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날들의 기록 - 철학자 김진영의 마음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아침의 피아노』로 삶을 정리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던, 김진영이 그간의 저작을 거쳐 단상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의 글이 다시금 독자에게 말을 건다. 『조용한 날들의 기록』이라는 제목처럼 고요 속에서 솟아오르고 침잠하고 벼려진 짧거나 아주 짧은 사유들을 모은 이 책은 따스한 봄빛의 표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조용한 날들의 기록이다. 홀로 웅크리고 조용히, 오래 울어본 이가 남겨둔 시간들. 새벽 어스름에서, 한밤의 불빛 너머에서,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오래오래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다 다시금 사랑을 다짐해본 자만이 써낼 수 있는 글들. 스스로를 아주 많이 부끄러워하고 세상의 어떤 면모를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 김진영의 글이다.
김진영의 글은 매번 나를 울게 한다. 그의 글은 고개를 떨구게 하고, 오래오래 고요히 울게 만든다. 그의 다른 책을 소개하는 글은 이렇게 말한다. "호주머니에서 죽음을 꺼내면서도 삶을 말하고, 아픈 이별을 떠나보내면서도 사랑을 껴안았던 철학자"라고. 그런 까닭에 그는 아프고 처절하게 묻는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p.79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 줄을 덧붙인다: 그런데 빛이 있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어떤 빛이 있다. 이 빛은 무엇인가?
p.408 『애도 일기』에서 바르트는 말했던가: "사랑이 끊어진 자리에서 타오르는 문장들이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런 한 줄을 생략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만이 문장이다’

공교롭게도 근래 여러 사람으로부터 비슷한 고민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노력하는 사람을 다그치지 말라고 답하며 으레 "무릎을 꿇은 자의 등에 채찍을 때려서는 안 된다(신철규, "마비" 중)"던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그저 안타깝다가도 감히 내 주제에 할 말인가 싶어진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는 과연 어디에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김진영의 글에서 나는 떠나보낸 이와 그의 상실로 무너져내린 세계를 떠올린다. 현존의 부재가 부재의 현존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그 어딘가에 놓인 시간들을.
p.47 자꾸만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아니라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뭔가 빗나가고 틀렸다는 생각. 그런 자기검열 뒤에는 언제나 초조함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비록 그것이 애를 쓰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모자라는 일이고, 그래서 더 무언가를, 더 많은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그런 강박.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기를 용서하지 않으려는 불쌍한 자괴감.
p.74 한 사람이 죽었다. 그의 사진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고 머리를 숙인다. 이 잠깐 사이에 혼란을 느낀다. 그건 부끄러움일까, 죽은 자들 앞에서 산 자들은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그 어떤 본질적 패배에 대한 부끄러움.

세상의 추악하고 괴로운 부분을 직시하는 일은 분명 어렵다. 그 꼴을 보고도 여전히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힘없이 눈물을 떨구는 자기연민이 아닌, 바닥의 바닥을 짚어내는 사유와 글은 분명 그에게 일종의 사명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김진영의 글이 쉬이 잊히지 않아 밤을 지새우게 하고, 부옇게 동이 트는 하늘을 보며 되뇌는 까닭이다.
수많은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에는 끈질긴 사랑의 의지가 있다. 얼어붙은 땅에서 기어이 고개를 드는 풀빛의 생명들과도 같은 그것. 이따금 그것을 숭고함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눈물은 얼굴의 굴곡을 기억한다(신철규, "어둠의 진화" 중)"던 시인의 말처럼 슬픔은 삶에 궤적을 남긴다. 슬픔을 이해하는 자 또한 세상에 그러하다. 어쩌면 애도와 사랑은 잊지 않음, 아니, 잊지 못함에서 자라나는 감정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슬퍼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했던가, 애도의 무게, 사랑의 책무를 아는 이에게는 이해가 남는다. 그 자신과 타인과 삶 자체에 대한 이해가. 나는 그것을 품위라고 부른다.
p.157 사유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아니. 말을 고치자. 부여가 아니라 ‘수여‘다. 수여 안에는 부여에는 없는 특별한 태도가 있다. 그건 존경심이다. 혼란을 배척하지도 제압하지도 않기, 오히려 혼돈을 응시하고 발견하고 존경하기. 그것이 사유의 질서, 아니 사유의 품위다.
p.314 착한 것들은 부드럽다. 그러므로 당연히 부드러운 것들은 착하다. 그런데 그런가? 부드러운 것들이 반드시 착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점점 더 수긍하게 된다. 그것이 몹시 슬프다.
p.384 "혁명이란 뿌리에 도끼를 대는 일이다"
(…) 뿌리에 도끼를 대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 중에는 애도를 중화시키려는 정치도 있다. "나쁜 사회는 슬픔을 슬퍼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다" 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 혁명이란 그러니까 제대로 슬퍼하고 제대로 애도하는 일이다. 역사 안에서 '애도의 정의가 구현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마지막 기록을 담은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서, 꼭 잡으면 잠자는 물고기 한 마리가 손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김진영, 『조용한 날들의 기록』"는 이답지 않은가.
한 권의 책을 채우는 짧은 글에 바위와도 같은 고뇌가 있다. 적막한 가운데 소란한 마음의 기록이 있다. 아마도 나는 또다시 쉬이 잊지 못할 문장을 되뇌어 볼 것이다.
p.140 마음이 늘 불편한 건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건, 아마도 아니 거의 분명히, 마음껏 사랑하지 못해서, 그럴 수가 없어서인지 모른다.
p.445 약한 사람은 더 약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강해지려고 한다. 그 강함이 약자들의 연대, 연민 혹은 사랑이다. 사랑은 본능도 천성도 아니다. 사랑은 약한 사람들이 긴 세월을 통해서 발견한 생존의 필연적 논리다. 그런데 이 논리를 생존술이 아니라 통치술로 이용하는 두 영역이 있다. 나쁜 종교와 나쁜 정치가 그것들이다. 그들은 약함을 강함과 생존의 논리가 아니라 순응과 순종의 논리로 더럽힌다. 타락한 종교와 정치가 그 끝에서 사랑과 정의가 아니라 법과 형벌로 귀결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 법으로부터 마침내 벌받고 추방당하는 이들이 약한 사람들이라는 건 더더욱 당연한 귀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