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때때로 목적에 충실한 작품은 독자를 도망치게 한다. 그것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차마 눈 뜨고 못 볼 추악한 꼴일수록 더더욱.

생각해보자. 유명 가수가 청소년을 꾀어 감금, 폭행하고 몰래 찍은 영상물을 갖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상습범인데다 이전 피해자를 협박해 피해사실을 증언하지 못하도록 한 전과까지 있단다. 그의 배우자와 팬들은 모든 것을 부인하며 여론에 호소한다. 진실을 밝히겠다고. 유명인이 관련된 일이니 당연히 화제가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사실 그 애도 즐겼다던데", "보나마나 돈 노리고 접근했다 틀어졌겠지", "걔도 알 건 다 아는 나이 아니야?". 이내 화제는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비슷한 기사가 쏟아져나오고, 대중은 지겨워한다. "이번엔 또 누군데?" 한동안 금기시되던 노래가 다시 들린다. "그래도 노래는 좋잖아.", "난 몰랐는데?", "둘 다 잘못했겠지, 난 중립이야".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서 "반전! 추악한 진실!"을 운운하며 조회수를 노리는 영상이 복제되고 또 확산된다.

법정 공방의 과정은 지난하고 많은 경우 가해자의 경제적, 사회적 권력은 피해자의 그것을 수십배 뛰어넘는다. 여기까지 간 상황에서 판결은 더이상 관심을 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몇 주간 맴돌다 다른 "충격 속보!"들에 밀려나버린다. 피해자의 이름과 삶은 조각조각 뜯겨 팔려나간 반면에 가해자의 신상은 철저한 모자이크와 가명으로 감춰진다. 언젠가 슬그머니 돌아올 길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그 탄탄대로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도알지 못한다.
p.280 삶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무척 비슷하다.
p.389 "얘야, 난 안 아프단다. 그게 문제야. 내 눈은 아주 또렷해.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눈앞에 있는 걸 못 보지.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단다."


쉽게 그려볼 수 있다. 실제 사례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수도없이 반복된 일이다. 남의 일은 언제나 쉽다. 중립, 양 쪽 다, 그 말에 얼마나 무거운 책임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극히 드물게 안전하게 성사되는 사례는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수많은 범죄를 가린다. 결국 남는 것은 보호를 가장한 배제와 범죄의 양극단일 뿐이고,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의 삶은 열정적인 구호 또는 조롱에 밀려 지워진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속한 현대 집단의 성원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 아동, 청소년 또한 그러하다. 이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네가 결정했잖아", "누가 협박이라도 했나", "다 알고 동의한 거 아니냐". 끔찍하게 이기적이고 추악하다. 성인간의 계약 과정에서도 기만이나 사기가 있었다면 그것을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제 눈도 모자라 남의 눈까지 가리는 기만은 유독 피해자가 약자일 때만 지고의 진리처럼 떠받들어진다. 이쯤 되면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니라 찌르고도 남았다고 해야한다.
p.142 "챈트... 이러면 안 돼. 그 사람은 다 큰 성인이야. 어린 여자애가 다니는 학교에 불쑥 나타나면 안 된다고." "야! 나 어린애 아냐. 6개월 뒤면 열여덟 살이라고."
p.284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아주 조금도 없어. 다 큰 어른의 행동을 아이가 책임져서는 안되는 거야."


모든 아동, 청소년이 성인의 보호 하에 있지는 않다. 모든 가정이 완벽하게 안전하고 행복하지는 않다. 상대적이거나 절대적인 연령이 도덕적 무결 또는 무류를 보증하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절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집단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더 취약한 자를 더 위협적인 것들에게서 보호하고 최소한의 윤리를 지켜내는 규범적 선이 정해지지 않았는가.

앞서 말했듯 나이는 절대적 선의 증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부당한 출발점의 증거가 될 수는 있다. 너랑 쟤랑 싸웠지만 둘 다 잘못했으니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자-선에서 끝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강자가 자신의 권력으로 약자를 착취하는 일이, 이 책의 주제인 그루밍 범죄가 그러하다. 피해자의 삶은 피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이도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선이 있다. 이를 부정하는 일은 곧 가해가 된다. 내가 뭘 어쨌길래 가해자냐고 펄펄 뛰는 분들은 그간의 행적을 돌아보세요. 그래도 납득이 안 되시는 분은 손 들어보세요. 그대로 니 뺨을 쳐.
p.332 "여자애들이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잘 안다고 생각할 순 있죠. 하지만 그 사람은 성인이에요. 우리 애보다 더 현명했어야죠."
p.335 "(…) 우리 모두 성인이에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우리가 과거에 어떤 규칙을 어겼는지는 제 관심사가 아니에요. 지금은 우리가 더 성숙해야죠."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다면, 실낱같은 가능성을 믿고 또다시 소리높여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연대의 가능성일 것이다. 우리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이에게, 그의 피해에 연대할 수 있다. 겪은 적 없는, 혹은 너무나도 잘 아는 고통에 공감하고 내 것처럼 분노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 가해자에게 갱생의 가능성이 있다면, 피해자에게는 일상을 회복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들을 둘러싼 사회 성원에게는 피해자에게 연대하고 정의로울 의무가 있다. 발벗고 뛰쳐나가지는 않을지언정 최소한 방관하거나 침묵하지 않을 책무가 있다. 작가가 반복해서 말하듯, 우리는 그래야 한다.

저자가 그려내는, 아니 옮겨담은 현실에는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가해자와 수많은 동조자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지지하는 또다른 피해자들과 주변인들이 있다. 그가 당연하게 돌아올 자리와 삶을 버리지 않을 이유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것을 사회 전체가 마땅히 해야했던 일이라고 부른다.
부디 이 책이 자극적이고 익숙한 홍보 문구로 팔려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치밀어오르는 역겨움에 인상을 찌푸릴지언정 허구의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기를 바란다. 혹시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를 떨쳐낼 수 없는 이가 있다면, 대체 어느 부분이 어떻게 "그건 좀" 인지, 양측이 무엇을 걸고 있는지를 따져보기를 바란다. "순결한 피해자의 절박한 호소"가 왜 의무인 것처럼 여겨지는지도.
세상에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 범죄 피해를 부끄러워해야하는 사람은 없다. 이 책이 고발에, 또 이상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p.429 "당신들한테 진실을 전하는 데 여자 열여섯 명이 필요했어요. 게다가 인챈티드는 당신네 멍청이들이 틀렸다는 걸 입증하느라 자기 인생을 걸어야 했다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