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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
와타야 리사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저자 이름을 듣자마자 묘하게 익숙하더라니,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한동안 일본소설에 푹 빠지게 했던 그 와타야 리사다. 간질간질한 연애물도 얼굴에 절로 열이 오르게 하는 뜨거운 묘사도, 하다못해 해마다 질리지도 않고 나오는 치정극(이라고 하기엔 팬들에게 너무한 단어 선택인가)에도 썩 흥미가 없었던 나를 앉은 자리에서 홈빡 빠지게 만들었던 그 이름, 와타야 리사.
그의 작품을 읽은 것도 꽤나 예전 일이라 "퀴어 로맨스"라는 홍보문구에 조금 시큰둥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요. BL은 만화든 드라마든 영화든 멋지고 화려한 청춘에 잘생긴 남자 둘이 붙어 이렇든 저렇든 행복해지는 것도 많은데 어떻게 된 게 여성애자만 나오면 어? 행복할 수가 없어! 백합? GL? 세기의 명작 "캐롤"을 보세요. 세기의 또다른 명작 "윤희에게"를 보세요. 나도 좀 행복하면 안되겠냐구! 운다 울어 정말. 사회고발 아니면 치정싸움, 그것도 아니면 둘이서는 행복할 수 없는 가슴아픈 이별!! 이런 것 좀 그만 보고 싶다고요!! 나도 좀 맘놓고 행복해져보자! 를 예. 내가 작가 이름에서도 좀 눈치챘어야 했는데. 응. 전작이 썩 말랑하기만 한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걸 기억했어야 했는데. 응. 냅다 읽어버려~!! 했던 내가... 천재였지. 후회라도 할 줄 알았나요? 그럴리가요. 없어서 못 먹습니다. 떨어진 것도 주워먹는 게 여성애물인데 그럼.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 좀더 청소년기의 미묘한 긴장감과 갈등, 관계를 다루었다면 이번 신작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는 제목처럼 꽤나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내내'라니, 세상에, 이건 순애물일까? 아주 그냥 몹시도 상처를 주고나서 뒤늦게 후회하고 싹싹 비는 고백일까? 삑. 오답입니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 묘하게 싸한 맛으로 아슬아슬한 심리묘사가 돋보였다면, 이번 작품은 작가가 약칭 등짝(...)에서 숨기지 못한 매운맛, 결말의 발길질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잘 다듬어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든 느낌이다. 시작부터 어른의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돌아보고나니 그래 그 때 참 어렸지. 하는, 어떻게든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그래야만 하는 인물들에 독자는 공감의 끄덕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일본 영화같은 느낌이다. 건조한 그림체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 같기도, 표지의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그대로 영화화 한 것 같기도 한 느낌. 다소 산만하거나 짧다고 느껴지는 각 장면들을 영상화해서 읽는 편을 권한다.
주인공 아이와 사이카는 각자의 남자친구와 여행지에서 처음 마주쳤다. 도도하고 냉정해보이는 미인 사이카, 귀엽고 싹싹한 아이. 첫만남부터 영 껄끄러웠다. 쟨 대체 뭐가 문제길래 말도 없고 단답에 사교성도 없어보이는지? 여기까지 읽고 아, 불편해... 라고 생각했다면 탈주가 너무 빠른 편이다. 참고 읽어보자.
남자친구 소우와의 관계는 순탄하고, 어쩐지 결혼까지도 자연스럽게 그려보게 되지만 자꾸만 마음이 간다. 불편하기만 한 첫만남을 지나 어쩐지 두 번 세 번 어울리다보니 사이카와는 친구가 되어있고? 그의 정체는 유명 연예인이었고? 그것도 놀라운데 이친구가 나를 좋아한다네? 나는 남자가 있는데?? 그게 문젠가요.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어도 편하지만은 않고, 자꾸만 나답지 않은 모습을 연기하게 되는 남자친구와 대체 얘는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폭주기관차처럼 다가오는 여자, 친구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신경쓰이고 잊혀지지 않은 그런, 여자. 초반부 아이의 태도는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눈치를 보고, 주변을 신경쓰고, 자기 마음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우유부단의 아이콘에 가깝다. 결국 졸지에 차여버린 소우가 안타까울 정도로.
