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밈학과 같은 건 없습니다
QNTM 지음, XCninety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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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황금가지

생각해보라. 생각할수록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했으되,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듣고, 겪었으나 전해질 수 없는 것을. 한 걸음 나아가, 당신이 바라본 것이, 뇌리를 스친 '그것'이, 당신의 의식을, 차원과 인식의 지평 너머에서 ◼◼하고, ◼◼◼◼ 나머지, 혹은, 본능적으로, ◼◼을 ◼◼한다면, ◼을 찢고, 다가와, 휘감고, ◼◼후에, 자, 지금 당신은, 뭘까.

익숙한 그림처럼 흉측한 몰골의 악의 무리로부터 '평범한' 일상을 지켜내는 그림자 영웅이 아니라, 연구하고, 수집하며, 패퇴하기를 반복하는, 대체 무엇인지 알 수도 떠올릴 수도 없는 그런 희한한 집단이 있다. 그들의 업적은, 아니, 존재는 숨겨지며, 지워지고, 잊혀진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이해와 통제 너머에 군림한다. 아니, 그렇게 믿어져왔다. 그러나, 핵심과 처절한 무력의 교집합 어딘가에 거하는 '◼'은, 순식간에 ◼◼의 ◼◼과 ◼◼ 그 자체를 ◼◼◼◼◼ 시작하는데…

p.20 "항밈은 전파되지 않는 관념이에요. 항밈성 개체 및 현상은 정보를, 특히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거둬가서 집어삼키죠. (...) 직접 관찰할 수도 있고 눈에도 멀쩡히 보이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인식해요."

p.336 녀석이 지닌 악의적인 중력이 인간성과 그 모든 인간의 관념을 자기 궤도로 끌어들여 알아볼 수 없도록 왜곡시킨다. 그 아래에서, 그 맥락 안에서 모든 것은 최악의 형태로 타락한다. 기쁨은 복수의 쾌감이 되고 자립심은 병적 유아론이 된다. 사랑은 숨 막히는 폭력이 되고 자부심은 굴욕이 되며 가족은 덫이 되고 안전은 피해망상이 되고 평화는 불만이 된다. 사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문명은 궁극적으로 혐오로 뒤덮인 폐허가 된다.


우리는 패배했다. 수없이 패배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처참히 ◼◼되고 있다. 우리와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이들의 ◼◼ 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채, 천천히, 완전히 망각되고, 인식과 존재의 세계 바깥으로 내던져진 채 ◼◼◼갈 것이다. ◼◼되었다는 사실조차 ◼◼질 때까지.

◼◼이 인간과 접촉할 수 가능성이 존재하며 인간 존재와 떨어질 수 없이 결부되는 한 그를 피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필연히, 무와 유의 경계가 무용케 들이닥치는 트롤리 레버 앞에, 선로 위에, 차창 너머에 붙박여 끝없이 절망할 운명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발버둥치고 치받기를, 번번이 실패하고 처참히 무너질 줄을 알면서도, 순응과 평화 대신 발악하고 반격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가?

p.98 "사람들이 있었어, 우리보다 훨씬 발전된 기술을 지녔을. 수천 년 전에 존재했을 테고, 어쩌면 수만 년 전이었을까. 정확하게는 몰라.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명하기도 어렵고. 문화적 밈복합체가 치명적으로 피폭당해 버렸으니까, 이 문명의 핵심 문화 개념, 이들이 창조한 존재들, 이들이 무엇을 상징했고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 모두 이제는 알 수도, 전파될 수도 없어."

p.342 "우리는 지금껏 어느 때보다도 더 처참하게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비밀 조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 기구 바깥의 그 누구도 우리에게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야. (…) 우리도 결코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테지.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냥 죽는 사람은 없어. 누구도 아무 일 없이, 저절로 죽지는 않아. 죽음에는 원인이 있으니까."


