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클보다 스파게티가 맛있는 천국
김준녕 지음 / 고블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 발전했다. 과학기술로는 첨단을 달리고 있으며, 삶의 곳곳에 현대사회의 기술과 제도가 녹아들어있다. 나아졌고, 달라졌으며, 진보했다. 과연 그러한가? 근 십여 년 들어 뉴스 보기를 포기했다는 말을 주변에서 여럿 들었다. 체면치레로도 감당키 어려울 만큼 버거운 소식이 연일 밀려드는 탓일까. 상상도 못한 일을 해내는 지금의 세상은 정말 나아졌을까. 보다 치밀하고 다양하게 잔인해진 것이 아니라?

야만의 시대, 어둠의 시대. 희망도 미래도 없이, 각자도생과 눈 앞의 생존이 모든 가치를 전도한 시대. 이에 혹자는 100여 년 전의 전란을 떠올리고, 또다른 누군가는 익히 들어온 "야만", 즉 전자기기도 첨단기술도 없는 고립된 자연 속 어느 집단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지금 우리의 시대는 인간의 시대라 할 수 있는가. 문명과 지성의 시대라 할 수 있는가.

p.34 "예산이나 실적같이 눈에 보이는 거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은 절대 저 같은 사람을 이해 하지 못해요. 저도 그런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다고 믿고요. 서로 살아온 세상이 너무나도 달라요. 보는 시각도 다르고. 이걸 이겨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세계 어딜 가나 돈, 돈, 돈이니까요."

p.136 "프로젝트는 성공했습니다. 사람들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한 단계 도약했다고 말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도약이라는 작용은 개인의 희생이라는 반작용으로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 국가는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데, 개인의 처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불안정합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연구소 노동자들의 현실을 제발 한 번만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만 아니면 돼"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느냐", "왜 나한테만 그러냐"가 일종의 지상명제처럼 떠받들어지는 시대, 대를 이어도 남을만치 차고 넘치는 재화와 말그대로 굶어죽고 맞아죽고 헐벗어 죽어가는 이가 같은 세상에 놓여있는 지금이 과연 야만과 어둠의 시대가 아니라고 할 자가 있는가.

누군가 내게 우리 시대와 사회를 한 단어로 묻는다면, 억울함의 총집합이라 답하겠다. 저마다의 이유로 내몰리고 뜯어먹히며, 제각기 그만한 사정이 있다. 도통 양보와 절제를 말할 수가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세상에서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며,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손해를 넘어 어리석음과 자멸을 자초하는 꼴일지도 모른다.

p.161 사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사라의 눈에 카탈로그 속 정제된 모습이 아닌 실제 논휴먼들의 생활 양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평화로움은 다른 논휴먼을 죽이고, 행성의 환경을 파괴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었다. 웃음 아래에는 비명이 잔뜩 깔려 있었다. 죽어가던 논휴먼 하나가 하늘을 바라보고서 신을 찾았다. 사라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p.226 빛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 뿐이었다. 그곳에 다른 것이 존재할 틈은 없었다. 핍은 수잔에게 목소리들에 관해 물어보려다 말았다. 관측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그에 관해 말하기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삶의 아주 작은 일부 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이 내일을, 다음 세대를, 우리 바깥의 이들을 모조리 같은 꼴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것 외의 방법을 모르니까. 당장 보이지 않는 것, 닫힌 문과 깊은 금 너머의 것을 믿기에는 팍팍하고 급박하다. 다시금,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내 코가 석자다.

어쩌면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는 중일지 모른다. 존재의 테두리 안에 '우리'만을 밀어넣는, 점점 좁아지고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일찍이 누군가가 말했듯,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p.170 선배들은 내게 눈에 불을 켜고서 잘못된 점을 찾으라고 했다. 종사자만 해도 삼십 명인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의 공장이었기에 막무가내로 폐쇄할 수는 없었고, 위생 문제나 비리 등 공장 사람들이 꼼짝없이 공장 폐쇄를 받아들일 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야 추후 구조 조정 때 보다 쉽게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p.227 눈을 감아도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빛으로 가득한 세상에는 그 어떤 상상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핍이 말했다. "보지 않으면 없는 거야. 그런 거야."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핍은 살고 있었다.


아홉 편의 수록작, 그 주인공들은 제각기 외롭다. 때로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때로는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눌러 삼키게 한다. 그들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있기에, 결국 그 뒷맛이 씁쓰레할 것을 알기에 그렇다. 미련하다 불리는 이들은 말한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차마 그렇게는 안 된다고, 이렇게 가다간 모두가 죽는다고,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사람은 생존 이상의 것으로 움직이기도 하는 동물이라고,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곧 죽게도 한다고.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무엇이어야 하는가. 어느 작가의 말을 빌어 묻는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47 그가 말했다. 이렇게 해도 뭐, 뭐라도 해줄 것 같습니까? 그는 침을 튀겨가며 말을 이었다. 저 새끼들이 더 빼먹었으면 빼먹었지, 더, 더 줄 놈들입니까? 아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입이 떨어졌다. 그렇게 부서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 그러지 말라고 만들어진 건데 그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p.280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소설의 방점을 찍었을 때 나는 이미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내 행동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시대에도, 쓰는 사람, 아니 목격하는 사람은 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작가라고 불렀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인간 창작 확인 센터로 발걸음을 돌렸다.


*도서제공: 고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