결국 사귀는 사이가 되었지만 몸의 대화는 영 어색한 아이, 애매한 유명인에서 톱스타로 떠오른 사이카.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리 쉽기만 한가. 둘의 관계를 눈치챈 소속사와 사이카의 어머니는 갖은 협박과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둘을 갈라놓는다. 자기가 힘이 없어서, 사이카에게는 꿈이 있어서. 두 가지 이유로 잠시 떨어져있기로 결심한 아이는 소속사가 말한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사이카를 데리러 오겠다고 이별을 고한다. 과연 그 둘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아무리 나만은 변함없는 마음이라고 해도 재회한 상대의 마음까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거지? 이건 사랑이 맞긴 한걸까?
섹슈얼스탠스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스릴에 가깝게 포착해 묘사하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몸의 대화는 피식과 포식에 가깝다는 진부한 표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공감할만하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에서의 긴장감... 그것도 처음에 스릴러인 줄 알았지... 정말 무슨 일 내는 줄 알았다구. 그 기량이 어딜 가지 않는다. 앞서 우유부단의 아이콘이었던 아이가 여러 벽에 부딪히고 걸려넘어지면서 자기 마음에 누구보다도 솔직한, 그러면서도 책임감을 잃지 않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자리잡는 과정 또한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동안 자연스레 눈치채고 감동하게 된다.
앞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왜 여성애서사는 행복할 수가 없냐고 울부짖었지만, 따지고보면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예인에게 연애 그 자체가 아니라 "동성연애"가 흠이 된다는 것, 당당하게 드러내보이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 있다는 것, 믿고있던 가족마저 부정하고만 싶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현실의 많은 퀴어들이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짠! 하고 행복해졌습니다~하고 끝내지 않고, 킨츠키처럼 깨어진 관계마저 더욱 아름답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에서 행복해지는, 결국 우리의 청춘 또한 아름다웠고, 나는 너의 곁을 지킬 반려자가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그래, 그럴 수 있다고. 눈부시다고.
기실 젠더를 막론하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게 사랑이고, 마냥 어릴 수만은 없는 어른의 로맨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그 자체는 남의 뜻대로 꺾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상품으로 취급되는 스타라도 나에겐 그저 너일 뿐이라고, 사랑이라고 작가는 피할 길을 주지 않으며 치열하게 그려낸다. 그리하여 끝끝내 묻는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얼 사랑이라 불러야 하죠?"(p.265)라고. 사랑이라고.
사실 온라인 서점사의 홍보문구를 보면서도, 한 번으로는 모자라 몇 번을 거듭 읽고 나서도 사실 얼떨떨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이거, 이런거 이젠 정식 출판물로 나와도 되는 내용인가? 만화나 웹소설이나 개인 출판이 아니고 정말로 서점에서 고를 수 있는 그런 책으로 나와도 되는 내용이 맞나?
나는 자라나던 대부분의 시간을 퀴어의 ㅋ자도 들어보지 못했고,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숨기기에 급급하거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 했다. 그런 게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로 나오다니, 이렇게 익숙하기까지 한 서사로 나오다니, 다른 연애물과 다를 바 없는 사랑이야기로 나오다니. 지금까지도 작가에 대한 걱정 반, 고마움 반의 복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같은 작품이다. 모두가 자기 행복을 찾는, 완벽하고 속이 뻥! 뚫리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모든 순간에 살아가는 누군가에겐 이런 이야기도 필요한 법이다. 나를 포함해서.
"세월이 흘러도 끝없이 차오르는 사랑에 대해 쓰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오래 만나지 못해도, 마음의 결이 달라져도, 상대의 감정이 어떻든 아무래도 계속되는 그런 관계"를 그리며, 아련하고 찬란한 청춘들에게, 지나온 청춘에 자리했던 무수한 사랑들에게 이 말을 전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