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살리는 옷장 - 지속가능한 패션을 위한 고민
박진영.신하나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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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솔직히, 비건지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낫아워스라는 브랜드를 SNS에서만 봤지 큰 관심은 없었다. 첫째로는 옷이나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친환경", "에코", "비건" 재질 패션은 어쩐지 좀... 그렇잖은가 싶었다. 소수의 유행 잘 타는 사람들만 찾는 것 아닌가, 내구성도 떨어지고 디자인도 안 예쁘고 어쩐지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 아니 편견으로. 그래서 SNS의 지인들이 신상품을 샀다거나 홍보를 한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넘긴 적이 숱하다. 어느날 '아 이 가방 참 예쁘다. 보나마나 동물 가죽이겠지.'라고 생각하기 전 까지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 때까지 순 착각이었고, 편견이었다. 내심 그래도 동물성 소재가 좋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아닌가, 어쩔 수 없다는 자기위안으로 앞에서는 동물권을, 뒤로는 슬쩍 눈 감아오며 기만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에 대체 내가 지금까지 뭘 했던건가 싶더라. 관심없다는 핑계로 대충,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없는 셈 치며.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특가 세일", "기본템", "저렴한" 이라는 수식어를 주렁주렁 매단 그 옷들은, 대체 원가가 얼마길래? 이 가격에 팔아도 이문이 남는다면 대체 이걸 만들고 유통한 사람들은 돈을 받긴 했다는건가? 환경에 덜 해로운, 해를 덜 끼치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공정을 거치긴 한건가? 그 비용은 다 어쩌고? 대체 이건 무슨 돈으로, 어디에 비용을 떠넘겼길래 이 가격이 되어 한 철 입고 버리는 쓰레기가 되어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다.
p.36 "싼 물건의 가격에는 언제나 그 가격이 가능하도록 만든 보이지 않는 외부 비용이 결여되어 있다. 오늘날 싼값으로 트렌디한 옷을 즐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제공한 값싼 노동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SPA브랜드며 인터넷쇼핑 광고에는 "신상"과 "잇템"이 쏟아져나온다. 환한 조명이 켜진, 널찍한 매장에 들어서면 수십수백벌의 옷이 사이즈별로, 종류별로 걸려있다. 이 많은 옷들은 대체 누가 다 사입고 다닌단 말인가? 2017년 기준으로 전세계 의류 소비량은 연간 6,200만톤에 이른다고 한다. 아니, 옷 한 벌에 무거워봤자 얼마나 된다고? 그 많은 옷은 "시즌템"으로 잠깐 입고 버려져 어디로 가는가? 역시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고 당연한 결과가 튀어나온다. 팔리지도, 재활용되지도 못한 옷은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것은 아무도 쓰지 않는 쓰레기가 되어 어딘가에 묻히거나 태워지거나 그저 던져지거나... 오물이 되어 어딘가의 누군가가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절대로 내 근처, 내 집, 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하고도 뻔뻔한 확신이란. 그저 헌옷수거함에 휙 던져 넣으면 "불쌍한 사람"이 감사히 주워다 입고 사용할 것이라는 야비하고도 오만한 계산이란.
p.59 "패스트 패션의 옷은 판매된 후 1년 이내에 50퍼센트가 매립되거나 소각된다."
p.62 "많은 사람들이 '기부'라는 미명 아래 내가 안 쓰는 물건을 남에게 주어 처리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착각한다.하지만 진정한 기부는 쓸 만한 물건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체모의 대부분을 잃었다. 생존과 멋을 위해 걸치는 것은 당연하게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털이라면 다른 동물의 것, 가죽이라면 역시 다른 동물의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가죽을 입고 태어난 인간이 다른 동물의 가죽을 벗겨내 입고 다닌다는 것이. 한때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모피를 최고급으로 치던 때가 있었다. 길거리의 사람이, 동물이 사람의 머리며 손가락, 발가락이 온전히 달린 가죽을 걸치고 다니는 것을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지 않은가. 가죽은 동물의 피부다. 가죽은, 털을 제거한 모피다. 많은 사람들이 북극곰, 펭귄, 담비는 퍽 귀여워하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멸종위기종을 보호하자는 표어는 수시로 내걸리며 그들을 형상화한 뱃지며 가방은 넘치게 팔린다. 그것들이 그들과 "덜 귀엽고" "덜 희귀한" 동물의 목을 조르고 살 곳을 빼앗고, 매일같이 뼈와 살을 발라내는 줄은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p.115 "물범, 바다코끼리, 북극곰, 판다 등을 위한 캠페인과 관련 굿즈는 언제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멸종위기종에 관심이 많지만 닭, 소, 돼지와 같은 흔해빠진 동물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p.116 "축산업과 가죽 산업 안에서 동물들이 받는 고통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늘린 고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환경보호, 종평등, 덜 해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늘 양쪽으로 시달린다. "그래봤자 우리는 이미 다 망했다"와 "이것저것그것은 누리고 고작 그정도만 해서 되겠느냐"면서. 탈진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것도,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런 말들이다. 개인의 책임을 통감하는 동시에 무력감에 빠지는 것. 비건지향을 주장한은 이들의 대부분이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대기업의 쓰레기에 좌절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에코"와 "친환경적"이라는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맥락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히고 해봐야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길이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래알 하나만큼의 힘이라도 보탤 수 있다고. 그 모든 노력과 용기를 사랑한다.
그러니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나 한 명만큼, 하나의 일 만큼은 책임져야 한다고,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이 필요한 때라고, 저 멀리서 불이 번지는 숲이라도 하나의 씨앗을 심는 마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미미한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고. 어머니 대지, 방글방글 웃는 동물 같은 오래된 그림을 꺼내오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며, 알 기회가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 더는 안된다고, 물러설 곳이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다고. 우리 모두는 생산자이 동시에 소비자라고, 한낱 생명인 동시에 크나큰 책임을 진 존재자라고.
p.144 "한 개인이 고민 끝에 깊은 자연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삶을 선택해 살아간다면 그것도 존경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러한 선택이 모두에게 답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생산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렇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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