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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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지원받고 쓰는 개인적 후기입니다

기레기, 권력의 개, 파파라치... 현대의 언론을 수식하는 말들이 화려하기도 하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수두룩하게 쏟아지는 게 거짓말에 혐오선동에, 이게 언론사인지 공작교실인지 모를 오려붙이기 아니던가. 언제부터 언론에게 올바른 정보전달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사기만 치지 말라고 두 손 모아 빌게 되었는지.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우리 언론이 된 건지.
이런 시대에 언론인, 이제는 원로-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가?-라고 불릴 때도 된 손석희의 에세이라니. 웃을 일인지 울 일인지 모르겠다. 이걸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도 손석희가 사장으로 있는 모 방송국은 똥을 싸고 있고...!(미안합니다. 그치만? 니들이 먼저?) 그래도 읽었으니 기록은 남겨두어야겠고, 이 글을 읽는 미래의 나와 현재의 누군가들이 이해심을 갖고 함께 괴로워해 줄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난과 역경의 민족.
이러나 저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언론계에서 뼈가 굵은, 몇 안 되게 점잖은 언론인이라 그런지. 머리말이 아주 인상깊다. 이대로 언론이 그저 자본의 홍보지, 권력의 공작수단 이상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니냐는 우려에 충분히 답하고 있으니.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손석희 본인이 언론인으로서 겪었던 사건들, 뉴스들, 현장과 스튜디오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뒷이야기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언론인이자 방송 이면의 사람 손석희의 이야기를. 그치만 가볍게는 아니고. 무겁게. 묵직하게. 다음에 읽을 나야. 무겁단다. 기억하렴.

에세이긴 하지만 직업 특성상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전국을 들썩이게 하고 수많은 이들의 공분을 이끌어냈던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부끄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내심 나는 이것들을 지나간 일로 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화면 너머의 일이라고 거리를 두었던 그 때 그 방관자의 위치에서 조금도 변한 게 없구나. 아마 이 책의 사건들을 몰랐던 이는 적게나마 있을지 몰라도 알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양심이 없는 사람이리라.
에세이지만 에세이가 아니다. 개인의 이야기일 수 없는 사건을 이야기하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잊혀지는 것은... 힘이 없다. 힘이 없어 잊혀지기도, 잊혀지면서 힘을 잃기도, 힘을 빼앗기 위해 잊혀지기도 한다. 수록된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명확해지기도 한다. 결국은 그 모든 "장면들"을 통해 독자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때 이후로 우리는 달라졌는가.' 라고.

한 시인은 홀로 남아있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정호승, 「새벽편지」) 변하는 이도, 변하지 않는 이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하겠지. 살아남기 급급해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만드는 현실에서.
p.27 "선배,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마십쇼."
그에게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변한다는 건 그때까지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변한 다음 비난받는 것이 무서워서라도 잘 못 변한다.'

언론의 책무가 무엇인가. 대중은 물어야 한다. 기자가 기레기로 불릴 때, 언론이 권력의 손아 귀에 붙들려 사람을 기삿거리로 만들 때, 그 때야말로 대중은 물어야 한다. 언론의 책무가 무엇인가. 권력을 향해야 할 언론이 칼자루를 거꾸로 쥐었을 때, 대중은 무엇을 요구하고 경계해야 하는가? 이 책은 만능이 아니고, 답을 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언젠가 좀 더 삶의 경험이 쌓였을 때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훗날의 나에게,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수많은 진심을 한 문장으로 남긴다.
p.325 "한놈만 미안하다고 해라... 한놈만..."

