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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피, 열
단시엘 W. 모니즈 지음, 박경선 옮김 / 모모 / 2023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모모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단편집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수록작들의 제목에 숨겨진 의미와 그들을 관통하는 전체 주제를 생각하는 데 있지 않을까. 이 책도 다르지 않다. 한참을 음미하듯 굴려보고서야 알았다. 분노구나, 어떤 형태로, 어떤 감정을 동반하든 간에, 이것은 분노구나.
모두가 분노에 차있다. 늘어붙은 바닥처럼, 파글거리며 튀어오르는 방울처럼. 어떤 것은 터져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깊은 냄비 안 걸쭉한 액체의 바닥처럼 푹, 하고 주저앉아버리기도 하고. 억눌린 분노와 굴종, 순응, 교묘함과 회피를 동반하는 그 모든 감정들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여성, 약자, 소수자로 경험하는 삶에 관련된 분노, 혹은 권력 우위에서 밀려나 당혹스러워하는 이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사치스러운 야만을 목도하면서도 숨죽이고 내리눌러야 하는 구역감을 속삭이듯 무심하게 풀어놓는다.
p.301 저녁 식사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맨얼굴이었다. 모임 회원들은 우리를 힘 없는 사람들처럼 대하면서도 우리를 알고 싶어 했다. 우리는 우리가 힘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를 사이에 두고도 마치 공기를 통해 이야기하듯 대화를 나눴고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주 가까이서 알아버렸다.
p.295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변한다. 그는 그저 아를로일 뿐이고, 숨 막히는 어른 특유의 머스크향 같은 체취가 나를 압도한다. 쟤네는 섹스를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를로의 손이 내 배 위에서 메마른 열기를 뿜는다. 그럴 때면 내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자궁처럼 품는다. 잠잠하면서도 의식적인 그의 손에는 그 나름의 심장박동이 있다. 나는 착한 딸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나는 그의 손처럼 잠잠하지만 어둠은 어김없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런가하면 여성 또한 사람인 까닭에 여성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흑인 여성, 어린 여성, 혹은 어린 흑인 여성,
p.70 제이는 목사가 하는 말을 듣고 그 이면에 감춰진 뜻을 이해한다. 자신은 머리에는 털이 있어도 되지만 겨드랑이에 있어서는 안 되고, 팔에는 털이 있어도 되지만 다리에 있어서는 안 되며, 다리 사이의 털은… 남자 취향에 달려 있다는 것. 구경당할 수는 있어도 구경할 수는 없다는 것.
p.282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몸이 기능하느라 내는 냄새를 감추려 애쓰기는커녕 그걸 이용해 돈을 벌기도 할 만큼 자기 육체 안에서 편안한 삶은 대체 어떤 걸까 궁금해하느라 정신이 너무 없어서.
p.299 우리는 가입조차 못 했을 거야. 가입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들의 아버지들, 더 올라가서는 그들의 할아버지들로부터 부를 넘겨 받아 우리에게 건네주고 검은 육체와 갈색 육체의 삶과 죽음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한들 우리 가운데 이런 끔찍한 풍요에 가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람이라는 까닭에 죽어가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생생한 욕망에 타오르고 흔들리는 여성이 있다. 관계의 역전, 혹은 일탈의 문턱에 선 여성은 얼마나 찬란한가. 버림받을 것, 혹은 불만족의 대상이 될 것을 예견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이전의 "주체"는 얼마나 초라하고 또 우스꽝스러운가. 소리내서 웃고 얼빠진 새끼, 넌 아무것도 몰라, 비웃고 싶었다. 세상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고 정숙과 위안을 요구하는 여자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응원하고 싶었다.
p.95 글로리아는 울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지나치는 거리 풍경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어. 그냥 전부, 그냥 방 안에서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눈 게 다였다고."
p.98 글로리아의 몸을 끊임없이 갉아먹으며 무언가를 빼앗아가는 대가로 글로리아에게 일종의 신성한 앎을 선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프레드는 글로리아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들이 빛을 흠뻑 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아홉 살 아래인 글로리아가 응당 자신을 돌보리라 생각했는데 역할이 뒤바뀌어버린 데 대한 프레드의 분노도. 그리고 최악의 가능성도.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해 프레드가 느끼는 극도의 공포와 수치심은 글로리아의 혀끝에서 녹으며 씁쓸한 맛을 냈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곁에 없으면 프레드가 겁쟁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프레드는 글로리아가 그런 생각을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다고 믿었다.
