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오래 산다 - 30년 문학전문기자 생애 첫 비평에세이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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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참에 '아, 이건 분명 필연적으로 멀리 돌아가는 감상을 남길 것이다' 싶은 책은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것들은 십중팔구 문학이나 역사서처럼 개인의 해석이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분야에 속해있기 마련이다. 이 책도 그랬다. 비평에 에세이, 아무래도 할 말이 많아지는 게 당연지사 아닐지.

그러므로 이 글은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 장르와 문학, 그와 관계된 소회라고 보는 편이 옳겠다. 읽는 일과 쓰는 일, 독자로서의 정체성과 말과 일상을 대하는 전반적인 태도에 대해 먼저 말해두는 편이 좋겠다.

내게는 운 떼자마자 앞뒤 재지 않는 이들에게 욕 얻어먹기 십상이라 어지간한 자리가 아니고서는 꺼내지 않는 말이 몇 가지 있다. 개중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완전히 무결한 존재는 없다는 것, 누구의 무슨 말이든 어떤 주장이든 들어볼 필요가 없는 것은 없다는 것, 모순처럼 보이는 주장들이 같은 곳을 향할 수 있다는 것.

p.143 생각해 보면 비평이란 옳고 그름 또는 참과 거짓을 따지는 일과는 성격이 다른 행위이다. 비평의 가치는 타당성과 설득력의 다과로써 판단되어야 한다. 타당성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비평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생존 근거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건강한 토론 문화다.


문제는, 이 피로한 원칙이 바람 잘 날 없다고 표현하기엔 추잡하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피로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 속 세계가 현실의 권력구조와 폭력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현실 반영이라더니, 한 술 더 떠 읽는 사람을 고통으로 밀어처넣는 꼴이다.

이를테면 신념에 버금가는 내면 세계를 쌓아올리는 데 일조한 문인이 실은 걸레짝보다 못한 인성을 지녔다든지, 삶의 고비를 넘기게 했던 문장들이 위태롭고 약한 이들을 착취해 얻어진 것이었다든지.

문학을, 예술을, 세계를 사랑하는, 삶을 사랑하려 애썼던 적이 있다면, 경멸과 환멸이 줄지어 찾아오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사랑했던 것을 버리려면, 사랑했던 마음과 시간, 나의 일부를 함께 떼내야만 한다.

사랑했던 스스로를 부정하는 고통. 같은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또다른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가장 먼저 지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모욕으로 돌려받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쓰는 사람 이상의 읽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읽는가, 어째서 글 너머의 세상을 갈구하는가.

역설적이게도, 문학이 알고 싶지 않은 세계의 존재를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그가 보이려는 세계를 잘라내고 확대하고 재창조한다.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의 내면을 마치 배경처럼, 별빛처럼 도처에 흩뿌리고 심어놓는다. 독자가 만나는 문학은 그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너무나도 나의 이야기임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는 것, 대안을 상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문학의 역할 아니던가. 그 즐거움을, 고통을, 눈물과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독자로 남는다.

p.282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고통스럽고 절박한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워 놓는다. 그리고 추궁한다. 우리는 짐승인 것이냐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냐고. 그 고통스러운 질문을, 일상의 균열과 한밤의 악몽을 피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악몽은 언젠가 잔인한 현실이 되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여기, 오랜 시간, 반평생을 문인을 만나고, 글을 읽고 쓰는 일에 바친 사람이 있다. 쓰는 일에 사람이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가 있다. 저자 최재봉은 문학전문기자로서 문학과 독자를 잇는, 문학이 문학으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히는 데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만나온 이들, 그가 사랑하고 비호해온 작품 중 일부는 이제 와 낡은 것이 되기도 했고, 알지 못한 채로, 혹은 부정해온 모욕에 참지 않은 독자들이 등을 돌린 것이 되기도 했다. 문학은 살아있는 것이라, 세상 그리고 독자와 단절되어서는 질식해 죽어버리는 것이라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수많은 시간, 쌀알만큼 많은 문장을 읽으며 '글밥'을 먹어온 저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어떤 시간을 살아왔던가. 그의 세계를 엿보는 방법은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발을 맞추어 서는 것 뿐이리라. 그 자신 또한 그래왔듯이.

