해온 인권운동은 죽은 자들이 죽어 가면서도 외쳤던 '유언'을 현실에 접목해서 구체화하는 일이었다. 물론 갑자기 닥친 죽음 앞에서 한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의 간절했던 바람을 안다. 그 바람 또한 유언일 것이다. (...) 내 싸움은 앞서 죽어간 이들이 가르쳐준 인간 존엄의 길을 따라왔던 것이다. 달리 길이 있지 않았다.


다시, 경청이 곧 연대의 씨앗이다. 연대란 누구도 외로이 두지 않는 일이다. 그의 삶에 숭고나 놀라움이 아닌 '그럼에도'를 말하고 싶다. 찬사는 쉬이 흩어지는 타자의 사건이나, 후자는 나와 우리의 가능성인 탓에. 그러므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지금 여기, 익숙하고 당연한 폭력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고,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믿는다. 누구도 홀로 살아가지 않으므로. 타인에 지는 존재 자체의 책무란 바로 그런 것이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곁이 될 수 있음을, 가슴을 맞대고 끌어안는 마음을. '나빠지는' 세상과 폭력의 권력은 그런 이들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나아지고 있다고.

p.399 "이례적인 일은 사실 언제나 이례적이지 않다는 걸. 너희를 보내고 남은 우리가 해온 건, 슬픔의 강요가 아니라는 걸. 너희의 죽음만 특별하게 기억하려는 게 아니라, 반대로 모든 죽음이 위로받을 일이고 모든 생명이 귀함을 알아주길 원했다는 걸. 나라는 언제나 사람들의 삶과 안전을 담보로 서 있다는 걸. 그리고 대규모 참사는 그 약속에 뚫린 큰 구멍을 보여주는 일이란 걸. 여기에 '놀러 가서 죽었는데' '적당히 해야 하는데' 같은 말은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걸."

p.489 문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폭력은 있다. 구조적 폭력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직접 폭력만 사라졌을 뿐이다(물론 아직도 시민들의 시선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직접 폭력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리적인 공격과 방어가 필요한 때가 아니라 문화적인 방법으로 차별과 혐오, 폭력을 넘어가야 하는 때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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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앤 리즌 3호 : 블랙코미디 라임 앤 리즌 3
오산하.이철용.황벼리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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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참 여러 상황에 웃는다. 아기처럼 입을 활짝 여는 웃음이든, 잔잔히 퍼져나가는 미소든, 입귀를 비트는 쓴웃음이든, 차마 울지도 못하고 실성해 터트리는 웃음이든. 뭐였더라. 울어라, 너만 울 것이다. 웃어라, 온세상이 웃을 것이다... 라던가. 아무튼. 야. 웃어. 분위기 뭐 만들지 말고.

관음과 무관심의 적절한 배합으로 범벅된 지금 사회는 서로가 컨텐츠로 취급하다 못해 태어나자마자 느닷없이 광대로 기능하기를 요구받는 꼴이다. 서로를 오징어 게임이 다른 게 아니라 꼭 사회의 축소판 아닌가. 맡겨 놓은 재미를 긁어짜내고 뼛속까지 쥐어짜이는 도파민의 왕국. 뭐 없어요? 아, 재미 없어. 구독 취소, 싫어요 콱.

p.20 누군가는 장난, 누군가는 정말 그럴 작정이었을 모든 살인 예고를 보면서 이 거대한 쇼 같은 상황은 언제 막을 내리는 거지? 생각했다. (...) 땅에 발을 붙이고 서서 이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자 하는 다짐은 엎질러진 마음만큼 크고 무겁지만, 살아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이것보다 명확한 블랙코미디 쇼는 없을 것 같다.

p.64 그럼에도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묻는다. 도저히 대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한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죽어왔던 이들에게, 자꾸만 부인가를 죽이고 파괴하려는 이들에게 말한다. 이곳이 바로 끔찍함이라고, 당신 서 있는 이곳이 언제나 피와 살의 한가운데라고, 전쟁의 끔찍함이 바로 여기라고. 그냥 이런 것을 한 번쯤 말하고 싶었다고 또 말해본다.


