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도시 타코야키 - 김청귤 연작소설집
김청귤 지음 / 래빗홀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서출판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따금 상상해보곤 한다. 이미 손 쓸 길 없이 변해버린 세상이라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다가온 위협이 있다면, 우리 인간은 수많은 철학자가 그려온 이상적인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한들 그것이 윤리적일 수 있을까.
사람이 싫다. 농담으로 도는 '사람은 다 죽어! 동물이 최고야!'도 싫다. 이유는 석달열흘도 더 넘게 댈 수 있지만 결국은 사람도 동물이라서, '다 죽어!'에 가장 먼저 쓸려나가는 것은 지금의 세상에서도 착실하게 밀려나고 목을 졸리는 이들이라서. 무책임이 싫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람이 싫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사람이라는 존재를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존엄의 경계로 밀려나는 경험 혹은 그렇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로 타인을 짓밟고라도 생존하고자 하며, 어떤 이는 세계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함으로서 생존조건으로서의 공존을 말하기도 한다. 정반대의 결론으로 치닫는 둘은 놀라우리만치 닮았다.
상상이 현실에 뿌리를 두듯이, 실망은 애정과 믿음에 뿌리를 둔다.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믿음을 말할 수 있다. 사람을 해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이지만, 파괴되고 낯설어진 세계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다만 이전의 만물의 영장이니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니 어쩌니 하는 콧대 높은 수식어 대신 사람 곁에, 존재 곁에 나란히 위치하는 일개 존재로서의 사람에게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겠다고.


해피라며! 해피엔딩이라고 했잖아! 그치만? 누구의 어느 해피인지는 말하지 않았다구요? 배신이라고 하자니 오히려 너무나도 선명하게 알려주고 시작하지 않았나. 멸망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기후변화로 거주 가능한 육지가 줄어들고 사방을 둘러싼 바다가 곧 위협인 세계부터 물의 행성이 된 지구에서 바다 속 해저도시에 모여 살아가는 세계까지. 언뜻 개별 단편으로 느껴지는 여섯편의 소설이 모여 한 권의 책, 얼마간의 시대를 그려낸다. 피할 수 없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주인공과 그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까치발을 들고 모여있는 듯 하다. 바다에서도, 땅에서도. 그들의 일상은 위태로우며 세상은 적대적인데다 사납고 추하다. 목전에 절멸을 두고도 욕심에는 끝이 없다. 처음부터 자명한 결과를 향해 가는 길이나 다름없다. 해피엔딩, 그 말에 답이 있다. 끝이 나야 해피엔딩이다. 적어도 마침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해피엔딩을 말할 수 있다. 땅에 사는 동물이 발 디딜 곳을 잃은 세계에서, 허공과도 같은 바다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없다면 시작부터가 비극인 셈이다. 우리는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니.


썩 유쾌하게 쓰이는 꼴을 본 적은 없지만, '전쟁통에도 애 낳고 산다'는 말이 있다. 상항이 어쨌건 난리통에도 사랑을 하고 아이는 자란다. 폐허가 된 자리에도 싹이 돋고 한때 대지였던 바다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니 물에 잠긴 지구에도 분명히 춤추고 사랑하고 웃는 이는 존재한다.
반대로 그럭저럭 살만한 일상에, 걱정이라고 해봤자 내일 아침 메뉴가 고작인 세상에서도 힘없이 쓸려나가는 존재가 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면서도 바다에서 난 것을 먹고, 앉은 자리에서 저 먼 곳까지 물자가 오가게 할 수 있다면,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쯤이야 대신할 존재가 차고 넘친다면, 너는 오래 살았으니 우리를 위해 제 발로 죽으러 가라 떠밀 수 있다면, 당장 내 입에 들어갈 것만 있다면 어디서 온 무엇인지 신경쓸 일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에 누리는 자와 이용되는 이가 다르다는 것쯤은 당연한 일 아닌가. 지독하게도.
p.11 그러나 공포와 절망에 물든 사람들은 어렵고 느린 길보다 빠르고 결과가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그때라도 멈춰야 했을까? 타임머신이 발명되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인간은 늘 이기적이기에.
p.191 지구가 죽어가고 있어서 바다로 도망쳐 왔으면서도 사람들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바다를 데우고 있었다.

