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환대
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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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러니까, 그러므로, 그래서 따위로 말을 시작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뒤에는 으레 어쩌면, 주저하는 마음이 따라붙기 십상이고. 결국 두려움 반 자진 반 하는 마음으로 나는, 우리는... 다소 유치하고 초라한 고백으로 말꼬리를 흐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퉁이로, 옷자락 뒤로 숨어버리는 마음이 그러하듯이.
장희원의 소설집 『우리의 환대』 다른 언제도 아닌 이 계절에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찬 바람이 스치는 벽에 햇살로 새겨지는 그림자는 닿을 수 없는 것의 부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어쩌면, '부재의 현존을 드러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의 자리에는 그림자 외에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사실은 조금 차갑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평소와는 다르게 목차를 먼저 읽었다. "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 표제작인 "우리의 환대", "작별'과 "기원과 기도"를 지나 "우리가 떠난 자리에"로 맺는 글들.
각각의 수록작들은 결핍과 부재, 이별로 이어진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없는 것, 비워진 것, 떠나간 것들로 채워지는 관계라니. 잠들지 못하는 밤에 몇번이고 중얼거리고 뒤척여본 지금은 안다. 그것 또한 지극한 사랑이고, 우리(畜舍)와 우리의 환대가 될 수 있음을.
언젠가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하늘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인적 드문 도로에 가만히 누워본 적이 있다(그 날 본 하늘이 정말 마지막이 될 뻔 했다는 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까 싶긴 하지만). 꼭 쏟아져내리는 것 같아서. 온 시야를 채우는 하늘이 서럽고 또 다정해서 언제까지고 이대로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이후로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 무너지고 또 바뀌었다. 그날 비워진 것은 새로 채워지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갓 파헤쳐진 흙내를 풍긴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p.87
"왜 저런 걸 받았니?"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기는 그를 빤히 보았다. 정호는 더 참지 못했던 것을 후 회하며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어쩔 수 없었어, 형.” 정기가 말했다.
“저걸 받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어. 도저히 앞으로 갈 수 없었다구."
정기는 아무런 높낮이 없이 차분히 말했다.

작가 장희원이 닿고자 하는 세상이 환대, 그러니까, 다가감의 이야기, 하나가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어쩌면 표지의 사진처럼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단절 혹은 상실을 그려내야만 했던, 그런 필요의 세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우리 모두 다들 한구석이 무너져내린 채로, 그것을 알지 못한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춥다. 적응할 틈이라고는 조금도 주지 않고 몰아친 추위에 몇십년을 겪었던 지난 계절의 느낌이 벌써 가물가물하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든 자리니 난 자리니 거창하게 하지 않아도 사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허전함이라는 것은 불현듯 파도처럼 밀려와 자 여기가, 하며 누군가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가. 이것을 쓸쓸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젠가 보았던 '물의 뼈'라는 말을 두고두고 생각한다. 햇살이 지나온 흔적을 드러내는 것.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의 부재를 드러내는 자욱. 그림자와 같은 것이 아닐지.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빈 자리를 빈 채로 두는, 흔적을 흔적으로 둘 수 있는 마음이 용기와 다정함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다.

한 해의 끝에서 우리(畜舍)와 우리를 생각한다. 그 모호한 테를 덧그리는 마음으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하늘의 느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환대 #장희원소설집
#우리의환대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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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중산층 -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
구해근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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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서민'이라거나 '중산층' 정도의, 그러니까, '남들만큼은 산다'고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 한국인들에게 이제 와서 중산층의 동질성이 와해되고 있다든지 당신 정도면 '남들만큼'을 넘어 풍족한 지경이니 복지정책을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
대체 누구 좋자고 저렇게 악을 써가면서까지 부자감세, 주택공급가 하락에 반대하는 걸까. 아무리 봐도 알랑거려봤자 콩고물 하나 나올 게 없는데 대체 무얼 위해 소수의 극상위층에 자원이 집중되는 나라에 매달리는 걸까. 당장 복지정책이 축소되고 세금 나올 구석이 줄어들면 그 일부의 '재벌' 외에는 사회 인프라도 안전장치도 기대할 수가 없는데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이들이 기대하는 본인의 미래상은 대체 무엇이길래. 정치경제뉴스를 접할 때마다 이런 의문을 가져왔다면 아마도 이 책이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 상류 중산층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극히 물질주의적, 가족이기주의적, 성공지상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p.244).