덤. 생각해보자.
언론인이 유명인이 되어, 정치인과 자본가, 주변인이 유명인이 되어 인신공격의 타겟이 되어 마땅하다는 인식이 만연한 사회에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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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수록 풍요롭다 -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제이슨 히켈 지음, 김현우.민정희 옮김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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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후기에, 또 소개에 저자 설명을 굳이 덧붙이지 않는 건 저자의 배경이나 그가 갖는 속성에 편견을 갖지 않고 내용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미래의 나도, 내 소개를 읽고 어떤 책일까 고민할 누군가도 그렇기를 바라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저자 소개를 빼놓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주제에 당사자성을 갖거나, 흔히 "주류"로 분류되지 않는 집단에 속할 때, 저자 자신의 속성을 빼놓고는 저작의 의미를 충분히 되새길 수 없을 때가 그러하다. 이 책도 그렇다.
저자는 경제인류학자다. 에스와티니(구 스와질란드)출신이며 국제불평등연구소 방문 선임연구원이다. 저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역자다. 살펴보자.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연구기획위원이며 탈핵신문 운영위원장 하나, 기후위기 비상행동 공동운영위원장이자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 이사 하나, 이렇게 두 명이다. 『적을수록 풍요롭다』라는 제목까지 곁들이면, 짠. 감이 잡히는가? 표지의 치솟는 그래프, 나란히 선 굴뚝과 그 옆의 달팽이. 내용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이쯤되면 모른다고 하는 쪽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경고를, 재난을, 뻔히 보이는 착취를 안간힘을 써가며 묵인하고 동조하기까지 했으니. 적어도 무엇을 경고하고 촉구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이 책에 관심이 있어 집어드는 이 중에서 찾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솔직해지자. 이제는 부끄러워할 시간이다. 무한성장에 대한 광신과 환경오염 담론은 잠깐의 괴담으로 취급할 이야기가 아니다. 어렸을 적 그리던 과학상상화(요즘은 이런 말 안 하나요?)의 눈물짓는 지구, 스모그로 뒤덮인 하늘, 오염된 땅과 물로 죽어가는 생명들은 더이상 상상도, 미래도 아니다. 눈물이 난다. 과장이 아니다. 유치원에서 크레파스 쥐고 그릴 때만 해도 저런 광경은 디스토피아였다. 위험하다, 심각하다 하지만 어쨌든 하늘은 맑고 다큐멘터리 속 밀림은 울창했다.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강물에 오수를 쏟아붓는 사람, 검은 굴뚝에서 치솟는 연기를 본 적이 없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도 않았다. 머리에 뿔이라도 달린 것처럼 악독한 사람은 먼 이야기라고,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거라고 다짐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렇게 되었다. 내가 살아오며 누리고 가졌던 것들은, 당연하게 여겨온 생활과 가치는 비명이 절로 나올 만큼 끔찍한 착취와 폭력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길거리가 아닌, 누군가의 삶의 터전에 쓰레기를 쏟아붓는 사람이다. 나는 종부세가 올랐다고 투덜대면서 누군가를 단칸방으로 내몰아 틀어쥐고 있는 사람이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가다간 정말로 다 죽는다고, 이미 재앙은 시작되었다고 코앞에 들이밀어도 파멸로 달려가나는 사람이다. 나뿐만 아니라 여태껏 선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가족, 친구, 지인과 나라, 나의 세상은 공범이자 동조자, 방관자, 쉽게 말해 가해자다. 동화로는 어림도 없는, 명실상부한 악당이다. 이 책을, 이 책의 내용을 당장 오늘의 재난이 아니라 편안한 집에 앉아 생각해보았다는 점에서 뭐라고 둘러댈 방도도 없이 쓰레기는 남의 집에, 그 집을 폭염과 바닷물, 독성물질에 집어던져놓고 세계는 너무 더러워요! 이제는 환경을 보호해요! 아끼고 나눠요! 하는 구호만으로 지친 하루의 끝을 유튜브로 달래는 사람이다. 이게 악당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선진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대부분은 끝없이 성장하는 경제, 더 많이, 더 빨리 생산하고 소비하는 삶, 철마다 때마다 새로 사야 하는 재화들, 부가 부를 부르는 인생을 당연히 여겨왔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체제를 경험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렇기에 무한 경쟁 체제, 부의 편중, 생의 많은 시간을 임금노동에 쏟아붓는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복지를, 사회주의를, 기업의 것이 아닌 노동자와 공동체의 것이 아닌 재화를 깎아내리고 치워버리기를 서슴지않았던 세상에서 살아왔으니, 당신의 그 눈곱만한 소득 정도는 자본 축에도 끼지 못한다, 당신은 자본가가 아니다, 복지를 줄이면 당신도 타격을 받는다, 생계에 치여 허덕이는 삶은 당연하지 않다고 아무리 말해봤자 와닿지않는 것 또한 이상하지 않다.