한 발 재겨디딜 곳이 없다. 밀려나고 얻어맞고 버려지며 존엄을 상상할 기회조차 빼앗기는 이들이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식을, 가능성을 찾는다. 숨쉬고 사랑하며, 사랑하고 웃는다. 손을 내밀고 등을 내어주며, 서로를 끌어안고 마주한다. 그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감히 기적이라 하겠다. 신이 없는 세계에 간신히 기적이라 부를 것이 남아있다면, 체온을 가진 존재의 맞닿음일 것이다.
삶을 알지 못하는, 짦은 수명을 부여받은 존재가 태어나서 처음 먹는 따뜻한 음식에 마음을 빼앗기듯이. 누군가가 스스로를 베어 넘겨줄 때, 소외된 이들이 서로를 끌어안을 때. 멸시받고 천대받는 이들로 유지되던 세계를 그들 스스로 버릴 때, 그것이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p.70 옛날 사람들은 물에 잠긴 식료품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좋았다. 그런데 왜 세상이 바다로 변하는 건 막지 못했을까?
p.238 우리는 다른 돔도 부수어 인간으로 인해 죽은 바다를 인간을 통해 되살릴 것이다. 루나의 다리가 새로 자라는 동안 내 다리를 써도 되겠지. 온 세상이 바다로 가득했다.

그러니 다시금 물에 잠긴 폐허의 자리에서 춤을 추고, 눈부시게 웃으며 기꺼이 세계를 등지련다. 작가가 그려내는 절망 이후의 세계와 원래부터 주어지지 않았던 이를 끌어안고 사랑하련다. 멸망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에서, 행복을 의심치 않으며.

"우리는 멸망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웃는 날이 더 많을 거라 믿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혜씨 덕분입니다 - 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찐모녀 블루스
장차현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느 날 우리집에 ‘문제아’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젠 그 ‘문제아’ 없인 하루도 살 수 없게 됐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현실모녀의 블루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겠지만, 정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현실모녀의 블루스는 높은 확률로 "난리 부르스!"가 되기 때문일까.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태어난 아이는 죄가 없고, 모든 탄생은 그 자체로 기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육아의 부담을 떠안는 것도 모자라 사회의 적대적 시선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야 하는 이의 고충을 없는 셈 치거나 "숭고한 희생" 따위로 무마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엄마와 딸, 다정다감하고 사근사근한 관계? 꿈 깨시라. 내가 해봐서 안다. 뒤집어지게 싸우고, 하루가 뭔가, 반나절도 안 되어 후회하고 밥먹을 때 쯤 슬그머니 화해했다가 며칠 안 가서 똑같은 문제로 싸우고 "너/엄마 때문에 못 살아!"를 외치는 게 흔히 말하는 모녀지간 아닌가. 부르스가 맞긴 하다. 그 부르스가 로맨틱은 집어던진 난리부르스라 문제지. 서로의 세계이자 사랑이었다가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어지는 사이였다가 결국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애증의 관계가 되는 게 모녀지간의 부르스라면 부르스다. 장애인이라고 다르겠는가.
p.188 표준치에 제외된 사람들을 열외로 생각하는 오만함의 정체는 무얼까? 표준치에 오르려고 모두들 아우성을 치고 있다. 난 갑자기 내 안의 표준치를 바꾸고 싶어졌다. 행복의 기준은 내 안에 존재한다.