그 답을 찾아 수없이 헤매왔다. 묻고 부딪히고 들이받다 픽 죽어버리기를 반복해왔다.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뼈저리게 무력해지는 지점, 가장 취약하고 또 가장 연약한 곳이 우리의 인간성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눈 뒤편, 뇌 깊숙한 곳, 의식의 심층에 처박아넣는 안식의 손길 대신 등 뒤의 세계를 지키기로 마음먹는, 마주치는 시선에, 다음, 또 다음에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패배하고, 절망하고, ◼◼◼할 것이다.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망설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끝내 사라지기 전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완과 미지의 실마리를 붙잡고 일어설 누군가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 이 비합리와 연약함을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기 때문에, 그의 세계에 '가능성이라는 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말해왔듯 홀로 전능함은 곧 절대적인 무능에 다름아니다. 그러므로, 언젠가의 ◼◼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패배가 아닌 '다음'의 선언을. "항밈학과 같은 건 없습니다".

p.46 리는 컴퓨터로 가서 미지체 항목을 다시 열어 희생자 수에 막대기를 하나 더하고, 지금부터 시도해 볼 방법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자신이 마지막 희생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방법 역시 실패했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p.147 애덤은 마리를 믿는다. 마리가 얼마나 빠르게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다시 맞출 수 있는지를 안다. 말도 되지 않는 세계를 상대로 싸우며 진실만을 분리해 낼 수 있다는 것도. 그녀라면 우주 전체를 상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불안감 하나가 뱃속을 찔러 온다. 애덤은 결국 이 말을 삼키지 못한다. "하지만 지면? (…) 지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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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 2026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박서련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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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단편집, 개중에서도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것엔 언제나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소개나 작가 목록에 기대보다는 겁부터 집어먹기 때문이다. 분명 어느 작품인가엔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모였으니 내 마음에 꼭 들어맞는 글이 하나쯤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순간은 몹시도 짧아 허망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만 팔랑이며 부여잡고 있을 꼴이 뻔하다… 뭐 그런 생각에.

지난 한 해에 발표된 단편소설들 중 빼어난 작품을 추리고 가려 심사한다는 김유정문학상도 벌써 20회차를 맞았다. 그간의 수상작들을 쭉 톺아보고 난 후에 읽는 올해의 후보작들은 각별하고 걸출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동시에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변해왔는지, 그 안에서 문학은 무엇을 찾고, 드러내고, 돌파하고자 애써왔는지 몸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p.48 〈김채원, 태양에서 멀리〉 치워 없애야만 하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됐다. 누가 보아도 선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야기,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것들. 에구, 눈부셔라. 에구, 싫어라. 솔지는 이 모든 것에 필요 이상의 적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지의 약점을 건드렸다.

p.97 〈박민경, 별개의 문제〉 그 불안 속에서 엉뚱하게도 음식물 처리기가 떠올랐다. 만약 정말 늦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일 거다. 개를 집어삼키고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지게 할 거대하고 똑똑한 구덩이.


주제와 서사를 달리하는 여섯 작품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문학이기 위해, 다른 무엇도 아니고 문학이기에 할 수 있는 일과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수없이 물어온 흔적이 지금, 여기의 취약하고 연약한 것의 형태를 입고 그려졌다는 느낌을 준다.

언젠가의 문학은 세상을 바꿀 창이었다. 동시에 어딘가의 문학은 사상의 지평이었고, 또 누군가의 문학은 읽는 이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어야 할 책무를 졌다. 그 모든 것을 두고 묻고자 한다. 현실이 상상을 불가하게 한다면, 현실이 발을 떼고 나아가기를, 드러내기를, 균열-하기를 거부한다면, 아니, 부인한다면. 이 이야기들은 무엇을 선언하는가. 금을 내고 추악하고 피흘리는 '것'을 까발리는가.

