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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도시 타코야키 - 김청귤 연작소설집
김청귤 지음 / 래빗홀 / 2023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서출판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따금 상상해보곤 한다. 이미 손 쓸 길 없이 변해버린 세상이라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다가온 위협이 있다면, 우리 인간은 수많은 철학자가 그려온 이상적인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한들 그것이 윤리적일 수 있을까.
사람이 싫다. 농담으로 도는 '사람은 다 죽어! 동물이 최고야!'도 싫다. 이유는 석달열흘도 더 넘게 댈 수 있지만 결국은 사람도 동물이라서, '다 죽어!'에 가장 먼저 쓸려나가는 것은 지금의 세상에서도 착실하게 밀려나고 목을 졸리는 이들이라서. 무책임이 싫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람이 싫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사람이라는 존재를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존엄의 경계로 밀려나는 경험 혹은 그렇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로 타인을 짓밟고라도 생존하고자 하며, 어떤 이는 세계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함으로서 생존조건으로서의 공존을 말하기도 한다. 정반대의 결론으로 치닫는 둘은 놀라우리만치 닮았다.
상상이 현실에 뿌리를 두듯이, 실망은 애정과 믿음에 뿌리를 둔다.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믿음을 말할 수 있다. 사람을 해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이지만, 파괴되고 낯설어진 세계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다만 이전의 만물의 영장이니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니 어쩌니 하는 콧대 높은 수식어 대신 사람 곁에, 존재 곁에 나란히 위치하는 일개 존재로서의 사람에게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겠다고.
해피라며! 해피엔딩이라고 했잖아! 그치만? 누구의 어느 해피인지는 말하지 않았다구요? 배신이라고 하자니 오히려 너무나도 선명하게 알려주고 시작하지 않았나. 멸망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기후변화로 거주 가능한 육지가 줄어들고 사방을 둘러싼 바다가 곧 위협인 세계부터 물의 행성이 된 지구에서 바다 속 해저도시에 모여 살아가는 세계까지. 언뜻 개별 단편으로 느껴지는 여섯편의 소설이 모여 한 권의 책, 얼마간의 시대를 그려낸다. 피할 수 없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주인공과 그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까치발을 들고 모여있는 듯 하다. 바다에서도, 땅에서도. 그들의 일상은 위태로우며 세상은 적대적인데다 사납고 추하다. 목전에 절멸을 두고도 욕심에는 끝이 없다. 처음부터 자명한 결과를 향해 가는 길이나 다름없다. 해피엔딩, 그 말에 답이 있다. 끝이 나야 해피엔딩이다. 적어도 마침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해피엔딩을 말할 수 있다. 땅에 사는 동물이 발 디딜 곳을 잃은 세계에서, 허공과도 같은 바다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없다면 시작부터가 비극인 셈이다. 우리는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니.
썩 유쾌하게 쓰이는 꼴을 본 적은 없지만, '전쟁통에도 애 낳고 산다'는 말이 있다. 상항이 어쨌건 난리통에도 사랑을 하고 아이는 자란다. 폐허가 된 자리에도 싹이 돋고 한때 대지였던 바다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니 물에 잠긴 지구에도 분명히 춤추고 사랑하고 웃는 이는 존재한다.
반대로 그럭저럭 살만한 일상에, 걱정이라고 해봤자 내일 아침 메뉴가 고작인 세상에서도 힘없이 쓸려나가는 존재가 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면서도 바다에서 난 것을 먹고, 앉은 자리에서 저 먼 곳까지 물자가 오가게 할 수 있다면,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쯤이야 대신할 존재가 차고 넘친다면, 너는 오래 살았으니 우리를 위해 제 발로 죽으러 가라 떠밀 수 있다면, 당장 내 입에 들어갈 것만 있다면 어디서 온 무엇인지 신경쓸 일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에 누리는 자와 이용되는 이가 다르다는 것쯤은 당연한 일 아닌가. 지독하게도.
p.11 그러나 공포와 절망에 물든 사람들은 어렵고 느린 길보다 빠르고 결과가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그때라도 멈춰야 했을까? 타임머신이 발명되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인간은 늘 이기적이기에.
p.191 지구가 죽어가고 있어서 바다로 도망쳐 왔으면서도 사람들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바다를 데우고 있었다.
한 발 재겨디딜 곳이 없다. 밀려나고 얻어맞고 버려지며 존엄을 상상할 기회조차 빼앗기는 이들이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식을, 가능성을 찾는다. 숨쉬고 사랑하며, 사랑하고 웃는다. 손을 내밀고 등을 내어주며, 서로를 끌어안고 마주한다. 그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감히 기적이라 하겠다. 신이 없는 세계에 간신히 기적이라 부를 것이 남아있다면, 체온을 가진 존재의 맞닿음일 것이다.
삶을 알지 못하는, 짦은 수명을 부여받은 존재가 태어나서 처음 먹는 따뜻한 음식에 마음을 빼앗기듯이. 누군가가 스스로를 베어 넘겨줄 때, 소외된 이들이 서로를 끌어안을 때. 멸시받고 천대받는 이들로 유지되던 세계를 그들 스스로 버릴 때, 그것이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p.70 옛날 사람들은 물에 잠긴 식료품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좋았다. 그런데 왜 세상이 바다로 변하는 건 막지 못했을까?
p.238 우리는 다른 돔도 부수어 인간으로 인해 죽은 바다를 인간을 통해 되살릴 것이다. 루나의 다리가 새로 자라는 동안 내 다리를 써도 되겠지. 온 세상이 바다로 가득했다.
그러니 다시금 물에 잠긴 폐허의 자리에서 춤을 추고, 눈부시게 웃으며 기꺼이 세계를 등지련다. 작가가 그려내는 절망 이후의 세계와 원래부터 주어지지 않았던 이를 끌어안고 사랑하련다. 멸망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에서, 행복을 의심치 않으며.
"우리는 멸망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웃는 날이 더 많을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