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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평점 :
전국이 사실상 섬인 국가의 성원, 개중에서도 본토라고 할만한 반도 거주민으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바다는 언제나 망망대해, 열린 공간이었다. 그렇잖아도 국토라고 해봤자 손바닥만한 당일 생활권이 태반이라 더더욱. 해외가 곧 자국 바깥, 외국-집단의 동의어로 쓰이는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라는 건 뭘까. 바다 너머에 이 땅과 '이어진 대륙'이 있어 딱 잘라 이것으로 나와 그들의 경계를 그을 수 없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흑해를 그 희한한 지리의 대표 사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p.25 역사와 사회 연구에는 육지 중심의 편견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역사와 사회생활이 땅 위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예컨대 바다를 항해하거나 강을 타고 내려가는 여정은 단지 배우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펼칠 진짜 연기를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양과 바다, 강들은 단순히 통로나 경계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작용과 교류라는 독특한 이야기들의 핵심 주역으로서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p.75 다른 변경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마주친 종족들의 문화에 적응하고 심지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전기 아테네의 시인과 극작가가 상상했던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명확한 문화적 경계선은 실로 매우 흐릿해졌다.
한때는 거친 바다, 또 언젠가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환대의 바다, 이제는 검은 바다로 불리는 그것은 '동서양'의 중간지대,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백. 언젠가는 대재앙의 현장이었다가, 미개인과 '도시' 바깥의 험지였던 때를 지나, 무역의 중심지이자 갓 움트던 유럽의 개념적 연장이 되었고, 이제는 범세계적 이권다툼의 요소로 여겨진다.
야망과 생업, 죽음과 침탈의 가능성 그 자체였던 검은 바다는 세계의 끝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들끓고 있다. 여전히. 땅의 바다, 대륙의 확장. 흑해는 언제나 신과 인간, 문화와 종족의 교차로였다. 언젠가는 미지의 땅에 용을 그렸다지. 'Hic sunt dracones'. 이 바다 너머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용이 있다. 침탈과 교잡, 낯선 이름이라는 피가 흐르는 존재.
p.155 복원된 비잔티움은 해협의 제국에 불과했고, 발칸과 카프카즈의 다른 기독교 왕국과 아나톨리아의 투르코만 에미르국에 둘러싸인 비교적 작은 세력이었다. 경제와 대외 무역은 대부분 이탈리아인들 손에 남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조금만 올라가면 닿는 흑해는 이제 사실상 제국 통제권의 지평선 너머에 있었다.
p.241 흑해는 더 이상 내해, 즉 제국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 땅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물길이 아니었다. 이제 변경이 된 것이다. 1600년대 후반까지 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사를 톺아보는 작업에 어떤 도덕적 잣대로 첨언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언젠가 세계의 끝이었던 이곳에서 다채로운 문명이 꽃피고 뒤섞였음을, 수많은 역사의 시발점이자 종착이였음을 되새겨본다.
소련 붕괴 이후 그나마 오락가락하던 짧은 '평화'의 환상마저 숨통이 끊긴 지금, 전장으로 재구성되는 이 바다, 한때 변경이자 경계였던 '이 장소'를 묻는다. 죽음의 바다는 결코 자연만을 의미하지 않았으리라. 이곳은 누구의 바다인가, 혹은, '영토'인가. 공백을 공-존으로 두지 못하는 인간의 자리가 저 깊은 곳에 있겠거니, 희망과 절망의 뒤섞임을 저 아래 가라앉히며.
p.377 바다와 해안의 진정한 소유권에 관한 논쟁이 학술지와 책들의 지면에서 벌어졌다. (...) 이런 논쟁은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가의 연구가 특정 영토 합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됐고, 영토에 대한 역사적 권리 주장은 평시 실지회복 운동의 기반이었으며 종종 또 다른 전쟁의 출발점이었다.
p.435 (역자 후기) 21세기 흑해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20세기 냉전 시대의 지정학이 중첩되는 복잡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흑해가 앞으로도 국제 정치의 주요 갈등 지점이자 협력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도서제공: 사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