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조건 - 철학이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
오사 빅포르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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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조건 #오사빅포르스 #푸른숲 #철학 #포스트투르스 #리터러시 #언론

*출판사 푸른숲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탈진실, 대안진실, 대안언론, 가짜뉴스, 미디어 리터러시... 신조어인 양 하며 언제 어디서 속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기레기", "입만 열면 구라"를 외치는 분노를 부추기는 단어들이다. 마치 평화로운 예전에는 없던 문제가 꼭 누구 때문에, 꼭 어느 당, 어느 언론사 때문에 생겨난 것처럼 너도나도 문해력과 진짜 진실, 가짜 진실을 외쳐대는 시대. 남의 일이 아니라 눈물이 난다는 말로 요약하고 싶다. 남의 일이길 바라는 마음 또한 문제라는 것도 함께.
과연, 넘쳐나는 시사교양서와 인터넷 뉴스, 개인과 정당을 가리지 않고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움켜쥐며 악을 쓰는 시대, 우리 누구누구 하고싶은 것 다 해! 개같이 멸망해라!와 공정과 역차별을 외치는 커뮤니티와 온라인 유명인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무엇을 사실과 진실로 착각하고 또 주장하며 끝내 도래할 영광의 망국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인가.
여러모로 시의적절하고 반가운 책이다. 기실 인간 사회가 생겨나고 개인의 정치적 역할이 중요해짐에 따라 필요하지 않은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프고 시원하게 핵심을 찌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남의 일이 아니라 눈물이 난다. 현대의 아수라장 또한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부끄럽다가 그조차도 없던 일처럼 매끄럽게 지워지고 당연한 것이 되는 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저자는 1장부터 반복적으로 "대안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적 정보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과 사실이라고 주장되는 의견을 구분하며 강조하는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던진다.
p.72 "이는 객관성 논의가 절대적 확실성과 권력 과시와 관련되어 있다는 포스트모던적 비판을 뒷받침하는 사고방식과 비슷하다. 즉, 확실한 지식은 없으며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단지 권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객관적 진실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은 그 반대다. 진실이 객관적이기 때문에, 즉 우리와 우리 자신의 입장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확신해서는 안 된다."

쇼펜하우어의 명저 아닌 명저,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은 더이상 황당무계한 내용이 아니다. 정치인이 출연하는 어느 방송, 토론이든 유세든 하다못해 SNS든 각 지침(?)에 해당하는 예시를 찾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백과 한 질은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숱하게 봐온 역사 뿐만 아니다. 세계의 수많은 지식인과 학자, 평범한 시민들까지도 경악과 한탄으로 몰아넣은 불세출의 천재, 무치의 아이콘 트럼프를 보라.
저자는 트럼프와 그 주변인 및 극우언론으로 대표되는 가짜뉴스, 거짓말, "대안적 진실"의 범람이 미치는 영향을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예시들로 보여준다. 남 이야기라 와닿지 않는다 싶으면 일주일쯤 뉴스 프로그램만 줄창 돌려보아도 좋다. 어디 그것뿐인가. 서점만 가도 아비투스도 모자라 이것까지 자기계발서로 비벼먹고(...)있는 참혹한 광경을 볼 수 있다.
3장에서는 왜 우리는 주장을 사실이라고 착각할 뿐만 아니라 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외면하는지, 그것이 이른바 "배운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인지를 여러 심리학 실험들을 통해 그 이유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몰라서 그래" 가 아닌, 적극적이고 자기암시적인 사고 왜곡은 어째서 발생하며 또 심화되는가? 나는 바야흐로 커뮤니티 정치의 시대가 도래한 작금의 정치판을, 우려를 담은 이 문장으로 요약하고 싶다.