p.90 〈박민경, 별개의 문제〉 진심이 된다는 건 멈추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딱 그만큼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게 진심이니까. 그건 스스로를 매일 시험대에 올리는 일이자 밤잠을 설치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p.166 〈함윤이, 굴은 구르지 않는 돌〉 "어떤 때 애인은 나한테, 아니, 나를 통해서 뭔가에 항의하려는 것 같았어요. 가끔 그가 큰 소리로 말하길, '그쪽' 남자들이 '이쪽' 여자들을 때리고, 욕보이고, 아무렇지 않은 체 살아가고 있어. 그러면서 내 몸을 마구 주물렀어요. 내가 아파, 아파, 소리치고 내 살이 빨갛거나 파랗게 변할 때까지요. 그런 뒤에 애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감히 평하고자 한다. 이것은 경계의 이야기다. 침범하고 틈입하며 범람하는 변경, 언제나 우리-아님인 동시에 우리-안의 위험을 상기하. 가장 찬란한 진창, 무저갱의 끝이다. 앞이고, 과거이며, 순간마다 도래하는 미래이다. 가장 마지막의 가능성이고, 허리째 잘려나간 이름이다. 자격 없는 이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시도이다. 여전히 미약하고, 더없이 취약하다.

이 진부한 패배의 또다른 이름은 지금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자리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세계에 상처입고 비틀리는 이들의 면면, 일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뻔뻔하고, 치졸하고, 가만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취약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그 교차점들에서 상처를 읽었다. 차마 말이 되지 못한 것, 비로소 그 이름을 부르게 될 때, 문학의 길은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두려워하며, 혹은, 조용히 떠는 채.

p.68 〈김채원, 태양에서 멀리〉 그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농담 중에 한 개씩, 두 개를 골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가까이서, 그 다음에는 멀리서. 그것들은 솔지 말고는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이었다. 솔지 말고는 아무도 듣고 웃지 않는, 그러나 때때로 빛을 발하는 솔지만의 불행.

p.181 〈함윤이, 굴은 구르지 않는 돌〉 빛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가빠졌다. 눈을 들면 절반쯤 설치된 조명등 빛이 여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움켜쥔 피부처럼 붉거나 푸른 빛에 잠긴 얼굴들, 그녀들은 돌들 틈에서 만들어진 양 보였다. 또는 그저 돌 자체로, 굴속에서 오랜 시간 흘러내리고 솟아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변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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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카인 - 21세기의 소설
카린 보이에 지음, 이유진 옮김 / 미행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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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요. 꼭 그만큼 끔찍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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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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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사계절출판사

태초에 뭍으로 기어오른 짐승이 있었다. 이윽고 그것은 땅을 밀어 서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기 시작했다. 따스한 피가 도는 살갗을 맞대고 겁에 질린 밤을 보냈다. 어느샌가 그들 중 누군가가 두 발로 일어서 얼굴을 마주했다. 시선을 숨기지 않는 눈과 매달리지 않고도 능히 오르는 다리, 무른 살갗과 움켜쥐는 손은 다가서고 끌어안으며 심장을 맞대는 존재를 가능케 했다.

우우, 울음이 아닌 '말'을 속삭이기 시작한 순간, 인간은 기만하고 찬양하고 몰두하는 짐승이 되었다. 그렇게 우와 열을 넘어 새로운 선이 그어졌다. 초월이라는 선이. 뛰어넘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 재목이 정해져있다는 믿음으로 패이고 쌓아올려진, 차원. 어느 작가가 말했듯, 피에 젖은 3키로짜리 스펀지. 무리 안의 짐승, 무리를 만드는 짐승, 무리 위에 서는, 우월한, 짐승. 이 짐승은 입을 열어 말했다. "나".

p.404 루미는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 그런 이탈이 불안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특별한 감상을 주었다. 경계를 뛰어넘은 초월자가 된 것처럼.

p.832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는 굴욕적인 모습을 한대도 비웃음을 살 일은 없었다. 앞에서 미약한 빛이 느껴졌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터널이 끝나 가려 하고 있었다. (…) 그런데 그 때 맞은편 검은 차창 위로 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무릎을 꿇지도, 두 손을 비비지도 않는… 똑바로 선 인간.


