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전작에서 증명했듯, 최진영은 고통을 들여다보는 작가다. 그저 바라봄에 그치지 않고 상처를 헤집고 부패하고 뒤틀려 찢긴 몸을 내보인다. 읽는 이의 뒷목을 잡아채 균열 한가운데에 처박을 것처럼 밀어넣는다. 보라고, 여기에 고통이 있노라고, 부러지고 으깨지며 비명으로 가득한 이것이 고통 그 자체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느냐고.

딸의 여동생, 그들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는 꿈을 꾼다. 꾼다기보단 끌려들어간다. 수백수천의 죽음이 동시에 벌어지는 세계로.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

질문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받는다면, 영문도 모르는 채 무수한 비참을 목도하게 된 이가 온 힘을 다해 구해낸다면. 단 하나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p.15 그들은 죽은 듯이 살기로 했다. 더는 자라지 않고 그대로 멈추려고 했다. (...) 그들의 뿌리는 엉켜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몰두할 수 없었다.

p.60 가서 받아. 목화는 몸을 움츠렸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의심하지 말고 구해. 목화는 더욱 움츠렸다.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받으면 살아.


지옥인가? 말할 것도 없는 환상인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가? 바로 지금 도처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상기해보라.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다. 그것을 피할 길 없이 마주하게 될 때, 살아있음은 도리어 비정상이 된다.

이야기는 오래된 숲의 오래된 나무의 연대기로 시작한다. 수백년의 삶을 몇차례씩 겪고도 살아남은 나무가 있다. 그 세계도 살아있는 것이 가득하므로 죽음 또한 도처에 있으나 이별이 될 수 있었다. 작별할 수 있었다. 처음이 있었듯 끝이 있으리라 여길 수 있었다. 무수한 소문처럼 인간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작가는 묻는다. 슬픔의 끝의 끝으로 몰아붙여진대도, 시원도 종말도 없는 무력함에 두 팔을 늘어뜨리고 마음이 부서진대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느냐고, 세계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지켜보는 수많은 눈, 무엇도 인간을 돕지 않는다(48)."

p.19 그루터기만 남기고 줄기는 통쨰로 사라져 버리는 기괴한 죽음은 (...) 숲에서 보고 들은 죽음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이 아니엇다. 이별 또한 아니었다. 훼손이었다. 파괴였다. 폭발이자 비극이었다.


또한 철학자 레비나스는 묻는다. 내가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세계는 내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타인의 벌거벗은 얼굴, 호소로 도래하는 바로 그 얼굴의 부름에, 신의 그것을 마주하듯이 ‘Me voici’, 내가 여기 있노라 응답해야 합니까?

대체 왜 우리는 타자의 존재 자체에, 심지어 우리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까? 왜 우리는 타인의 얼굴, 죽이지 말라, 죽음으로 방치하지 말라는 명령에 저항할 수 없습니까? 무한한 책임으로 밀어넣어지는 수동성은 어째서 우리의 주체성을 성립하게 합니까?

p.54 목수야, 다 보고 있었어. 여기 모든 존재가. 그런데 아무도 돕지 않았어.

p.103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났을까. 탄생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인간은 약하다. 삶이 있는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다. 살아있기에 죽는다. 그것은 정지하지 않음의 이치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이, 개중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그 안의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비참이고, 고통이고, 비명이다.

앞서 작가가 들이밀고 레비나스가 마주했던 세계는 바로 이런 의미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곳에 살고 있다. 존재하며, 이어지고, 알지도 못하는 곳까지 뻗어나가 닿는다.

인간은 약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알 수는 있다. 바로 그것이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이, 근원적인 외로움을 떨칠 수 없는 존재를 살아남게 한다. 비참한 세계가 절망의 동의어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가 전했고, 이제는 독자가 말해야 한다. 죽음으로 가득한 세계에 우리는 여전히 묻지 않고, 손을 뻗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고, 사람에게는 적어도 단 한 사람을 살릴 만큼의 힘이 있다고,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고도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지옥이지만, 밑바닥에서도 해낼 수 있다고. 우리는 누군가의 단 한 사람이라고. 발버둥을 치고 외면하려 애써도 차마 그럴 수 없는 이유,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을 살려내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p.146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p.208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p.221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 그것은 나무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이었다. 나무의 지시가 아니었다. 목화의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언제의, 누구의 이야기인가? 지난 삶에 겪었던 일인가?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인가?