p.218 리외가 기록자가 되기로 한 까닭을 설명하는 소설 말미의 문장은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문학은 발언이며 증인이고 추억이라는 것,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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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 만든 천국
심너울 지음 / 래빗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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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점을 달리하는 단편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은 연작소설집일까요, 아니면 하나의 장편소설로 봐야 할까요? 솔직히 저는 첫 수록작이라고 해야할지, 첫 번째 주인공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한 챕터를 읽고 나서 '이야. 열등감 대단한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엔 이게 내 얘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내가 주인공의 나이 때에 저런 생각을 안 해봤던가? 나는 과거를 부정하고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친 적이 없었던가? 자신있게 부정할 수 없는 스스로를 돌아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이야. 내 열등감도 만만치 않았네'.

태어나서부터 이렇든 저렇든 생활에 부족함 없는 대도시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늙어 죽어가는 공동체의 시취"를 실감해본 경험 없이 그저 막연한 농어촌 어딘가를 떠올리는, 오만한 인간일 수밖에요.

p.15 작은 난리가 일어나는 와중에, 허무한은 초고추장과 간장으로 얼룩진 비닐을 유심히 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하게 늙어 있었고, 비스하게 외로운 것 같았다. 허무한은 늙어 죽어가는 공동체의 시취를 느꼈다.


기회의 평등, 공정한 경쟁과 노력의 결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수능과 대학기관의 환상. 능력이 있으면, 노력하면 누구나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찬란한 기만. 이렇게나 여과없이 마주치는 경험도 오랜만입니다.

앞서 이렇든 저렇든 생활에 불편이 없는 수준의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말했는데요. 내게 절박한 이슈가 아니게 된 이후로 괴로운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피해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타고난 성격이 게으르고 소박해 색다른 자극을 추구하지 않기에 어지간한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기에 딱히 뭘 더 요구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p.66 "우물 안의 개구리는 불행할까요? (...) 이 개구리를 우물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거예요. 우물 밖의 드넓은 세상과 우물 안을 비교할 수밖에 없겠죠. 아무리 우물 밖에서 오래 살아도, 우물 안에서 가졌던 습성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요. 그 중간에서, 그 중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우물 밖에도, 안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요는, 우물 밖으로 나간 적 없는 개구리의 삶을 살았다, 이겁니다. 나는 여전히 우물 밖을 알지 못하는, 혹은 알고는 있으나 이 작고 안락한 세계에서의 지위에 만족하기에 머무르기를 택한 개구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물 밖을 갈구한, 혹은 우물 너머의 세계를 보고야 만, 차마 열망을 떨치지 못한 이들의 세계는 어떨까요. 승승장구하는, 노력이 빛을 보는, 기대를 한몸에 받지만 이렇다할 성취를 내지는 못하는, 선하고 근면한 '재능충'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미덕 아닙니까? 전생애에 걸쳐 요구되고 주입되는 환상이기도 하지요. 성취는 노력의 결과다. 경쟁은 공정하고 노력에는 마땅히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능력있는 자가 모든 것을 얻는다.

p.141 임현채에게 이 힘은, 자신에게 주어져 마땅한 힘이었다. 누구도 뺏을 수 없는 힘. 누구도 임현채에게 힘을 포기하라고 할 수 없었다. 이 힘이야말로 임현채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이 힘이야말로 임현채의 삶이었으니까. 오직 이 힘 때문에 그는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돌아오는 실패를 넘어선 패배 그 자체라면, 적절한 때에 적절한 성취를 보여 기대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 이에게는 인생의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힌다면. 그러던 차에 우연한 기회로 주어진 힘, 눈물나게 달콤한 보상, 그것을 포기하라 말할 수 있는 자, 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세계에서 등장인물 모두는 분투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는 개천의 용으로, 누구는 노력형 인재로, 누군가는 부서진 낙원에서 뛰쳐나오는 '인간'으로요. 그만큼 이기적이고 나약한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군들 안 그렇겠어요. 주어진 세계에서 살아남기도 벅찬, 평범한 이라면 더더욱.