p.149 "상반된 입장에 선 사람들이 서로를 멀리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수록, 우리가 진실에 도달할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우리는 가짜뉴스와 언론, 정치인과 추종자를 포함한 집단들의 거짓말에 희망을 품는 경우가 많다. 그들도 잘못을 알고 있을 거라고, 조롱하고 계도(!)하면 죄 씻은 어린양처럼 "정의로운 우리 편"에 달라붙을 것이라고. 과연 그럴까. "깨어있는 시민"은 모든 거짓을 간파하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이윤 추구를 통해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평생을 물 속에 사는 물살이가 바다를 알아차리지 못하듯 거짓 정보와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개인은 "올바른 진실"을 간파하고 추구할 수 있는가?
p.197 "가짜 뉴스의 콘텐츠가 완전히 거짓은 아닌 경우도 종종 보인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뒤섞는 시도가 자주 보인다. 가장 효과적인 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만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뒤섞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저자는 4장의 말미에서 아렌트를 인용해 이 순진한 기대를 한순간에 두드려 부순다. 단지 이득이 얽히기 때문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상명하복 체계에서 거짓말의 공유와 전파가 권력위계와 행사의 반영일 수 있다고.
p.219 "전체주의 국가에서 거짓말의 또 다른 핵심 기능은 진실과 이성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지속적인 거짓말의 효과는 거짓을 진실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고 선고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대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5장에서는 떠먹여주는 진실, 입맛에 맞는 주장을 사실로 여기는 것이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또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 취합하는 능력을 기르는 방식에 현재 교육시스템이 어떻게 저항하는지, 어떤 취약점이 있으며 학생주도학습이라는 모토에 가려진 개인 간 격차의 심화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여러 논문과 전문가들의 우려, 저자 자신과 자녀 세대가 보이는 차이점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p.263 "하지만 지식에 관한 민주주의쟁점의 핵심은 모든 유형의 지식을 동등하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이론적 지식에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모든 문장과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지만. 가령 지식과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현장의 과제와 현재 교육계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5장의 내용에는 개인의 각성이나 노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배경처럼 깔려있다. 또한 저자의 교육관이나 여러 학파에 대한 의견,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전문가집단에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즉, 저자가 써내려간 문장에는 객관적 사실과 그것들을 취사선택해 종합한 정보에 따른 저자의 견해가 혼재되고 교차되어있다. 그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게 읽은 독자라면, 저자가 강조하는 바를 잊지 않고, 고개를 주억이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더욱이 이 책이 사회진출을 앞둔 청소년에게 권장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문제를 당장 해결하자는 것이 아닌 지적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청소년, 대학 또는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거나 사회로 진출하는 초년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계몽이 아닌 비판을 위해, 옳은 나와 틀린 남을 주장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아닌 진실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민사회를 위해 여기에 "포스트 트루스"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희망을 담은 문장을 남긴다.
p. 289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이들 요소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바꿀 수 있다면 최악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변화를 통해 경제적 불평등과 점차 허물어지고 있는 복지 시스템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위해서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지식의 적들에 대해 철저한 방어 태세를 마련해야 한다."

더해서 감상하기를 권하는 자료들.
