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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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우리는 서로를 아는가. 과연 누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으로 이루어진 존재인지 답할 수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겠냐는 물음에 피와 살, 과거와 현재, 수많은 타자의 시선과 기억이라 답한다면, 어떨까.

사람이 사람에게서 태어나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다 죽는 존재인 탓에,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지각하는 때부터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시달리며 시선을, 이름을 갈구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부재가 아니다. 육신의 소멸로 존재의 부재는 부재의 현존으로 이행해 어긋나고 단편적인 기억으로, 이해와 오해, 진실과 침묵의 불협화음으로 재배열된다.

p.84 전철이 왔다. 개찰구에서 배웅하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머릿속에 자욱한 미련을 애써 떨치며 나는 손을 가슴에 갖다 댔다. 그곳에 남은 한 줄의 상처. 이런 때면 그것이 지독한 콤플렉스가 되어 욱신거렸다.

p.158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미안해서 괜히 해본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때까지도 나유타라는 화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내 속을 꿰뚫어 봤는지 어쨌는지, 가세는 답이 없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은, 퍽 애달프고 간절한 일일지 모른다. 알아달라고, 나를 보라고, '진짜' 이름을 불러달라고. 아니, 부르지 말라고,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고, 그 누구도 '진실'을 감당할 수 없다고. 스스로조차. 지극한 무한에 가까운 이름이 곧 부재이자 영원한 존재의 그것과 맞닿는 것처럼.

어떤 진실은 영영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감은 눈과 서투른 비밀 속에 묻혀버린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태어나 존재하는가. 마음과 형상 중 흉내내기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p.269 미코토의 죽음을 슬퍼하는 형제, 가족, 무리의 멤버들. 소메이는 생각했다. 이 소박한 사람들은 슬퍼하는 법을 아는구나. 그게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두 더듬이가 뜯겨 나간 곤충이랬던가, 물속에서 세상을 보는 듯한 감각이랬던가, 아무튼 본인 말로는 그랬어요."

p.314 "그런데 소메이 군은 아니래요. 실패는 노이즈 마케팅 탓이 아니라 죄책감 탓이다, 남의 비난과 악평을 견디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을 버리지 못해서, 진부한 양심을 버리지 못해서다. 세기의 예술가를 만들어내는 데 그런 게 필요하냐, 외려 그리 되물으면서요.”


그러나 같은 이유로, 기억과 시선은, 믿음은, '나의 세계'의 '너'는 무엇으로 믿어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란, 구성된 기억이란, '진짜 의미'란 무엇인지. 믿음의, 바로 그것을 이루는 믿을 수 없는 연약함이란. 어떤 상처, 연약함에서 삶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더 큰 상처를 내야한다. 더 깊고 더 위태로운 지점까지.

새로운 상처가 아문 자리에는 새 살이 차오르고 한때 무엇이 있었다는 흔적이 남는다. 공백과 부재는 꼭 그만큼의 무게와 자리를 갖는다. 면책의 괴로움과 부정(不定)의 공포, 죽을 힘을 다해 기억되는 상실. 돌이켜보면 모든 순간이 초대이자 애원이었던 셈이다. 나를 기억해줘요. 나를 알아봐줘요. '진짜 나'를 만나러 와줘요.

p.270 "면책. 그게 그를 미치게 한 거죠." 에베 씨가 말했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 오로지 저쪽에서만 살아있음을 실감했다고. 그런데 그건, 죽은 거 아닌가? 나는 죽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감한 거죠."

p.341 "그래서 더욱 기를 쓰고 기억하려 했어요. 잊는 게 무서웠어요. 절대 잊기 싫은 것은 매일매일 떠올렸어요."


작품 전체가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한 사람의 세계라는 커다란 그림으로 그려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헤매는 듯도, 자꾸만 멈춰서는 듯도 한 여정은 진실에 다가갈수록 속도를 더하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라서는 숨을 멈추고 읽게 한다.

슬프고 무력한 존재가 마침내 서로의 '진짜' 이름을 부를 때, 마주할 용기를 냈을 때, 그제야 다음을 말할 수 있다. 새 살이 차오르고, 기억은 흔적으로 남는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여전히 살아갈 수는 있다. 그제야 비로소 생과 사란 무엇이냐는 물음에, 우리는 무엇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물음에의 답을 찾아나설 수 있다.

