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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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이 사실상 섬인 국가의 성원, 개중에서도 본토라고 할만한 반도 거주민으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바다는 언제나 망망대해, 열린 공간이었다. 그렇잖아도 국토라고 해봤자 손바닥만한 당일 생활권이 태반이라 더더욱. 해외가 곧 자국 바깥, 외국-집단의 동의어로 쓰이는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라는 건 뭘까. 바다 너머에 이 땅과 '이어진 대륙'이 있어 딱 잘라 이것으로 나와 그들의 경계를 그을 수 없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흑해를 그 희한한 지리의 대표 사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p.25 역사와 사회 연구에는 육지 중심의 편견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역사와 사회생활이 땅 위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예컨대 바다를 항해하거나 강을 타고 내려가는 여정은 단지 배우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펼칠 진짜 연기를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양과 바다, 강들은 단순히 통로나 경계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작용과 교류라는 독특한 이야기들의 핵심 주역으로서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p.75 다른 변경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마주친 종족들의 문화에 적응하고 심지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전기 아테네의 시인과 극작가가 상상했던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명확한 문화적 경계선은 실로 매우 흐릿해졌다.


한때는 거친 바다, 또 언젠가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환대의 바다, 이제는 검은 바다로 불리는 그것은 '동서양'의 중간지대,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백. 언젠가는 대재앙의 현장이었다가, 미개인과 '도시' 바깥의 험지였던 때를 지나, 무역의 중심지이자 갓 움트던 유럽의 개념적 연장이 되었고, 이제는 범세계적 이권다툼의 요소로 여겨진다.

야망과 생업, 죽음과 침탈의 가능성 그 자체였던 검은 바다는 세계의 끝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들끓고 있다. 여전히. 땅의 바다, 대륙의 확장. 흑해는 언제나 신과 인간, 문화와 종족의 교차로였다. 언젠가는 미지의 땅에 용을 그렸다지. 'Hic sunt dracones'. 이 바다 너머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용이 있다. 침탈과 교잡, 낯선 이름이라는 피가 흐르는 존재.

p.155 복원된 비잔티움은 해협의 제국에 불과했고, 발칸과 카프카즈의 다른 기독교 왕국과 아나톨리아의 투르코만 에미르국에 둘러싸인 비교적 작은 세력이었다. 경제와 대외 무역은 대부분 이탈리아인들 손에 남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조금만 올라가면 닿는 흑해는 이제 사실상 제국 통제권의 지평선 너머에 있었다.

p.241 흑해는 더 이상 내해, 즉 제국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 땅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물길이 아니었다. 이제 변경이 된 것이다. 1600년대 후반까지 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사를 톺아보는 작업에 어떤 도덕적 잣대로 첨언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언젠가 세계의 끝이었던 이곳에서 다채로운 문명이 꽃피고 뒤섞였음을, 수많은 역사의 시발점이자 종착이였음을 되새겨본다.

소련 붕괴 이후 그나마 오락가락하던 짧은 '평화'의 환상마저 숨통이 끊긴 지금, 전장으로 재구성되는 이 바다, 한때 변경이자 경계였던 '이 장소'를 묻는다. 죽음의 바다는 결코 자연만을 의미하지 않았으리라. 이곳은 누구의 바다인가, 혹은, '영토'인가. 공백을 공-존으로 두지 못하는 인간의 자리가 저 깊은 곳에 있겠거니, 희망과 절망의 뒤섞임을 저 아래 가라앉히며.

p.377 바다와 해안의 진정한 소유권에 관한 논쟁이 학술지와 책들의 지면에서 벌어졌다. (...) 이런 논쟁은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가의 연구가 특정 영토 합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됐고, 영토에 대한 역사적 권리 주장은 평시 실지회복 운동의 기반이었으며 종종 또 다른 전쟁의 출발점이었다.

p.435 (역자 후기) 21세기 흑해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20세기 냉전 시대의 지정학이 중첩되는 복잡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흑해가 앞으로도 국제 정치의 주요 갈등 지점이자 협력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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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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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광인, 부랑자, 사회의 온갖 문제적 존재를 한 데 쑤셔넣는 곳이었다가, 또 언젠가는 치료를 빙자해 죽을 때까지 가둬놓는 격리소였다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주립 어린이청소년 정신병원. 환자 수 천오백 이상, 한가운데엔 원장 관사. 그곳이 바로 밤이면 환자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들고 아침이면 실랑이와 발작 가운데 씩씩하게 등교하는 주인공의 집이다.