이 360도에 1도쯤 더 돌아 얼핏 보면 정상으로 보이는 돌아버린 세상에 그들이 불려나왔다. 자, 웃겨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웃긴다는 건 뭘까요? '웃기는' 사람, 웃음을 '주는' 역할을 맡은 이들을 큰 박수로 맞이합시다. 웃음이 있으라. 첫 박수가 터지기도 전에 독자는 되묻게 된다. 그런데, 방금 말한 거 누구야? 난 아닌데.

어느날 나타난 귀는, 마치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충격적이고 낯익은 폭력을 불러온다. 듣지만 말할 수 없다. 무결의 수용기에 속삭여지는 말들은 차라리 배설이다. 그것은 우습다. 공연-하/되-ㄹ 수 없는 웃음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헛웃음에의 응답은 조소일 뿐인가? 그렇게 끝나야만 하는가?

p.141 모든 이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예요. 하지만 용서가 만약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건 용서라고 할 수 없죠. 용서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의지로만 가능한 것이니까.

p.212 속삭이는 귀는 여전히 자살 절벽으로 가는 길목의 커다란 은행나무 앞에 서 있는데, TV에 나오는 사람들도, 울타리를 괴롭히던 애들도, 같은 반 아이들과 선생님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어째서?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 모두 아무렇지 않은 거야?


다시, 처음으로. 사람들은 제각기의 이유로 웃음을 터트린다. 새어나오든, 뭐 지리듯 흘러내리든, 파! 하고 고함처럼 내지르든. 그 모든 웃음조차 자유가 아니라면. 방금까지의 뜨거운 분투에서 작위를 발견하는 순간 어색하게 삐걱대는 우리 존재들을 알아차린다면.

세 차례의 종막 후에 남겨진 독자는 정처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묻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요? 웃어요, 말아요? 몰라 나도... 날카롭게, 파렴치하게, 추잡하게 직조된 이야기들은 그렇게 누군가를 불 꺼진 세상에 홀로 남겨두지 않는다. 적어도 꼭 한 사람의 몫만큼은. 웃어라. 너만 웃지는 않을 것이다.

p.141 용서하는 자는 언제나 용서받는 자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돼요. 하느님이 항상 우리 위에 계신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용서한다면, 위계는 뒤집혀요. 완벽한 계획입니다.

p.64 우리는 참 다양한 상황에서 웃고, 웃음은 너무나 다양한 맥락을 가져서, 그래서 어렵다. (...) 우리는 결국 웃는다. 때로는 그렇기에 웃음의 맥락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어찌 되었든 무언가를 비틀어 보일 때 내가 가진 슬픔이 당신들에게 웃음과 슬픔을 함께 주는 일이 되기를 바란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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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 - 분열의 시대에 도착한 새 교황, 레오 14세
크리스토퍼 화이트 지음, 방종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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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종교, 그것도 기독교계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둘로 갈린다. 희한할 만큼 익숙한 세계관이든지, 사회악에 준하는 이익집단이든지. 와중에도 가톨릭은 이 극동아시아나 저 멀리 발원지인 동네에서나 비교적 조용한 이미지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가. 비교적 점잖고 온화한 태도나, 교황 중심의 일관성이라든지. 오래 살아남은 집단이 으레 그러하듯이 따지고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건 의외로 가까이서, 오래 봐야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곧 신의 뜻이었고, 이제는 회의와 검증의 칼날 위에 선 교리가 연일 쇄신과 고수의 생사기로에 놓인 때에 교황이 죽었다. '우리에겐 교황이 없습니다'. 그러니 콘클라베가 단순한 종교적 행사가 아닌 나날이 더해가는 위기에 가톨릭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말 그대로 생사여부에 결부된 일종의 '사건'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p.31 "교회가 스스로 밖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때, 교회는 자기 참조적이 되고 병들게 됩니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동료 추기경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악의 뿌리는 바로 자기 참조성과 일종의 신학적 자아도취에 있습니다."

p.71 교황 재위 말기,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 커플 축복에 대한 결정이 불러일으킨 파장에 관해 질문을 받았다. 자신의 교회관에 비판적인 이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들의 반발을 소수이지만 지나치게 완강한 집단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교회는 결국 죽을 것인가? 상징을 넘어 구심점과 정체성 그 자체일 '교황'은 죽었는가? 가장 보수적인 집단을 이끄는 '진보적 리더'가 부재한 상황에 콘클라베가, 바티칸을 바라보는 신도들은 물어야 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아래에 앉아 있는 추기경들이 선종한 교황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지혜로운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71)?" 결국, 무엇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인가?