어렴풋한 혼란으로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무언가 왈칵, 하고 와닿는 이야기로 읽기를 바란다. 밝기를 낮추고, 조금쯤 지친 목소리로 읽기를 바란다. 이해란 그런 것이므로. 안다는 건, 꼭 그만큼이므로.

p.403 분명 인생에선 누구에게나 한 번은 이런 일이 찾아온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한 점에 집결하여, 나는 이걸 위해 태어났던가, 하고 깨닫는 순간이. 유년 시절 나를 살리기 위해 가차 없이 그어졌던 상처의 자국. 그걸 그에게 드러내며 나는 순수하게 실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려지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래서 이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거라고.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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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괴이 비채 미스터리 앤솔러지
조영주 외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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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전, 세간을 충격에 빠트리고는 씻겨내리듯 잊혀진 사건이 있다. 10여 년 전, 한 사람이 황량한 돌언덕에서 발견되었다. 머리에는 가시관, 옆구리에는 상흔이, 손발에는 못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오래된 종교의 교리적 순간을 집착적으로 재현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 현장.

사람이 스스로를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 "신의 아들"마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을 만큼. 그러나 타살로 보기에는 증거가 없다. 잠정적 결론만이 내려진 채 여전히 해결이 미뤄지고 있는 이유다.

아무것도 믿지 마라.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의심마저 무지와 미지에 갇혔음을 잊지 마라. 의심의 끝에서 미지는 발걸음을 쫓아 질문하는 자를 집어삼켜 새로운 미지가, 무지, 의심의 시작이 되리니. 여섯 편의 이야기는 죽은 자만이 아는 순간, 공란으로 남겨진 조각들에서 출발한다.

p.192 인간은 십자가 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자신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해야 한다. (...)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은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한 것인가? 자신의 죄를 자책하기 위해서 자기 육체를 학대한 것인가?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이야기일까? 에셔의 유명한 작품처럼, 쓰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까지도 이야기가 된다면. 마치 클라인의 병처럼, 안팎을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의 독자는 누구이며, 그것을 써내리는 자는 누구인가.

이는 또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예비하신 그 분"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가. 선험적인 전능자로 세계와 함께 존재하는가. 어쩌면, 불경하게도 그의 "의지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구현되는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의 존재에 대한 순종은 저 바닥에서는 굴종과도 닮아있지 않은가.

p.138 그것은... 나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내 이름과 사는 곳을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내 삶 전체를 관통해 모든 것, 약점이나 강점, 밝은 면이나 어두운 면까지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나를 내려다본 것만 같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마침내 내 안의 모든 것이 피를 뚝뚝 흘리며 드러나 보이는 기분이었다.

p.183 그분의 계획 안에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나는 태초에 존재했다. 이 이야기의시작에. 그러니 내가 처음이었고, 그분이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진상은 죽은 자만이, 어쩌면 그조차도 모르는 채로 남겨져있다. 오래된 신을 흠숭하여 그 자신이 신성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던 이의 마지막인지, 타락한 신성으로 모반을 꾀한 흔적인지, 그저 사람이 사람을 죽였을 뿐인지, 어쩌면 또다른 "의지"였는지. 그도 아니면... 영원히 알 수 없을 무언가일지.

여섯 명의 작가가 스스로를 이야기에 끌어들여 내놓는다. 달리 말하면 가장 자신있는 이야기로도 완벽하게 설명되지 못한 '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빌어 묻고자 한다. 그 날, 그곳의 진실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은 이 무지와 미지 사이의 어딘가일 이야기에서 살아 나갈 수 있겠습니까. 길고 긴 낮, 사방을 알 수 없는 밤의 시간에.

p.57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만 같았다. '같았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런 그의 손이 내 눈엔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를 믿을 수 없다.

p.227 어쩌면 이런 식으로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배우는 건 아닌가 느끼며 안은 지금의 이 모호함을 견뎌보려고 한껏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무진의 밤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제법 긴 밤이 될 것이었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할 것. 이 사건에 영웅은 없다. 추대된 순교자 혹은 제물이 있을지라도. 폐허의 시신, 그 끔찍한 참상은 여전히 진실을 파헤치는 자와 재야의 음모론자를 매혹한다. 추측컨대, 오래도록 이 이야기는 살아남을 것이다. 으스스하다기에는 지극히 황량하고, 짜릿하다기엔 너무도 처참한 탓이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모든 창작물을 마주하는 독자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책무가 있다는 것을. 실제에 허구를 덧입히는 일 자체에 대한 고민이 바로 그것이다. 주저함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상상하되, 주장하지 않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머무는 것, 거기까지도 독자와 창작자의 몫이라 믿는다.

