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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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빛소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따금 노년기의 삶을 상상해보곤 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머리가 세고 허리가 굽어지고 살결이 부드럽게 늘어지는 그 때가 되면 지금껏 바라마지 않던 것처럼 고요한 시간을 보내게 될까. 하루에 한두마디쯤, 많아야 잠깐의 담소 정도, 새벽녘에 깨어 해가 넘어갈 때쯤 잠이 드는 그런 삶, 뜨겁게 끓어오르던 피나 호승심따위의 감정들은 지나간 시간의 것으로 남겨두고 이따금 추억에 잠겨들게 될까. 젊을 때와 다름없이 활기와 욕망이 넘치는 생활이 이상적인 노년이라면, 정확히 반대를 사는 지금의 나는 이상적인 청년이라도 된단 말인가.

한 삼사십년 후, 그러니까 내 부모가 기억 속의 조부모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을 때 쯤, 그때의 삶을 그려보는 것은 모호하고 흐린, 이상과도 같은 이미지와도 같다. 결코 닿은 적 없고 살아낸 적 없는 시간의 것, 그러면서도 향수를 자아내는, 희한한 성질의 것.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상상의 끝은 늘 비슷하다. 막상 그 때가 되어서는 지금 이 순간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것이라고, 그러나 세상과 삶의 열기에 숨이 벅찰 때는 어김없이 똑같은생각을 할 것이라고, 너무 오랜 시간을 탈진과 비슷한 상태로 살아왔다고.
p.19 젊었을 때는 누구나 그렇게 마음이 급하단다.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사랑 없이 잃어버리는 하루하루가 마음을 찢어놓지.
p.29 만약 그들이 자신의 젊음이 되살아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그들은 공포에 질리거나 제 젊은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 앞을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랑, 저 꿈, 저 불이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저렇게 낯선 것이?” 자신의 젊음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어떻게 남의 젊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한 다리 건너 친척, 두 다리 건너 사돈인 조용한 시골 마을. 이야기는 어느 노년기에 접어든 "나", 실비오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정적인, 그러나 끔찍하지는 않은 고독 속에 일상을 보내는 이. 한때는 자유와 방항을 꿈꿨으나 지금은 젊은 날의 이상이었다고, 반복되는 일상 속 식어가는 열기를 품고 고요히, 고요히 침잠하는 이. 이러나 저러나 좁디좁은 바닥인지라 굳이 척을 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가깝게 지내는 이라고는 사촌과 그의 남편, 더해봐야 그들의 딸 정도. 이따금 찾아오는 이들, 오래 알아 편안한 사람들,잠깐의 담소. 그정도면 충분하다.
p.34 "그렇긴 하지만, 무엇을 수확하게 될지 미리 안다면 누가 밭에 씨를 뿌리겠어요?”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실비오. 다들." 엘렌이 나를 지칭할 때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름으로 나를 부르며 말했다. "기쁨과 눈물, 그게 삶이잖아요. 모두가 살고 싶어 하죠. 당신만 빼놓고.”
p.49 금방 식어버리는 피의 뜨거움. 그 꿈과 욕망의 화염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늙어버렸고, 너무나 차갑게 식었고, 너무나 철이 들었다고 느꼈다.

변하는 것이라고는 철마다 바뀌는 풍경이나 일과 정도, 그마저도 매 해 반복되는 것이니 새로울 것도 없고 일상이려니, 늘 그랬듯이 권태에 가까운 마음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던가, 손바닥만한 마을에서. 그래, 그게 문제다. 손바닥만한 마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서로가 서로를 훤히 꿰고 있는 그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다. 아니 뭐, 살다가도 죽고 죽다가도 살고 하는 건 맞지만, 문제는 그 대상이 장, 엘렌의 딸 콜레트의 남편이라는 데 있다. 그렇게 금슬 좋던 부부가 젊은 나이에 사별이라니. 아니, 그것마저도 제법 담담히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이 나이에 기함할 일이 몇이나 된다고... 사건이 일어나던 그 밤의 찜찜한 광경은 차치하고라도, 구태여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 혼자 묻고 가면 되려니, 싶으면서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오래된 지혜와도 같은 위로와 함께 모두가 그럭저럭 일상으로 돌아가던 와중에 충격적인 목격담을 듣고야 만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날 밤, 각자의 자리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p.81 그랬다, 자신만만했다. 그것은 한 번도 나쁜 길에 빠져 방황해 본 적이 없는, 한 번도 헐떡이며 약속 장소로 달려가 본 적이 없는, 한 번도 죄스러운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발길을 멈춰본 적이 없는 여자의 걸음걸이였다.
p.103 “그렇게 열렬하게 예찬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단다. 우리가 극도로 분개하며 경멸해야 마땅한 사람도 없고...” “너무나 큰 애정으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도 없고요…”

짧은 분량, 더 짧은 제목이 무색하게 읽는 데 한참, 잊는 데는 더 한참 걸렸다. 결국 잊지 못해 재차 펼쳐들고 나서야 다른 책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2차대전기, "순수하지 못한 인종들"은 모조리 수용소로 끌려가 살해당하던 시기, 광풍에 휩쓸려 사라진 작가의 반토막으로 출판되었다 겨우 온전하게 출판된 작품, 이라는 생각에 조금 더 마음이 쓰였다면 너무 멀리 간 걸까.

뜨거운 피, 출간 예정 목록에서는 "불타는 피"였던가. 한참 곱씹어보고야 제목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화인처럼 찍힌 자리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뜨거운 피. 타오르는 피, 끓어오르는 피. 그리고, 식어버린 자리에 남는 재 같은 것.
터지기 직전의 긴장감, 모두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심 털어놓고 싶으면서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라고 여기는 무언가를 숨기는 좁디 좁은 마을. 무심하고 고요한 곳에서도 타오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리.
p.128 나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p.131 우린 이십 년 전에 죽었어. 우린 이제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p.151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마음, 사랑하고 절망하고 어떤 불로든 타오르길 갈망하는 마음이 문제다. 우리가 원했던 건 그것이었다. 타오르는 것, 우리 자신을 불사르는 것, 불이 숲을 집어삼키듯 우리의 나날을 집어삼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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