"탈성장". 정말 낯설기 짝이 없는 개념이다. 매일같이 보도되는 경제대국, 무역흑자, GDP 수치를 말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고?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산을 깎고 청춘을 바치고 연기를 뿜어왔는데,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게 문제다. 다른 세계를 상상해본 적이 없으니 한계를 깨고 나갈 수 있을 턱이 없다.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내가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것, 나의 당연한 풍요가 사라진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현재의 문제가 모두의 문제임을, 그 책임은 지금까지 미뤄왔던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지금 당장 해결을 위한 총력전에 돌입하는 것. 그것만이 시작이자 해답이다.
p.33 애초에 생태위기를 낳은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생태 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 기후위기에 관한 한 특히 분명하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주로 기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후변화를 특별히 걱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일상의 경험에서 몇도 정도는 실제로 큰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온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기온은 스웨터의 풀어진 올과 같다.

본문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서의 자본주의 신화를 논파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하고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식민지와 식민경제를 통해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이어서 재활용과 청정에너지로 대표되는 "친환경정책"의 허구와 위선을 비판한다. 만일 경제규모가 커지면 복지정책도 증가할 수 있으므로 현 시점에서의 사회복지망 축소를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눈부신 GDP 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읽게 하자. 소득이 곧 복지는 아니다. 사회 기반 시설과 필수서비스를 사유화하고 자본가의 수익원이 되도록 방치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탈성장과 기본재의 탈상품화가 실업증가를 야기하지 않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지 구체적인 사례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1부에서 현재까지의 문제를 제시하고 비판했다면, 2부는 방법론과 가능성의 미래를 고민한다. 소제목 "포스트 자본주의의 상상"(p.320, "포스트 자본주의의 윤리"(p.370)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1부의 끔찍한 실태와 신랄한 비판을 지나 2부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노라면 '과연 가능하긴 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1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현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정확히는 탈성장 책임이 있는 국가의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나. 과연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폭압에 저항해 새로운 미래로 가는 것이, 그리하여 덜 해로워지는 길이 가능하긴 한 걸까? 지난한 싸움이 될 것이다. 책에서 소개된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언행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런다고 해서 멈추는가. 누가 그에게, 각자의 길은 다르더라도 모두의 생존이라는 뜻을 함께 하는 이들에게 변절을 종용할 수 있을까.
이쯤에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부끄러워 할 때가 되었다. 지금이다. 아무리 작금의 위기가 먼 이야기로 들릴지라도, 무서워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 우리에게 남은 길은 공멸 또는 변화뿐이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논리가 없이 그저 부정만 하는 것은 논쟁에서 지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반성에서 미래가 나온다. 지금이 더는 미룰 수 없는 바로 그 때이다. 적을수록 풍요롭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이 제목의 의미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 길에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그렇게 소개하고 싶다.

