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 -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 주니어 클래식 16
장영란 지음 / 사계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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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사계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개인적 감상입니다.

익히 들어본 작품이지만, 게다가 고전 명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지만 24권에 달하는 분량과 생소한 문화, 인명은 진입장벽이 되기 마련이다. 저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처음부터 욕심을 내려놓고 다가가기를 권한다. 솔직히,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나. 악명높은 러시아 소설의 인명과 별칭과 성경의 누구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에서 진절머리를 내본 적이 있다면. 성과 수식어를 제하고도 기본으로 네글자가 넘어가는 이름을 보면 지나간 악몽(?)을 되새기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거의 처음보는 이름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제1권을 읽으면 기가 질리기 시작하고, 억지로 참고 겨우겨우 제2권을 넘겨도 책장을 덮는 경우가 대부분이다."(p.28)
시작부터 눈을 질끈 감는 대신, 이렇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일리아스'"는 구전시다. 음유시인의 기억과 말에 의존해 전해지고 이어져온 내용이다. 솔직히 전문 시인들도 중간중간 까먹고 헷갈리지 않을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살이 떨리는 분노와 비극에,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은 말다툼에, 아들을 살해한 적군의 발치에 엎드려 시신만이라도 돌려달라 무릎을 매만지고 입맞추며 애걸하는 아비의 심정에 눈물을 흘리고 숨죽여 빠져들어보자. 감히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마음과 역사를 신의 뜻을 빌어 노래하고 남기고자 했던 그 심정을 이해해보자. 고전이라 불리는 많은 시들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앞서 말했듯이 일리아스는 장편 대서사시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의존해 구전된 작품이다. 이를 설명하려면 기억을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작되는 문장의 "분노를 노래하는 여신" 또한 신에 의존하는 기억, 신의 진노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을 뜻하는 영단어 Museum은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9인의 여신 Mousa(복수형은 Mousai)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신들의 왕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기억과 역사, 서사시는 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고대 대서사시, 서구 정신의 근원과 원형을 담은 장편 서사시 등 문학적 수사로 언급되는 일리아스의 주제는 분노와 비극이다. 시작하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분노로 시작되어 처참한 살육을 거쳐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웅을 찬미하고 신의 뜻을 기리는 내용이다.
다만 이렇게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고작 화 좀 난 걸로 10년 가까이 나라가 초토화된 전쟁을 24권이나 되는 내용으로 남길 일인가? 영웅이 아니라 영웅 아버지가 화를 냈대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킬레우스, 새벽의 신 테티스과 인간 펠레우스 사이에서 태어나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영웅̆̈의 분노, 단순한 불쾌함을 넘어 진노로 표현되는 그것이 제우스라는 신의 힘을 빌어 결국 참극을 야기한다. 아무리 그리스신화의 신들이 인격신이라 쪼잔한 면이 없지 않다지만, 왜? 많은 일이 그러하듯 선을 넘는 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이 비극의 시작은 그리스의 장군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를 모욕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크뤼세스의 딸을 노예로 삼고 딸을 돌려달라 명예와 인품에 호소하는 아비를 모욕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뜻을 전하는 이를 모욕하는 것은 곧 신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 아폴론, 제우스의 아들이자 태양과 의술의 신은 분노에 그리스군에 화살을 날리고, 이는 전염병의 창궐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 고전의 유용성을 또하나 떠올릴 수 있다. 서양-유럽권-고전에서 "신의 화살"이란 아폴론의 벌, 즉 전염병을 의미한다. 알면 알수록 재미가 더해진다는 말은 이런 게 아닐까.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탐욕을 지적하나 아가멤논은 화를 내며 이를 무시하고, 이후 화해를 도모하는 자리에서도 전리품에 탐을 낸다. 결국 신이 머리채까지 잡아 말려주었으나(p.54)
화해하지 못하고 치를 떨며 분노하는 아킬레우스의 참전 거부와, 올륌포스의 신들이 이리저리 엉키며 끼어든 결과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게다가 아킬레우스는 전쟁으로 죽을 운명이 아닌가. 아가멤논과의 갈등이 아니었다면 기꺼이 받아들였을 운명, 즉 "귀향길은 무너질 것이지만 불멸의 영광을 얻을 것(p.182)"을 뒤로 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길을 택하겠노라 선언하기까지 한다. 이는 헥토르의 경우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중시하던 명예를 무시할만큼 분노가 극단적으로 치달았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발단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와 인간 파리스의 선택이었으나, 결과는 인간들의 참극이 되었다. 이렇듯 호메로스는 "삶 전체를 뒤흔들어버리는(p.96)" 전쟁이 단지 인간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곳곳의 불씨는 인간의 오만(hybris)임을 작품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되새긴다.
