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 - 페미니스트 교사 마중물 샘의 회복 일지 점선면 시리즈 1
최현희 지음 / 위고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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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위고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읽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던 책이다. 으레 책을 두고 하는 고민이란 대부분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 정도일 터이나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에세이에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글을,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쓴 모든 문장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나는. 알량한 위안거리로 삼아버리면 어쩌지, 따위의 고민으로 인해 이 책은 침대맡 책탑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을 제법 오래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용기가 필요했다. 비겁한 사람이라 타인의 시간에서 용기를 얻어야했다.
양육자도, 교육자도 아닌 나의 좁다란 세계에 들어온 "마중물샘"이라는 이름(성함...?)이 들어온 건, 아마도 좋은 일은 아니었을 테다. 마중물샘의 블로그를 몇 번 보다 아주 정해놓고 찾아들어가면서도 그렇구나, 하고 넘겼던 때가 수두룩했으니. 그렇게 무관심했다. 어린이와 생활을 함께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마중물샘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이것은 부끄러운 나를 참회하는 데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제목에서처럼 "다시 내가 되는 길"의 일부일 뿐이다.
216
통증의 실제 느낌이 어떤지를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가? 언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잠잠해진 뒤에야 찾아온다.

'세상'이란 이름 아래 사람은 너무도 쉽게 말한다. '당장은 어떻게 못 한다', '이만하면 전보다는 낫다', '너의 피해의식일 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화를 낸 건 심했다' 등등. 침묵하라, 가해에 동조하라, 너의 피해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라. 기울어진 운동장, 평등하지 못한 세상, 위협적이고 부당한 세상에서 '내가 되는 나'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는 출간 때 그렇게 기뻐하며 읽어놓고도 말을 아꼈던 책이다. 아마 그 즈음의 나는 사람이라기보단 사람 형상의 넝마 정도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삶이, 내 시간이, 내 길이 버거워 휘청거리는 마당에 남의 마음까지 소화할 수는 없다고, 방구석에서 눈물콧물 짜며 읽어놓고도 피해버린 데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늦게나마 변명해본다. 다시 말하자면 나름의 사정이 변명이 될 정도로 소중하고 눈부신 기록을 엮어낸 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102
성차별과 편견에서 자유롭게 자란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법과 제도의 평등이 편견과 차별 없는 사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원래 그렇다'는 것들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고 다시 보고 질문해야 보인다. 그래야 바뀐다. 아주 느리게 하나씩 하나씩.
225
연약해 부서지더라도 그걸 버티는 과정과 재건의 시간을 거치는 순간들의 나는 약하지 않다. 버티다 보면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오늘 같은 변화가 온다. 그리고 알 수 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그런 신비로운 비밀에 대해서. 연약하지만 약하지는 않은 세상의 많은 이들과 연결될 수 있다.