끝으로, 좋아요! 포인트를 덧붙여둡니다. 성장주의 전략의 폐기, 탈성장 경제 도모하기, 소유의 제한과 현재를 소중히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칫 종교와 개인의 내적 인식에 한정될 수 있는 주제를 사회경제적으로 분석한 점을 높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비트코인, NFT 등 가상재화 열풍이 몰아치고, 가상가치를 위시한 기술과 산업의 급성장이 환경과 경제에 미치는 위험성을 지적할 논거를 제공합니다. 이 책에서 그치지 않고 관련된 도서나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저자의 문제는 아니지만, 구속복을 설명하는 주석(p.142)에 "미치광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구속복은 안정이 필요한 환자를 위험상황에서 보호하기 위해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참고하여 차후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 바랍니다. 또한 1부에는 저자가 철학 개념을 이용해 성장중심주의 사고를 지적하는 부분이 있는데, 인용된 철학자와 개념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저술과 체계 전반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책벌레)
스벤 베커트 저, 김지혜 역, 『면화의 제국』(휴머니스트)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 저, 노승영 역, 『시간과 물에 대하여』(북하우스)
얼 C. 엘리스 저, 김용진· 박범순 역, 『인류세』(교유서가)
수나우라 테일러 저, 이마즈 유리·장한길 역, 『짐을 끄는 짐승들』(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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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 -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 주니어 클래식 16
장영란 지음 / 사계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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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사계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개인적 감상입니다.