박식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시시때때로 속을 긁어놓는 두 형... 에 지지 않는 환장과 황당의 결정체같은 막내, 요세. 그가 풀어주는, 엉뚱발랄 따위의 깜찍한 수사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은, 뭐랄까. 얘야 제발. 요세, 막내야, 대체 뭐가 문제니. 진정하고 제발 말로 좀 해라. 안돼 하지마! 뭐든간에 멈춰!!!

p.131 나는 말을 떼기도 전에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 때부터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할 게 없다. 주변에서 밤마다 수천 명의 사람이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는데 나까지 울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새들이 아침의 특정 시간대에 노래하기 시작하듯 저녁 울음소리에도 일정한 논리가 있는 듯했다.

p.482 나는 그들의 무절제함, 끊임없는 소란, 그리고 내게는 너무나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던 그들의 일상적 광기가 그리웠다. 또한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분명함을 그리워했다. 수많은 환자들이 운명처럼 갇혀 있던 존재의 숨김없는 명료함을. 그리고 무엇보다 밤마다 울려 퍼지던 환자들의 무수한 절규를 그리워했다. 나를 그토록 기분 좋게 잠들게 했던 그 절규와 비명을.


꼬마에서 청년이 되기까지 자잘한 에피소드는 이따금 황당하고, 당황스럽거나 또 사랑스럽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환상적이고 치열했고, 불가해한 갈등과 미처 알지 못했던 어른의 사정들, 짜릿한 비밀 사이사이를 채우는 것은 반짝이는 순간들이다. 사랑이거나, 두려움이거나... 슬픔 같은. 자연히 묻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어쩌면 의심할 바 없이 당연하고 단단했던 불확실성의 집합으로 빨려들어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유년의 영웅이 그저 인간에 불과했음을, 때로는 어리석고 추잡하고 두려워하는,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는 한 명의 사람. 정상과 광기, 어른과 아이, 안과 밖의 다름과 동시에 인간 존재의 근원적 동일성을 납득하게 되는, 아릿한 통증.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p.248 슐라이 요트 클럽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맞았다. 이때부터 아들을 배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바람 강도 0 상태에서 조난당해 구조된 교수의 이야기가 슐레스비히 회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그것도 모두 면허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p.457 "참, 이상하지. 나는 내가 왜 소위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소위 정상적이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항상 더 편안함을 느끼는지 자주 생각했어. (...) 다른 의사들한테 부끄러워. 병든 의사라는 건 왠지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 작은 도시의 모두가 그걸 알아. 누가 병든 의사한테 자기 자식을 맡기겠니?"


종장에 다다라 그가 마주친 장면에 어떤, 아릿한 통증을 감각한다. 크으으으으게. 크게, 말고, 돌아 유리창 너머 소년의 눈동자, 흐려졌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단지 그뿐인 순간에 비로소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묻고 싶어진다. 너무 긴 포옹과 통제 불능한 존재들과 바깥의 삶은 무엇이 달랐겠느냐고.

그리고, 어째서, 이렇게나 그리운걸까. 이 정신사납고 사랑스럽고 난감한 일화들로 낱낱이 꿰인 삶을 따라가노라면 존재를 이루는 기억과 세계의 토대란 과연 이런 의미겠거니, 싶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슬픔은 단단하고 작은 조각이 된다.

어떤 순간은 잊혀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기이하고 곤란한 존재들의 형태로 마음에 남아 삶이 되고 그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남아 이어지고. 그렇게 한때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발작적으로 휩싸이던 소년은 유년의 일상이었던 불가해와 기나긴 포옹으로 하나가 된다. 찬란과 고통의 혼잡 한가운데서 독자는 그와 함께 조금 더 어른이 된다. 아침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p.479 내가 기억의 꾸러미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미래는 그 영원한 약속을 이행하고 불확실해지고, 하나의 선이 하나의 면으로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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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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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수술'이라는 말에 거리며 웹사이트를 도배하는 '이상적인 외형'의 모델들을 떠올리지 않는 이가 드물 것이다. 돈만 주면 티도 안 나게 딴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며 이리저리 긋는 절개선이며 보형물을 늘어놓는 광고를 질리도록 보고 또 보는 일상에도 익숙할 것이다.