한국의 중산층 비율은 그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인다. OECD 기준(중위소득의 50%에서 150%에 속하는 집단)으로는 1980년대의 75%에서 2010년대 60%중반으로 OECD 평균에 비해서는 급감하였으나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응답자 주관에 따른 분류, 즉 체감중산층은 1980년대 말 75%에서 2010년대 말에는 40%로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2013년 한국사회학회의 조사 결과로는 20%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게 무슨 기가 막힌 일인가 싶다. 단순 소득 기준으로 중산층에 속하는 집단에서 스스로를 저소득층에 속한다고 여기는 이가 제법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과연 '배가 불러서' 내지는 '진정 힘든 시절 안 겪어본 세대가 허영에 차서' 스스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어 나타난 결과일까.

현재 한국, 6.25 전후 이래로 경제 상황이 언제는 퍽이나 안정적이었냐만은,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모래산 터를 박박 긁어다 꼭대기에 장식하기, 잘해봐야 아랫돌 빼어 윗돌 괴기 일색에 가끔가다 겨우 끌어 가린 것들 홀딱 벗겨 자 우리가 자유경쟁을 하겠습니다!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시간을 차근히 되새겨보면 최근 뜨거웠던 '공정'논란(담론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낯부끄러운 아귀다툼이었지 않은가)이나 각종 '사이다 서사'에 열광하고 재벌 선망을 감출 생각 없는 인터넷, 미디어 문화는 일견 당연하게까지 느껴진다. 별 방도가 있었겠냐는 말이다. 기를 쓰고 버티지 않는 이상은 저렇게라도 스스로가 바닥은 아니라는 생각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싶을 정도로.
소득이 최상위층에서만 증가하고 다른 층에서는 정체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비중의국민소득이 럭셔리 소비에 집중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주된 결과는 무엇이 럭셔리인가에 대한 기준이 계속 상승하는 것이다(p.162).
웰빙에 포함된 먹거리, 운동, 여가 활동이 빠른 속도로 상업화되면서 광거에는 극히 사적이었던 영역의 것들이 차츰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위재로 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웰빙도, 더 정확히는 웰빙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도 아주 중요한 지위재로 변했다(p.164).

경제적 지표의 허리, 중심을 담당하는 중산층의 생활 양식은 말그대로 보통의, 대부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일상의 중요한 영역을 침해당하거나 포기해야 할 정도로 빈곤을 겪거나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 않은 이상 대충 다 이정도의 소득, 소비, 저축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고 간주되는 집단이 중산층이다. 따라서 중산층의 안정성은 국가경제가 마지노선으로 방어해야할 수준이자 그들의 평균 상승을 통해 집단 성원 전체의 삶의 질 상승을 도모해야 할 집단적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집단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을 기준으로 삼는다. 어느 정도는 본능이라 할 수 있겠지만, 현대인은 이를 극대화하도록 부추기는 미디어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상향평준화가 아닌 도달하기 힘든 생활상을 정상, 동경하고 추구해야할 선으로 각인시키는 동시에 계층이동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소득의 원천에 대한 인식은 개인과 타인의 노력이라는 비교적 유동적인 것 대신 기회와 세습지위로 얻는 자본증식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가깝다. 와중에 자본을 소유한 집단은 정당성 획득을 위해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 즉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며 그에 동조하고자 하는 비 상류층, 특권중산층과 나머지 계층 간의 갈등이 더해지는 형국이다.
어쨌든 부유층의 특권적 지위가 그들의 전문적 지식이나 직업적 지위만이 아니라 그들이 이런 위치를 이용해서 창출하는 불로소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이상 한국의 신흥 상류층은 능력주의 엘리트로서의 계급적 정당성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p.108).
그들이 특권적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시장이 그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한국의 신흥부유층은 아직 그들의 특권을 담보할 만한 도덕적 정당성은 물론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합법적인 수단이 자주 동원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회적 알력과 불안이 발생하고 있다(p.117).