익히 들어본 작품이지만, 게다가 고전 명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지만 24권에 달하는 분량과 생소한 문화, 인명은 진입장벽이 되기 마련이다. 저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처음부터 욕심을 내려놓고 다가가기를 권한다. 솔직히,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나. 악명높은 러시아 소설의 인명과 별칭과 성경의 누구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에서 진절머리를 내본 적이 있다면. 성과 수식어를 제하고도 기본으로 네글자가 넘어가는 이름을 보면 지나간 악몽(?)을 되새기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거의 처음보는 이름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제1권을 읽으면 기가 질리기 시작하고, 억지로 참고 겨우겨우 제2권을 넘겨도 책장을 덮는 경우가 대부분이다."(p.28)
시작부터 눈을 질끈 감는 대신, 이렇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일리아스'"는 구전시다. 음유시인의 기억과 말에 의존해 전해지고 이어져온 내용이다. 솔직히 전문 시인들도 중간중간 까먹고 헷갈리지 않을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살이 떨리는 분노와 비극에,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은 말다툼에, 아들을 살해한 적군의 발치에 엎드려 시신만이라도 돌려달라 무릎을 매만지고 입맞추며 애걸하는 아비의 심정에 눈물을 흘리고 숨죽여 빠져들어보자. 감히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마음과 역사를 신의 뜻을 빌어 노래하고 남기고자 했던 그 심정을 이해해보자. 고전이라 불리는 많은 시들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앞서 말했듯이 일리아스는 장편 대서사시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의존해 구전된 작품이다. 이를 설명하려면 기억을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작되는 문장의 "분노를 노래하는 여신" 또한 신에 의존하는 기억, 신의 진노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을 뜻하는 영단어 Museum은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9인의 여신 Mousa(복수형은 Mousai)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신들의 왕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기억과 역사, 서사시는 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고대 대서사시, 서구 정신의 근원과 원형을 담은 장편 서사시 등 문학적 수사로 언급되는 일리아스의 주제는 분노와 비극이다. 시작하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분노로 시작되어 처참한 살육을 거쳐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웅을 찬미하고 신의 뜻을 기리는 내용이다.
다만 이렇게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고작 화 좀 난 걸로 10년 가까이 나라가 초토화된 전쟁을 24권이나 되는 내용으로 남길 일인가? 영웅이 아니라 영웅 아버지가 화를 냈대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킬레우스, 새벽의 신 테티스과 인간 펠레우스 사이에서 태어나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영웅̆̈의 분노, 단순한 불쾌함을 넘어 진노로 표현되는 그것이 제우스라는 신의 힘을 빌어 결국 참극을 야기한다. 아무리 그리스신화의 신들이 인격신이라 쪼잔한 면이 없지 않다지만, 왜? 많은 일이 그러하듯 선을 넘는 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이 비극의 시작은 그리스의 장군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를 모욕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크뤼세스의 딸을 노예로 삼고 딸을 돌려달라 명예와 인품에 호소하는 아비를 모욕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뜻을 전하는 이를 모욕하는 것은 곧 신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 아폴론, 제우스의 아들이자 태양과 의술의 신은 분노에 그리스군에 화살을 날리고, 이는 전염병의 창궐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 고전의 유용성을 또하나 떠올릴 수 있다. 서양-유럽권-고전에서 "신의 화살"이란 아폴론의 벌, 즉 전염병을 의미한다. 알면 알수록 재미가 더해진다는 말은 이런 게 아닐까.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탐욕을 지적하나 아가멤논은 화를 내며 이를 무시하고, 이후 화해를 도모하는 자리에서도 전리품에 탐을 낸다. 결국 신이 머리채까지 잡아 말려주었으나(p.54)
화해하지 못하고 치를 떨며 분노하는 아킬레우스의 참전 거부와, 올륌포스의 신들이 이리저리 엉키며 끼어든 결과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게다가 아킬레우스는 전쟁으로 죽을 운명이 아닌가. 아가멤논과의 갈등이 아니었다면 기꺼이 받아들였을 운명, 즉 "귀향길은 무너질 것이지만 불멸의 영광을 얻을 것(p.182)"을 뒤로 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길을 택하겠노라 선언하기까지 한다. 이는 헥토르의 경우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중시하던 명예를 무시할만큼 분노가 극단적으로 치달았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발단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와 인간 파리스의 선택이었으나, 결과는 인간들의 참극이 되었다. 이렇듯 호메로스는 "삶 전체를 뒤흔들어버리는(p.96)" 전쟁이 단지 인간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곳곳의 불씨는 인간의 오만(hybris)임을 작품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되새긴다.
그리스군에 영웅̆̈ 아킬레우스가 있다면 트로이군에는 명장 헥토르가 있다.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가장 훌륭한 아들 (페이지 찾아 쓰기)"이자 (신 누구더라)의 사랑을 받는 장군이다. 트로이 대 그리스 대전쟁의 불씨가 된 파리스의 형제이자 아내와 아들을 둔 가장이기도 하다. 당신이 출전하면 아들 아스튀아낙스는 죽고 나도 비극을 당할 것(p.119)이라는 아내 안드로마케의 호소에도 여기서 겁쟁이처럼 물러서면 수치를 당할 것(p.150)이라 말하며 돌아서는 그의 말에서 독자는 고대 그리스의 명예와 수치 문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제1권에서 아킬레우스는 전리품을 빼앗아가는 아가멤논을 "수치심이 없는 자(anaideien)" 라고 비난한다. 또한 제9권에서는 화해의 선물을 가져온 사절단에게 '파렴치'하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일리아스가 집필되고 널리 불리던 시대의 그리스는 수치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인간이 타고난 탁월성과 좋음(agathos)은 명예(time)와도 연관이 있다.(p.235) 수치를 존중한다는 사람들(aidomenon andron)이 되라는 것은 명성이나 위업을 넘어 존재의 의의를 실현하는 것에 가깝기까지 하다.
제6권에서 헥토르가 안드로마케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국가의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죽음을 각오하는 데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치를 당할 것??(정확한 문장이랑 페이지 찾아넣기)"이라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제22권에서 아킬레우스의 창에 죽어가며 남긴 "시신을 훼손하여 신의 노여움을 얻지 않도록 조심하라(p.346)"는 충고와 친우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다짐한 아킬레우스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시신을 끌고 다닌 행위 또한 앞서 지적한 오만에 대한 경고와 함께 그 시대의 명예와 수치에 관련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치는 개인만의 것이 아니며, 수치를 모르는 것은 타고난 탁월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고 수치를 모르고 타인의 수치,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 오만은 신의 노여움을 부르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신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나는, 분노로 시작해 참극으로 막을 내리는 이 대서사시에는 당대의 문화와 철학, 사상과 신화가 모두 담겨있다. 인간의 오만과 신의 진노, 너무나도 인간적인 신과 필멸의 운명을 타고났기에 누구 하나 영광스러울 수만은 없는 전장에서 묘사되는 인간과 그들의 죽음. 일리아스는 영웅 아킬레우스에 대한 찬미이자 뼈가 부서지고 눈알과 창자가 흘러내리는 전장에 대한 비탄이며, 신의 뜻에 복종하는 동시에 그것의 잔인함을 말하는 이야기이다. 인생이자 역사이며, 찬가이자 경고이다.
문학 작품을 유용성의 측면으로먼 읽어서는 그 가치(도 유용성의 측면일까)를 충분히 알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마어마하게 긴, 옛날옛적 남의 나라 전쟁사를, 그것도 사흘짜리 전투에 첫 아홉권을 할애하는, 분량조절에 장렬히 실패한 것 같은 대서사시를 이렇게까지 불멸의 고전으로 여길 일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시대와 문화를 이렇게까지 잘 보여줄 수 있는 것도 흔하지 않다고, 그렇기에 수천년의 세월을 지나, 수많은 이들의 말과 글을 지나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고.
일리아스를 쉽게 풀어쓰려는 시도는 많지만, 이 책의 장점은 크게 둘을 꼽을 수 있다.시작하기 전 상세한 일러두기, 각 권의 내용에 해당하는 챕터 말미에 덧붙여진 해설자료와 당대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친절한 설명. 이름만 골백번 들어봤지 "아 한번쯤 읽어봐야 하는데"의 산을 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친절한 고전, 쉬운 고전, 삽화와 함께하는 대장정.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를 통해 함께하기를 권합니다.
좋은 책을 소개할 기회를 주신 사계절 출판사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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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태도가 과학적일 때
이종필 지음 / 사계절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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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살 작정이든 그저 관심이든, 책만 봤다 하면 냅다 뒤집어 소개문구부터 보는 사람들이 있다.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자세히 보지 않아도 심심찮게 있다. 내가 그렇다... 집어들자마자 뒤집어본 뒷표지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한국형 천재의 시대는 끝났다!"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도발적인 지적이었다. 위태롭다! 내지는 재고할 때가 되었다! 는 얌전한(?) 의견이 아닌 무려 끝났다!라는 단언이라니, 관심을 끌지 않을 수가 없다.
입자물리학 전공에,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소설 출간 경험까지 있는 신선한 이력답게 전반적으로 읽기 쉬운 책이다. 그렇다고 마냥 쉬운 이야기는 아니고, 교양지식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는 내용은 있으니 참고하는 것이 좋다. 3부작 정도의 TV 교양 강연 프로그램 이나 대학 교양 강의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딱 알맞다. 마침 초반부의 집필 배경에 대한 설명도 오리엔테이션 내지는 강연자 자기 소개와 유사한 내용이니 이런 전개에 익숙하고 또 과학분야 서적에 관심이 있던 독자라면 앉은 자리에서 술술 읽어나가기 어렵지 않겠다.