자주 했던 말처럼, 인간은 섬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위로가 위로를, 이해가 이해를, 변화가 변화를 부르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마중물샘의 오랜 회복일지, "다시 내가 되는 길"에 동행할 모두에게 행복하고 나른하고 깔깔 웃다가도 싫은 건 툭 털어버리는 하루가, 누구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도 안전하고 편안한 일상이 당연한 것이기를 바란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숨을 쉬고 또 하루를 시작해 힘든 날엔 화도 내고 소리도 좀 지르고, 아 할 일 있었지-하는 와중에 아니 어느새 또 트위터를!의 순간도 좀 갖고 말이다(그래, 수제트윗 좀 써주시라. 이왕이면 나 심심할 때). 그렇게 스스로가 되는 길의 길목마다, 언젠가의 끝에 쉬어갈 자리가 있기를 바란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서로에게 동행자, 쉼터, 눈부신 나날이기를.
277
내 안에는 남에게서 받은 위로들이 많이 쌓여 있다. 위로는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흐르게 되어 있으므로 나에게는 남을 위로하기 위한 엄청난 자원이 있는 셈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 힘든 삶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잘 버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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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원고 두 번째 원고
함윤이 외 지음 / 사계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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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사계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신춘문예 등단 이후 두 번째 작품"에 독자는, 평론가는, 문단은 무엇을 기대할까. 혹자는 등단 이후 "인정받은 작가"로서의 첫 행보에 설렐 것이고, 혹자는 그래봐야 풋내기 아니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애송이, 신인, 짧은 경력.
기실 문학 또한 사람의 일이니 확신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만은, 이 얇은 책 한 권 전체가 무엇하나 안일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는 글들로 가득 차있다. 작품 하나, 문장 하나까지도 매섭다. "신참"이라는 말에는 그저 적응하지 못한, 물정 모르는,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따위의 의미가 깔려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닳아 순해지지 않은 시선이 가장 날카롭고, 갓 터져오른 화산이 가장 폭발적인 법 아니겠는가.
p.58 저는 그에게 시스템의 논리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이자, 스승의 책무니까요. 더구나 문학이란 인간됨을 가르치는 학문 아닙니까. 그는 한갓 기예로써 문학을 다루려 했지만요. 문학을 통해 길러내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p.70 그가 언급하는 시인들은 저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검증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저는 명성과 실력이 아직 여물지 않은 그들까진 신경 쓸 시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문단의 온갖 추문들을 끌고 와서 피곤하기만 한 논쟁을 벌이려 할 때에도 저는 그에게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쏟다간 온화한 시심만 흐트러진다'며 꾸짖기도 했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대장장이는 쇠를 두드려 무언가를 만든다. 그렇다면 작가의 일은 무엇인가.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는 무엇을 하는 일인가.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인가? 글만 쓴다면 모두가 작가인가. 작가와 문학의 자격을 논하려면 석달열흘로도 모자라지 않겠는가. 그러니 단 한 마디로, 작가는 익숙함을 낯선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낯선 시간과 공간, 때로는 상황에서, 인간의 감각은 평소의 것 이상으로 날카로워진다. 아이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새롭고 또 생생하며, 낯선 시공이나 익숙함 속의 낯선 상황에 놓인 이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을 포함한 것을 의식 밖으로 밀어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개인은 적응을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다시금 주의의 대상으로 끌어오지 않는 한 그것들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배경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파격적"이니 "문단의 충격"이니 상투어가 되어버린 그 익숙한 말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 그대로의 파격과 충격은 신인 또는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만 보낼 수 있는, 어쩌면 최대의 찬사가 아니겠는가.
p.40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산에서 내려오니 너무 많은 게 변해 있었다. 그는 늙었고 산 아래 사람들은 미숙해졌다. 뒷덜미가 다시금 서늘해졌다.
p.106 어느 순간부터 윤 여사는 다른 인간의 먹고 잠자고 입는 방식에까지 참견하게 됐다. 대부분 비슷하게 먹고 잠자고 입었으나, 가끔은 다르게 먹고 잠자고 입는 존재도 있었다. 윤 여사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다르게 먹고 잠자고 입으려 하는 인경이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따금 이런 말을 한다. 너만 상대를 비웃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따져보면 당연한 게 아닌가. 조롱하고 낮잡아보는 속내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더 드물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것이 "세간의 인식"으로 포장될 때는 더더욱. 우리가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는 얼마나 고고하고 또 추악한가.
그리하여 닿지 않을 사과, 돌려주지 못할 말과 마음에 대해 곱씹어보고 한다. 들을 이와 의지가 부재하는 사죄와, 반성은 얼마나 참담하고 또 절망스러운가.
p.162 레이를 다시 본 건 병철이 고령 운전자가 어쩌고 했던 뉴스까지 싸잡아서 신나게 뇌까리던 도중이었다. (…) 저 차에 환자가 타고 있거나, 어쩌면 저렇게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부름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한 소리를 했다 싶었다. 병철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멋대로 지껄였던 얘기들에 대해서는, 거기서 오는 죄악감에서는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에게라도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p.200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정말 가져갈 생각이 없다면, 받아 들지 않는다면, 그걸 어떻게 제게 주시겠습니까? 제가 받지 않을 건데." (…) 눈밭에 피를 조금 튀기면 저 검정 패딩과 왠지 어제보다 홀쭉해진 가방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주둥이를 벌리고 썩지 않은 치아를 뽑아서 차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져가지 않겠다는 검은 봉지를 사마귀의 손에 돌려줄 방법 은 없었다.

