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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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전작에서 증명했듯, 최진영은 고통을 들여다보는 작가다. 그저 바라봄에 그치지 않고 상처를 헤집고 부패하고 뒤틀려 찢긴 몸을 내보인다. 읽는 이의 뒷목을 잡아채 균열 한가운데에 처박을 것처럼 밀어넣는다. 보라고, 여기에 고통이 있노라고, 부러지고 으깨지며 비명으로 가득한 이것이 고통 그 자체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느냐고.

딸의 여동생, 그들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는 꿈을 꾼다. 꾼다기보단 끌려들어간다. 수백수천의 죽음이 동시에 벌어지는 세계로.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

질문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받는다면, 영문도 모르는 채 무수한 비참을 목도하게 된 이가 온 힘을 다해 구해낸다면. 단 하나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p.15 그들은 죽은 듯이 살기로 했다. 더는 자라지 않고 그대로 멈추려고 했다. (...) 그들의 뿌리는 엉켜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몰두할 수 없었다.

p.60 가서 받아. 목화는 몸을 움츠렸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의심하지 말고 구해. 목화는 더욱 움츠렸다.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받으면 살아.


지옥인가? 말할 것도 없는 환상인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가? 바로 지금 도처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상기해보라.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다. 그것을 피할 길 없이 마주하게 될 때, 살아있음은 도리어 비정상이 된다.

이야기는 오래된 숲의 오래된 나무의 연대기로 시작한다. 수백년의 삶을 몇차례씩 겪고도 살아남은 나무가 있다. 그 세계도 살아있는 것이 가득하므로 죽음 또한 도처에 있으나 이별이 될 수 있었다. 작별할 수 있었다. 처음이 있었듯 끝이 있으리라 여길 수 있었다. 무수한 소문처럼 인간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작가는 묻는다. 슬픔의 끝의 끝으로 몰아붙여진대도, 시원도 종말도 없는 무력함에 두 팔을 늘어뜨리고 마음이 부서진대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느냐고, 세계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지켜보는 수많은 눈, 무엇도 인간을 돕지 않는다(48)."

p.19 그루터기만 남기고 줄기는 통쨰로 사라져 버리는 기괴한 죽음은 (...) 숲에서 보고 들은 죽음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이 아니엇다. 이별 또한 아니었다. 훼손이었다. 파괴였다. 폭발이자 비극이었다.


또한 철학자 레비나스는 묻는다. 내가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세계는 내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타인의 벌거벗은 얼굴, 호소로 도래하는 바로 그 얼굴의 부름에, 신의 그것을 마주하듯이 ‘Me voici’, 내가 여기 있노라 응답해야 합니까?

대체 왜 우리는 타자의 존재 자체에, 심지어 우리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까? 왜 우리는 타인의 얼굴, 죽이지 말라, 죽음으로 방치하지 말라는 명령에 저항할 수 없습니까? 무한한 책임으로 밀어넣어지는 수동성은 어째서 우리의 주체성을 성립하게 합니까?

p.54 목수야, 다 보고 있었어. 여기 모든 존재가. 그런데 아무도 돕지 않았어.

p.103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났을까. 탄생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인간은 약하다. 삶이 있는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다. 살아있기에 죽는다. 그것은 정지하지 않음의 이치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이, 개중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그 안의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비참이고, 고통이고, 비명이다.

앞서 작가가 들이밀고 레비나스가 마주했던 세계는 바로 이런 의미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곳에 살고 있다. 존재하며, 이어지고, 알지도 못하는 곳까지 뻗어나가 닿는다.

인간은 약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알 수는 있다. 바로 그것이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이, 근원적인 외로움을 떨칠 수 없는 존재를 살아남게 한다. 비참한 세계가 절망의 동의어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가 전했고, 이제는 독자가 말해야 한다. 죽음으로 가득한 세계에 우리는 여전히 묻지 않고, 손을 뻗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고, 사람에게는 적어도 단 한 사람을 살릴 만큼의 힘이 있다고,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고도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지옥이지만, 밑바닥에서도 해낼 수 있다고. 우리는 누군가의 단 한 사람이라고. 발버둥을 치고 외면하려 애써도 차마 그럴 수 없는 이유,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을 살려내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p.146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p.208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p.221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 그것은 나무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이었다. 나무의 지시가 아니었다. 목화의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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