"한국형 천재", "과학적 사고"를 논하기에 앞서, 저자는 왜 대중이 과학을 어렵게 느끼는지, 왜 과학용어나 과학이 설명하는 내용들에 거리감을 가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이는 "자연의 기본 원리가 인간의 일상과 아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자연의 것이다. 그래서 관련 숫자들조차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복잡하다.(p.86)"는 말로 정리된다. 말마따나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우리는 우주의 변방으로 일찌감치 밀려난 존재(p.87)"가 아닌가! 이 거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고,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거대한 자연과 볼 수 조차 없는 극히 미세한 구조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니,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무도 낯설고 어려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이 책의 과학적 태도에 관한 내용에서 특히나 인상깊은 부분이 있었다.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로서의 지식(정보)이라기보다 그 결과에 이른 과정이다.(p.125)" 우리는 흔히 인과관계와 상관관계, 또는 단순한 사건의 순서를 혼동하곤 한다.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가짜뉴스와 황색언론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로는 "선풍기 틀고 자다 질식사" 같은 제목의 해프닝 내지는 낭설이 있겠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누가 말했던가(내가 했다). Covid-19가 대유행한지 2년차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벌어지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러한 자극적인 보도 태도와 가짜뉴스 유포에 대해 끊임없이 지적하고 또 경계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일까. 물론 그만큼 동요되는 이들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찜찜한 기분에 슬그머니 가짜뉴스를 들여다보게 되는 이들도 그만큼 많아서 문제겠지만.

