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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시가 된다 ㅣ 위대한 도시들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누가 그랬던가. "I'm an alien, I'm a legal alien"이라고.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만큼 이민자들의 도시인 곳이 있을까. 이방인들의 국가로 출발해 이방인들의 국가, 이방인들의 집합체가 된 곳, 그러면서도 이방인을 배척하는 곳. 이방인이란 무엇인가. 잠시 머무르는 자, "우리"가 아닌 자, 잠재적 위험요인, 침략자, 약탈자... 겉으로는 다를지언정 속내를 들여다보면 좋은 감정을 품은 단어는 아니다. 놀랄 일도 아니다. 동물은 낯선 것을 경계하기 마련이고 인간 또한 무리짓고 선을 긋는 동물이니. 배척은 습성이다. 사회적 규율로 차별과 배제를 차단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폭력을 향하는 본능이다.
이방인의 나라, 이방인의 도시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다섯 주인공이 뉴욕시 각 자치구의 화신이 되어 도시를 지킨다. 생각만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우리"가 아닌 것이 "우리"가 속한 곳 그 자체가 되어 수호한다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이 단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다중우주이론의 거대한 수식을 가져오지 않아도 쉽사리 상상해볼 수 있다. 다층적이고 환상적인 우주, 세계 간의 경합과 그 안의 이물질같은 인간.
각기 뉴욕시 내 다섯 자치구의 화신인 주인공들은 각 도시의 역사와 문화와도 관계가 깊다. 그러나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상류층이 아니라 이방인의 도시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유색인종, 혼혈, 선주민 그리고 비자를 원하는 불안정한 계약직 이민자들이 그 주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히 진정한 미국을 나타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선, 이 환상문학에서 도시생성의 개념과 다중우주, 시공을 오가는 이야기를
p.420 "(전략) 특정한 장소에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의 독특한 문화를 충분히 발전시키면 모든 현실의 층들이 압축돼 변화하기 시작하지"
미국, 자유의 나라? 앞서 말했듯 이방인과 침략자의 나라? 원래 해본 놈이 더 잘 안다고, 뿌리깊은 인종차별과 표현의 자유를 가장한 혐오발언이 판치는 나라가 아니던가. 예의 그 Great America는 이 책의 구석구석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유색인종을 대하는 백인 경찰의 폭력성, 성소수자로 간주되는 유색인에 대한 백인-중산층의 혐오, 유대인과 소수자를 향한 온라인 루머와 반달리즘, 네오나치의 혐오발언과 폭력성, 위대한 엉클샘과 캡틴 아메리카 뒤에 숨겨진 추잡한 민낯이.
p.107 "경찰이 오는 중이래. 여태까진 대낮에 공원에서 마약을 빨든 다른 걸 빨아 주든 별짓을 다 하고 살았을지 몰라도 난 그런 짓거리를 참아 주려고 여기 이사온 게 아니거든? 너희 같은 놈들을 다 쫓아낼 거야. 한 번에 하나씩, 전부 다."
p.366 "마침내 나타난 경찰들은 브롱카에게 이들을 고발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든다. 잘사는 집안의 착하고 순진해 빠진 백인 청년들이 갈색 피부의 히피 여자들이 운영하는 아트센터에 밤중에 몰래 들어와 잡힌 것뿐이니까."
현실을 그저 나열하거나 상상으로 도피하는 대신 날카로운 고발과 지적을 혐오와 차별을 사소하거나 당연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그저 나약하게 내몰리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세대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가 나아갈 길과 진정한 도시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날카로운 지적과 더불어 꺾이지 않는 신념과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처럼. 매니, 브루클린, 브롱카, 파트미니, 아이슬린. 그들의 그들의 핏줄에 새겨진 긍지와 생존과 신념, 그러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도시와 인간들.
장편서사의 시작답게 분량의 반 가까이를 캐릭터와 세계관 설정에 할애하고 있으나 그 자체가 서사를 이루는 덕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600쪽에 육박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훌훌 넘어가는 책장에 줄어드는 분량이 아까워 재차 멈추고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이 책 하나만 가지고도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반대로 첫 권이 이정도면 대체 세계관 전체는 얼마나 거대할까-하는 생각에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기도 하다.
독특한 소제목과 챕터 또한 주목할만하다. 서막으로 시작해 각 장과 막간을 지나 코다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한 편의 무대극, 발레 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칫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SF와 이종족 전투물임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설레지 않을 수가 있나. 기성작가, 대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실험적인 작품 구성에 도전하는 모습에 독자는 그저 환호의 깃발을 흔들 수 밖에.(앗, 이것도 너무 군국주의스러운가?)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영상화를 기대해본 적이 있던가. 사랑에 빠지게 만든 짜릿한 전투장면과 신랄한 비판이 시야를 꽉 채우는 화면과 귀를 울리는 사운드로 채워진, 실감넘치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작품이다. 전작 '부서진 대지 3부작'으로 쌓아올린 기대가 전혀 무색하지 않은, 새로운 서사의 시작. 다음 권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또다른 이방인이, 먼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