분명 작품의 세계는 환상적이고 초인적인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지만, 꼭 그만큼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원하느냐 묻는다면, 가봤자 이런 곳이라면 싫다, 고 답하겠습니다. 마법이 있든 없든, 별반 다르지 않으니.

p.231 사회에서 반마력을 가진 이들이 종사할 수 있는 일자리는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어려운 일들. 물론 모두 이 세상에 필요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선택지가 그것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은 불공평했다.


인간됨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지-않음의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 딛고 선 땅을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우물을 뛰쳐나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능력은 그런 데에 쓰는 말입니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을 거머쥐지 않았다고 욕하고 부에서 부를 만든 노력에 보상까지 내놓으라고 할 때가 아니라.

인간이 되는 문은 좁고 길은 험난합니다. 인간됨의 자리는 위태롭고 사소합니다.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걸어서라도 문을 열어젖히는 일입니다. 어떤 "최선"이 도래하든 한 사람이라도 "사소한 것"이 된다면 그곳은 이상도 최선도 아닙니다.

나는 이 책에서 부끄러움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아주 희미한 빛을 보았습니다. 괴로움을 아는 존재를 보았습니다. 변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작은 기대를 걸어보렵니다. 신도 마법도 없는 세계에서, 인간 너머의 힘을 내는 인간의 힘에.

p.253 "그래.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어. 이 세상에 완전히 선한 일 같은 건 없다. 최선이었다. 그게 최선이었어. (...) 네가 도와주면, 더 나은 세상을 보여준다고 약속할게." "그래서? 그 나은 세상에 우리 아빠는 어딨는데!" 이윤진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p.257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하나하나의 역장이 모두 죄책감이라는 비수가 되어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어떤 점에서, 그 부끄러움은 종아리의 총상보다, 출혈과 냉기로 인한 탈진보다 더 그녀를 괴롭게 했다.



*출판사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갈아만든천국 #심너울신작 #SF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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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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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라는 말을 종종 떠올린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든 낯선 사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 영원히 떠도는 미완의 존재, 자기 자신에게마저. 현시대의 이방인은 어떤 의미일까.

이민자를 말하기란 이방인에 비해 한결 쉽다고 할 수 있겠다. 후자를 구성하는 요소들, 그러니까 소외라든지 소격감을 기본 구성품으로 딸려주지 않던가. 바라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물건을 강제로 떠안겨주는 일.

숙명처럼 주어지는 영구불변의 정주지로서의 국가와 출신의 경계가 희미해진 시대에 이민이 대수냐 물을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그것들은 힘을 갖고 있지 않은가. 떠날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떠나온 자가 새로운 곳에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닫혀있지 않은가.

굳이 말하자면, 주어진 대로 살든지, 모든 보호수단을 잃고 무표의 존재,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로 격하되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를 자유 정도가 있는 셈이다. 그것도 자유라고 칠 수 있다면 말이다


제각기 쓰여진 여덟 편의 작품들은 황금의 땅, 까지는 아니어도 황금빛 햇살이 아낌없이 내리쬐는 곳, 선주민과 동물을 밀어낸 이민자의 사막, 호주, 그곳에 당도한 새로운 이민자들의 일상을 그려보이고 있다.

사방이 바다인 메마른 땅, 물로 둘러싸인 대지, 그리하여 치솟은 불길을 피해 도망칠 수도 없는 곳. 사람이라고 다를까.

왜 떠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바라 이 모욕과 수치와 고난을 견디고 있는지의 문제다. 이방인의 지위에서 또다른 이방인을 배척하는 목소리에 동조하기란 적지 않은 자기부정을 요하기 때문이다. 나만은 다르다. 나는 그들이 아니다.

