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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평점 :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좋아하는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개중 책 이야기를 할 때면 매번 떠올리는 문장들로 이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p.19)."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p.301).
개브리얼 제빈, 『섬에 있는 서점』, (문학동네).
책을 왜 읽느냐는 물음에 정보습득목적 외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마도 문학이 거의 유일할테다. 또한,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문학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명해내기 어려운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모든 존재는 그만의 서사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모든 존재의 삶이 곧 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듬고 벼려낸 글, 쉼표와 마침표로 이어지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문학이 필요한 시간들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그런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 때때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혹은 마치 내가 존재하지도 않던 때에 나를 위해 쓰여진 것만 느낌과 함께 어떤 문장을 떠올리게 될 때가 있다. 거꾸로 문장을 통해 삶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을 문학의 쓰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거창하다면, 문학이 삶의 적재적소에 잘 들어맞아있다, 정도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따금, 그러니까 주로 에세이나 시를 읽을 때면 (대개는 책날개 상단에 위치한) 저자 소개를 꼼꼼하게 읽을 때가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가만히 묻는 것처럼. 저자 정여울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상의 모든 곳에서 신이 깜빡 흘리고 간 아름다운 문장을 용케 발견하고 싶은 사람". 이 문장을 읽자마자 『일리아스』를 떠올렸다.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오래되었다는 그 서사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어쩌면 무형의 초월자, 또는 인외의 신적 존재를 믿는 이들에게 문학은 신이 흘리고 간, 삶이되 삶 바깥에 위치하는 무언가의 조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실 에세이를 자주 읽지 않게 되는 것은 수많은 타인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치이는 일상 속에서 내 이야기를 찾기에도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작고 가볍고 한 장 찍어 올리기에 좋은, 짧고 아름다운 문장들의 모음집같은 에세이(맞다. 다분히 가치판단적이다. 나도 안다.)가 범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따금, 아니 꽤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자극적인 쾌락으로 가득해지는데, 그런 세상에서 한 자리에 붙어 책을 읽는 건 매력적이지 못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독서는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결국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세상에서 홀로 침잠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간절하지만 그것은 점점 더 외롭고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야기를 찾는 사람은 자꾸만 파고들어가고 찾지 못한 사람은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고. 어렵고 낯설어서 더더욱.
저자 정여울은 말한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은, 이곳에서는 마음껏 울어도 괜찮은 시간, 이곳에서는 마음껏 세상을 향해 소리쳐도 되는 시간을 꿈꾸는 모든 이를 위한 시간입니다". 그러니 다시 인생을 시작하려는 마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내가 꿈꾸던 어른은 어디로 갔을까, 내 안의 외계어를 지키는 일, 잃어버린 모모의 시간을 따라서. 총 다섯 장으로 나누어 각각의 작품들을 통해 풀어내는 저자 자신, 어쩌면 수많은 독자들의 이야기가 깊숙하게 와닿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의 책으로 다른 책, 영화, 노랫말까지 확장해가며 저자의 삶을 따라가는 여행이 『네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논제로섬과 서로를 세계를 이해하는 매개가 되는 언어를 이야기하고, 『행복한 왕자』를 통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자비를, 『손톱』을 통해 고통스러운 이의 곁에 나란할 때, 그의 곁에 머물고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을, 『모모』를 통해 무용과 유용, 근검절약과 태만의 구분과 선악의 권장이 아닌 삶의 모든 순간을 찬란하게 빛내는 소통과 애정,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p.236 "모든 순간이 찬란한 의미로 넘쳐흐르기에, 한순간도 쓸모없지 않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모는 무엇도 '쓸데없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기에 그 모든 존재에 깃든 찰나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들이마신다. 모모의 시간은 어떤 시간의 의미도 놓치지 않은 채 남김없이 불태워짐으로써 오히려 아름다워진다."
누군가 나에게 책을, 그 중에서도 문학 작품을 왜 읽느냐고, 결국 남의 이야기일 뿐인데(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왜 그렇게 울고 웃느냐 묻는다면 당신이 말한 것이 곧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다는 아니겠지만. 어떤 시대, 어떤 인물, 어떤 주제와 내용을 다루든 문학은 곧 삶의 이야기이다. 짧은 시간 특정한 존재하고 긴 시간을 자연의 일부로 흩어져 부재의 공간을 남기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결국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나와 남을 이해하는 일이, 작가의 세계를 공유하는 경험이 더없이 소중하고 즐겁기 때문이지 않을까. 결국 문학을 읽는 마음이라는 것은 혼자이되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과도 같다.
작품은 창작과 동시에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문학은 누구의 것일까. 필경 누군가의 상상 혹은 시간의 기록일 그 문장들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상처가 두렵고 실망이 버거워 오늘도 책장 혹은 활자 앞에서 머뭇거릴 이들에게 저자의 말을 빌어 전한다.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이는 순간 오히려 환하게 떠오르는 생의 진실이 있다".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당신이 읽고 생각한 시간과 함께한 그 모든 문장들은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니 그렇게 오늘도 오늘의 책으로, 오늘의 문학이 열어젖히는 세계로 기꺼이 뛰어들라고.
p.94 "지상의 모든 곳에서 눈부신 문장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누구도 나의 힘, 즉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의지'를 빼앗지 못하도록, 책 한 권 없는 빈털터리가 될지라도 내 마음속에서만은 내가 읽은 모든 팩의 페이지가 숨 가쁘게 넘어갈 것이다. 어떤 권력도 우리의 소중한 권리, 문학의 아름다움을 느낄 권리를 빼앗지 못하도록,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 뜨거운 심장을 잃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