1. 다큐멘터리 영화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2. 닐 포스트먼 저, 『죽도록 즐기기』
3. 해리 G.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4.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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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살리는 옷장 - 지속가능한 패션을 위한 고민
박진영.신하나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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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솔직히, 비건지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낫아워스라는 브랜드를 SNS에서만 봤지 큰 관심은 없었다. 첫째로는 옷이나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친환경", "에코", "비건" 재질 패션은 어쩐지 좀... 그렇잖은가 싶었다. 소수의 유행 잘 타는 사람들만 찾는 것 아닌가, 내구성도 떨어지고 디자인도 안 예쁘고 어쩐지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 아니 편견으로. 그래서 SNS의 지인들이 신상품을 샀다거나 홍보를 한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넘긴 적이 숱하다. 어느날 '아 이 가방 참 예쁘다. 보나마나 동물 가죽이겠지.'라고 생각하기 전 까지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 때까지 순 착각이었고, 편견이었다. 내심 그래도 동물성 소재가 좋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아닌가, 어쩔 수 없다는 자기위안으로 앞에서는 동물권을, 뒤로는 슬쩍 눈 감아오며 기만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에 대체 내가 지금까지 뭘 했던건가 싶더라. 관심없다는 핑계로 대충,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없는 셈 치며.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특가 세일", "기본템", "저렴한" 이라는 수식어를 주렁주렁 매단 그 옷들은, 대체 원가가 얼마길래? 이 가격에 팔아도 이문이 남는다면 대체 이걸 만들고 유통한 사람들은 돈을 받긴 했다는건가? 환경에 덜 해로운, 해를 덜 끼치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공정을 거치긴 한건가? 그 비용은 다 어쩌고? 대체 이건 무슨 돈으로, 어디에 비용을 떠넘겼길래 이 가격이 되어 한 철 입고 버리는 쓰레기가 되어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다.
p.36 "싼 물건의 가격에는 언제나 그 가격이 가능하도록 만든 보이지 않는 외부 비용이 결여되어 있다. 오늘날 싼값으로 트렌디한 옷을 즐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제공한 값싼 노동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SPA브랜드며 인터넷쇼핑 광고에는 "신상"과 "잇템"이 쏟아져나온다. 환한 조명이 켜진, 널찍한 매장에 들어서면 수십수백벌의 옷이 사이즈별로, 종류별로 걸려있다. 이 많은 옷들은 대체 누가 다 사입고 다닌단 말인가? 2017년 기준으로 전세계 의류 소비량은 연간 6,200만톤에 이른다고 한다. 아니, 옷 한 벌에 무거워봤자 얼마나 된다고? 그 많은 옷은 "시즌템"으로 잠깐 입고 버려져 어디로 가는가? 역시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고 당연한 결과가 튀어나온다. 팔리지도, 재활용되지도 못한 옷은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것은 아무도 쓰지 않는 쓰레기가 되어 어딘가에 묻히거나 태워지거나 그저 던져지거나... 오물이 되어 어딘가의 누군가가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절대로 내 근처, 내 집, 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하고도 뻔뻔한 확신이란. 그저 헌옷수거함에 휙 던져 넣으면 "불쌍한 사람"이 감사히 주워다 입고 사용할 것이라는 야비하고도 오만한 계산이란.
p.59 "패스트 패션의 옷은 판매된 후 1년 이내에 50퍼센트가 매립되거나 소각된다."
p.62 "많은 사람들이 '기부'라는 미명 아래 내가 안 쓰는 물건을 남에게 주어 처리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착각한다.하지만 진정한 기부는 쓸 만한 물건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체모의 대부분을 잃었다. 생존과 멋을 위해 걸치는 것은 당연하게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털이라면 다른 동물의 것, 가죽이라면 역시 다른 동물의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가죽을 입고 태어난 인간이 다른 동물의 가죽을 벗겨내 입고 다닌다는 것이. 한때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모피를 최고급으로 치던 때가 있었다. 길거리의 사람이, 동물이 사람의 머리며 손가락, 발가락이 온전히 달린 가죽을 걸치고 다니는 것을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지 않은가. 가죽은 동물의 피부다. 가죽은, 털을 제거한 모피다. 많은 사람들이 북극곰, 펭귄, 담비는 퍽 귀여워하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멸종위기종을 보호하자는 표어는 수시로 내걸리며 그들을 형상화한 뱃지며 가방은 넘치게 팔린다. 그것들이 그들과 "덜 귀엽고" "덜 희귀한" 동물의 목을 조르고 살 곳을 빼앗고, 매일같이 뼈와 살을 발라내는 줄은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p.115 "물범, 바다코끼리, 북극곰, 판다 등을 위한 캠페인과 관련 굿즈는 언제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멸종위기종에 관심이 많지만 닭, 소, 돼지와 같은 흔해빠진 동물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p.116 "축산업과 가죽 산업 안에서 동물들이 받는 고통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늘린 고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환경보호, 종평등, 덜 해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늘 양쪽으로 시달린다. "그래봤자 우리는 이미 다 망했다"와 "이것저것그것은 누리고 고작 그정도만 해서 되겠느냐"면서. 탈진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것도,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런 말들이다. 개인의 책임을 통감하는 동시에 무력감에 빠지는 것. 비건지향을 주장한은 이들의 대부분이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대기업의 쓰레기에 좌절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에코"와 "친환경적"이라는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맥락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히고 해봐야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길이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래알 하나만큼의 힘이라도 보탤 수 있다고. 그 모든 노력과 용기를 사랑한다.