장애당사자 혹은 그와 대부분의 일상을 함께하는 이의 이야기를 제3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매번 고민하게 된다. 어쨌든 간에 나는 그들과 한 집에서 먹고 자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섣부른 감동은 무례한 동정 내지는 없느니만 못한 흥미가 되리라, 지레 겁부터 먹고 만다. 이런 비겁함이 사는 동안 수많은 은혜씨와 장차현실씨를 만나 함께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놓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장차현실씨와 은혜씨가 맞닥뜨렸던 수많은 차별의 벽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인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발달장애인에게도 갈 곳이 있어야 한다. 장애아동의 양육자도 주저없이 또래 양육자들과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전국을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알맞은 교육기관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급우들과 다른 양육자들에게 잘 부탁한다고 연신 허리를 숙이지 않아야 한다. 딱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이 사람에게는 내가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발달장애인 또한 "평범한" 이들처럼 자라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며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닐 이유가 없기에. 아직까지도 이 당연한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p.144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말한다. “엄마 선생님이 울더라. 내가 불쌍해서 운대.”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장애인이 불쌍한 존재임을 확실히 인식시켜주었나 보다. “나 그렇게 불쌍해?” 화가 난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낯선 즐거움을 누리기엔 세상은 너무 서툴다.
p.195 누군가 젊음, 건강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나에게 이야기했겠지만 귀담아듣기에는 일하고 싶은 젊은 욕망과 장애인 아이의 돌봄을 국가가 외면하는 사회적 간극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자립이 모든 것을 홀로 해내는 것이 아닌 사람 사이에서 살아나가며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양육자의 역할은 아동이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일원으로 성장하는 여정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생계와 장애아동의 양육의 책임자가 된 장차현실씨가, 혼자에서 두 사람, 둘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부모는 아이와 함께 자란다고 했던가. 아이가 어른을 자라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성장은 단순히 해를 넘기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험이 필요하다. 부딪히고 얽히는 경험이 세상을 넓고, 다양하게 구성하며 그로 인해 개인을 더이상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아닌, 사람과 이어진 세계 안의 존재로 성장하게 한다. 그러니 제목의 "은혜씨 덕분"은 장차현실씨와 독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감사와 사랑을 담아, 어딘가에 존재할 수많은 동료 시민들에게, 은혜씨, 장차현실씨 덕분입니다. 인사를 전하고 싶다. 당신 덕분에, 라고.
p.129 장애아 부모 중 아이 돌보는 역할은 대부분 엄마들이다. 엄마들은 마치 아이의 장애가 자신의 탓인 양 가족들 사이에서 주눅 들고 남편에게도 미안해하며, 아이를 위한 헌신을 이래저래 강요받는다. 장애아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조차 엄마들의 개인적인 삶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p.186 그리고 난 결심한다. 난 아이에게 전부이지 않으리... 아이에게 중요하고 좋은 사람이 많아져야 아이는 진정 오래도록 행복해지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다시금 반성한다. 표지에 떡하니 적힌 "장편소설"을 보지 않고 시작해버려서 단편집인 줄 알고 읽었다. 옴니버스인가보다... 하면서 읽다 중간에서야 이거 장편이었냐고 혼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작가님, 미안합니다... 그치만 그만큼 각 장의 서사가 탄탄하다는 뜻이기도 하니 넘어가주세요. 『미확인 홀』은 소제목을 사이에 두고 단편집처럼 이어지는 하나의 큰 이야기다. 떠나온 고향 은수리, 사과냄새가 가득한 곳, 산과 들이 일상인 곳,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벗어나고픈 족쇄같은 곳, 그곳을 떠나온 희영의 이야기로 서막을 연다.
어느날 나타난, 받았다거나 날아왔다고 할 수도 없이, 나타나듯 전해진 편지 한 장, 그 한 단어가 현재의 그들을 과거로 모조리 빨아들인다. "종이를 펼치차 세 글자가 나타났다. 블랙홀, 단정한 글씨체였다(p.8)."
p.135 누구에게나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박음질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어떤 사람은 대롱대롱 매달린 기분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는 걸 몰랐다.

이따금, 아니, 자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도망치고 싶다-에 가까운 마음. '눈 쌓인 숲 사라질 길을 따라 걸어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문장을 생각한다. 숨어버리고 싶어요, 토해내듯 속삭이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허공을 노려보며 소리없이 울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전체가 때를 놓친 애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미처 몰랐기 때문에, 사는 일이 급해서, 들여다보기엔 너무나도 큰 상처라서, 얼떨떨하고 황망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고 덮어두고 때로는 존재를 부정해야만 했던 슬픔과 상실을 끄집어내 먼지를 털고 살피는 마음을 말하는 이야기, 결국 죽음과 상실을 축으로 맴도는 존재들이 살아내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p.113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것이 아닌 건 결국 잃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순옥은 살아왔다. 버리거나 버려지는 것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살다 보면 모든 걸 한순간에 잃는 것 같아도, 살아보면 어떤 걸 완전히 잃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고. 그러므로 완전히 잃지는 않을 기회 또한 여러 번 있다고. 때로는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상실을 막아주기도 한다.
p.226 지금까지 자신이 지킨 건 아내와 자식의 평안이 아니라 자신의 안온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달빛으로도 사람이 빛나고 빛날 수 있다는 것과 강렬한 빛을 쫓느라 은은한 빛을 여러 번 놓쳤단 것도. 그날 밤 깨달음의 강물이 찬영을 통과해 찬영이 볼 수 있는 빛의 범위를 넓혀주었다. 하지만 밝음을 향한 찬영의 갈망까지 쓸어가진 못했다. 빛나고 빛나며 빛나고 빛나니 모든 것이 빛나도다. 어두운 것은?