인간이 너와 나를 구분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이는 시원에서 갈라지는 고통을 내포한 생태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끔찍한 단절, 절대적인 공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둘 뿐이다. '태어남' 이전에서 벗어나지 않기, 혹은 모든 것을 '자기'로 끌어들여 하나가 되기.

전자는 절대적인 신뢰와 순수로 불변의 안락함을 얻을 수 있고, 후자는 수없이 맞닥뜨리는 '다름'을 매끄럽게 묵살하는 포식이다. 이 둘은 일견 다양한 형태와 언어로 드러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고 절대적인 신뢰에 순응하려는, 그렇게 책임과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며 반복되었다. 질서, 권력, 창조, 안정, 진화, 문명, 순수, 정화, 나.

p.213 세상을 바꾸는 일? 루미야, 그건 어린아이들이 꾸는 하룻밤의 몽상일 뿐이란다. 갖고 놀던 장난감이 지루해 발로 부수어서 재조립하는 것과 비슷하지. 아이들은 잠깐씩 그래도 돼. 어차피 금방 꿈에서 깰 테니. 하지만 나이를 먹고도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이 있다면,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단다. 이 완벽한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는 반란이고 폭동이…

p.322 다윈은 자신을 둘러싸고 흐르는 기류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의 교복에 얼마나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지, 자신의 존재에서 얼마나 깊은 열등감을 느끼는지 조금도 인식하지 못했다. 저렇게 많은 걸 가진 인간이 어떻게 자기 스스로에게 저렇게까지 무감각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전개가 퍽 분명함에도 읽는 이를 거듭 혼란에 빠트리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와 독자가 꼭 닮아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800여쪽의 이야기가 정결과 부정, 흑과 백, 순수와 혼란, 인간과 짐승을 가르고 접붙이기를 반복하는 동안 독자는 판단하고, 한 편에 서며, 가려내다 결국 한 지점에 갇혀 헤매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이렇게 부르고, 아니, 시뻘건 오물처럼 퍼붓고 싶다. 오만, 오만, 오만!

과거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오만. 죄와 벌, 선과 순수가 매끄럽게 나뉜다는 착각, 그를 완벽하게 판가름힐 수 있다는 오만. 태생부터 무결한 '시조'가 될 수 있다는 오만. 결코 뒤바뀔 수 없는 우열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오만. 순수한 빛이 투명한 유리같은 존재를 곧게 뚫고 환히 비추리라는 오만. 완벽이 존재한다는, 혹은, 완벽 너머의 초월에 순종하고 나아가 그 자신이 되리라는 오만. 나와 타자를 완벽히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

p.153 "그게 정말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상위 지구만을 제외한 모두의 바람이었는지를 따져 봐야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지. 처벌의 순간이 오자 모두 뒤로 물러나서 9지구를 지목했으니까. 결국엔 보기 좋게 9지구만 죄의 땅이 돼 버렸지." 루미가 남자를 신경 쓰는 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관용이라고 하잖아요. 주도 인물들이 아닌 이상 국가 발전을 위해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p.445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단다. 애초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 넌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악마적인 면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야. 아무리 똑같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런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구나."


이 오만의 연대기는 멈출 곳을 찾지 못한 채 질주한다. 역설적으로, 그 모든 과정은 '성장'을 표방하는 동시에 그것을 대가로 치른다. 무비판적인 순진은 무비판적인 신뢰에 기인한다. 그것은 그 대상을 옮겨가거나, 복제하고 이식할 뿐 '다름'의 존재를 부인한다. '나'의 '바깥'을 부인함으로서 변화, 이동, 변/태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한다. 순수로의 질주는 원형의, 시원적인 순진을 필요로 한다. 이 얼마나 정결하고 매끄러운 퇴보란 말인가.