다시금, 진실은 무엇인가. 여전히 이야기 바깥에 머무는 독자를 이 순간에도 바닥부터 집어삼키는 심연은 무엇인가. 미지의 몫으로 남길 뿐이다.

p.192 인간은 십자가 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자신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해야 한다. (...)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은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한 것인가? 자신의 죄를 자책하기 위해서 자기 육체를 학대한 것인가?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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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보다 스파게티가 맛있는 천국
김준녕 지음 / 고블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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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 발전했다. 과학기술로는 첨단을 달리고 있으며, 삶의 곳곳에 현대사회의 기술과 제도가 녹아들어있다. 나아졌고, 달라졌으며, 진보했다. 과연 그러한가? 근 십여 년 들어 뉴스 보기를 포기했다는 말을 주변에서 여럿 들었다. 체면치레로도 감당키 어려울 만큼 버거운 소식이 연일 밀려드는 탓일까. 상상도 못한 일을 해내는 지금의 세상은 정말 나아졌을까. 보다 치밀하고 다양하게 잔인해진 것이 아니라?

야만의 시대, 어둠의 시대. 희망도 미래도 없이, 각자도생과 눈 앞의 생존이 모든 가치를 전도한 시대. 이에 혹자는 100여 년 전의 전란을 떠올리고, 또다른 누군가는 익히 들어온 "야만", 즉 전자기기도 첨단기술도 없는 고립된 자연 속 어느 집단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지금 우리의 시대는 인간의 시대라 할 수 있는가. 문명과 지성의 시대라 할 수 있는가.

p.34 "예산이나 실적같이 눈에 보이는 거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은 절대 저 같은 사람을 이해 하지 못해요. 저도 그런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다고 믿고요. 서로 살아온 세상이 너무나도 달라요. 보는 시각도 다르고. 이걸 이겨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세계 어딜 가나 돈, 돈, 돈이니까요."

p.136 "프로젝트는 성공했습니다. 사람들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한 단계 도약했다고 말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도약이라는 작용은 개인의 희생이라는 반작용으로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 국가는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데, 개인의 처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불안정합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연구소 노동자들의 현실을 제발 한 번만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만 아니면 돼"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느냐", "왜 나한테만 그러냐"가 일종의 지상명제처럼 떠받들어지는 시대, 대를 이어도 남을만치 차고 넘치는 재화와 말그대로 굶어죽고 맞아죽고 헐벗어 죽어가는 이가 같은 세상에 놓여있는 지금이 과연 야만과 어둠의 시대가 아니라고 할 자가 있는가.

누군가 내게 우리 시대와 사회를 한 단어로 묻는다면, 억울함의 총집합이라 답하겠다. 저마다의 이유로 내몰리고 뜯어먹히며, 제각기 그만한 사정이 있다. 도통 양보와 절제를 말할 수가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세상에서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며,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손해를 넘어 어리석음과 자멸을 자초하는 꼴일지도 모른다.

p.161 사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사라의 눈에 카탈로그 속 정제된 모습이 아닌 실제 논휴먼들의 생활 양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평화로움은 다른 논휴먼을 죽이고, 행성의 환경을 파괴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었다. 웃음 아래에는 비명이 잔뜩 깔려 있었다. 죽어가던 논휴먼 하나가 하늘을 바라보고서 신을 찾았다. 사라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p.226 빛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 뿐이었다. 그곳에 다른 것이 존재할 틈은 없었다. 핍은 수잔에게 목소리들에 관해 물어보려다 말았다. 관측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그에 관해 말하기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삶의 아주 작은 일부 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이 내일을, 다음 세대를, 우리 바깥의 이들을 모조리 같은 꼴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것 외의 방법을 모르니까. 당장 보이지 않는 것, 닫힌 문과 깊은 금 너머의 것을 믿기에는 팍팍하고 급박하다. 다시금,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내 코가 석자다.