과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가끔가다 섬뜩하게까지 느껴질 지경인, 거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성형외과에 대한 시선은 비대칭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한쪽은 다분히 미용의 영역으로서 가히 자연의 수준을 벗어난 경지를 추구하는 '사치', 반대편은 생성과 재건, 조립과 해체 등 지극히 첨예한 기술의 장으로.

p.157 그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는 환영 행진도, 악단도 없었고 예전 약혼자뿐 아니라 많은 주민이 그의 달라진 얼굴에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예전 직장을 찾아갔을 때 사장은 손님들이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으니 뒤쪽 구석에서 잡일이나 하라고 했다. 이런 푸대접에 분개한 그는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상처는 전쟁터에서만 입는 것이 아니었다.

p.328 미용 시술에 대한 관심이 역사상 가장 높아지긴 했지만 선천적 이상, 외상, 질병으로 달라진 몸을 복원하고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재건 수술은 여전히 이 분야의 주류로 남아 있다. (...) 추진력이 무엇이든 안면 이식이 일부 환자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형 음식물을 먹고, 자력으로 호흡을 하며, 더 나아가 평생 처음으로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다.


개중 후자가 압도적으로 궁핍과 과로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저자는 대량살상무기 급진보의 실험대였던 세계대전에 활약한 의사들을 중심으로 성형이 왜 외과에 속하는지, 어쩌다 학문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는지, 무엇보다도 그 필요성이 대두된 기원이 무엇이었는지를 병원 안팎의 생생한 사례를 중심으로 풀어놓는다.

그 가운데 어떤 '미용'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 앞서 제쳐둔 후자.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와 타인 모두에게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를 위한 시도들은 말 그대로 생존의 영역에 닿아있었다.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폭력에 맞닥뜨린 이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힘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의 삶을 위한 토대였다.

p.168 가면의 목표가 병사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긴 하지만, 가면 자체는 그 궁극적인 목적을 상기시키는 역할도 했다. 바로 가리는 것이다. 관람객을 위해 쓸 때가 그렇다.

p.324 길리스는 얼굴을 재건하는 일 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때와 그 뒤에 부상병의 생식기 재건 수술도 했다. (...) 길리스는 새 환자에게 급성 요도밑 열림증이라는 허위 진단서를 써주었다. 요도 구멍이 잘못된 곳에 생기는 선천성 결함이었다. 진료실에 오는 딜런이 성전환자임을 숨겨서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길리스는 몇 년에 걸쳐 딜런에게 13차례 수술을 했다.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서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매달리는 마음은 뭔지. 그리고, 그렇게 살려낸 사람을 도로 끌어가 기어코 죽여버리는 높으신 분들과 명분이란 게 대체 무엇이었을지. 수없이 죽어나간 다음에야 하나둘씩 살릴 방도를 찾아낸다는 게 과연 인류사의 진리일지.

수술대 위의 존재가 더 아름다운 '용모'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 또한 여상해진 지금, 과연 누가 그 언젠가의 수술실 안팎에서 벌어지던 사투를 기억할까. 누가 '무엇'을, 어떻게,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왔는지를. 역사의 끝, 현재에서 그 기원을 다시 묻는다.