비단 개인의 분노만을 그려내지는 않는다. 지킬 것이 없는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이 스스로가 되었든, 피와 살로 빚어진 자식이 되었든. 사람 대 사람으로 공유하는 분노, 광기, 복수. 감히, 내 아이를, 한때는 나를 세상으로 여겼으나 이제는 나를 경멸하는 내 딸을 네가 감히, 네 행복을 너의 이로, 혀로 부수는 고통을. 웃는 얼굴과 담배 한 개피로 이어지는 홀가분함, 인간으로 마주하는 여자의 존재를 그려낸다.
또다른 단편에서는 대립하는 존재로서의 모성을 그려낸다. 희생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모성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 어느 여성이 지극한 사랑을 타고나겠는가. 엄마에서 딸로, 다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이가 존재를 요구하는 이물-자녀에게 느끼는 분노와 부담과 거부감을 당사자가 아닌 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널 사랑하지만 가끔은 네가 하나도 좋지 않아, 증오스러워.
p.162 엄마는 분명 세상이 원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프랭키의 모습 이 갑자기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단지 엄마가 아니라 한 온전한 인간으로. 두려움 가득한 별개의 존재. 나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엄마에게도 지구상에서 처음 보내는 시간이라는 걸 마고는 문득 깨닫는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고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진다.
p.229 콜레트는 몸을 숙이고는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는 열기 같은 목소리로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난 너를 사랑해, 하지만 가끔은 네가 하나도 안 좋아. 빌리는 엄마가 이 일을 기억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디로 들어가 가라앉았을지 궁금했다.
p.247 빌리는 이 아기가 자신을 부숴버릴 것임을 알았다. 이 모든 이유들이 참일 수 있으며 타당하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끼어든 혼란 뒤에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엄마가 되는 일이 어떤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은 주머니에 돌 하나를 더 집어넣는 일과도 같다는 설명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기는 훗날 온전한 사람으로 자랄 것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도리어 내가 망가뜨린다면? 물론 모두가 엄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습적인 의미로는 더더욱 아니다. 만일 여자들에게 궁금해할 자유가 더 많이 허락되었더라면 세상은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이따금 "미친 여자"라는 단어를 곱씹어본다. 미친 여자, 미쳐버린 여자,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헝클며 발을 구르지는 않지만 광기로 휘몰아치고 끓어오르는, 혹은 완전한 폐허에 맨발로 존재하는 그런 존재. 그럴 때면 늘 어느 향수 광고를 떠올린다. 잘 차려입은 여성이 격식있는 연회장을 떠나 발을 구르고 머리를 헝클고, 춤추고, 파괴하고, 뛰어내리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각각의 시공에서 이야기를 플어내는 열한 개의 단편들 내내 여성이 자기-것을 조각내고, 들여다보고, 파괴하거나 저항하는 과정들이`불합리 혹은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재현된다. 이를 미치거나 미쳤거나 미쳐갈 여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좋다. 조금 더 미쳐도 좋겠다.
미친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미친 여자는 낯설다. 미친 여자는 힘이 세다. 미친 여자는 예측 불가와 괴력과 이질성과 보이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상징과도 같다. 미치지 않으면서 미칠 것을 요구받는 존재들. 미친 여자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미친 여자는 당신을, 세계를 부술 것이다.
p.25 골반 한쪽을 삐딱하게 기울여 선 채로 에바에게 말하는 엄마의 모습이 마치 방의 모든 빛과 공기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에바는 엄마의 거대한 존재감에 둘러싸여 협박당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더 우쭐해졌다. 엄마의 따스한 갈색 얼굴에 입 맞추고 싶었다. 손바닥이 얼얼할 때까지 후려치고 싶었다.
p.57 "도대체 언제쯤에나 흘려보낼 수 있는 거야? 우리 원래 대로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건데?" "흘려보내?” 나는 한밤중의 별처럼 불꽃이 번쩍 튀고 갑자기 감정이 울컥한다.
(...) "그게 뭐였는지 우린 알지도 못했잖아." 나는 알고 있었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보드라운 꽃잎들, 내 딸아이. 그리고 나는 히스가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길 원했다.
p.84 제이가 말한다. 다음에 또 내 동생한테 좆같이 굴면 네 침실로 찾아가서 이걸 쥐어뜯어 놓을 거야. 제이가 뱉는 말에는 어떤 그림자도 숨어 있지 않았다. 그 탁 트이게 열린 곳에서 녀석은 스르륵 열려버렸고 허세와 유산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두려움이 녀석의 얼굴 위로 떠오른다. 제이는 그 두려움을 뚫어져라 본다. 그리고 그 시답잖음을 음미한다. 그래 내 말 알아들었어? 제이가 묻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둠 속에서도 제이는 뜨거운 빛을 뿜어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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