어쩌면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는 중일지 모른다. 존재의 테두리 안에 '우리'만을 밀어넣는, 점점 좁아지고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일찍이 누군가가 말했듯,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p.170 선배들은 내게 눈에 불을 켜고서 잘못된 점을 찾으라고 했다. 종사자만 해도 삼십 명인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의 공장이었기에 막무가내로 폐쇄할 수는 없었고, 위생 문제나 비리 등 공장 사람들이 꼼짝없이 공장 폐쇄를 받아들일 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야 추후 구조 조정 때 보다 쉽게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p.227 눈을 감아도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빛으로 가득한 세상에는 그 어떤 상상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핍이 말했다. "보지 않으면 없는 거야. 그런 거야."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핍은 살고 있었다.


아홉 편의 수록작, 그 주인공들은 제각기 외롭다. 때로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때로는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눌러 삼키게 한다. 그들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있기에, 결국 그 뒷맛이 씁쓰레할 것을 알기에 그렇다. 미련하다 불리는 이들은 말한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차마 그렇게는 안 된다고, 이렇게 가다간 모두가 죽는다고,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사람은 생존 이상의 것으로 움직이기도 하는 동물이라고,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곧 죽게도 한다고.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무엇이어야 하는가. 어느 작가의 말을 빌어 묻는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47 그가 말했다. 이렇게 해도 뭐, 뭐라도 해줄 것 같습니까? 그는 침을 튀겨가며 말을 이었다. 저 새끼들이 더 빼먹었으면 빼먹었지, 더, 더 줄 놈들입니까? 아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입이 떨어졌다. 그렇게 부서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 그러지 말라고 만들어진 건데 그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p.280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소설의 방점을 찍었을 때 나는 이미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내 행동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시대에도, 쓰는 사람, 아니 목격하는 사람은 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작가라고 불렀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인간 창작 확인 센터로 발걸음을 돌렸다.


*도서제공: 고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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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트 영매탐정 조즈카 2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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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이랄지, 정석이랄지. 추리소설은 으레 범죄의 재구성을 향한 여정과도 같다. 미궁에 빠진 사건, 불가해한 현상의 심부에서 진실을 발굴해내는 과정은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정의의 편, 즉 독자와 탐정의 입장에서 쓰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건이 제목처럼 Inverted, 도치된 서술로 전개된다면?

작가는 사건의 현장, 사건의 중심을 드러내고 시작한다. 아니, 목격자가 된 독자로 하여금 현장 밖에서부터 다시금 사건에 접든하도록 하는 모종의 게임에 가깝다. 범인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각자의 자리에서의 불완전한 진실을 짜맞추는 동시에 패를 숨겨야 하는 이 치열한 경합은 독자와 탐정이 한 팀이 되어 범인을 좁혀나가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되는 결과, 범행의 현장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올가미를 조여오는 탐정에게 쫓기는 듯한 느낌을 준다.

"추리 소설의 세계는 단순해서 좋아요. 명탐정의 논리를 모두가 이해해주고, 논리만 구축하면 경찰은 납득해줄 거고, 범인은 흔쾌히 자백을 해요. 재판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그 부분이 명쾌해서 좋아요."


각 챕터는 사건현장, 그것도 범인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살인. 사람을 죽이는 일. 살아있는 자의 숨통을 눈앞에서, 제 손으로 끊어버리는 일. 살인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일인 탓에,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그 본질적인 속성을 떨쳐낼 수 없다.

'죽일만해서 죽였다'는 말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폭력. 응분의 살인이란 과연 가능한 말일까? 사람이 사람의 숨통을 끊는 일은 무엇으로 정당회될 수 있는가? 누가 '죽어도 되는 사람'이고 누가 '죽여도 되는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용인되는 사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폭력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는가? 살인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보편적 금기의 성격을 띄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꺼림칙한 난해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건가. 이렇게도 허무하게 인간은 죽는 건가. 에리는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래. 자신은 알고 있었을 터였다. 사람은 허무하게 죽는다. 비눗방울 터지듯 허망하게, 생명은 사라진다. 일격에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수월하게 죽였다..."