그리하여 이 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아들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성장기이자 핏줄로 이어져온 칼자루를 거머쥐는 결단이나, 그 아래에는 진화에 대한 통념 향한 지독한 조소라 할 수 있겠다. 어린양에서 두발로 선 존재로, 무리 없이 살 수 없는 짐승에서 "무릎을 꿇지도, 두 손을 비비지도 않는… 똑바로 선 인간"으로 진일보한다는, 완벽을 향한 직진이라는 순진한 믿음. 그렇게 무결의 존재, 바깥을 잃고 무리 위에 서는 우월한 짐승은 입을 열어 말한다. 나, 오직 나.

p.179 "하지만 애초에 더 나은 세계가 되느냐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 바퀴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 나쁘게 변한 세계보다 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건 사슬에 묶여서 꼼짝하지 않는 바퀴니까. 아무것도 변하는 것 없이 모든 게 제자리에만 멈춰 있다면 인간은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p.470 그러나 웃고 있는 제이의 사진이 놓인 제단에 다윈을 안고 선 순간, 나는 왜 내가 다원을 제이 앞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다윈은 한 마리의 양이었다. 내가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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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 - 갈등, 변절, 내로남불의 시대를 이해하는 도덕심리학
오둔 달 지음, 배동근 옮김 / 북트리거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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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북트리거

인간이 '짐승과 인간'을 구분하게 되면서, 인간이 '금수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해 뒤엉키는 꼴을 보며, 배반과 대립과 회유의 경험, 정치적 갈등과 수사의 고도화로 인헤 그 필요성을 절감함에 따라, 소위 '도덕성'이라는 것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끝없이 이어져왔다.

무엇이 '선과 악'인지, 도덕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최소한 합의된 정의에 이를만큼의 규명이 가능할런지,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아니면 인간 본성에 기본으로 탑재된 것인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인지 없던 게 생겨나는 일인지, 수도 없이 묻고 공방해온 역사가 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전방위적 물음 또한 켜켜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p.37 도덕성을 정의 내린다고 어떤 도덕적• 경험적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 도덕성을 정의 내린다고 해서 무엇이 옳거나 그른지 혹은 좋거나 나쁜지, 또는 사람들이 무엇을 옳고 그름,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는지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 정의는 우리가 도덕성과 도덕적 변화를 연구할 때 기준을 잡아 줄 뿐이다.

p.55 변덕은 우리가 도덕성에 기대하는 일관성을 위배한다. 도덕에 일관성을 기대하는 까닭은 그것이 보편적이고 가역적이며 편파적이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황금률과 정언명령의 척도이다. 우리의 도덕관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한지 혹은 불리한지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저질렀든, 당신이 나에게 저질렀든 혹은 p가 r에게 그랬든 잘못은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변덕스러운 도덕 감각을 마주할 때 느끼는 실망은 결국 일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융통성 있으면서도 일관적이나 너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자명한 선을 무시하는가? 왜 나는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 '옳음'을 지향하나 너의 그것은 변덕과 맹신에 기반하는가? 왜 '그 때 그 사람들'은 이토록 자명한 선을 두고 불보듯 뻔한 악에 동조하고, 매달렸는가? 인간의 본성에 '선'이, 이타심과 공존을 가능케하는 어떤 부분이 내재되어 있는가? 아니면 정말 '악하게' 태어나 '선'을 학습하며 자라나는가?

그렇다면, 똑같이 배우고 자란 '그들'에겐 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저 모양이란 말인가? 여전히 도덕성이 인간의 생존을 담보하지는 못해도 강력한 지지력 중 하나임을 말할 수 있는가? 쉽게 풀기 어려운 문제다. 나부터도 '선'이라는 개념 자체와 성질로서의 '선함', 암묵적이거나 성문화된 '사회 규칙'과 '도덕'과 '도덕성'을 마구 섞어 쓰고 있으니 그 용어와 각각의 영역의 분리부터 모호한데다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각자가 상대를 악마화하고, 혹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마당에 제삼자적 분석이 용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p.80 한 가지 질문은 두 사람이 어떤 행동이 해롭고 도덕을 위반하는지 아닌지를 놓고 의견 차이를 보이는가이다. 틀림없이 어떤 이에게는 해로워 보였던 행동이 또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일 수 있다. (…) 도덕심리학 논의를 할 때, 결정적인 질문은 어떤 행위가 진실로 해롭냐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이 해로울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하느냐이다.