그 모든 회의에도, 신도가 존재하는 한 교황은 가톨릭 신앙을 표방하는 국가와 신도 개개인에 충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다. 흔들리는 믿음의 시대에 여전히 오래된 믿음을 말하는, 살아있는 신성의 증인. "Habemus papam!" 신도는 환호했고, 교황은 평화를 말했다.

p.101 콘클라베에 앞서 역시 공개적으로 논의된 문제는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기 위해 필요한 친교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자유를 허용할 수 있는 여지를 어떻게 남겨 둘지에 대한 것이었다. (...) '일치'를 중시하는 진영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진영 사이의 균열이 드러남에 따라, 교회를 이끌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p.134 레오 13세는 급변하는 사회를 틈타 세상을 재편하려는 여러 세력들을 바라보며, 이러한 혁명이 대중에게 초래한 고통을 교회가 증언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뒤 또 다른 교황이 이러한 역할을 이어받기로 결심했다. 이 역할을 맡은 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카고 남부 출신의 69세 남성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침탈, 보편가치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기천년 묵은 종교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살아 숨쉬는 세계관이자 가치이며, 모든 논리에 앞서는 믿음이자 "말씀"이다. 새로운 교황은 사랑이 남아있느냐 묻는 세계에 외쳤다.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고. 그 사랑이 정말 사랑이겠느냐는 물음에 믿는 사람은 말한다. 그렇게 믿는다고. 안으로부터 열려야만 하는 문이 있다. 교회 또한 그렇다.

믿음과 사랑을 깨부수지 않고도 우리, 다양한 세계가 공존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신은 믿지 않아도 저자와 같이 달라지고 나아가려는 교황과 그의 어린양들이 지닌 가능성만은 믿는다. 함께 살아가는 길에 보다 크고 넓은 '사랑'이, 베풀지 않아도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에 새로운 교황의 탄생을 기꺼이 축하하리라. Habes papam.

p.216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입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이렇게 강론을 마무리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를 형제자매로 만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p.228 어떻게 지금 시대에도 신앙이 유지되고 있는가? 이는 설사 역사적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신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교회 역시 과거를 들여다보고 반성하며, 보다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을 실행할 것인지, 하느님의 계명을 어떻게 성실히 따르고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황이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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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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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이 간단한 사실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던 때가 있었다. 어째서 이 답할 길 없는 물음을, 나를, 남겨진 나라는 그 커다란 물음을 나와 함께 내동댕이치고 떠나버렸는지. 어떤 죽음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죽이기를 택하는 것은, 내 안의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내 묻고 싶었다. 내가 정말 쪽팔려서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대체 왜 그랬냐고. 왜 나를 두고 가버렸냐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살아있는 채로, 초라하게, 남겨두고, 그렇게, 왜, 누구 마음대로, 뺏어갔느냐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다음에는 물어봐야지. 언젠가 마주치거든 꼭 따져야지. 그렇게 다짐만 몇 번을 하고 한번도 이루어지지 못한.

부재는 말이 없다. 부재는 있-었-던 자리로 말을 한다. 흔적으로 말한다. 푹 패여 눌린 자국, 켜켜이 쌓인 먼지와 시간의 냄새로 말한다. 떠난 자는 말이 없고, 남겨진 자에겐 말할 이 없이 들어야 할 책임만이 남겨져있다.

p.28 나는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이것이 지난 10년 동안 나를 살아 있게 한 질문이었다. 지금껏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가 아닌, 아직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죽는가? 살 이유가 없을 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살아 있다면 살아지지만, 살아갈 동력이 없어진 사람은 살 수 없다. 그자리에 붙박여버린다. 어쩌면 살아 남겨진 사람은 멈춰선 사람을 두고 나아가기를, 내일로 떠밀려버리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다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따라서 모든 말은 산 사람, 살아 남겨진 사람이 짜맞추고 기워낸 결과다. 이렇게, 아니, 이렇게였지, 하고.

그들의 흠결은, 용서받을 수 없는 어떤 일들은, 살아있었다면 따져 묻거나 하다못해 멱살이라도 틀어잡았을 모든 순간들은 죽음과 함께 침묵이 된다. 저 깊이 잠겨버려 흔적도 자취도 남기지 않는 영영 닫힌 문, 덮어씌워지는 수면. 어떤 죽음은 이해마저도, 하지 않은 말조차도 살아 남겨진 이에 떠넘겨버린다.