사람은 통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얽힌 감정과 생각을 기억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아픈 줄도 모르고 쑤셔넣기 급급했던, 여전히 생생하게 피를 흘리고 환상처럼 덮쳐오는 통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납득하지 못한 상실은 어떻게 허공을 부재의 자리로 채워넣는가.
사는 일이 사는 것 같지 않은 사람은, 오랜 시간을 죽은 사람의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은, 어깨에 자기 것이 아닌 삶을 짊어진 사람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그이를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조차 살아있음을 확신할 수 없는 사람에게 당신이 선 곳이 무덤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는가. 하나의 존재가 하나의 세계라면 사람을 잃고 신뢰를 잃는 것은 세계가 무너지는 것에 버금가는 사건이다.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념, 합리적이고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이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p.150 "매미가 밤마다 저렇게 우는 데 자기는 아무런 책임도 없대요. 그럼 누구 책임이에요?" 필성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울면서도 또렷하게 말했다. “매미가 울면 매미를 봐야죠. 매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잖아요. 저러다가 미쳐서 죽는 거라고요."
p.164 공권력이 파업하는 사람들 편이 아니란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과 경찰에게 벌레 잡듯 두들겨 맞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부위를 가리지 않고 내리치는 곤봉에, 사정없이 휘두르는 발길질에 세상을 향한 정식의 믿음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믿음까지 모두 다.

첫 문장부터 그랬듯이 끝끝내 의뭉스럽고 기쁘지 않으며 답을 주지 않는다. 제목인 "미확인 홀"의 정체나 부재로 시작한 인물의 행방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사는 일의 본질일지 모른다. 만남으로 시작해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 삶이 아니던가. 우리는, 어쩌면, 때를 놓쳐 고여버린 수많은 "미안해"를 끌어안고 사는 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든 견뎌내고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다른 사람, 삶, 그것도 불확실한 삶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완전한 확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힘없이 울며 맴돌기만 하는 이들의 패인 발자욱이라면 이렇게까지 힘들게 읽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고 빛나기만 하는 이들의 정의로운 무용담이었다면 도중에 인상을 찌푸리며 덮었을 테다. 오히려 모두가 비겁하고 울먹이고 얼굴을 붉히는 이들이어서 내려놓지 못했다. 용서나 동의와는 다르다. 그 비틀린 부분이 주는 끝, 후련함이 있다.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장례는 산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맞는 말이다. 부재를 공언하고 상실을 확정하는 일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마침표를 찍고 여지를 주지 않는 끝을 마주하게 한다. 존재하지 않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평안을 누릴 것이라는 허구의 희망, 내려놓음에서 오는 안도, 오직 그것을 위해 수많은 절차와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 아니던가. 작품 전체, 이 한 권이 각자의 자리에서 치러내는 장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감히 말한다. 이 책은 애도와 이별의 의식이라고. 각자의 자리, 각자의 시선에서 맴돌던 이들이 발길을 멈추고 해묵은 눈물을 쏟아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p.183 정식은 그제야 자신이 그날에 대해, 그날 받았던 충격과 무너진 믿음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324 "필희가 정말 거기에 들어갔을까?" 그때처럼 겁먹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매일 모래 한 알 정도의 크기만큼씩 그 사실을 받아들였는지 담담한 목소리였다. "필희가 분명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못 들어줬어. 그게 너무 미안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
김지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감상입니다.