작가는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건다. 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보라고. 많은 경우 자신의 세계에 독자가 자리함을 전제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영문 모르고 내던져진 독자만 남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잘못 쓰여진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실패했는가? 그렇지 않다. 한순간에 내쫓기듯 현실로 돌아온 독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그럼으로서 도리어 이야기의 세계에 남아버린다.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떠나온 곳을 헤매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책을 읽을 어딘가의 독자가 아무런 기대나 예상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명쾌한 마침표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기를 권한다. 가진 적 없던 것을 빼앗기는 것만 같은 초조함,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뒤섞이는 혼란함, 경계-없음에서 출발하는 사색을 충분히 음미하며 읽을 때, 비로소 작가가 말하는 바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정답을 맞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중 ‘나’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앞서나간 자는 추월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나의 길의 나-아닌 자의 길로 덮어씌워질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p.91 당신은 언제고 항상 원래의 길로 다시 되돌아오게 돼 있소. 당신의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오. 어떤 작품이 여러 연출가에 의해 연출될 경우와 마찬가지요. 무대가 달라지고 심지어 대사가 바뀌거나 축소되어도 줄거리는 변함없이 진행된다는 것이오.


선형적 세계에서 먼저 지나온 길, 알고 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설명은 곧 나-아님을 나의 체계로 끌어들이는, 포섭의 과정이다. 결국 안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 된다. 방향을 지시하는 자는 곧 아는 자다. 설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p.95 처음엔 미칠 것 같았소. 내가 말했다. 난 그 친구에게 화가 났소. 어쩌면 질투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친구가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했소. 왜냐하면 그 친구는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오. 그 친구의 일생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지. 나에 의해 선취되어 있었단 말이오.

p.117 크리스에 대한 내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가 내 삶을 그대로 베껴 삶으로써 마치 내 인생을 도둑질 해 가고, 내 삶을, 내 자신을 말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연 나는 그의 죽음만이 나를 구원하고 다시 올바른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세계가 선형이 아니라면, 또는 우리가 인생이라는 무대에 자리만 바꿔 오를 뿐 각본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와 타자와 타자로서의 내가, 이곳과 저곳이, 현실과 상상이 안개처럼 뒤엉킬 때, 모든 요소들이 서로에 닿지 않을 수가 없을 때, 그것은 분명 흔적을 남긴다.

답이 없는 질문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읽고 혼란스러울 독자에게 다시금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객관적인가? 모든 것은 유일하고 인생은 연극일 따름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삶을 살아낼 수 있는가? 홀로 숨지듯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만족해야 하는가?

그 모든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우리 겁 많고 초라한 신은 묻는다. 존재란 무엇인가.

p.80 나는 오후 내내 당신을 미행했소. 최소한 몇 시간만이라도 내가 다시 젊어져서 내 인생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하는 환상 속에서 살고 싶었소.

p.96 선생님이 범한 오류를 수정하고, 우리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싶은 유혹 말이에요. 아니면 단지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시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이랄까요. 겁이 나오. 내가 말했다. 뭐가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웰다잉 프로젝트 -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
봉봉 지음 / 씨네21북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현대사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고와 말을 가지고 살아간다. 과거에 비해 개인은 자유롭고 다양하다.

정정한다. 현대 사회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각자의 사고와 말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가지고 떠밀려 살아간다.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나에게 자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자유는 나의 자유에 밀려 사라진다.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특별함을 원한다. 특별함은 시장의 매물이 된다. 그러므로 결국 특별하지 않은 이들이 모여 더 특별한 특별함을 원한다. 끊임없이.

이 책의, 총 여섯 편의 수록작들은 대체로 위안을 주지 않는 내용이다. 대신, 생각하고 마주할 것을 들이민다. 보세요. 당신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인간이 공장식 생산품이 되는 시대, 여전히 손쉬운 소비 대상을, 처형할 마녀를 간구하는 인간들, “ANA”. 타인의 죽음마저 유흥거리가 되어버리는 소비자들, 나서서 그를 조장하는 자본, “웰다잉 프로젝트”.

외양의 차이를 제거해 차별을 없앴다고 주장하나 결국 그마저도 끊임없는 경쟁과 무한소비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붉은 여왕”. 성찰과 윤리가 부재하는 관심 경쟁 미디어의 적나라한 면모와 그마저도 관심경쟁에 이용하는 정치, 사회, 시민성의 폭로, “마지막 비행”.

“손톱 먹은 쥐” 설화를 모티브로 한, 그런데 이제 어딘가 좀 귀엽고 짠한 구석이 있는, 이대로도 참 괜찮은 스스로가 가족이 되는 이야기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 신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죄책과 짐으로부터 책임없는 자유를 주시옵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소서. 더러움과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변기”.