p.102 의사들은 서둘러 부상병들을 깁고 꿰매면서도, 의도치 않게 그들이 회복되면 더 강력해질 전쟁 기계에 인력을 공급하고 있었 다. (...) 〈이 통탄할 결과 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점이 하나 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전시에 의사들이 획득한 지식으로부터 인류가 혜택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격렬해질 시기에는 오로지 한 가지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하여 최대한 많은 병사를 전선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p.256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루어진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결정과 마찬가지로, 그 명령도 상부의 보이지 않는 손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클레어가 받은 명령은 새 환자들을 위해 침대를 비워 주고 전쟁 기계에 인간이라는 연료를 계속 공급하라는 것이었다. (...) 그리하여 클레어는 치료받다가 만, 멍들고 부은 상태로 다시 싸우러 갔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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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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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글은 양심을 정면으로 찔러들어오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처음 읽었던 그의 책 제목은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였더란다. 그때는 어느정도 심상히 넘긴 감이 없지 않았다. 생각을 글로 써내는 일이 업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당시, 대선 후로 반년쯤 지난 때에, 나는 그간의 삶이 부끄러웠다. 아는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알지 못하고 흘려버린 것들, 눈 감고 귀 막아 등돌린 이들에 속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해가 네 번 바뀐 지금, 말할 때도 아니고 글로만 정의롭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텍스트 뒤로 숨어서만 입바른 소리를 떠들곤 이내 흘려버린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적기엔 해묵은 악수들이 극단적 형태로 얽혀버린 경우에 불과하다. 어떤 일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거나 잊혔으며, 심지어 더 나빠졌다. 어떤 일상은 여전히 회복되지도, 상상되지도 않는다. 앎과 삶 사이는 여전히 멀찍이 데면데면하다.

p.29 동정도 숭배도 불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감정이다. 그래서 자칫 모욕이 된다. 차별 없는 평등이 답이다. (...) 서로 다른 정체성들은 교차해야 하고, 쟁점들은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다중화되어야 한다. 서로 혐오해서는 존엄해질 수 없다.

p.209 사실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위태롭고 불안정한 생계에 묶여 싸우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싸울 이유가 가장 절실한 이들은 바로 그 이유 탓에 싸우지 못한다.


사회 곳곳의 걷잡을 수 없는 균열에 '새로운 정의'가 들어섰다. 굴러떨어지는 이들은 대강 공백인 셈 치고 어떻게든 패를 갈라 그 간극을 벌리려 애쓴다. 이건 정치도 뭣도 아니다. 패싸움이고 땅따먹기지. 사람이 살기 위해 모인 사회가 누군가를 사람 바깥으로 밀어내야만 동력을 얻는다.

소수의 권력을 탓하기엔 당장의 삶에 급급한 평범한 이들이 절대 다수다. 침묵과 외면은 적극적인 동조가 된다. '나도 힘들다'는 말의 모순에 눈 막고 귀 감아 자리를 뜬다. 수사와 편가르기를 떠나 '무결하고 죄 없는 시민'은 어디에도 없다. 등돌려진 책임만이 덩그러니 남아 던져질 돌이 된다. 죄인 찾아라. 일단 우리는 아니겠지만.

p.141 시험도 안 거친 비정규직이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받는 건 못 보겠다는 '민주 시민'도 드물지 않다. 연대를 외치던 입으로 차별을 옹호한다. 그렇게 함께 지옥을 만든다.

p.264 지금은 내란 막기에 힘을 모아야 하니 '탄핵 이후의 세상'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들 한다. (...) 내란을 막자면서 왜 부자가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지 모르겠다. 내란을 막자면서 왜 당신들이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윤석열은 나쁘지만, 세상의 고통이 모두 그의 탓은 아니다. 어떤 슬픔들은 당신들에게서 나온다.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우리의 응원을 받으며.


저자의 첫 책에 "부끄러웠던 자만이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는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사는 세상을,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자리와 관점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고 남겼었다. 지금의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다. 오래도록 그래왔듯이.

앞서 말했듯, 앎과 삶 사이는 허허벌판마냥 황량히 동떨어져있다. 그 사이에 놓인 건 '어쩌면'이나 '예외들'이 아닌 실재하는 이들이다. 우리들이다. 일상이어서는 안 될 평범들이다. 손을 뻗는다.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풀로 뒤덮인, '최초의 악수'를 위해. 하지 않음보다 늦는 것은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

p.68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한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333 약하고 사소한 존재들은 각자의 모양대로 세상에 '구멍'을 남긴다. 구멍은 그들의 죽음 후에도 뚫린 채 남아 세상에 균열을 내고 무언가를 남긴다. 그 구멍 속에 '작은 것들의 신'이 있다. 작가는 '세상의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고, 그 연관성이 어떻게 인간 삶을 형성하며 인간관계를 결정짓는지를 보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밝힌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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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왜곡의 역사 - 증보판
바트 어만 지음, 민경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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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다'는 책, 성경. 통독이야 교인도 쉽지 않다 쳐도 존재 자체나 그것이 신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만들어진' 이래, 때마다 철마다 진리처럼 불려나오는 이 오래된 텍스트는 과연 교리처럼 완벽불변하는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는 걸까?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익히 알려진 성서무오설이니 축자영감설이니, 거창한 수사를 빌지 않더라도 전능한 유일신의 '말씀'이 시대에 따라 다르고 사람에 따라 달리 말해진다고, 쉽사리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외로 눙치기엔 너무 많다.