한국형 천재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한국에서 과학에 기대되는 역할과 함께 소통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사회, "헬조선"에서 팀프로젝트를 기피하는 이유도 그것과 거리가 멀지 않다. "좋은 글은 쉬운 글이다" 내지는 "진짜 지식인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는 말은 이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착각이다. 저자는 이렇게 한국의 과학만능주의, 천재만능주의를 지적한다. 마치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만 붙이면 모든 것이 술술 해결되고, 우수한 시험 성적을 거두는 이를 천재로 치켜세워 소수의 천재에 자원을 몰아주면 금세 성과를 내고 부와 성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바로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등장을 어렵지않게 예견할 수 있는 현대 과학계에서 한국의 성장을 가로막는 이유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돈이 되지 않는" 기초과학 연구와 교육에, 양질의 풍부한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속적으로 규모있게 투자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과학하는 태도란 무엇인가. Nullius In Verba. "어느 것도 쉽게 믿지 마라"는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 과학을 한다는 것은 나의 시각, 나의 철학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로부터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정보를 얻는 과정이다.(p.155)" 이는 저자의 말처럼 문명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양 강좌처럼 술술 읽을 수 있어 무겁지 않게 시작해 생각할 거리를 잔뜩 던져주는 것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더불어 현 시국이나 비교적 최근의 이론이나 사회적인 이슈까지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 또한 시의적절하게 만날 수 있어 반가운 책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저자의 이력이나 경험해온 집단이 이유인지, "우리 과학자"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는 점은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저자가 예상했던 독자가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일 수도 있겠지만.
끝으로, 신랄한 지적과 본론에 앞서 초반부의 과학지식에 대한 가벼운 몸풀기에서 숨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전공 관련 분야 나와서 신나게 이 얘기 저 얘기를 풀어놓는 부분이 꽤 재밌습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저서나 마크 포사이스의 "걸어다니는 어원 사전"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아 이 사람 신났구나. 말문 터졌구나. 싶은 부분이 있으니 깨알같은 재미로 찾아보세요.

시의적절한 화두를 던지는 고찰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출판사 사계절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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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내를 위한 레시피
카르마 브라운 지음, 김현수 옮김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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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서출판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요리의 비결은 복수, 재료는 남편". 띠지 맨 위에 자리해 보자마자 내용을 궁금하게 하는 문장이다. 문자 그대로 완벽하다못해 남편까지 착착 다져넣는, 아내를 위한 통쾌한 레시피일까? 표지의 강렬한 붉은 색에 맞는 "언니 다 죽여!"일까? 적지만은 않은 분량에 집어들기 전까지 즐거운 고민의 시간이 있었지만, 펼쳐드는 순간 표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까지 답을 주는 디자인도 없을텐데 왜 이걸 몰랐지?
이야기는 두 인물의 시점과 시간이 번갈아가며 진행됩니다. 1940년대에 지어진, 한적한 동네의 벽돌집의 두 아내, 앨리스와 넬리. 2018년과 1955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한숨처럼 풀어놓는 이야기가 어쩜 이렇게 변함이 없는지, 어쩜 이렇게까지 평행을 달릴 수가 있는지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다정하고 든든한 보호자 혹은 평생의 동료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시작된 결혼생활은 한숨이라고 하기엔 비명에 가깝고, 절규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억눌려 들리지 않는다.