단 한 편을 제외하고, 위의 작품들은 각기 현대의 지옥도를 그려낸다. 지금 현재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법한 내용도, 뻔히 도래할 미래를 다루는 내용도 있지만 결국은 독자가 알고 있을, 지금의 세계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타인은 지옥이다”.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한다. 타인 뿐만 아니라 자아가 존재하는 곳이 곧 지옥이다. 마음이 있는 곳이 지옥이다. 타자의 본질은 ‘나와 다른 것’이다. 모든 것이 동일한 존재가 여럿 존재하더라도 ‘나’와 ‘나-밖의 존재’는 같지 않다.

나의 영향력이 본질적으로 한계를 갖는 경계, 그곳이 타자의 존재영역이다. 인간은 세계에 존재한다. 모든 것이 인식 가능하며 자기 자신으로 흡수되는 세계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세계가 아니다. 자기 안의 자기에 불과하다.


앞서 말했듯이 현대 사회의 우리는 바글바글한 타자와 동일성의 반복으로 가득한 지옥에 놓여있다. 존재의 탄생 이래 타자에 둘러싸이지 않은 적이 없는 존재는 피할 수 없는 지옥에 놓여있다. 우리 인간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결국 생각해야 한다. 외면할 수 없다면, 그렇다고 매몰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면 남은 것은 치열한 사고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려는 몸부림 밖에 없다. 해서, 작가는 그림과 대사를 통해 이렇게 묻는다. 이것이 지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어리 테일 2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동화라고 했잖아요... 동화라매요!!! 그치만 따지고 들어가면 영 아니라고만 할 수는 없어서 뭐라고 딱히 따질 말은 없는... 형식상 동화가 맞기는 해... 그치만 이게 동화라면 지금까지 내가 읽어 온 동화는 대체 뭐란 말이냐 공갈협박이란 말이냐...

근데 무슨 동화가 러브크래프트랑 심야 코미디쇼 섹시 드립 같은 게 나오나요... 이걸 동화라고 보여줬다간 인세를 합의금과 벌금으로 날리게 될 것입니다, 작가양반...

p.177 "템푸스 푸지트도 좋은 구절이긴 하지만 시간이 항상 빠르게 흐르지는 않지. 뭘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겠지만, 템푸스 에스트 움브라 인 멘테가 더 맞지 않을까? 대충 번역하자면 시간은 마음속의 그림자라는 뜻이야."

p.230 막판에 정신을 차렸다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유감스러웠다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면 거짓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둠의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물을 마시면 자기만 손해다. 그 안에는 독이 들었다.


새삼스럽지만, 겁쟁이에게 모험은 없다. 그들의 삶에도 나름의 긴장과 짜릿함이 있겠지만 결국 모험의 본질은 비일상적인 선택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땅함이나 자연스러움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달리 어쩌겠는가, 로 시작되는 많은 일들,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돌아서는 발걸음, 그것들은 어쩌면 당연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모험의 시작과 절망의 예고로 끝나버린 1권은 그나마 희망찬 축에 속한다. 2권을 읽기 시작한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아차, 앞의 건 맛보기였구나. 대부분의 모험은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어버리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고야 마는 데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p.306 당연히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나만의 생각들로 가득했다. 엘사의 앞을 숱하게 지나쳤지만 (…) 노래를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건 내가 사는 세상의 노래와 이야기에도 해당이 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지만 귀를 기울이는 경우에만 그렇다.


화려한 빛깔에, 독을 품은, 하늘을 뒤덮는 제왕나비. 그 황홀한 광경은 어떤 불길함의 징조였을까. 주인공은 점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간다. 스스로를 잊기 직전에 다다랐을 때, 발견된다. 하지 않는다. 된다. 너는 영웅이로구나.

신이 아니다. 신은 고통받는 세계를 일시에 구원해낸다. 영웅은 그 세계를 온몸으로 헤쳐나간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이를 잃기도, 스스로의 목숨마저 내던지기도 한다. 이따금 감춰져있던 또다른 영웅이 드러나기도 한다. 평범하고 나약한 자의 발악이 바로 그것이다.

절망의 아가리에서 시작해 바닥을 보고 돌아온 이에게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목전의 이득과 행복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살아있어야 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과연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돌아올 수 있을까. 무너져가는 세계의 비밀과 비명을 알아챌 수 있을까.

p.361 그걸 무를 수만 있다면 무르고 45구경을 쓰겠지만 나는 몰랐다. 스냅도 몰랐다. 알았더라면 자야에게 얘기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세상 역사를 통틀어. 온 세상 역사를 통틀어 몰랐다는 것으로 만회가 되는 실수는 없다.