p.207 도덕심리학이 던지는 질문은 왜 교육자, 연구자, 학생들이 특정 상황에서 부정행위나 권위에 대한 복종 문제를 놓고 의견이 달라지는가 하는 점이다. 실험을 통해 입증해야 할 질문은 도덕적 판단이 행동을 이끄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끄는가이다. (…)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힘이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무력해질 것이며, 우리는 그런 존재를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것이다.


이 난감한 영역에 발들이는 학문이 바로 도덕심리학이다. 저자는 무엇이 옳은지, 왜 옳게 '되는지'가 아닌 사람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도덕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혹은 '느끼는'지를 연구와 현실의 사례를 통해 도덕심리학의 관점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아울러 종장에 나아가서는 이것이 연구 데이터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동시에 독자를 이 흥미로운 영역에 초대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언동이 버젓이 울려퍼지고 있다. 이에 혹자는 이해를 말하고 한편에서는 화합을 말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그조차도 찍어 눌러 말살하려 세를 불린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는 동안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한 생각은, 이런 현실을 두고 근원적인 해결책에 앞서 당장 뭘 할 수 있는지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 그대로의 '현실'일 것이다.

p.251 미디어, 대화, 또는 교육을 통해 받아들인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서로 다른 믿음과, 그 믿음이 만들어 내는 서로 다른 판단의 연결 고리들은 두드러진 정치적 견해 차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런 차이는 어떤 사람들의 도덕적 관점이 변덕스럽다거나, 혹은 모든 사람이 이기주의, 편협한 지역주의, 비합리적인 충동 따위에 지배되는 변덕스러운 도덕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두 집단 사이의 이런 균열은 공정성에 대한 관심사와 각자 인식한 빈부 격차의 원인 사이에 서로 다른 연결 고리를 채택할 이유를 발견하면서 초래된다.

p.286 상황에 따른 도덕적 변화는 어떤 사람이 같은 행동을 상황에 따라 도덕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도 하고 그르다고 판단하기도 하는 이유를 물을 때 우리가 다루게 되는 문제다. 상황적 변화는 발달적 변화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하다. (…) 다행히도 아이들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고 자라지는 않는다. 개개인의 평생에 걸친 도덕적 변화는 이미 변화를 겪었고 여전히 겪고 있는 공동체와 문화 속에 깃들어 있다. 어디에나 숨어 있다.



미래 혹은 어딘가의 '당사자들'에게 나 또한 분명 타협과 변덕을 일삼고 악에 동조한 '그름' 중 하나이다. '현장' 밖의 소시민 중 하나이고, 내가 경험하는 현실은 화면 너머의 언설과 이따금의 시위, 일상적인 진저리에 불과하다. 마침표로 질주하지 않고 물음표와 쉼표를 나누는 사회란 정말 가능한 일일까.

좌절 대신 저자와 함께 다시금 믿어보려 한다.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세계와 미래를. 그러니 더 생각해볼 수 있다고, 이해와 대화를, 지지와 변화를 꿈꿔볼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이다. 책에서 거듭 말해지듯 우리는 변덕스럽지만 그렇지 않다, 라는 말처럼.

p.361 도덕심리학을 정확하게 적용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이 실제로 품고 있는 도덕적 관심사들, 연결, 조정과 변화의 근거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p.362 이면에 숨겨진 도덕심리학을 알게 되면 우리의 판단은 더 온건해질까? 때로는 그렇다가도 때로는 더 가혹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배우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오직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사례를 판단받을 시간이 왔을 때, 우리의 심판자들이 자신들의 도덕심리학적 성찰의 순간을 충분히 오래 이어 가며 우리가 택한 변화의 이유들이 그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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