이 책을 읽을 독자가 (아니라면 더 좋겠지만) 한줌의 우월감이라도 품고 있다면 이왕 하는 것 한껏 오만하기를 바란다. 아주 높이, 지극히 고고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작품 속 주인공에서, 작가 후기의 "세상"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란다. 내가 그러했듯이, 어쩌면 뜨거운 애정과 서릿발같은 비판이 뒤엉킨 문장들을 세상에 내놓았던 수많은 신인이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나란한 곳에 놓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말할 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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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발명된 신화 -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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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묻고 싶다. 내가 속한 집단의 역사이되, 내가 겪지 않았던 시대의 것을 평가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살고있는 지금,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되 내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 앞선 물음에 바로 내가 그렇다고 손을 들지는 않아도 이미 한두마디씩 말을 얹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나, 막상 말해보라, 어느 누가 그럴 수 있는가, 질문을 받으면 어물거릴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전에도 존재했고, 아마 아주 오래된 이름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창조물인 그것, 유대인, 유대민족, 유대인종. 이 책은 그들의 통사도, 옹호도, 비난도 아닌 그저 이해해보려는 노력일 뿐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의 한계와도 같이. 책에서 말하듯 "이 책이 겨루려는 대상은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얽힌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놓고 극단적 편향으로 양분된 일반인들의 인식이다. 한쪽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선', 다른 한쪽은 '악'으로 바라본다. 유대인, 이스라엘과 역사적으로 직접적 관련성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인들이 특히 그렇다(p.6)."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의 텍스트나 유대민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한국 보수 개신교단, 한국 도서시장에서 유대인은 일종의 롤모델에 가깝다. 선택받은 민족, 신의 역사를 드러낼 증거물, 성공가도를 달리게 해줄 교육문화와 자본이라는 장점이 마음에 꼭 들기 때문일까. 그러나 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유대인은 그다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작정 내보내기에는 정착해온 시간이 있지 않은가.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선인가, 악인가?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극단적인 편향 인식을 교정하는 첫걸음은, 유대인은 역사가 만들어낸 산물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타고난 능력의 선민이나 음모 집단이 아니다. 유대인의 고난과 성취는 역사적 환경이 만들어냈다(p.7)."

과제용 독후감을 쓰듯 내용을 요약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한국의 역사, 한 페이지로 요약하시오.'에 대한 솔직한 답이 '되겠는가?' 내지는 '얻어맞고 쥐어터지다 힘이 있을 땐 두들겨패러 쳐들어가고 꽤나 자주, 오래 숨죽여 살았다'에 대한 수사에 불과하듯이.
이 책은 성서고고학의 시작부터 성서와 이스라엘의 기원, 디아스포라의 신화에 대한 비판을 거쳐 유대 공동체와 유대인 정체성, 그들이 사회에서 나름의 지위를 차지했던 역사와 근대 이후 유대인 음모론과 반유대주의, 서구 각국의유대 공동체와 시오니즘, 이스라엘 건국과 이후 현대까지의 분쟁을 다룬다. 이 중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만 톺아보려 해도 이만한 분량의 책 서너권은 너끈히 필요할 것이다.
대신 오래 고민해왔고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남기려 한다. '왜 인간을 이다지도 끊임없이, 오랜 시간,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또 집요하게 타 집단을 증오하고 가해하는가?' 우리는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의 선봉, 인간 문명의 최전선을 자부하던 동서 거대 문화권이 증오와 박해, 내분과 충돌로 붕괴하는 것을 보았다. 그 과정에서 이질적인 집단, 공공의 적을 만들어내는 일은 필수 절차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나라에 대봐도 조선만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낀 신세'로 쥐어터진 역사가 많지 않다. 적어도 양란기부터 한국전쟁 종전 후까지는 그렇다. 이런 '선량한 피해자의 아픈 역사'를 주입받고 자란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도 유대인의 역사는 반 이상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교에서 바울 기독교가 분화되고 그것이 주류 종교로 자리잡은 이후의 역사가 그렇다. 이래서 몰리고 저래서 떼죽음에 차별과 배제가 그들 자신을 규정하고 결집시키는 정체성이 된 데에는 어디에서도 이방인이 아닐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반유대주의자와 유대인』 에서 말했다. "만약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유대주의자가 유대인을 고안해낼 것이다. 유대인은 반유대주의가 만든다(p.15)." 오늘날 중동분쟁,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를 멸절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극우파 또는 반유대주의자에게 묻겠다. 그들이 먼저 존재했는가? 그들에게 속했다고 여겨지는 불변의 공통점은 누가 어떻게 규정하고 유지하는 것인가?
그런 그들이 새로운 가해자가 되어 박해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대부분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을 이들이 허구와 진실을 넘나드는 기록의 폭력과 증오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심지어 그간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면서 당장의 폭력적 충돌과 가해를 멈추려는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고 있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악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현재에 대한 저자의 분석으로 처참한 심정을 대신한다. "인종주의 광기 때문에 집단수용소에서 죽어간 이들의 피와 뼈로 세운 이스라엘은 인종주의 범죄 경력이 있는 인물이 치안장관이 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역사는 잔인한 역설이다(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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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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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좋아하는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개중 책 이야기를 할 때면 매번 떠올리는 문장들로 이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p.19)."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p.301).
개브리얼 제빈, 『섬에 있는 서점』, (문학동네).

