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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평점 :
이 사람의 글은 양심을 정면으로 찔러들어오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처음 읽었던 그의 책 제목은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였더란다. 그때는 어느정도 심상히 넘긴 감이 없지 않았다. 생각을 글로 써내는 일이 업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당시, 대선 후로 반년쯤 지난 때에, 나는 그간의 삶이 부끄러웠다. 아는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알지 못하고 흘려버린 것들, 눈 감고 귀 막아 등돌린 이들에 속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해가 네 번 바뀐 지금, 말할 때도 아니고 글로만 정의롭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텍스트 뒤로 숨어서만 입바른 소리를 떠들곤 이내 흘려버린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적기엔 해묵은 악수들이 극단적 형태로 얽혀버린 경우에 불과하다. 어떤 일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거나 잊혔으며, 심지어 더 나빠졌다. 어떤 일상은 여전히 회복되지도, 상상되지도 않는다. 앎과 삶 사이는 여전히 멀찍이 데면데면하다.
p.29 동정도 숭배도 불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감정이다. 그래서 자칫 모욕이 된다. 차별 없는 평등이 답이다. (...) 서로 다른 정체성들은 교차해야 하고, 쟁점들은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다중화되어야 한다. 서로 혐오해서는 존엄해질 수 없다.
p.209 사실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위태롭고 불안정한 생계에 묶여 싸우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싸울 이유가 가장 절실한 이들은 바로 그 이유 탓에 싸우지 못한다.
사회 곳곳의 걷잡을 수 없는 균열에 '새로운 정의'가 들어섰다. 굴러떨어지는 이들은 대강 공백인 셈 치고 어떻게든 패를 갈라 그 간극을 벌리려 애쓴다. 이건 정치도 뭣도 아니다. 패싸움이고 땅따먹기지. 사람이 살기 위해 모인 사회가 누군가를 사람 바깥으로 밀어내야만 동력을 얻는다.
소수의 권력을 탓하기엔 당장의 삶에 급급한 평범한 이들이 절대 다수다. 침묵과 외면은 적극적인 동조가 된다. '나도 힘들다'는 말의 모순에 눈 막고 귀 감아 자리를 뜬다. 수사와 편가르기를 떠나 '무결하고 죄 없는 시민'은 어디에도 없다. 등돌려진 책임만이 덩그러니 남아 던져질 돌이 된다. 죄인 찾아라. 일단 우리는 아니겠지만.
p.141 시험도 안 거친 비정규직이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받는 건 못 보겠다는 '민주 시민'도 드물지 않다. 연대를 외치던 입으로 차별을 옹호한다. 그렇게 함께 지옥을 만든다.
p.264 지금은 내란 막기에 힘을 모아야 하니 '탄핵 이후의 세상'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들 한다. (...) 내란을 막자면서 왜 부자가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지 모르겠다. 내란을 막자면서 왜 당신들이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윤석열은 나쁘지만, 세상의 고통이 모두 그의 탓은 아니다. 어떤 슬픔들은 당신들에게서 나온다.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우리의 응원을 받으며.
저자의 첫 책에 "부끄러웠던 자만이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는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사는 세상을,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자리와 관점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고 남겼었다. 지금의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다. 오래도록 그래왔듯이.
앞서 말했듯, 앎과 삶 사이는 허허벌판마냥 황량히 동떨어져있다. 그 사이에 놓인 건 '어쩌면'이나 '예외들'이 아닌 실재하는 이들이다. 우리들이다. 일상이어서는 안 될 평범들이다. 손을 뻗는다.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풀로 뒤덮인, '최초의 악수'를 위해. 하지 않음보다 늦는 것은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
p.68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한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333 약하고 사소한 존재들은 각자의 모양대로 세상에 '구멍'을 남긴다. 구멍은 그들의 죽음 후에도 뚫린 채 남아 세상에 균열을 내고 무언가를 남긴다. 그 구멍 속에 '작은 것들의 신'이 있다. 작가는 '세상의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고, 그 연관성이 어떻게 인간 삶을 형성하며 인간관계를 결정짓는지를 보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밝힌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