1955년의 넬리. 잔인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선택한 남편 리처드는 물심양면으로 애정표현을 쏟아붓는 사람이었고, 결혼 후의 그는 잔인하고 또 위선적인 본모습으로 돌아가 조금의 "반항"도 용납하지 않아 뜻대로 하기 위해 폭력과 모욕, 협박을 일삼는 괴물이었다. 자기가 약하게 보일까 남들 앞에서 아픈 것을 걱정하는 아내를 수차례 멍이 들도록 움켜쥐고 폭행하는 그와,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주고 잘못이 아닌 일에도 사과를, 폭력에도 감사를 말하는 완벽한 아내 넬리.

"고마워요"
넬리는 겨우 말했다. 그는 넬리의 존중을 받을 가치가 없었지만 그는 그걸 원했다. 격렬한 통증 속에서도 넬리는 자기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에게 공손한 아내, 자기 탓이 아닌 일로도 사과하는 아내, 자기 삶이 아무리 힘들어져도 남편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아내. 완벽한 아내.(p.67)

2018년의 앨리스. 이 선택이 옳을지 불안했지만 평생의 동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결혼을 결심한 남편 네이트는 다정하고 적극적이지만 결국 앨리스라는 인간의 삶보다 그가 꿈꾸는 완벽한 가족의 삶에 머리를 묻고 꿈을 꾸는 남자다. 선물로, 무려 선물로 임신테스트기를 주는 남자, 생각해보겠다는 말은 철석같은 동의라고 생각해 아내의 생리주기까지 외우는 남자. 이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는 이 작품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는 책을 먼저 읽어야 할 일이다.

화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정원에서의 장면을 지나 이야기는 앨리스가 넬리의 집이었던 곳을 소개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앨리스는 도통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원치않게 직장을 떠난 현재로서 대체 여기서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 할지, 커리어우먼으로서 자기만의 삶이 있고 가사에 능통한 적은 없었던 생활에서 이 한적한 곳의 손 많이 가는 집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없지만 남편 네이트는 홀딱 빠져 몰아붙인다. 그렇게 불안과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시작된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던 때, 지하실에서 오래된 요리책을 발견하고, 어머니가 딸에게 가사노하우와 요리책을 물려주던 시절의 책엔 이런저런 메모가 가득하다. 앨리스는 그곳에서 넬리의 이름을 발견한다. 완벽한 아내, 넬리.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넬리의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이걸 다 견디고 살았을지 놀랍기까지 한 폭력과, 넬리 자신의 삶과 이야기가 뒤엉켜있다. 번갈아 진행되는 두 화자의 이야기 모두 그놈의 남편은 대체 결혼생활을 뭐라고 생각하는건지, 자기 눈앞의 아내가 사람이라는걸 알고는 있는지, 자기가 훼방꾼에 눈치까지 내다버린 짐덩어리라는걸 알고는 있는건지 속이 터져나간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과연 넬리의 완벽한 레시피, 그 종장은 무엇일까?: 넬리의 어머니가 딸에게로 물려준 마법의 요리는 무엇일까? 궁금증을 안고 따라가다보면 아, 하는 탄식과 함께 한숨, 그리고 모를 수가 없는 고민과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은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긴장으로 가득차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만일 그 말이 가족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저 앞에서 말한 자와 함께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책부터 읽고 오는 것이 좋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이제는 무리 없이 동의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말인데 어째서 아직까지도 여성은 완벽한 아내가 되기를 강요받는가? 어째서 넬리의 삶은 그 오랜 시간을 두고 앨리스의 시간에서 그토록 많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아내로서의 넬리와 앨리스가 아닌, 넬리와 앨리스라는 여성, 사람, 존재.
약하지 않다. 침묵하고 끄덕이고 또 참았을지언정, 연약하지도 순종적이지도 않다. 이해할 수 있는 삶과 경험에 깊은 슬픔과 또 서러움을 안고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찾기를 주저하지 않은 넬리의 이야기에 앨리스의 삶과 중첨되는, 합창과도 같은 이야기에 함께하는 좋은 경험이었다. 저자의 차기작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보자.

좋은 책을 소개할 기회를 주신 출판사 창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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