어느 집단이든 중심이 무너지면 그 집단 전체의 균형은 손 쓸 길 없이 무너지는 꼴이 된다. 코로나19 판데믹으로 대규모 취약점이 드러난데다 전세계적 분열, 국수주의와 극단적인 이방인 배척과 혐오가 득세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 남은 중산층마저 완전히 갈라지기 전에. 저자는 작금의 상황을 아주 희망이 없는, 절멸에 직면한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위안이 아니라 경고가 된다. 무너지는 바닥을 밟고 올라갈 수 없어 목을 빼고 있는 이들에게 남아있을 것이 '평화롭고 정중한' 태도일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현재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행되는 불평등의 패턴은 중간계층 내에서 중,하층은 하향 분화해가는 한편 상층에 있는 이루는 상향이동을 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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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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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미디어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상상해보자, 어느 나라의 기록이 있다. 모 년에 모 국으로 보내는 공물 내역.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은 오백여 관, 소 이천여 두, 쌀, 과일, 세공품, 자기... 그리고 여인 삼백여 명. 이 문서에는 사람이되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공녀(貢女), 공물로 보내지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아니, 노역을 질 인부가 필요하면 자국 장정을 모집하고, 기술자가 필요하면 사신단에 딸려 오가면 될 것을 사람을 아주 돌아오지 못하게 바친단다. 그것도 여인을, 조공품으로. 그려지는가.
이름이 무엇이든간에 건국 이래 한반도는 조용할 날이 없는 땅이었다. 툭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빼앗기고, 제법 나라같이 생긴 꼴을 갖추기 전까지는 달달 볶여 시달리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제주는 이중, 삼중의 고생을 해야만 했던, 우리이되 우리가 아니었던 아픈 역사가 응축된 땅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있었을 이야기에 작은 위안과 사죄를 전하는 이의 마음이기도 하다. 벼락같이 끌려가 말도 글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다 간신히 돌아오기라도 하면 손가락질에 숨어 살아야 했던 이들의 하나하나 읊어주는 상상이다. 동시에 서문처럼 저자 자신과 동생을 위한 화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최고의 수사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만 같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는지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제발 살아만 계시라고 빌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그저 그것에 매달려 오래 전 떠나온 고향 제주도로 향한다. 희미한 죄책감을 안고. 두고 온 동생을 떠올리며.
정의감 넘치는 수사관이었던 아버지는 소녀들이 연달아 사라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제주 땅에서 실종되었다. 그리고 찢긴 옷소매만이 발견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면 아버지에게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도달한 섬, 바람과 바다가 모든 것을 가져갈 것만 같은 이 섬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먹하기만 한 동생은 아버지도, 나도 그저 원망할 뿐이고 그 동생이 가족처럼 여기는 늙은 무당은 수상하기 짝이 없다.
복순이라는 여인에게 전해받은 아버지의 수사일지와 기억을 더듬어가며 사건의 전말에 가까워질 수록 점점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늘어가고, 내내 불안하던 동생과의 관계조차 파탄이 나고 마는데...!

책을 덮고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다소 가벼운 성장소설이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중간중간 서럽게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람의 이야기이다. 밑바닥에서 끌려가고 짓밟히고 기껏해야 규중규수, 방 안의 화초로 자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판을 뒤집는, 모험이자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서로를 돕는 힘없는 사람 간의 연대를 잊지 말라. 높으신 분(스포일러 방지)의 말은 틀렸다. 약한 자가 승리할 수 있다. 선한 길을 가려고 투쟁하는 사람은 꽃처럼 짖밟혀도 들불로 살아난다. 그러니 부당한 요구에 저항할 힘이 없다고, 혹은 그럴 용기가 없다고 타인에게 고통을 떠넘겨서라도 자신을, 제 자식만을 구해보려 애쓰는 이가 그저 죄인만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죄가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제 자식에게, 남의 자식에게, 그 누구에게라도.