버릴 각오로 떠났으니, 당도한 곳에 악착같이 매달릴 수밖에, 온 힘을 다해 선택과노력과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을 수밖에. 새로운 세계로의 이식과 동화를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외로 이어진다. 자신에게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에게서.


옳고 그름을 떠나, 빛나는 순간이 응분의 보상처럼 주어지리라 믿기에 바쳐온 헌신을 모조리 부정당할 때 무너지는 것은 비단 자존심 만이 아니다. 이 절박한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은 작품 밖에, 뒤에, 행간 너머에 있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모든 존재에 대해 유책이다.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죄에도 책임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과 "우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로부터의 소외에서, 이방인의 공포에서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의 전회를 목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손 쓸 수 없는 것. 닿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에서 다가오는 희망의 가능성, 아주 약하고 어리고 또 꺼지기 쉬운 것. 메마른 땅을 불태우는 거대한 불길에서도 살아남는 것. 저 낯설고 연약한 것이 나와 이어져있고 또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

이 작가에게 이른바 "유니버스"가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는 방법은 낯설고 나약한 피로한 존재들이 손을 잡고 함께 발을 내디디는 것, 오직 그뿐이지 않겠는가. 영원한 거부와 무정주의 두려움, 피로의 바다에서 손을 맞잡는 것, 눈을 마주치는 것.


홀로 결을 달리한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말을 빌어 묻고 싶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너의 존재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울게 하지 않았는지, 너의 존재가 네가 있을 곳을 없애버리지 않았는지.

언젠가의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의 사랑은 떳떳하게 울고 밝게 빛난다고, 환하게 웃고 눈치 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마땅히 그래야 하고 또 그럴 것이라고, 혼자 울게 해서 미안하다고.

이 또한 이방인에 대한 환대, 존재의 유책과 이어질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내친 "나"들에 내미는 손, 처벌이 뒤따르지 않는, 바로 그 책임. 내가 너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너와 나는 각자의 이방인이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죄. 경계와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낯설고 피로한 자들, 이방인에게 가능성이 있다면 오직 이뿐이리라. 나는 또 한 번의 희망을 본다.

p.188 은영은 희율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사랑해서 괴롭지 않았어?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수치스럽지도 두렵지도 않았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어? 네 사랑이 너 자신을 혐오하게 하지 않았어? 네 사랑이 네 가족을 울게 하지 않았어? 네 사랑은 아프지 않지. 네 사랑은 밝고 빛나지. 너는 환하게 웃고 떳떳하게 울지. 눈치 보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지, 네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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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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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4일, 두려움과 설마하는 안일함이 뒤범벅된 채로 전세계가 지켜보던 그곳에서, 드디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집권 이래 팽창주의, 신질서패권의 야욕을 숨기지 않던 러시아 정부가 인접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야 만 것이다. 기실 그 징조는 오래전부터 사그라들지 않은 채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명분 없는 일이 어디 있겠냐, 국가 간 일시적인 외교 갈등이니 그들끼리 해결하게 두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가진 것 다 내놔라 하는 마당에 넙죽 내주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명목상의 경계와 주권이나마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집단 성원, 국민의 생존까지도 좌우하는 요소이지 않은가.

말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던 양차대전, 태평양전쟁 이후로 전세계가 휘말려드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곧 비교적 지엽적 규모의 학살과 침략, 분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러나 결국, 이른바 "선진국"의 성원으로는 미디어 등의 간접경험 외의 전쟁을 겪어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이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p.57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요? 배급제/기초적 복지제도와 초강력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비밀경찰의 전국적 감시와 통제망으로 무장한 국가는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내몰려도 그리 쉽게 내파되지 않습니다. 탈세계 추세와 함께 앞으로는 오늘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전쟁들이 더 빈번해질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이한 일이지 않은가. 명실공히 휴전 중인 국가이면서 노상 주적은 누구요 승리요 무력을 주문처럼 외면서 그 실상에 대한 위기감은 조금도 없다는 것이. 평화의 세대, 실제로서의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번 전쟁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우리, 그러니까 적어도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전쟁을 모른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금 외의 세계를 기약할 수도 전할 수도 없는 그 참상을 모른다. 지금의 전쟁은 국지적 분쟁, 일시적이고 이례적인 갈등일까, 과연.

