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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언제의, 누구의 이야기인가? 지난 삶에 겪었던 일인가?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인가?
작가는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건다. 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보라고. 많은 경우 자신의 세계에 독자가 자리함을 전제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영문 모르고 내던져진 독자만 남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잘못 쓰여진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실패했는가? 그렇지 않다. 한순간에 내쫓기듯 현실로 돌아온 독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그럼으로서 도리어 이야기의 세계에 남아버린다.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떠나온 곳을 헤매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책을 읽을 어딘가의 독자가 아무런 기대나 예상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명쾌한 마침표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기를 권한다. 가진 적 없던 것을 빼앗기는 것만 같은 초조함,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뒤섞이는 혼란함, 경계-없음에서 출발하는 사색을 충분히 음미하며 읽을 때, 비로소 작가가 말하는 바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정답을 맞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중 ‘나’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앞서나간 자는 추월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나의 길의 나-아닌 자의 길로 덮어씌워질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p.91 당신은 언제고 항상 원래의 길로 다시 되돌아오게 돼 있소. 당신의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오. 어떤 작품이 여러 연출가에 의해 연출될 경우와 마찬가지요. 무대가 달라지고 심지어 대사가 바뀌거나 축소되어도 줄거리는 변함없이 진행된다는 것이오.
선형적 세계에서 먼저 지나온 길, 알고 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설명은 곧 나-아님을 나의 체계로 끌어들이는, 포섭의 과정이다. 결국 안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 된다. 방향을 지시하는 자는 곧 아는 자다. 설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p.95 처음엔 미칠 것 같았소. 내가 말했다. 난 그 친구에게 화가 났소. 어쩌면 질투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친구가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했소. 왜냐하면 그 친구는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오. 그 친구의 일생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지. 나에 의해 선취되어 있었단 말이오.
p.117 크리스에 대한 내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가 내 삶을 그대로 베껴 삶으로써 마치 내 인생을 도둑질 해 가고, 내 삶을, 내 자신을 말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연 나는 그의 죽음만이 나를 구원하고 다시 올바른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세계가 선형이 아니라면, 또는 우리가 인생이라는 무대에 자리만 바꿔 오를 뿐 각본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와 타자와 타자로서의 내가, 이곳과 저곳이, 현실과 상상이 안개처럼 뒤엉킬 때, 모든 요소들이 서로에 닿지 않을 수가 없을 때, 그것은 분명 흔적을 남긴다.
답이 없는 질문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읽고 혼란스러울 독자에게 다시금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객관적인가? 모든 것은 유일하고 인생은 연극일 따름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삶을 살아낼 수 있는가? 홀로 숨지듯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만족해야 하는가?
그 모든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우리 겁 많고 초라한 신은 묻는다. 존재란 무엇인가.
p.80 나는 오후 내내 당신을 미행했소. 최소한 몇 시간만이라도 내가 다시 젊어져서 내 인생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하는 환상 속에서 살고 싶었소.
p.96 선생님이 범한 오류를 수정하고, 우리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싶은 유혹 말이에요. 아니면 단지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시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이랄까요. 겁이 나오. 내가 말했다. 뭐가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