책을 왜 읽느냐는 물음에 정보습득목적 외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마도 문학이 거의 유일할테다. 또한,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문학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명해내기 어려운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모든 존재는 그만의 서사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모든 존재의 삶이 곧 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듬고 벼려낸 글, 쉼표와 마침표로 이어지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문학이 필요한 시간들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그런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 때때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혹은 마치 내가 존재하지도 않던 때에 나를 위해 쓰여진 것만 느낌과 함께 어떤 문장을 떠올리게 될 때가 있다. 거꾸로 문장을 통해 삶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을 문학의 쓰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거창하다면, 문학이 삶의 적재적소에 잘 들어맞아있다, 정도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따금, 그러니까 주로 에세이나 시를 읽을 때면 (대개는 책날개 상단에 위치한) 저자 소개를 꼼꼼하게 읽을 때가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가만히 묻는 것처럼. 저자 정여울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상의 모든 곳에서 신이 깜빡 흘리고 간 아름다운 문장을 용케 발견하고 싶은 사람". 이 문장을 읽자마자 『일리아스』를 떠올렸다.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오래되었다는 그 서사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어쩌면 무형의 초월자, 또는 인외의 신적 존재를 믿는 이들에게 문학은 신이 흘리고 간, 삶이되 삶 바깥에 위치하는 무언가의 조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실 에세이를 자주 읽지 않게 되는 것은 수많은 타인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치이는 일상 속에서 내 이야기를 찾기에도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작고 가볍고 한 장 찍어 올리기에 좋은, 짧고 아름다운 문장들의 모음집같은 에세이(맞다. 다분히 가치판단적이다. 나도 안다.)가 범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따금, 아니 꽤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자극적인 쾌락으로 가득해지는데, 그런 세상에서 한 자리에 붙어 책을 읽는 건 매력적이지 못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독서는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결국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세상에서 홀로 침잠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간절하지만 그것은 점점 더 외롭고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야기를 찾는 사람은 자꾸만 파고들어가고 찾지 못한 사람은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고. 어렵고 낯설어서 더더욱.

저자 정여울은 말한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은, 이곳에서는 마음껏 울어도 괜찮은 시간, 이곳에서는 마음껏 세상을 향해 소리쳐도 되는 시간을 꿈꾸는 모든 이를 위한 시간입니다". 그러니 다시 인생을 시작하려는 마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내가 꿈꾸던 어른은 어디로 갔을까, 내 안의 외계어를 지키는 일, 잃어버린 모모의 시간을 따라서. 총 다섯 장으로 나누어 각각의 작품들을 통해 풀어내는 저자 자신, 어쩌면 수많은 독자들의 이야기가 깊숙하게 와닿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의 책으로 다른 책, 영화, 노랫말까지 확장해가며 저자의 삶을 따라가는 여행이 『네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논제로섬과 서로를 세계를 이해하는 매개가 되는 언어를 이야기하고, 『행복한 왕자』를 통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자비를, 『손톱』을 통해 고통스러운 이의 곁에 나란할 때, 그의 곁에 머물고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을, 『모모』를 통해 무용과 유용, 근검절약과 태만의 구분과 선악의 권장이 아닌 삶의 모든 순간을 찬란하게 빛내는 소통과 애정,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p.236 "모든 순간이 찬란한 의미로 넘쳐흐르기에, 한순간도 쓸모없지 않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모는 무엇도 '쓸데없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기에 그 모든 존재에 깃든 찰나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들이마신다. 모모의 시간은 어떤 시간의 의미도 놓치지 않은 채 남김없이 불태워짐으로써 오히려 아름다워진다."