"아방이 대낮에 내 목을 졸라수다. 도와달랜 도와달랜 해신디도 마을 사람들은... 그 사름들 그냥 대문 앞에 고만히 보고만 있었수다. 얼굴 알려지면 공녀 된댄 아방이 나 얼굴 해싸지게 허는 동안에요(p.327)."
전에도 집안 물건들을 보관하기 위해 이런 자물쇠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나는 아무 열쇠나 골라 자물쇠를 열며 속으로 말했다. 이 아이들은 문갑에 보관하는 옥반지, 은 머리 장식, 비단이 아니야. 하지만 현실이었다. 보휘, 경자, 마리는 그런 물건처럼 우리 안에 갇혀있었다(p.381).
악마다. 이제야 알겠다. 이 사람을 이해하기가 왜 그리 힘들었는지. 나는 악마라면 뾰족한 뿔, 날카로운 이발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했다. 선하고 점잖은 겉모습으로 빛나고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의 말이 내 왼쪽 귀에 들렸다. 좋은 것들이 알고 보면 모조일 때도 있자. 문 촌장의 친절은 진심이었을지 몰라도 금칠한 놋쇠처럼 싸구려였다(p.388).

다만 시대 배경상의 한계인지 애쓰고 분투하는 여성, 어리고 약한 이들의 행동을 높은 지위의 남성이 인정하고 격려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 다소간 아쉽다. 허나 등장인물의 대사에서 제주말씨를 살리려 노력한 점과 주인공 민환이가 작중 높으신 분(스포일러 방지)의 권유와는 달리 궁내 수사관이 되어 강대국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민중과 여성을 착취하는 또다른 가해자의 일원이 되는 길을 거부하는 선택은 마음에 든다. 미디어작품, 기왕이면 영화로 나오면 좋겠다. 어느 때에 나와도 우리 사회가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테니.
"(...) 아무리 깊이 묻혀 있어도 진실은 반드시 떠오른다고. 진실은 꺾이지 않으니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고 빛을 찾아 올라오는 게 진실이야(p.326)."
"나리께서 나헌티 한 가지 질문을 남겨신디. 좀좀허랜 할 순 있다. 허나 그 결정을 멫 년이 지나도 만족햄시나? 라고." (...) "아시 돕쟁 헐 때 내가 깨달은 게 이수다." 가희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캄캄한 밤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빛을 보는 듯했다. "옳은 행실 헌다는 건 죽을 만큼 무섭다고. 하지만 지금은 펜안해져수다(p.362)."