그러니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나 한 명만큼, 하나의 일 만큼은 책임져야 한다고,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이 필요한 때라고, 저 멀리서 불이 번지는 숲이라도 하나의 씨앗을 심는 마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미미한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고. 어머니 대지, 방글방글 웃는 동물 같은 오래된 그림을 꺼내오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며, 알 기회가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 더는 안된다고, 물러설 곳이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다고. 우리 모두는 생산자이 동시에 소비자라고, 한낱 생명인 동시에 크나큰 책임을 진 존재자라고.
p.144 "한 개인이 고민 끝에 깊은 자연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삶을 선택해 살아간다면 그것도 존경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러한 선택이 모두에게 답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생산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렇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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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시가 된다 위대한 도시들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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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누가 그랬던가. "I'm an alien, I'm a legal alien"이라고.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만큼 이민자들의 도시인 곳이 있을까. 이방인들의 국가로 출발해 이방인들의 국가, 이방인들의 집합체가 된 곳, 그러면서도 이방인을 배척하는 곳. 이방인이란 무엇인가. 잠시 머무르는 자, "우리"가 아닌 자, 잠재적 위험요인, 침략자, 약탈자... 겉으로는 다를지언정 속내를 들여다보면 좋은 감정을 품은 단어는 아니다. 놀랄 일도 아니다. 동물은 낯선 것을 경계하기 마련이고 인간 또한 무리짓고 선을 긋는 동물이니. 배척은 습성이다. 사회적 규율로 차별과 배제를 차단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폭력을 향하는 본능이다.

이방인의 나라, 이방인의 도시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다섯 주인공이 뉴욕시 각 자치구의 화신이 되어 도시를 지킨다. 생각만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우리"가 아닌 것이 "우리"가 속한 곳 그 자체가 되어 수호한다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이 단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다중우주이론의 거대한 수식을 가져오지 않아도 쉽사리 상상해볼 수 있다. 다층적이고 환상적인 우주, 세계 간의 경합과 그 안의 이물질같은 인간.
각기 뉴욕시 내 다섯 자치구의 화신인 주인공들은 각 도시의 역사와 문화와도 관계가 깊다. 그러나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상류층이 아니라 이방인의 도시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유색인종, 혼혈, 선주민 그리고 비자를 원하는 불안정한 계약직 이민자들이 그 주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히 진정한 미국을 나타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선, 이 환상문학에서 도시생성의 개념과 다중우주, 시공을 오가는 이야기를
p.420 "(전략) 특정한 장소에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의 독특한 문화를 충분히 발전시키면 모든 현실의 층들이 압축돼 변화하기 시작하지"

미국, 자유의 나라? 앞서 말했듯 이방인과 침략자의 나라? 원래 해본 놈이 더 잘 안다고, 뿌리깊은 인종차별과 표현의 자유를 가장한 혐오발언이 판치는 나라가 아니던가. 예의 그 Great America는 이 책의 구석구석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유색인종을 대하는 백인 경찰의 폭력성, 성소수자로 간주되는 유색인에 대한 백인-중산층의 혐오, 유대인과 소수자를 향한 온라인 루머와 반달리즘, 네오나치의 혐오발언과 폭력성, 위대한 엉클샘과 캡틴 아메리카 뒤에 숨겨진 추잡한 민낯이.