누군가 나에게 책을, 그 중에서도 문학 작품을 왜 읽느냐고, 결국 남의 이야기일 뿐인데(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왜 그렇게 울고 웃느냐 묻는다면 당신이 말한 것이 곧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다는 아니겠지만. 어떤 시대, 어떤 인물, 어떤 주제와 내용을 다루든 문학은 곧 삶의 이야기이다. 짧은 시간 특정한 존재하고 긴 시간을 자연의 일부로 흩어져 부재의 공간을 남기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결국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나와 남을 이해하는 일이, 작가의 세계를 공유하는 경험이 더없이 소중하고 즐겁기 때문이지 않을까. 결국 문학을 읽는 마음이라는 것은 혼자이되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과도 같다.
작품은 창작과 동시에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문학은 누구의 것일까. 필경 누군가의 상상 혹은 시간의 기록일 그 문장들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상처가 두렵고 실망이 버거워 오늘도 책장 혹은 활자 앞에서 머뭇거릴 이들에게 저자의 말을 빌어 전한다.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이는 순간 오히려 환하게 떠오르는 생의 진실이 있다".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당신이 읽고 생각한 시간과 함께한 그 모든 문장들은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니 그렇게 오늘도 오늘의 책으로, 오늘의 문학이 열어젖히는 세계로 기꺼이 뛰어들라고.

p.94 "지상의 모든 곳에서 눈부신 문장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누구도 나의 힘, 즉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의지'를 빼앗지 못하도록, 책 한 권 없는 빈털터리가 될지라도 내 마음속에서만은 내가 읽은 모든 팩의 페이지가 숨 가쁘게 넘어갈 것이다. 어떤 권력도 우리의 소중한 권리, 문학의 아름다움을 느낄 권리를 빼앗지 못하도록,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 뜨거운 심장을 잃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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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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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러니까, 그러므로, 그래서 따위로 말을 시작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뒤에는 으레 어쩌면, 주저하는 마음이 따라붙기 십상이고. 결국 두려움 반 자진 반 하는 마음으로 나는, 우리는... 다소 유치하고 초라한 고백으로 말꼬리를 흐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퉁이로, 옷자락 뒤로 숨어버리는 마음이 그러하듯이.
장희원의 소설집 『우리의 환대』 다른 언제도 아닌 이 계절에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찬 바람이 스치는 벽에 햇살로 새겨지는 그림자는 닿을 수 없는 것의 부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어쩌면, '부재의 현존을 드러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의 자리에는 그림자 외에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사실은 조금 차갑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평소와는 다르게 목차를 먼저 읽었다. "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 표제작인 "우리의 환대", "작별'과 "기원과 기도"를 지나 "우리가 떠난 자리에"로 맺는 글들.
각각의 수록작들은 결핍과 부재, 이별로 이어진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없는 것, 비워진 것, 떠나간 것들로 채워지는 관계라니. 잠들지 못하는 밤에 몇번이고 중얼거리고 뒤척여본 지금은 안다. 그것 또한 지극한 사랑이고, 우리(畜舍)와 우리의 환대가 될 수 있음을.
언젠가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하늘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인적 드문 도로에 가만히 누워본 적이 있다(그 날 본 하늘이 정말 마지막이 될 뻔 했다는 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까 싶긴 하지만). 꼭 쏟아져내리는 것 같아서. 온 시야를 채우는 하늘이 서럽고 또 다정해서 언제까지고 이대로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이후로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 무너지고 또 바뀌었다. 그날 비워진 것은 새로 채워지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갓 파헤쳐진 흙내를 풍긴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p.87
"왜 저런 걸 받았니?"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기는 그를 빤히 보았다. 정호는 더 참지 못했던 것을 후 회하며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어쩔 수 없었어, 형.” 정기가 말했다.
“저걸 받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어. 도저히 앞으로 갈 수 없었다구."
정기는 아무런 높낮이 없이 차분히 말했다.

작가 장희원이 닿고자 하는 세상이 환대, 그러니까, 다가감의 이야기, 하나가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어쩌면 표지의 사진처럼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단절 혹은 상실을 그려내야만 했던, 그런 필요의 세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우리 모두 다들 한구석이 무너져내린 채로, 그것을 알지 못한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춥다. 적응할 틈이라고는 조금도 주지 않고 몰아친 추위에 몇십년을 겪었던 지난 계절의 느낌이 벌써 가물가물하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든 자리니 난 자리니 거창하게 하지 않아도 사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허전함이라는 것은 불현듯 파도처럼 밀려와 자 여기가, 하며 누군가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가. 이것을 쓸쓸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젠가 보았던 '물의 뼈'라는 말을 두고두고 생각한다. 햇살이 지나온 흔적을 드러내는 것.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의 부재를 드러내는 자욱. 그림자와 같은 것이 아닐지.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빈 자리를 빈 채로 두는, 흔적을 흔적으로 둘 수 있는 마음이 용기와 다정함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다.

한 해의 끝에서 우리(畜舍)와 우리를 생각한다. 그 모호한 테를 덧그리는 마음으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하늘의 느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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