함께 읽기를 권하는 책들.
1. 조혁연, 『빼앗긴 봄, 공녀』 (세창출판사)
2. 정구선, 『공녀』 (국학자료원): 절판
3. 정승호, 김수진, 『명나라로 끌려간 조선 공녀 잔혹사』 (지식공감)
4. 로렐 켄달, 『무당, 신령, 여성들』 (일조각)
5. 진성기, 『제주도무속논고』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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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을 만나러 갑니다 - 함께 우는 존재 여섯 빛깔 무당 이야기
홍칼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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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에 앞서, 무속 및 민간신앙을 포함한 모든 유신론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겠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고민해봤지만 강경한 무신론자이자 초월신 신앙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나는. 이는 종교의 순기능이나 신에게 의지하는 마음에 대한 부정과는 다르다. 나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를 자청하는 모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신의 이름을 빌어, 혹은 공유하는 믿음과 가치에 기대서라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결국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일부가 공유하는 믿음에 불과하지 않는가.
이쯤해서 잊을만하면 한번씩 꺼내드는 모 평론가의 글을 떠올려보자.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나또한 그렇다. 초월적인 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내세나 거대한 순리에 대한 믿음을 비웃을 권리가 아니라 기댈 존재가 없기에 사람이 사람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져야할 의무이다. 그 무게를 잊지 않고서야 비로소 믿음의 체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짊어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굿을 하고 부적을 쓰고 치성을 드려 복을 얻으라는 '팁'이 아니라 우리 곁에 직업인으로서,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여러 무속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이다. 영화 "만신"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진 고 김금화 만신의 제자부터 성소수자, 시각장애인, 나라의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의 희생자를 위로하는 무당, 무당을 위한 무당 등 "무당"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무속인들과의 문답을 통해 그들의 내력과 세계관을 듣는다. 그 사이사이 저자가 독자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읽는 이를 곁으로 부른다.
어쩌면, 여기서만은 당신의 이야기를 놓고 가도 좋을 거라고. 우리는 속죄도 회개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저 큰 흐름이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의 조언을 줄 수 있을테니, 천지만물에 깃든 신에게 당신 몫의 기원을 전할테니 마음 편히 머물다 가셔도 좋으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 아 젊은 사람들이 이래서 무속신앙을 찾으러 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여러 에세이를 읽고나서 무속신앙에 대한 믿음이 생겼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한번쯤 타로나 괘를 뽑아 나온 결과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아니다. 여전히 본인도 믿지 않는 무형의 힘에 영험한 효능이라도 있는 양 퍼트려 돈과 시간을 갈취하는 일에는 분노가 치솟고 저것이 사회악이지 다른 것이겠냐고 화를 내지만 어쩌겠는가. 무엇에라도 기대고 싶은 마음, 스스로가 믿는 축복과 기원의 힘을 타인을 위해 쏟아붇고 나누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끈질기게 존재해왔고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방도가 없다.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신의 품안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과 살아가는 방법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사람 위에도 아래에도 다른 것이 없으니 귀하고 천한 것이 따로 없어 모두를 각자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존재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나의 좁은 식견에 드넓은 세계를 끼워맞추지 말자고, 모든 시간 모든 대상에게서 배우기를 멈추지 말자고, 다만 그것이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 믿는 오만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잊지 말자고. 오늘도 어딘가에서 맑은 물을 떠놓고 신령의 이름으로 기원했을 이들에게서 배운다. 그렇게 살아가는 마음을 잊지 말자고.

함께 읽기를 권하는 책
1. 로렐 켄달, 『무당, 여성, 신령들』 (일조각)
2. 홍칼리, 『신령님이 보고 계셔』 (위즈덤하우스)
3. 손노선, 『한국무당의 신들림과 무업의 사회적 실천』 (민속원)
4. 도우리,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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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앤더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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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막막하다. 갑갑하고.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매체를 가리지 않고 회귀며 빙의가 유행한단다. 새삼스레 그러는 것도 아니고 제법 오래된 소재란다. 계보도를 그려도 충분할 그것을 더듬어보노라면 지금의 기억과 지식을 가진 채로 다시 도전한다면 더 잘 살 수 있을텐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텐데, 그 때 그 괴로움을 조금은 수월히 넘길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미련에 가까운, 그런 욕망은 인류보편사인가, 하는 의문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낡고 지친 어른, 닳아빠진 어른이 만드는 세상은 하나같이 청소년기를 아름답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낭만의 시기로 그려내는데 정작 우리네 아이들은 어떤 몰골인가. 하이틴 로맨스처럼 가슴떨리는 첫사랑에 울고 웃는가? 방과후 부활동으로 잊지 못할 추억을 쌓는가? 무모한 도전에 덤벼들고 마음껏 미래를 꿈꾸는가? 아니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대다수 학생들의 삶은 공부, 경쟁, 입시 이 세 단어로 대강 설명되지 않는가.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학원이나 과외로, 수업 끝나면 자습, 자습 끝나면 한밤중, 조금 눈붙이고 나면 새벽같이 등교.
식용견, 불법으로 감금되고 사육되어 도축되는, '시장 보신탕집' 개들은 소리에 예민해지면 짖느라 살이 빠지니 부러 고막을 터트린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좁은 우리에서 스트레스로 서로를 공격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에 이빨과 꼬리를 절제당하는 돼지도 다를 바가 없다. 청춘입네 미래네 추켜세우는 청소년들을 대하는 현실이 이와 다를 바가 있는가.
우정의 소중함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외쳐봤자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간다"느니,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는 말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세상에 친구가 어디 있는가. 생활기록부 한 줄에, 시험점수 1점에 기십년의 미래가 오락가락 하는 곳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가. 한창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아야 할 시기에, 12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온통 쏟아부어 결정짓는 것이 겨우 대학이란 말인가. 겨우, 겨우 그것때문에 애써 태어나 자라는 이들이 서로를 향해 눈을 홉뜨고 경계하지 않으면 영영 패배자로 살아야한다고 여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단 말인가.