p.107 "경찰이 오는 중이래. 여태까진 대낮에 공원에서 마약을 빨든 다른 걸 빨아 주든 별짓을 다 하고 살았을지 몰라도 난 그런 짓거리를 참아 주려고 여기 이사온 게 아니거든? 너희 같은 놈들을 다 쫓아낼 거야. 한 번에 하나씩, 전부 다."
p.366 "마침내 나타난 경찰들은 브롱카에게 이들을 고발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든다. 잘사는 집안의 착하고 순진해 빠진 백인 청년들이 갈색 피부의 히피 여자들이 운영하는 아트센터에 밤중에 몰래 들어와 잡힌 것뿐이니까."
현실을 그저 나열하거나 상상으로 도피하는 대신 날카로운 고발과 지적을 혐오와 차별을 사소하거나 당연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그저 나약하게 내몰리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세대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가 나아갈 길과 진정한 도시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날카로운 지적과 더불어 꺾이지 않는 신념과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처럼. 매니, 브루클린, 브롱카, 파트미니, 아이슬린. 그들의 그들의 핏줄에 새겨진 긍지와 생존과 신념, 그러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도시와 인간들.

장편서사의 시작답게 분량의 반 가까이를 캐릭터와 세계관 설정에 할애하고 있으나 그 자체가 서사를 이루는 덕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600쪽에 육박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훌훌 넘어가는 책장에 줄어드는 분량이 아까워 재차 멈추고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이 책 하나만 가지고도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반대로 첫 권이 이정도면 대체 세계관 전체는 얼마나 거대할까-하는 생각에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기도 하다.
독특한 소제목과 챕터 또한 주목할만하다. 서막으로 시작해 각 장과 막간을 지나 코다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한 편의 무대극, 발레 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칫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SF와 이종족 전투물임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설레지 않을 수가 있나. 기성작가, 대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실험적인 작품 구성에 도전하는 모습에 독자는 그저 환호의 깃발을 흔들 수 밖에.(앗, 이것도 너무 군국주의스러운가?)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영상화를 기대해본 적이 있던가. 사랑에 빠지게 만든 짜릿한 전투장면과 신랄한 비판이 시야를 꽉 채우는 화면과 귀를 울리는 사운드로 채워진, 실감넘치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작품이다. 전작 '부서진 대지 3부작'으로 쌓아올린 기대가 전혀 무색하지 않은, 새로운 서사의 시작. 다음 권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또다른 이방인이, 먼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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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맨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 지음, 양혜진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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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느날, 전대미문의 세계적 재난으로 인류의 반이 사망한다면? 나이, 신분 가릴 것 없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간다면? 가난한 사람, 젊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손 쓸 겨를도 없이 숨이 끊어진다면? 익숙하다면 익숙한 소재다. 재앙, 인류절멸의 위기, 첨단과학과 자본으로 무장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 우리는, 적어도 여성은 이런 재난상황에 재난의 원인 외에도 한 가지 위험을 떠안게 된다. 약자로 전락하는 여성 신체. 여성을 포함하는 약자의 신체가 강자-약탈자-남성 존재에게 위협당하고 사회적 지위 또한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를. 그러나? 만일 그 재앙이 남성을 제거한다면? 전쟁과 같이 남성 간의 위계가 비일상적으로 공고해져 비-남성집단이 그 아래의 하층계급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집단이 한순간에 절멸 위기에 처한다면? 여성의 세상이 오는가?