작은 균열과도 같은 위화감과 속삭이는 웃음소리를 따라가며 도달한 곳에서 과연 어떤 진상을 마주할까. 어디서부터 꼬리를 잡힌 걸까. 무엇을 놓친 걸까. 허술해보이는 외양 너머에서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과 경쾌한 웃음을 가르고 찔러들어오는 질문,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모든 과정은 수사보다는 오히려 몰이에 가깝다.

그렇기에 사건 해결 뒤에 밀려오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 선택은 과연 옳았을까? 진실을 밝혀내면, 자백하면, "그 누구도 죽어 마땅하지는 않았다"고 맗하면, 그걸로 끝인걸까. 사건 이전의 사건에서 온전한 진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사회를 지켜나가는 것 외에는, 사람의 생명을 뺏으려는 폭력을 없앨 방법이 없다고요! 다른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대가를 받는다고!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려면 그 룰을 철저히 알려야, 살인이라는 폭력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어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세요? 옳다고 판단하면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소중한 사람이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마가 옳다고 생각해서 죽였다고 주장하면 어쩔 수 없다고,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가르치실 수 있느냔 말이에요!"


졸지에 수사관의 안락한 지위에서 내쫓겨 필사적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범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추리소설에서는 꽤나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 독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이 한 권의 책 전체가 전작 『영매탐정 조즈카』를 사랑했던 독자들을 위한 연결고리와 더불어 까다로운 서술트릭과 곳곳에 심겨진 증거로 빈틈없이 짜여진, 사건현장이자 탐문이고 힌트와도 같다. 어쩌면, 모든 것이 거짓이고 불완전한 진실이며, 꾸며진 연극일 수도.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숨겨진 손, 시야를 스쳐지나간 것들 중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포착해내는가? 그런 이유로, 작가가 탐정의 목소리로 던진 질문을 다시 묻는다. "범인은 자명. 하지만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과연, 당신은 탐정의 추리를 추리할 수 있습니까?"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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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사전 -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며 때로는 유머러스한 사물들의 이야기
홍성윤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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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십니까? 왜, '그거' 있잖아요. 이름은 몰라도 대충 이렇게... 여기에 이렇게 쓰이는 '그거'라고 하면 다 아는 물건, 바로 "그거".

세상에 이름 없는 존재는 없다. 비단 사람의 것이 아니더라도, 어느 세계에서든 그 나름의 이름, 불리는 것 혹은 다른 무언가와의 구별을 가능케 하는 무언가로서의 '그것'이 아닌 존재는 없다.

이런 점에서 '이름 모를 물건'의 지위는 꽤나 묘하지 않을 수 없다. 쓰인다. 챙겨진다. 팔리고 찾아진다. 그러나 그래서 그게 뭔데, 라는 질문에는 난처해지고 만다. 그거 있잖아. 그거지. 응.

p.6 사물의 이름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따라 야심찬 발명으로 꽤나 떠들썩하게 태어난다. 이름은 그 모든 흔적의 장부다.


지나간 영광의 추억. 사람도 물건도 잊혀진다. 혁신은 머지않아 일상의 더께를 뒤집어쓰고 놀랍지 않은 것, 이 책은 '그거' 들의 기록이다. 이름표, 사전, 어쩌면 그저 '그거'가 되어버린 일상에 보내는 찬사다.

왜, 그거 있잖아, 에 따르는 "아, 그거 말이지! 그걸 뭐라고 부르냐면"으로 찾아 떠나는 먹고, 마시고, 걸치고, 살고, 쓰는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있는 '이름 모를 그것'들에게 보내는 찬사와 기원으로의 여정에서 독자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아마도, 어쩌면, 그마저도 '그거'일지도. 왜, 있잖아요. 이럴 때 딱 맞는, "그거".

p.120 혁신은 등장과 동시에 그 빛을 잃어간다. 시대를 풍미했던 유행도 이내 닳고 퇴색돼 흔한 일상의 일부가 된다. 위대했던 출발점을 기억하는 이들도 점차 사라진다. (...) 영광의 시대를 살아내고 이윽고 일상이 된 늙은 혁신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기억될 자격이 있다.


*도서제공: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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