주인공 해솔은 한국의 중심, 그중에서도 가히 '교육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대치동 수험생이다. 가장 가까운 친구도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스토리'가 온통 입시에 맞춰진, 부모까지 입시에 올인하는 열성적인 학생이다. 그마저도 편하지만은 않다. 미묘한 신경전, 견제, 기싸움은 기본인 그런 사이. 친구라고는 하지만 정말 친구가 맞는걸까,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운 그런 사이.
“스토리. 우리한테 필요한 건 성적이 아니라 스토리야. 대학에 가려면 학생부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를 관통하는 스토리가 있어야 돼. 그러니까 요즘은 공부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을 하는 거야.”(p.11)
엄마의 재혼으로 졸지에 가족에서 떠밀려나와 호주로 유학하게 된 해솔은 한인 홈스테이 가정에 머물지만 자리잡을 생각도, 동갑내기인 주인집 딸 클로이와 친해질 생각도 없다. 그저 악물고 공부만 열심히 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지금까지 살아온대로, 그렇게.
엄마는 해솔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해솔이 호주에만 있으면, 한국에 돌아가서 엄마의 행복한 재혼 생활에 걸림돌이 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된 것 같았다.(p.144)

주인공 클로이는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 온 학생이다. 이유는 몰라도 그래야 하니까, 착한 딸이고 엄마의 삶 또한 입시에 걸려있으니까,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엄마가 애걸해 얻어낸 우등생, 명문대 튜터에게 과외를 받고, 그렇게 의대에 가야한다고 믿는 조용하고 착한 아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생각할 기회도 다른 기회도 없었으니 그저 그래야만 하는 그런 아이. 그동안 상냥함을 내밀면 이용해먹는 친절이나마 돌아오던, 자기와는 경쟁할 수 없는 그저 그런 하숙생들과 다르게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무심하고 낯선 해솔을 만나며 클로이의 일상이 뒤틀린다. 혼란스러워진다. 자꾸만 저 아이를 미워하게 된다. 해솔과 친해지고 싶고, 그를 이해하고 싶은 동시에 밉고 싫고 자신을 불안하게 한다.
클로이는 멍하니 해솔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한창 보고 있는 드라마를 떠올렸다. 드라마에서는 시드니 도심에 가야 볼 수 있을 크기의 건물이 학원이었다. 그 건물 옆도, 그 옆도 모두 학원 건물이었다. 깜깜한 밤까지 학원의 불빛이 환했고, 건물들 앞에는 학원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한밤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집에서도 자신을 감금한 채 공부를 했다. 가르친다기보다 학대하는 것에 가까운 과외 선생에게 수업을 받고 싶다고 울기까지 했다.(p.51)
“저거 봐라, 한국 애들은 저렇게 공부해. 넌 쟤들에 비하면 맨날 놀고먹는 거야.”
Selective School. 선별된 학교. 선택받은 학교. OC반에서도 우수한 학생이고 학원 셀렉티브 준비반에서도 상위권이던 클로이가 셀렉티브 스쿨 시험에 떨어진 건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누구로부터?(p.115)