처음의 질문의 다시 생각해보자. 어느날,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대유행해 남성의 90%가 사망한다면? 나이, 경제적 계급을 가릴 것 없이 죽어버린다면? 극도의 여초사회가 도래한다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이 소설은 이 도발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책 전체가 내용을 나타내듯,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의) 전부 여성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수많은 여성의 이름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응급실에 내원한 한 환자의 급격한 상태 악화, 고열, 손 쓸 겨를도 없는 사망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전염병인가? 응급의 어맨더는 최근 입원기록을 확인하자마자 전염병을 의심하지만 사람 사는 일과 조직 돌아가는 꼬라지는 어디나 비슷하다지. 정부기관의 태도는 영 시큰둥하기만 하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불안감, 그리고 기시감. 이것이 결코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저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공포. 독자는 아직 처음이니 가벼운 사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보겠지만, 분량이 어지간한 사전에 육박하지만 않았어도...... 재난영화의 문법이 대체로 그러하듯 사건 등장인물들의 태도 변화를 보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자 고통이다. 그 인물이 현실에 꺾이지 않으려 고군분투할수록 더욱.
최초보고자 어맨더의 앞에서 사망한 환자에 이어 전세계에 급속도로 유사한 증상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속출하고, 이들의 공통점은 남성, 그 중에서도 XY염색체의 남성이다. 호흡기? 점막? 음식?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대유행에 부유층은 전염병 확산세를 피해 사유지로 이주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전쟁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세상에서 기존의 남성과 여성이 체감하던 위협의 범주가 역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출이 어려워지고, 접촉이 어려워지며, 각종 요직에서 비중이 줄어드는 것, 그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되는 것. 그것은 이미 익숙하다면 익숙한 광경이 아닌가. 여성은 감정적이다. 여성은 연약하다. 여성은 비이성적이다. 여성이 대표를 맡는 것은 어색하다. 여성에게는 남성이 필요하다.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노골적으로 성적인 시선을 받거나 행동거지가 성적인 신호로 해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이미 익숙하다면 익숙한 편견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근거가 무너진 세상에서 앞선 모든 편견과 위협이 남성에게 쏟아진다면? 그것 또한 익숙하고 당연하여 감내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현실이 되는가?

서술자로 구분되는 소챕터는 다양한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퍼즐처럼 맞춰나가는 즐거움을 준다. 또한 앞서 말했듯 서술자 대부분이 여성이면서 동시에 기혼자이(었다 사별하게 되었)거나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그 말은 그들에게도 소중한 가족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단순히 기존의 관계를 역전하는 데에서 그치는가, 이때다 하고 피비린내나는 복수극이 펼쳐지는가, 아니면 돌봄과 애정, 관계에 대한 갈망과 밑바닥에서도 일어나는 의지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결말까지의 여정에서 기꺼이 감수할 긴장과 즐거운 피로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남자들아 기죽지마라 그냥 죽어라"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집필된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대유행 전후의 세상을 소름끼치게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만일 이것의 정체가 페미니즘 소설이냐 묻는다면 당신이 묻는 "페미니즘 소설"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실제로 들었던 말처럼) "받은 대로 돌려준다니 너무 유치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럼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무엇이냐고 되물을테다.
시대반영부터 재난상황에 대한 인간의 유구한 아수라장, 젠더권력과 계급, 국가별 의료격차와 정치, 재난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0호 환자"의 유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가 코로나 대확산 초기부터 지금까지 주욱 놓치고 있는, 언론이 생존자에게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의까지 아예 시리즈로 냈어도 무리가 없었겠다고 생각할만큼 다양한 주제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과연 지금은 괜찮으냐고, 이대로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겠냐고, 생존자 혹은 남겨진 자가 된다면 그 이후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이겠냐고. 바로 눈 앞에 도래한 현실을 계기로 생각해보길 바란다. 반복되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재앙, 재난에 똑같은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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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
와타야 리사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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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저자 이름을 듣자마자 묘하게 익숙하더라니,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한동안 일본소설에 푹 빠지게 했던 그 와타야 리사다. 간질간질한 연애물도 얼굴에 절로 열이 오르게 하는 뜨거운 묘사도, 하다못해 해마다 질리지도 않고 나오는 치정극(이라고 하기엔 팬들에게 너무한 단어 선택인가)에도 썩 흥미가 없었던 나를 앉은 자리에서 홈빡 빠지게 만들었던 그 이름, 와타야 리사.
