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오래 산다 - 30년 문학전문기자 생애 첫 비평에세이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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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참에 '아, 이건 분명 필연적으로 멀리 돌아가는 감상을 남길 것이다' 싶은 책은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것들은 십중팔구 문학이나 역사서처럼 개인의 해석이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분야에 속해있기 마련이다. 이 책도 그랬다. 비평에 에세이, 아무래도 할 말이 많아지는 게 당연지사 아닐지.

그러므로 이 글은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 장르와 문학, 그와 관계된 소회라고 보는 편이 옳겠다. 읽는 일과 쓰는 일, 독자로서의 정체성과 말과 일상을 대하는 전반적인 태도에 대해 먼저 말해두는 편이 좋겠다.

내게는 운 떼자마자 앞뒤 재지 않는 이들에게 욕 얻어먹기 십상이라 어지간한 자리가 아니고서는 꺼내지 않는 말이 몇 가지 있다. 개중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완전히 무결한 존재는 없다는 것, 누구의 무슨 말이든 어떤 주장이든 들어볼 필요가 없는 것은 없다는 것, 모순처럼 보이는 주장들이 같은 곳을 향할 수 있다는 것.

p.143 생각해 보면 비평이란 옳고 그름 또는 참과 거짓을 따지는 일과는 성격이 다른 행위이다. 비평의 가치는 타당성과 설득력의 다과로써 판단되어야 한다. 타당성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비평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생존 근거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건강한 토론 문화다.


문제는, 이 피로한 원칙이 바람 잘 날 없다고 표현하기엔 추잡하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피로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 속 세계가 현실의 권력구조와 폭력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현실 반영이라더니, 한 술 더 떠 읽는 사람을 고통으로 밀어처넣는 꼴이다.

이를테면 신념에 버금가는 내면 세계를 쌓아올리는 데 일조한 문인이 실은 걸레짝보다 못한 인성을 지녔다든지, 삶의 고비를 넘기게 했던 문장들이 위태롭고 약한 이들을 착취해 얻어진 것이었다든지.

문학을, 예술을, 세계를 사랑하는, 삶을 사랑하려 애썼던 적이 있다면, 경멸과 환멸이 줄지어 찾아오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사랑했던 것을 버리려면, 사랑했던 마음과 시간, 나의 일부를 함께 떼내야만 한다.

사랑했던 스스로를 부정하는 고통. 같은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또다른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가장 먼저 지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모욕으로 돌려받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쓰는 사람 이상의 읽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읽는가, 어째서 글 너머의 세상을 갈구하는가.

역설적이게도, 문학이 알고 싶지 않은 세계의 존재를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그가 보이려는 세계를 잘라내고 확대하고 재창조한다.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의 내면을 마치 배경처럼, 별빛처럼 도처에 흩뿌리고 심어놓는다. 독자가 만나는 문학은 그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너무나도 나의 이야기임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는 것, 대안을 상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문학의 역할 아니던가. 그 즐거움을, 고통을, 눈물과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독자로 남는다.

p.282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고통스럽고 절박한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워 놓는다. 그리고 추궁한다. 우리는 짐승인 것이냐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냐고. 그 고통스러운 질문을, 일상의 균열과 한밤의 악몽을 피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악몽은 언젠가 잔인한 현실이 되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여기, 오랜 시간, 반평생을 문인을 만나고, 글을 읽고 쓰는 일에 바친 사람이 있다. 쓰는 일에 사람이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가 있다. 저자 최재봉은 문학전문기자로서 문학과 독자를 잇는, 문학이 문학으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히는 데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만나온 이들, 그가 사랑하고 비호해온 작품 중 일부는 이제 와 낡은 것이 되기도 했고, 알지 못한 채로, 혹은 부정해온 모욕에 참지 않은 독자들이 등을 돌린 것이 되기도 했다. 문학은 살아있는 것이라, 세상 그리고 독자와 단절되어서는 질식해 죽어버리는 것이라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수많은 시간, 쌀알만큼 많은 문장을 읽으며 '글밥'을 먹어온 저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어떤 시간을 살아왔던가. 그의 세계를 엿보는 방법은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발을 맞추어 서는 것 뿐이리라. 그 자신 또한 그래왔듯이.

p.218 리외가 기록자가 되기로 한 까닭을 설명하는 소설 말미의 문장은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문학은 발언이며 증인이고 추억이라는 것,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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