이따금 하는 말,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산다. 어떤 식으로든 배울 것 없는 존재는 없다. 어른이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선생이기 때문에 학생에게 배우지 못할 이유는 없다. 사람이 사람과 경계를 맞대고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순간들이 경이가 아닐 수 없는, 사람이 사람과 함께일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식으로든 취약한 이를 대하는 직업종사자의 글은 덮는 순간까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읽는다. 제발 뻔하지만 말아라. 손쉬운 동정을 던지지 말고 당신의 이야기를 해라. 당신 자신의 세계를 보여달라. 매번 간절한 마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제목에서 풀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얼마나 애썼겠는가. 부족하거나 사라진 세계가 아닌, 말이 “숨어 있는“ 세계라면, 어쩌면, 끝없는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어쩌면, 우리는, 어쩌면.
p.91 우리에게 언어가 없다면 모두가 '나'일까? 아니면 모두가 '너'일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 걸까.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는 부제 그대로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이다. 사람이 음성언어로 소통하는 동물인 탓에 언어능력은 사회에 속해 생존하는 대부분의 상황에 필수적이다. 비단 교류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나의 요구를 표현하고 각종 지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말"이다. 이 책은 그 "말"에 도움과 지원이 필요한 이를 찾아가는 언어치료사와 그가 만난 이들이 성장하고, 후회하고, 생각해나가는 이야기다.
이 책은 아동 언어치료에 대한 기록이나 결국 세상의 다른 성원을 대하는 태도 혹은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성장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느낀 기쁨과 깨달음을, 후회와 미안함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치료사는 곧 조력자이니 독자는 복지 혹은 각종 의료, 사회 서비스의 대상자와 그 주변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동료 시민으로서 손을 내밀고 함께 가야하는 우리는 그와 우리 자신 사이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가.
p.176 때로 우리는 연민을 거두고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왜 우리를 이렇게 취급하느냐고. 왜 당연하게 걷어간 우리의 세금이, 누군가에게 미안하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쓰여야 하느냐고,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과 이 결정을 구체화하는 고급 관료들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한가. 그렇지 않다. 완전한 것은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완성된 것은 변화를 허용치 않으며, 홀로 존재한다. 미래도 과거도 없으며, 영원한 현재에 머문다. 그것은 완전하지 않다. 완전함은 불완전함의 반증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세계이다. 나의 희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언어가 숨어있는 세계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찾는 것, 너와 내가 함께 열어젖히는 세계가 있다는 것. 소통의 가능성조차 없는 존재는 없다. 마주치고 경계를 넘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사람이 싫다는 말을 자주 한다. 생각은 더 자주 한다. 사실, 하지 않는 날이 드물다. 백석의 말처럼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고 먼 곳으로 떠나버리고 싶다고 매일같이 생각한다.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는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을 닮고 싶어하는 것은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p.122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사라지고 새롭게 태어날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지. 그때가 되면 우리가 일으킨 사건들로 인해 우주가 조금은 바뀌어 있을 거다.

봄이 오고, 새로 돋고 자라는 것을 보며 인사를 건넬 때 이 책을 떠올리는 이가 많기를 바란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기를, 기다리고 돌아보는 데에 주저함이 없기를 바란다. 어쨌든, 우리는 함께 살아야만 하니까.
p.293 세상은 지뢰밭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네 이야기를 해주곤 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그런 것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터뜨리고 또 터뜨린다고 그래도 게임은 계속되고 삶도 지속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는 마음 - 나를 돌보는 반려 물건 이야기
이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는 마음, 혹은 살아가는 마음. 살-다와 사-다 사이에는 수많은 물질과 시간이 자리할 테다. 이미 안 쓰고 안 사는 게 그나마 에코인 세상이라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나요. 살다보면 꼭 필요하지는 않은 줄 알면서도 기어코 사버리고는 또 쓰레기 만들었다고 자괴감에 머리를 뜯기도 하고, 별 생각 없이 산 물건을 기십년씩 끼고 살기도 한다. 혹은 역시 사길 잘했다고, 일년에 몇 번 입지도 못하는 코트, 모셔만 두는 찻잔, 애물단지라고 한숨을 쉬어도 쉬이 버리지 못하는 책들. 삶을 함께하는 존재들, 반려인간, 반려동물이 있다면 삶을 함께하는 것들을 반려 물건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
미니멀리즘이 대세라지만, 여전히 도통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가하면 확신과 기대에 차 장만한 물건을 떠나보내는 마음도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소유하는 것을 넘어 나를 돌보고 존재를 사유하게 되는 반려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p.85 사람이나 관념이 아닌 물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늘 경계하고는 있지만 내가 정성스럽게 돌보아 더욱 사랑스럽게 된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물건에 대한 애정이 꼭 그렇게 경계해야 할 대상인가 싶다.