p.15 전쟁 시대에 평화 만들기란 국가에만 맡길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시민사회와 그 구성원 각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 무엇보다 평화는 우리 안에서의 가치 재평가부터 시작됩니다. 예컨대 '죽음 장사'라고 할 만한 한국의 방위산업 수출 폭증에 과연 우리가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봐야 합니다.

p.35 푸틴주의를 총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회주의의 반대편에 "야만"이 있다면, 푸틴주의는 바로 그 야만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고 봅니다. (...) 푸틴주의가 지향하는 미래 세계는 강국들이 약소국을 지휘, 통제하는 서열적 세계이지, 평등의 세계는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목처럼 나는, 우리는, 한국과 주류 선진국 사회는 전쟁 이후의 세계를 구축할 힘이 있을까? 지금의 인간이 빙하기의 종언이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를 살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 전쟁을 세계 어디선가 벌어지는 일 정도로만 아는 이들에게는 전쟁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능력조차 없는 형국이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일견 현대전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국 전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유무형의 폭력을 통해 타자의 생명과 자유를 포함하는 존재-범위를 침해하는 것이 곧 전쟁의 본질이다.

작게는 신체와 물리적 공간을, 크게는 이름, 그러니까 의식체계와 존재의 근원까지도 침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전쟁의 변하지 않는 속성이다. 힘의 논리, 남의 목숨으로 이득을 보는 이가 주도하는 것.

p.202 신권위주의 국가들은 대신 노동자 등 피통치자 사이의 연대를 파괴해 원자화된 개인이 각자도생식으로 생존을 위해 분투하게 만들고, 어용언론의 매혹적인 메시지에 홀로 노출되도록 합니다. (...) 저복지와 불안정노동, 개인의 원자화 속에서 무력해진 개인들이 호소력 높은 민족주의적 메시지에 포획된 것이 신권위주의 사회입니다.

p.221 21세기초반 홀로코스트라는 참상을 겪고 현재는 인터넷으로 모두가 하나의 '마을'로 연결된 세계이지만, 여전히 한 국가의 영토 보유나 국제적 위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바로 해당 국가의 '살인력', 즉 군사력입니다. 인류가 지난 역사로부터 본격적으로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파괴와 말살을 도모하지 않는 전쟁은 없다. 이번 전쟁 또한 그렇다. 앞서 이야기한 전세계적 규모의 전쟁 이후, 오랜 시간 질서라는 이름 아래 갈등을 키워온 평화의 시대, 그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전쟁의 시대를 상상할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의 시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도래했다.

저자는 묻는다. 간신히 재건한 세계가 다시금 포화와 절멸의 길로 착실히 나아가는 지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겠느냐고. 아직도 기존의 방식으로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으리라 믿느냐고. 자본주의 사회의 재앙에서 진보를 주장하는 이의 책무란 무엇이겠느냐고.

소련의 몰락, 과거의 영광 그 이상을 원하는 푸틴의 신질서 이상향을 지켜본 이의 물음에 우리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러시아의 침략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어떤 미래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반도의 섬,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으며 무엇을 도모해야 할 것인가.

p.262 열강 세계의 외교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반자도 없습니다. 서로 간에 아주 복잡하고 갈등으로 가득한 역사를 가진 중, 러는 지금 이해타산이 맞아 준동맹 관계가 됐지만, 타산이 달라지면 그 관계도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불확실성 혹은 가변성을 염두에 두고 대한민국 역시 앞으로의 생존 전략을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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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에서 만난 사람들 - 모든 사람은 한 편의 드라마다
이언주 지음 / 비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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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사람에게 관심이 많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럴 때마다 매번 같은 말로 돌려준다. 관심이 아니라 정이 많은 거라고, 있다고 해도 생물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수준에 그칠 거라고.