주인공 엘리는 호주에서 자란 한국인이다. 엄마도 아빠도 나라도 내가 한국인이라는데, '원래는 여기 있으면 안 될' 신분이라는데 한국어라고는 조금도 모른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호주에서 자랐고, 당연히 호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법으로 개조한 차고에 세들어 살지만, 마약 판매로 용돈벌이를 하지만, 매년 익스펙션 때면 온가족이 세간살림을 싸들고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게 다 나를 위해서란다. 내가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비자를 받아내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단다. 그걸 위해서.
매일 혼자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와 아빠는 모든 게 엘리 때문이라고 했다. 엘리 때문에 집에 들어올 시간도 없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거라고. 엘리를 위해. 엘리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학교에 다니도록 하기 위해.(p.190)
모든 것이 너무나 간단하다는 듯 엘리 엄마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엘리가 (...) 그 많은 일이 이미 다 준비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 교실마다 가득 들어차 있는 애들을 보면, 부모의 욕망을 대리 충족해 주는 것을 자기 장래 희망으로 굳건히 믿고 공부하는 애들을 보면 엘리의 엄마 아빠가 바라는 것이 저런 애들이고, 결국 문제는 자신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p.222)

김혼비 작가의 추천사처럼 "꺼지지 않는 산불이 호주 남부를 집어삼키듯 하루하루 잿더미로 변해가는 세 명의 10대를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정말이지 까맣게 타들어갔다". 자기만의 이야기도, 인생도, 고민할 기회와 마음놓고 자랄 환경마저도, 단 한번도 쥐어보지 못한 그것들은 연대의 싹을 잘라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여성이 서로를 향해 보내는 애정, 서로를 결국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감히 해쳐져서는 안될 존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가능한 그 마음은 여전히 중심을 세우지 못하고 휘청이는 모든 이들을 눈물짓게 할 것이다. 그것이 단지 동정에 그치지 않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자 더이상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다는 간절한 외침이 되기를 바란다.

깨질 것만 같은 세 사람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어쩌면 같은 이유로 처절하게 외롭고 지친 세 사람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독자를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아니, 차라리 한번은 질러야 한다고, 아니, 아니. 애원하고 갈등하게 만든다.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 까끌하고, 위태롭고, 또 찬란한 동시에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게 한다. 같은 시기, 같은 고통을 겪어봤기에 모른 체 할 수가 없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력하고 순진무구한 소녀들에 불과한가, 그럴리가. 술도 마시고 약도 하고 자퇴에 기물파손에... 별 걸 다 한다. 그러나,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닌가. 그럴 수 밖에 없도록 궁지에 궁지로 몰리지 않았는가.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익히 알려진 문구가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부서지기 전에, 숨 쉴 틈도 없이 조여오는 세계를 부수고 날아가는 이들을 응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소설은 응원인 동시에 위로이다. 웃을 수 있는, 행복할 수 있는 세계로 날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연대와 격려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잊지 않기를. 나도, 당신도. 행복해지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웃고, 또 웃었다. 분명히 둘은 연결되어 있었다. (p.182)
언제까지라도 계속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같이 울 수도 있을 것 같고, 왜 울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둘은 신이니까. 해솔과 클로이는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시간 위에 서 있었다. 버림받고 나서 신이 되어 버린 둘은 그렇게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며 킬킬거리고 웃었다.(p.214)
그때 해솔의 머릿속에서 구슬 목걸이가 끊어졌다. 몇 년에 걸쳐 모아온 구슬이 산산이 흩어졌다. 침대 아래로, 서랍장 뒤쪽으로, 문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떤 구슬도 아쉽지 않았다. 해솔은 자신이 구슬 목걸이를 직접 끊어버렸다는 걸 알았고, 그게 중요했다.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서사였다.(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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