시인 김춘수는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비로소 나에게 와 꽃이 된다고. 물건도 다르지 않다. 단순한 사물에 불과한 것에 마음과 시간이 쌓여 비로소 '나'의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홀로 선다는 것이 나를 아껴 준 사람의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라면 곧 나를 아껴 준 사람의 영혼과 작별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어떤 물건은 나의 자아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물건은 세상에 녹아들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의태이며, 또 어떤 물건은 몸을, 시선을 옥죄는 규율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p.55 물론 가발은 불편할지언정 군중 속에 숨을 수 있게 해준다. (...) 암 환자가 무수히 많은 병원 암 센터에서도 스카프를 쓰면 쳐다보는 사람이 많다. 대개는 가발을 쓰거나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산업은 이처럼 다양성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용한다.
p.63 하지만 특정한 이미지로 비치고 싶다는 욕구보다는 특정한 이미지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목차의 "내가 돌보는 물건, 나를 돌보는 물건"부터 "충동이 없으면 지불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사고, 사기 위해 산다"까지 저자의 삶에 오간 반려-대상의 목록을 따라가노라면 공간이라고 생각했으나 물건인 것, 물건이라고 생각했으나 가치관, 관념 혹은 주입된 편견이었던 것들을 만나게 된다. 머무르는 공간, 책, 집, 가방, 식물, 자동차까지. 만족과 단념을 오가는 여정에서 저자 개인의 경험뿐만 아니라 촘촘한 혐오와 억압이 어떻게 개인은 짓누르는지, 집단과 산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얼마나 둔감하게 살았는지, 세대를 건너 오래도록 머무는 물건들에 대한 애정이 어떤 것인지를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p.141 인간은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배설을 해야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기계에 끼이면 팔다리가 잘리고 높은 데서 떨어지면 죽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 취급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은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우리와 남을 구분해서 착취를 합리화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이 상품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사람이 사람과 사는 까닭에 타인의 시선을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물건을 사고 물건과 함께 살아가고, 물건에 사람을 맞추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파편화된 개인으로서의 소비자로 전락한 동시에 역설적으로 동시에 서로가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 혹은 개체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책을 대상, 물건에 대한 사적 기록으로 읽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p.178 남녀를 '떠나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외모에 대해서는 더더욱 남녀를 떠나서 말할 수 없다. 내가 신발 가게에서 신발을 살 수 없는 이유는 내가 겁쟁이라서가 아니다. 여전히 큰 발은 알아서 숨겨 주는 것이 미덕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p.224 나를 들여다보는 일, 남의 말을 듣는 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 이 모든 것은 목청 높여 간결한 구호를 외치는 일보다 복잡하고 어렵다. 단시간에 끝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유하고 행동하는 능력은, 인류 모두에게 주어졌는지 도통 의심스럽기는 해도, 우리 중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도 없이 주어진 귀중한 특권이다.

문학 도서라면 저자 소개부터 추천사까지 전부 제치고 본문으로 돌진하는 버릇 탓에 에세이면서도 저자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소비하는 마음, 그러니까 아무래도 값싸고 빠르게 소비되는 물건을 사들이는 마음에 대한 단상일까, 했던 짐작이 부끄러웠다. 등장하는 '물건'들이 일회용품이 아니라거나, 저자가 '젊은이'가 아니라서가 아니다. 반짝거리거나, 부럽거나, 나를 '럭셔리'의 세계를 이끌어줄 것만 같은 물건들이어서도 아니다.
저자 이다희의 글을, 사람 이다희의 시간을 만날 수 있어 고마운 시간이었다. 읽는 내내 많이 울고, 많이 웃고, 많이 부끄러웠다. 아마도 읽지 못할 저자에게 이렇게나마 감사를 전하는 마음은 어쩌면, 낡은 책들을 모아 담고 맞지 않는 옷을 버리거나 노트를 사고 가구를 들이는 때에 문득 떠오를 것이다.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은 물건들과의 연대의 기억"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살며(live) 왜 사는가(buy)?"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