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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평점 :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듣고 말해본 적이 있을 말들이 있다. 싸가지 없는 놈, 나이도 어린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노친네… 너무 쉽게 말해져 혐오라고 불리지도 않는 이 말들에는 나이라는 공통점이 도사리고 있다. '애새끼'도 모자라 '유충'에서부터 잼민이, 급식충, MZ, 아줌마, 영포티, 틀딱, 노친네까지, 우리 사회에서 멸시 어린 연령 집단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툭하면, 주로 저 마음 불편한 소리에 '갈라치기 하지 말라'며 예의 '준엄한 꾸짖음'이 횡행하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촘촘하게 규정짓고 혐오한다. 나이보다는 개인적 속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청년세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구성하는 연령주의적 제도 및 인식은 필연히 개인과 사회 수준 모두에서 충돌하고 갈등한다.
p.9 연령차별주의는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차별이면서 가장 잔혹한 거부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는 달리 연령차별주의 피해 당사자들은 차별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는 누구나 다 평등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연령차별주의가 너무나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제도화된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p.65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언젠가 SNS 댓글에서 본 적이 있다. 임산부 우선석에 노인이 앉아 비켜주지 않았다는 토로에 달린 내용 중 "10년만 지나면 그런 노인네들이 다 없어져서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황당하고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혐오에 있어 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의 문제가 이렇게나 뒤섞여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댓글창을 떠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초상은 배제와 구분에 다름아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한국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조롱과 혐오일 것이다. 이 둘은 극단적인 타자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져있듯 구분짓기는 혐오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혐오할 수 없다. 혐오 대상으로서의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은 타집단, 그것도,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서는 절대 내가 아닌 이들에게 전가되어야 하므로.
p.88 나이에 따른 혐오스러운 멸칭들이 각종 언론과 일상 대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이는 '일상성'을 넘어서 '사회성'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 이제는 우리 사회가 언어를 통한 탈인간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대안적 표현을 학습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p.144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노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전의 어떤 세대도 지금의 노년 세대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오랫동안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고령층은 문화적 전위 의 역할을 떠맡아 새로운 노년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노년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의 연령주의는 너무 막강하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단순히 살아온 햇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되는 역할과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금지하는 강력한 규범이자 위계로 기능한다. 이것은 탈-규범적 전위를 요구하는 동시에 '감히' 전형을 벗어나는 이레귤러를 가혹하게 조롱하고 탄압하는 모순적 사회에서 이중구속으로 기능한다. 연령주의의 폐단은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는다. 아젠다 선정에서 실질적 참정권까지, 정치-제도의 곳곳에 연령주의의 뿌리는 깊고도 촘촘하다.
예의 청년정치를 표방하는 모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무능과 도덕성은 차치하고라도, 청년유권자에 '우리'로 묶이려 시도하며 그 자신이 마치 아이콘인 것처럼 행세하는 전략이 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가 청년이라고 불릴 만큼,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정치기득권이 고령화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64 나이 멸칭은 특정한 개인들의 행태를 전체 나이대의 공통적인 특성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사회는 특정 나이대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와 이들에게 기대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자꾸 특정 나이대 사람들에게 뭘 해야 한다고 규정을 내린다. 그 규정에 어긋나면 멸칭이 만들어지고, (...) 유행이 되어 빠르게 번지고 오프라인까지 선을 넘어 퍼져 나간다.
p.321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꼽히는 것도 이런 나이에 대한 차별이 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유권자의 목소리'는 평등하게 대표되지 않는다. 소구와 '표밭'이 따로 노니 아젠다는 자연히 과시행정에 급급해진다. 고령화와 동시에 경제-기득권화 된 정치권이 호소하는 부양 부담의 증가는 과연 누구의 '억울함'인가. 그놈의 '갈라치기', 과대표와 청년 호도 정치인의 부상은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끊임없이 나 아닌 집단을 배격하는 인식은 과거와 미래, 사회와 개인 모두를 옭아맨다.
삶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리게 태어나 늙어 죽는다. 어느 순간도 삶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어려서, 젊어서, '적당한 나이'를 지났기 때문에 '임시'로 밀려나기를 요구받는 사회에서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불안하다. 결국 나이는 수로 계산될 수 없는 삶을 욱여넣지 않는, 그저 '중요한 숫자'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생의 모든 시기가 그 때만의 가치를 갖는, 제각기 어떤 사람의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04 대통령이 될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은 2030 청년세대의 정치적 역량 약화와 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고령화로 인해 선거에서 노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정치인들은 고령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공약 경쟁을 함으로써 청년을 위한 정책은 감소할 가능성이 있는데 피선거권 제한까지 더해지니 문제는 한층 심각하다.
p.243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치인이나 재벌 등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