그리스군에 영웅̆̈ 아킬레우스가 있다면 트로이군에는 명장 헥토르가 있다.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가장 훌륭한 아들 (페이지 찾아 쓰기)"이자 (신 누구더라)의 사랑을 받는 장군이다. 트로이 대 그리스 대전쟁의 불씨가 된 파리스의 형제이자 아내와 아들을 둔 가장이기도 하다. 당신이 출전하면 아들 아스튀아낙스는 죽고 나도 비극을 당할 것(p.119)이라는 아내 안드로마케의 호소에도 여기서 겁쟁이처럼 물러서면 수치를 당할 것(p.150)이라 말하며 돌아서는 그의 말에서 독자는 고대 그리스의 명예와 수치 문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제1권에서 아킬레우스는 전리품을 빼앗아가는 아가멤논을 "수치심이 없는 자(anaideien)" 라고 비난한다. 또한 제9권에서는 화해의 선물을 가져온 사절단에게 '파렴치'하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일리아스가 집필되고 널리 불리던 시대의 그리스는 수치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인간이 타고난 탁월성과 좋음(agathos)은 명예(time)와도 연관이 있다.(p.235) 수치를 존중한다는 사람들(aidomenon andron)이 되라는 것은 명성이나 위업을 넘어 존재의 의의를 실현하는 것에 가깝기까지 하다.
제6권에서 헥토르가 안드로마케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국가의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죽음을 각오하는 데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치를 당할 것??(정확한 문장이랑 페이지 찾아넣기)"이라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제22권에서 아킬레우스의 창에 죽어가며 남긴 "시신을 훼손하여 신의 노여움을 얻지 않도록 조심하라(p.346)"는 충고와 친우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다짐한 아킬레우스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시신을 끌고 다닌 행위 또한 앞서 지적한 오만에 대한 경고와 함께 그 시대의 명예와 수치에 관련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치는 개인만의 것이 아니며, 수치를 모르는 것은 타고난 탁월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고 수치를 모르고 타인의 수치,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 오만은 신의 노여움을 부르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신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나는, 분노로 시작해 참극으로 막을 내리는 이 대서사시에는 당대의 문화와 철학, 사상과 신화가 모두 담겨있다. 인간의 오만과 신의 진노, 너무나도 인간적인 신과 필멸의 운명을 타고났기에 누구 하나 영광스러울 수만은 없는 전장에서 묘사되는 인간과 그들의 죽음. 일리아스는 영웅 아킬레우스에 대한 찬미이자 뼈가 부서지고 눈알과 창자가 흘러내리는 전장에 대한 비탄이며, 신의 뜻에 복종하는 동시에 그것의 잔인함을 말하는 이야기이다. 인생이자 역사이며, 찬가이자 경고이다.
문학 작품을 유용성의 측면으로먼 읽어서는 그 가치(도 유용성의 측면일까)를 충분히 알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마어마하게 긴, 옛날옛적 남의 나라 전쟁사를, 그것도 사흘짜리 전투에 첫 아홉권을 할애하는, 분량조절에 장렬히 실패한 것 같은 대서사시를 이렇게까지 불멸의 고전으로 여길 일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시대와 문화를 이렇게까지 잘 보여줄 수 있는 것도 흔하지 않다고, 그렇기에 수천년의 세월을 지나, 수많은 이들의 말과 글을 지나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고.
일리아스를 쉽게 풀어쓰려는 시도는 많지만, 이 책의 장점은 크게 둘을 꼽을 수 있다.시작하기 전 상세한 일러두기, 각 권의 내용에 해당하는 챕터 말미에 덧붙여진 해설자료와 당대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친절한 설명. 이름만 골백번 들어봤지 "아 한번쯤 읽어봐야 하는데"의 산을 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친절한 고전, 쉬운 고전, 삽화와 함께하는 대장정.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를 통해 함께하기를 권합니다.
좋은 책을 소개할 기회를 주신 사계절 출판사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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