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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조건 - 철학이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
오사 빅포르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평점 :
#진실의조건 #오사빅포르스 #푸른숲 #철학 #포스트투르스 #리터러시 #언론
*출판사 푸른숲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탈진실, 대안진실, 대안언론, 가짜뉴스, 미디어 리터러시... 신조어인 양 하며 언제 어디서 속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기레기", "입만 열면 구라"를 외치는 분노를 부추기는 단어들이다. 마치 평화로운 예전에는 없던 문제가 꼭 누구 때문에, 꼭 어느 당, 어느 언론사 때문에 생겨난 것처럼 너도나도 문해력과 진짜 진실, 가짜 진실을 외쳐대는 시대. 남의 일이 아니라 눈물이 난다는 말로 요약하고 싶다. 남의 일이길 바라는 마음 또한 문제라는 것도 함께.
과연, 넘쳐나는 시사교양서와 인터넷 뉴스, 개인과 정당을 가리지 않고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움켜쥐며 악을 쓰는 시대, 우리 누구누구 하고싶은 것 다 해! 개같이 멸망해라!와 공정과 역차별을 외치는 커뮤니티와 온라인 유명인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무엇을 사실과 진실로 착각하고 또 주장하며 끝내 도래할 영광의 망국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인가.
여러모로 시의적절하고 반가운 책이다. 기실 인간 사회가 생겨나고 개인의 정치적 역할이 중요해짐에 따라 필요하지 않은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프고 시원하게 핵심을 찌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남의 일이 아니라 눈물이 난다. 현대의 아수라장 또한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부끄럽다가 그조차도 없던 일처럼 매끄럽게 지워지고 당연한 것이 되는 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저자는 1장부터 반복적으로 "대안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적 정보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과 사실이라고 주장되는 의견을 구분하며 강조하는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던진다.
p.72 "이는 객관성 논의가 절대적 확실성과 권력 과시와 관련되어 있다는 포스트모던적 비판을 뒷받침하는 사고방식과 비슷하다. 즉, 확실한 지식은 없으며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단지 권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객관적 진실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은 그 반대다. 진실이 객관적이기 때문에, 즉 우리와 우리 자신의 입장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확신해서는 안 된다."
쇼펜하우어의 명저 아닌 명저,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은 더이상 황당무계한 내용이 아니다. 정치인이 출연하는 어느 방송, 토론이든 유세든 하다못해 SNS든 각 지침(?)에 해당하는 예시를 찾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백과 한 질은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숱하게 봐온 역사 뿐만 아니다. 세계의 수많은 지식인과 학자, 평범한 시민들까지도 경악과 한탄으로 몰아넣은 불세출의 천재, 무치의 아이콘 트럼프를 보라.
저자는 트럼프와 그 주변인 및 극우언론으로 대표되는 가짜뉴스, 거짓말, "대안적 진실"의 범람이 미치는 영향을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예시들로 보여준다. 남 이야기라 와닿지 않는다 싶으면 일주일쯤 뉴스 프로그램만 줄창 돌려보아도 좋다. 어디 그것뿐인가. 서점만 가도 아비투스도 모자라 이것까지 자기계발서로 비벼먹고(...)있는 참혹한 광경을 볼 수 있다.
3장에서는 왜 우리는 주장을 사실이라고 착각할 뿐만 아니라 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외면하는지, 그것이 이른바 "배운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인지를 여러 심리학 실험들을 통해 그 이유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몰라서 그래" 가 아닌, 적극적이고 자기암시적인 사고 왜곡은 어째서 발생하며 또 심화되는가? 나는 바야흐로 커뮤니티 정치의 시대가 도래한 작금의 정치판을, 우려를 담은 이 문장으로 요약하고 싶다.
p.149 "상반된 입장에 선 사람들이 서로를 멀리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수록, 우리가 진실에 도달할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우리는 가짜뉴스와 언론, 정치인과 추종자를 포함한 집단들의 거짓말에 희망을 품는 경우가 많다. 그들도 잘못을 알고 있을 거라고, 조롱하고 계도(!)하면 죄 씻은 어린양처럼 "정의로운 우리 편"에 달라붙을 것이라고. 과연 그럴까. "깨어있는 시민"은 모든 거짓을 간파하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이윤 추구를 통해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평생을 물 속에 사는 물살이가 바다를 알아차리지 못하듯 거짓 정보와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개인은 "올바른 진실"을 간파하고 추구할 수 있는가?
p.197 "가짜 뉴스의 콘텐츠가 완전히 거짓은 아닌 경우도 종종 보인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뒤섞는 시도가 자주 보인다. 가장 효과적인 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만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뒤섞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저자는 4장의 말미에서 아렌트를 인용해 이 순진한 기대를 한순간에 두드려 부순다. 단지 이득이 얽히기 때문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상명하복 체계에서 거짓말의 공유와 전파가 권력위계와 행사의 반영일 수 있다고.
p.219 "전체주의 국가에서 거짓말의 또 다른 핵심 기능은 진실과 이성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지속적인 거짓말의 효과는 거짓을 진실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고 선고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대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5장에서는 떠먹여주는 진실, 입맛에 맞는 주장을 사실로 여기는 것이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또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 취합하는 능력을 기르는 방식에 현재 교육시스템이 어떻게 저항하는지, 어떤 취약점이 있으며 학생주도학습이라는 모토에 가려진 개인 간 격차의 심화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여러 논문과 전문가들의 우려, 저자 자신과 자녀 세대가 보이는 차이점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p.263 "하지만 지식에 관한 민주주의쟁점의 핵심은 모든 유형의 지식을 동등하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이론적 지식에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모든 문장과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지만. 가령 지식과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현장의 과제와 현재 교육계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5장의 내용에는 개인의 각성이나 노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배경처럼 깔려있다. 또한 저자의 교육관이나 여러 학파에 대한 의견,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전문가집단에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즉, 저자가 써내려간 문장에는 객관적 사실과 그것들을 취사선택해 종합한 정보에 따른 저자의 견해가 혼재되고 교차되어있다. 그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게 읽은 독자라면, 저자가 강조하는 바를 잊지 않고, 고개를 주억이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더욱이 이 책이 사회진출을 앞둔 청소년에게 권장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문제를 당장 해결하자는 것이 아닌 지적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청소년, 대학 또는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거나 사회로 진출하는 초년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계몽이 아닌 비판을 위해, 옳은 나와 틀린 남을 주장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아닌 진실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민사회를 위해 여기에 "포스트 트루스"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희망을 담은 문장을 남긴다.
p. 289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이들 요소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바꿀 수 있다면 최악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변화를 통해 경제적 불평등과 점차 허물어지고 있는 복지 시스템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위해서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지식의 적들에 대해 철저한 방어 태세를 마련해야 한다."
더해서 감상하기를 권하는 자료들.
1. 다큐멘터리 영화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2. 닐 포스트먼 저, 『죽도록 즐기기』
3. 해리 G.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4.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