그의 작품을 읽은 것도 꽤나 예전 일이라 "퀴어 로맨스"라는 홍보문구에 조금 시큰둥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요. BL은 만화든 드라마든 영화든 멋지고 화려한 청춘에 잘생긴 남자 둘이 붙어 이렇든 저렇든 행복해지는 것도 많은데 어떻게 된 게 여성애자만 나오면 어? 행복할 수가 없어! 백합? GL? 세기의 명작 "캐롤"을 보세요. 세기의 또다른 명작 "윤희에게"를 보세요. 나도 좀 행복하면 안되겠냐구! 운다 울어 정말. 사회고발 아니면 치정싸움, 그것도 아니면 둘이서는 행복할 수 없는 가슴아픈 이별!! 이런 것 좀 그만 보고 싶다고요!! 나도 좀 맘놓고 행복해져보자! 를 예. 내가 작가 이름에서도 좀 눈치챘어야 했는데. 응. 전작이 썩 말랑하기만 한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걸 기억했어야 했는데. 응. 냅다 읽어버려~!! 했던 내가... 천재였지. 후회라도 할 줄 알았나요? 그럴리가요. 없어서 못 먹습니다. 떨어진 것도 주워먹는 게 여성애물인데 그럼.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 좀더 청소년기의 미묘한 긴장감과 갈등, 관계를 다루었다면 이번 신작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는 제목처럼 꽤나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내내'라니, 세상에, 이건 순애물일까? 아주 그냥 몹시도 상처를 주고나서 뒤늦게 후회하고 싹싹 비는 고백일까? 삑. 오답입니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 묘하게 싸한 맛으로 아슬아슬한 심리묘사가 돋보였다면, 이번 작품은 작가가 약칭 등짝(...)에서 숨기지 못한 매운맛, 결말의 발길질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잘 다듬어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든 느낌이다. 시작부터 어른의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돌아보고나니 그래 그 때 참 어렸지. 하는, 어떻게든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그래야만 하는 인물들에 독자는 공감의 끄덕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일본 영화같은 느낌이다. 건조한 그림체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 같기도, 표지의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그대로 영화화 한 것 같기도 한 느낌. 다소 산만하거나 짧다고 느껴지는 각 장면들을 영상화해서 읽는 편을 권한다.
주인공 아이와 사이카는 각자의 남자친구와 여행지에서 처음 마주쳤다. 도도하고 냉정해보이는 미인 사이카, 귀엽고 싹싹한 아이. 첫만남부터 영 껄끄러웠다. 쟨 대체 뭐가 문제길래 말도 없고 단답에 사교성도 없어보이는지? 여기까지 읽고 아, 불편해... 라고 생각했다면 탈주가 너무 빠른 편이다. 참고 읽어보자.
남자친구 소우와의 관계는 순탄하고, 어쩐지 결혼까지도 자연스럽게 그려보게 되지만 자꾸만 마음이 간다. 불편하기만 한 첫만남을 지나 어쩐지 두 번 세 번 어울리다보니 사이카와는 친구가 되어있고? 그의 정체는 유명 연예인이었고? 그것도 놀라운데 이친구가 나를 좋아한다네? 나는 남자가 있는데?? 그게 문젠가요.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어도 편하지만은 않고, 자꾸만 나답지 않은 모습을 연기하게 되는 남자친구와 대체 얘는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폭주기관차처럼 다가오는 여자, 친구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신경쓰이고 잊혀지지 않은 그런, 여자. 초반부 아이의 태도는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눈치를 보고, 주변을 신경쓰고, 자기 마음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우유부단의 아이콘에 가깝다. 결국 졸지에 차여버린 소우가 안타까울 정도로.