의심할 바 없이 믿어온, 당연한 ‘하나의 세계’가 둘로 갈라지고(혹은 그 안의 새로운 차원을 드러내고) 저항할 수 없이 융합되었다가 다시금 각자의 자리고 돌아가는 과정, 이별은 슬프지만 서로를 기억하는 한 그것은 영원한 슬픔이 아닐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 그 일련의 과정을 이다지도 멋지게 그려낼 수 있을까.

전작 『나중에』 를 인상깊은 성장 소설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 주인공이 작가의 일면을 대변하는 성장형 캐릭터가 아닐까, 싶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아닐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나 저러나 삶은 언제나 조금쯤 슬프고 이별은 만남보다 무수하며 우리는 너무도 짧은 시간을 살아가니... 살아가는 일이 이야기가 아니며 ‘별이 쏟아지는 깔대기’를 의지하지 않을 까닭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오늘 밤도 되뇌는 말이 있다. 옛날 옛날에 말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
김달님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수많은 문인과 현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사랑해야 한다고, 세상은 기쁨으로 넘치고 소중한 것들로 가득하다고. 나는 말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고...

쉬이 잊히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 안의 반짝임을 발견하는 것은, 바래고 낡아 사라지는 것을 잘 보내주는 일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쉽지 않다. 슬픔의 끝에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놓아주는 것은, 그럼으로서 함께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18 슬픔이 긴 날들에도 다시 기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지금 여기에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조용히 희망하는 마음. 그러니 하루하루 다가오는 삶을 기꺼이 사랑해보자는 마음. 마음이 자라는 방향은 사람들이 내게 들려준 말들이 가리키는 곳이기도 했다.


한적한 길을 걸을 때, 가만히 눈을 감을 때, 돌 틈을 비집고 자란 풀이며 떠다니는 솜털이나 신나게 내달리는 것들을 볼 때, 문득 생각한다. 어떤 순간은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린다고.

사랑하는 이의 눈을 바라볼 때, 마주 앉은 이에게 온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일 때, 다시금 생각한다. 언젠가 이 순간을 간절히 그리워할 날이 올 것이라고.

완전히 준비된 이별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떠나보낸 이들을 떠올릴 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파도처럼 밀려와 온몸을 부수는 것 같은 슬픔에 그저 웅크려 울기만 할 때, 나는 생각한다. 아주 느리게, 기억조차 희미해져서야 비로소 찾아오는 슬픔이 있다고.

p.59 계절을 계절답게 하는 존재의 이름을 익히는 것. 그건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익히는 일인 것 같다고,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보라색 들꽃을 지나치며 생각한다. 알아야 할 이름이 여전히 이렇게나 많다.


유난히 마음에 박히는 말들이 있다. 때로는 너무 아파서, 때로는 오래 닳아 매끄러워진 돌처럼 소중해서. 애써, 굳이, 작은, 연약한, 찰나의, 멀고 알 수 없는 것을 부르는 말들. 그것들을 한 데 모으면 결국 사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오늘도 생각한다.

도래하지 않은 것을 향한 그리움, 너무 일찍 잃어버린 것에 대한 사랑이 있다. 계절의 문에서, 하루의 끝에서 팔을 벌려 맞이하고 안녕을 비는 마음이 있다. 돌고 돌아 다 같은 마음이려니, 다만 그렇게 생각한다.

p.140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 싶고, 나란히 걷고 싶고, 다시 한번 옆에 앉고 싶고, 전화를 걸고 싶다는 바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어도 다가올 시간은 믿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온 마음을 다해 슬퍼할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귀 기울여 듣는 일, 그런 시간들이다. 작고 약하고 사소하고 찰나에 사라지는 것을 오래오래 아껴 사랑하는 마음, 그 무거움을 끌어안는 일이 곧 사는 일이다.

사는 일은 평생에 걸쳐 자라는 일이다.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조금씩, 느리게, 끊임없이 자란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과 세계도 자란다. 넓어지고, 다채로워진다. 끊임없이 배우고 살피는 일이다. 어려운 일이다.

최선을 다해 듣는 사람, 타인의 세계를 마음에 담는 사람의 글을 읽으며 여전히 생각한다. 사는 일은 자주 슬프고, 어렵지만, 눈물이 흐른 자리도 길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자라고, 살아나간다고. 결국에는, 사랑할 수 있다고.

p.159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정오를 지난 햇볕처럼 이 슬픔도 조금씩 줄어들게 되리라는 걸. 그럼에도 아주 사라지지는 않고 표정처럼 말투처럼 내 일부가 되리라는 것. 그리워하는 일에는 언제나 슬픔이 필요하니까.

#김달님 #우리는조금씩자란다 #에세이 #에세이추천 #신간 #미디어창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