그렇게 삶에로 떠-밀린 이들에게 사는 일은 마른 익사와도 같다. 살 이유를 알아내든 찾아내든 쥐어짜내든, 뭐든 손에 쥐이지 않는 멀끔한 꼴로 고요히 죽어가는 것이다. 살만해서, 괜찮아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건 그대로 두고, 웃기면 웃고, 좋으면 좋다 하고, 간간이 마음 저 아래서 출렁이는 소리가 나면, 그래,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게 아니라 꾹 참고 하나, 둘, 세어야 한다는 뜻이다.

p.309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도와달라고 손 내밀어야 했던 두 사람이 결국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서로의 손을 잡은 거지. 길이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아무것도, 너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허부적대며 천천히 잠겨 죽어가다 이제는 티도 안 나게 출렁, 하면 하나, 다시 하나, 둘은 영영 오지 않을 테니까, 또다시 하나… 좀처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초침처럼 주저앉는 법, 마른 땅에서 조용히 우는 법을 알아야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이 불가해한 가해를 억지로 용서의 틀에 욱여넣지 않는다. 그저, 살아-있음에 집중할 뿐. 살아 남겨진 이의 생에 여전히 긴 시간이 남아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함을, 그럴 수 있음을 말할 뿐. 그런 이유로 오랜만에 손을 잡아주고 싶은 이야기를 만났다. 그냥 말없이 꾹 잡았다 놓고 싶은 그런 마음. 이 이야기가 말하는 용서는 거창하지 않다.

남겨졌음의 수치, 상처가 단단히 달라붙어 엉긴 존재라는 모욕 대신 사랑했던 기억을 부정하지 않는 것, 오직 그뿐이다. 모든 미련을 꽁꽁 끌어안고 잠겨 죽어버리는 대신, 저 아래 둘 것은 두고, 살아있으므로 들이마실 숨을 향해 떠오르는 일. 막다른 길에 선 이에게 손을 내미는 일. 다시, 뒤늦은 회복은 결국 산 사람을 위한 일이다. 살아가야 할 시간을 막다른 길로 여기게 하지 않는 일.

p.209 눈가가 뜨거워졌다가... 엄마 귀에 대고 미안하다고 속삭였다가···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모든 비극-아님은 뻔하고 진부하다. 클라이맥스에서 장렬히 산화하지 않으니. 그러나 살아있다는 건, 살아 남겨져 기억을 되씹으며 그런 순간도 있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은 그렇게 밍밍하고 시시하다. 그래야 산다. 살아내는 일은 그 지난함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에이, 살아버렸네, 들의 손을 들어주려 한다.

그래, 살아라. 살아서… 계속 살아. 숨도 쉬고, 밥도 먹고, 어떤 날엔 숨막히게 그리워하고, 말을 하고, 웃고… 때때로 이 짓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날엔 새처럼 대가리를 처박았다가, 폐를 쥐어짜내어 숨을 토해내고 다시, 들이마시고. 그렇게 살라고, 열없이 어깨나 툭 쳐주고 싶다. 혹시 아나. 그러다 어떤 날엔 뒤늦은 알라뷰! 라도 터져나올지. 그렇게 살아지는 삶도 있는 법이다. 남겨진 마음에도.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있는 힘껏 들이키는 숨에, 기다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여기 있었다고, 잊혀지고 지워져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그런 시간이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다시, 여기 있겠노라고. 살기 위해 아래로, 더 깊이, 침잠하다 마침내 숨과 함께 떠오르는 그런 삶이. 닫힌 수면을 헤치고 나오면, 젖은 얼굴로 마주할 삶이. 세계를 관통해 단단히 맞잡아오는 손.

p.335 "떠나고 나면 내가 사랑을 줬던 순간은 다 잊고 잠시 지쳐서 했던 생각, 그 생각 하나에만 매몰되더라고요. 죄책감. 후회.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보고 싶고, 밉고. 겪어보니까 이 감정들이 모순이 아니더라고. (...) 그 일로 나까지 죽이지는 말자고 새기고 또 새기면서. 그래서 다 정리하고 여기로 온 거예요. 살려고, 살아보려고."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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