결국 사귀는 사이가 되었지만 몸의 대화는 영 어색한 아이, 애매한 유명인에서 톱스타로 떠오른 사이카.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리 쉽기만 한가. 둘의 관계를 눈치챈 소속사와 사이카의 어머니는 갖은 협박과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둘을 갈라놓는다. 자기가 힘이 없어서, 사이카에게는 꿈이 있어서. 두 가지 이유로 잠시 떨어져있기로 결심한 아이는 소속사가 말한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사이카를 데리러 오겠다고 이별을 고한다. 과연 그 둘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아무리 나만은 변함없는 마음이라고 해도 재회한 상대의 마음까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거지? 이건 사랑이 맞긴 한걸까?

섹슈얼스탠스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스릴에 가깝게 포착해 묘사하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몸의 대화는 피식과 포식에 가깝다는 진부한 표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공감할만하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에서의 긴장감... 그것도 처음에 스릴러인 줄 알았지... 정말 무슨 일 내는 줄 알았다구. 그 기량이 어딜 가지 않는다. 앞서 우유부단의 아이콘이었던 아이가 여러 벽에 부딪히고 걸려넘어지면서 자기 마음에 누구보다도 솔직한, 그러면서도 책임감을 잃지 않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자리잡는 과정 또한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동안 자연스레 눈치채고 감동하게 된다.
앞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왜 여성애서사는 행복할 수가 없냐고 울부짖었지만, 따지고보면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예인에게 연애 그 자체가 아니라 "동성연애"가 흠이 된다는 것, 당당하게 드러내보이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 있다는 것, 믿고있던 가족마저 부정하고만 싶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현실의 많은 퀴어들이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짠! 하고 행복해졌습니다~하고 끝내지 않고, 킨츠키처럼 깨어진 관계마저 더욱 아름답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에서 행복해지는, 결국 우리의 청춘 또한 아름다웠고, 나는 너의 곁을 지킬 반려자가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그래, 그럴 수 있다고. 눈부시다고.
기실 젠더를 막론하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게 사랑이고, 마냥 어릴 수만은 없는 어른의 로맨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그 자체는 남의 뜻대로 꺾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상품으로 취급되는 스타라도 나에겐 그저 너일 뿐이라고, 사랑이라고 작가는 피할 길을 주지 않으며 치열하게 그려낸다. 그리하여 끝끝내 묻는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얼 사랑이라 불러야 하죠?"(p.265)라고. 사랑이라고.

사실 온라인 서점사의 홍보문구를 보면서도, 한 번으로는 모자라 몇 번을 거듭 읽고 나서도 사실 얼떨떨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이거, 이런거 이젠 정식 출판물로 나와도 되는 내용인가? 만화나 웹소설이나 개인 출판이 아니고 정말로 서점에서 고를 수 있는 그런 책으로 나와도 되는 내용이 맞나?
나는 자라나던 대부분의 시간을 퀴어의 ㅋ자도 들어보지 못했고,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숨기기에 급급하거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 했다. 그런 게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로 나오다니, 이렇게 익숙하기까지 한 서사로 나오다니, 다른 연애물과 다를 바 없는 사랑이야기로 나오다니. 지금까지도 작가에 대한 걱정 반, 고마움 반의 복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같은 작품이다. 모두가 자기 행복을 찾는, 완벽하고 속이 뻥! 뚫리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모든 순간에 살아가는 누군가에겐 이런 이야기도 필요한 법이다. 나를 포함해서.
"세월이 흘러도 끝없이 차오르는 사랑에 대해 쓰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오래 만나지 못해도, 마음의 결이 달라져도, 상대의 감정이 어떻든 아무래도 계속되는 그런 관계"를 그리며, 아련하고 찬란한 청춘들에게, 지나온 청춘에 자리했던 무수한 사랑들에게 이 말을 전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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