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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나
이종산 지음 / 래빗홀 / 2025년 3월
평점 :
어느 날 거대한 고양이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을 고양이로 사시겠습니까?" 혹자는 고민할 틈도 없이 답했고, 또다른 누군가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조심스레 결정했다. 그렇게 전 세계 인류의 5%가 고양이로 변했습니다. 네??? 정말고양이가되었나요?? 네 실화입니다 알아서하세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최저최악끔찍보송사건이란 말인가요...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야옹.
어느 날 고양이가 물었습니다. 사람을 그만두고 싶지 않니. 차라리 고양이로 살고 싶지 않니.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 마음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남겨진 사람은 알 방도가 없다. 그저, 행복하니, 물으면 가만히 깜박이는 시선이 돌아올 뿐. 그렇다면 이젠 정말 어떡하면 좋지. 네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다르게 있는 여전한 세상에서.
p.13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만나는 분' '같이 사는 분' 하는 식으로 모호하게 말한다. 부모님이나 동생에게는 '같이 사는 친구'라고 한다. 이런 지칭에는 쿠션이 깔려 있다. 나는 비밀을 싫어한다. 적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비밀보다 충돌을 더 싫어한다. 누가 내게 참견을 하거나 내가 선택한 것, 내가 선택한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상황도 싫고, 내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반박해야 하는 상황도 싫다.
p.31 나는 동반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존재가 필요했다. 그는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다. 그런데 그 존재가 고양이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고양이가 된 사람의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 고양이만큼 살까, 사람만큼 살까?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묻게 된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저 팔자 좋은 동물로 태어났더라면, 안 씻어도 귀엽기만 하고 하루종일 자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으니 지금보다 훨씬 낫지 않았을까. 그래서였을까. 남겨진 사람들은 묻는다. 행복하니.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사실 사람으로 사는 일은 피곤과 환멸의 연속이다. 할 수 있는 것 많고, 해야 할 일은 더 많다.
게다가 사람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야 하는 습성까지. 생각 많은 동물은 꼭 그 머리 수만큼 복잡한 관계에 얽혀 산다. 그런 이유로, 이 허무맹랑한 환상은 무료한 일상에 들이닥친 달콤한 파랑이기도, 비현실을 빌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이도 하다. 동시에, 비현실에 힘입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은 역설적으로 현실에 절실히 필요하고 또 이미 도래해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존재, 의미, 삶. 뭐 그런 것들.
p.89 프공은 그런 면에서 단단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남들의 시선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없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런 성격 때문에 남들과 부딪힐 때도 종종 있지만, 결국 인정할 사람은 인정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나간다. 나는 프공을 보며 그런 것을 배웠다.
p.175 고양이가 되다니 운이 좋다. 그동안 내 인생은 그리 크게 운 좋은 일도 없었고, 또 그리 크게 불행한 일도 없었다. 그럭저럭 남들만큼. 가끔 운 좋은 일도 있었다. (…) 가끔 운 나쁜 일도 생겼다. 운이 나쁜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의외로 나쁜 일들을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이다. 지금 돌아보니 일부러 지우면서 살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작게 운 좋은 일들과 작게 운 나쁜 일들로 내 인생은 이루어져왔던 듯하다.
그런 이유로 이 이야기는 단순한 환상을 넘어 물음으로 뻗어나간다. 사는 일에 정답이 있느냐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안 되는 거냐고. 그 사람이라서, 이런 마음이라서, 그런 이유로는 안 되는 걸까. 어떤 이름은 꼭 틀에 박힌 형태로만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 그게 삶이래도, 사랑이래도.
누군가는 조롱이 되어버린 안다무(안온, 다정, 무해)의 총집합이라 말하겠지만, 뭐랄까, 이런 두 박자는 너무 느리고, 한 박자보다는 긴, 한 박자 반쯤 느린 이야기도 세상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남은 삶을 고양이로 사시겠습니까?" 쉴새없이 몰아치고 닦아세우는 세상에서 숨을 멈추는 그런 순간이, 그 작은 틈이 절실했던 사람이 답하지 않았을까.
p.47 그는 고양이가 되었어도 그였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방 안에 고양이가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나는 금방 그를 알아보고 골라낼 자신이 있다.
p.150 심지어 책과 관련된 일은 명문대를 나오거나 의사 같은 직업을 가진 것보다 사회적으로 더 낮은 위치에 있다. (...)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남에게 말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운 것은 내 직업의 사회적 위치가 낮아서가 아니라 책과 관련된 일이 너무너무 멋지다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의 자의식 때문이다. 그 우쭐거리는 놈을 없앨 수가 없어서다.
아무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울부짖지 않는 충격이라니,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천진함을 세상 물정 모르는 미숙으로 치부하는 나의 세계가 닫혀있을 뿐이었다. 어떤 맑음은, 어떤 긍정은 무수히 깨져나가는 가운데 단단히 살아남은 것임을, 아니, 어쩌면, 반짝이는 것은 수없는 흠과 파편의 결과라는 것임을 몰랐던 이유로.
작가는 말한다. 여전히 이런 사람이 남아있다, 이런 마음이 있다, 고 말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아있다고, 그렇게 믿는다고, 믿어야만 한다고. "이해와 존중을 품고 나아가는 환대의 미래"는 이런 의미일 것이다. 솔직하게 사랑하는 마음, 그저 그대로도 괜찮을 수 있다는 용기. 당신에게도 기회가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을 고양이로 사시겠습니까? 고요한 사랑. 그저, 이 말을 남길 뿐이다.
p.216 그냥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해서. 사람이었던 그도 너무 사랑하고, 고양이가 된 그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건데. 사람이었던 그가 그립고, 고양이가 된 그가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여러 마음이 너무 복잡하게 뒤섞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순간이 있는 건데. 그런 마음을 무신경한 타인에게 말할 수는 없다.
p.243 그곳에서는 이상하게 희미한 희망을 품게 된다. 어쩌면 이곳에서 내가 기다리던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랑 그 비슷한 것, 아니 비슷한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어떤 이야기가 이곳에서 탄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 말이다.
*도서제공: 래빗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