그래서인지, 토크쇼라면 아주 질색을 했다. 아니,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연사가 나오는 것도 싫고, 여럿이 모여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은 종류를 막론하고 시청 시간 10분을 넘긴 적이 없다. 남이사 이런 삶을 살든 저런 삶을 살든, 괜히 훈수 둘 생각 하지 말고 알아서들 앞가림 잘하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동시에, 가까운 이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듣고 있어"다. 귀 기울여 듣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당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어주기를, 그리하여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당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으로 하는 말.

너무도 복잡해진 세상,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그 수만큼 다른 세계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커녕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빛나고 힘있는 지위가 아닌 평범한 일상의 영웅들, 그러나 제각기 자기 삶의 주인공인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애써 찾아내야만 가능할 만큼 귀한 일이 되었다.

우습지 않은가. 누구도 홀로 살아낼 수 없다, 모든 삶은 유일하다, 노상 입에 달고 사는 주제에 남 이야기는 듣기 싫다고 피해왔다는 것이. 어쩌면 무서워서 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알면 이해하지 않을 수 없고, 이해하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테니 모를 때처럼 속 편하게 살 수 없어서.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향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이것은 단지 말 그대로의 의미뿐만이 아니다.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자기 자신이라는 닫힌 세계를 내려두고 타인의 삶, 바로 그 자리에 서보지 않는 한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p.45 호기심은 우리를 움직인다. 기꺼이 움직여 이유를 찾고 묻고 듣게 한다. 호기심으로 가까이 다가간 누군가에게서 '나와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될지라도, 곽재식과 유재석의 경우처럼 뜻밖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불현듯 발견한 공통점은 서로를 이해하는 첫 문장이 되리라.


그러니 "사람은 다 그렇다", "인생사 각자도생"이라는 말은 틀렸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고독하는 말은 이기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사람은 홀로 살도록 생겨먹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 배를 곯을자언정 차마 굶어죽어가는 이를 모른척하지 못하는 이가 분명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고, 어떤 상황에서든.

팍팍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세상에 여전히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다. 인사를 건네고, 손을 내밀고, 푼돈이나마 나누는 이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희망은 거기서 온다. 더 작고 약한 이의 삶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세상을 묵묵히 지탱하고 꼭 한 사람만큼의 가능성을 믿는 이들이 있다.

p.134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마음으로 분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순간 모두의 마음속에는 누군가가 옆에 있기를, 혼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인간을 향한 본능적 사랑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절망을 희망으로 희석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도록 한다고 나는 믿는다.

p.205 이름 모를 우리네 이웃이 적어도 밥 한 끼 정도는 잘 먹었으면 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그 마음에 답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보듬는 곳. (...) 세상의 안부가 궁금한 이들이 이곳으로 더 많이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서로 생존을 확인하며, 우리 모두 오늘 또 하루 잘 살아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사는 원래 그러려고 나누는 거니까.


읽는 내내 평생을 갖고 살아온 그 생각, 신념에 가까운 그것이 처음부터 틀려먹은 것, 오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다채롭고, 당사자에게서 듣는 삶은 타인의 시선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내밀한 층위를 포함한다. 뼈저리게 느꼈다.

선망받는 권력을 쥐지 않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대도,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 작고 작은 삶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처음, 혹은 수차례 마주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살아내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어디에나 있다.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르련다. 영웅은 매일을 분투하는 평범한 일상에 있다. 내일 당장 세상이 무너진대도 모두가 죽어버리게 둘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 있다. 이야기를, 삶을 듣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위대한 이야기가 있다."

p.52 당장은 외롭고 방법이 없어 보일지라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가능성을 믿고 길을 가다 보면 같은 가능성을 믿는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날 수 있다. 혹은 내가 누군가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그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걸출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가 아니라,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살고 싶은 삶을 그리고, 믿고, 살아가게 되리라 믿는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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