p.91 어떤 필사자가 실수로든 의도적으로든 한번 본문을 바꾸면 그 이문은 사본 속에 영원히 남게 된다. 다른 필사자가 수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이문을 담고 있는 사본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본을 만드는 필사자는, 그 이문들도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라고 믿으며 그대로 베낀다. 그런데 그뿐일까? 이 필사자 역시 새로운 이문들을 만들기 마련이다. 또 이 사본을 베끼는 후대의 필사자는 앞선 두 필사자가 만들어낸 실수에 자신만의 실수를 더한다. 이문에 이문이 덧붙는 셈이다.

p.117 중세 필사자들은 그렇게 전문적인 방식으로 베껴 쓴 사본을 어디서 구했을까? 이들은 분명히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했으며, 그 사본들 역시 그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했다. 물론 그것은 또 그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상 원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이라고 한다면,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후기의 표준화된 전문 필사본이 아니라 초기의 조잡하고 다양한 형태의 사본들일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자란 저자가 실제로 마주한, 빈번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할만큼 무수한 자기모순과 충돌의 역사에 퍽 당황할만도 하다. 무류한 말씀입네 성령으로 받아적었네 해놓고선 이렇게까지 막 주먹구구로 뜯어고쳐도 되는 건가, 싶을 지경이었으니, 읽고 쓴다는 것, 이해한 내용을 전달하고 정리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변개'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종장에서 독자는 어떤 이해에 가닿게 된다. 필사에 '연루'된 이들 모두가 사람이라는 것. 믿음의 세계, 교단의 세력 확장에 결부되는 분열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가 필연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가장 탈속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영역이야말로 지극히 세속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p.148 어떤 경우에는 필사자들이 본문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독자의 오해를 막기 위해 본문을 변개하기도 했다. (...) 때때로 필사자들은 보다 신학적인 이유로 변개하기도 했다. '이단들'이 본문을 자의적으로 이용할 수 없게 하거나, 필사자가 이해한 의미를 더 분명하게 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p.230 2세기와 3세기만 해도 이렇듯 일치된 견해가 없었다. 합의된 정경과 교리가 없었으며, 매우 다양한 모습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예수의 사도들이 썼다고 주장되는 다양한 문서를 기반으로 다양한 분파가, 다양한 신학을 주장했다.


다시, 현재, 신이 죽고도 남은 이 시대에 왜 수천년 묵은 텍스트의 변천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가, 하면, 이 성스러운 '말씀'이 기천년을 이어져온 종교의 뿌리인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신의 실재와 전능에의 믿음과는 별개로, 그 이름을 빌어 말하고 행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작이야 산꼭대기든 동산이었든 간에,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져온 말. 필연히 오류와 의지의 산물일 믿음으로 이어지는 섭리에 대해 물을 책임은 인간에게 있었다. 언제나. 신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인간의 폭력이 또다시 세계를 좀먹는 지금, 묻고 싶다. 무엇을 믿겠습니까.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어떤 세계에서 대화할 책임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p.278 요약하자면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는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으며, 간혹 이런 논쟁은 신약성서의 전승 과정에서 본문에 유입되었다. 필사자들은 때때로 성서 본문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회 내 여성의 (제한된) 역할에 더 부합하도록 본문을 변개하곤 했다.

p.324 본문을 읽으려면 그것을 마음속에서 다른 말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표현하기 위한 다른 말을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하고 (...) 살아있다는 것은 곧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온갖 요소들 즉 욕구, 갈망, 필요, 바람, 신념, 관점, 세계관, 의견, 기호, 혐오 등으로 채워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본문을 변개하는 행위이다.


*도서제공: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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