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vs 보부아르 세창프레너미 11
변광배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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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서는 남에게 소개하기 쉽지 않다. 그것도 '이러니까 저렇게 해라' 식의 자기계발서의 형식이 아닌, 정말로 철학자 혹은 어떤 학문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내용이라면 더더욱. 혼자 보고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두는 요약집이 아니라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어떤 이의 치열한 사유를 따라가며 느꼈던 감동을 풀어두는 일은 정말,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즐거움이 아닌, 어떻게든 함께 읽고 생각해볼 기회를 만들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역시 애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창의 프레너미 시리즈는 종종 이야기했던 것도 같은데... 각 원저의 입문 역할을 하는 명저산책 시리즈에 비해 사전 지식이 있는 독자에게 적합하다. 저자별로 다르겠지만 어느정도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있으나 친우 혹은 지우이자 대립각을 세웠던 라이벌로서의 프레너미인 두 학자(때로는 그들의 학파까지도)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서술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본적인 흐름이나 큰 줄기가 되는 사건들은 알고 읽는 편이 이롭다. 싫다면? 어쩌겠어요. 맨 땅에 헤딩 한 번 하고 시작하는거지, 뭐.

엘리트 사회인 고등사범학교의 콧대 높은 3인방이었던 사르트르, 항상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이 꼭 비버(Beauvoir와 Beaver의 발음이 유사함)같다며 Castor(불어로 '비버'를 뜻함)라는 별명이 붙었던 보부아르. 그들은 1929년 이후 서로를 "지적으로 훌륭한 훈련 파트너", "완벽한 대화 상대자"로 여기며 사랑을 꽃피우다 사르트르의 입대를 계기로 계약 결혼을 시작한다. 그들은 생애 내내 유지한 호칭에서 알 수 있듯 존중에 기반하는 관계였다.
p.43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처음 만나면서부터, 또 그 이후에도 여전히 서로에게 '당신(vous)'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했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은 존칭형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서로를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고자 했다.

사랑의 관계를 일방적 희생이 아닌 나의 잉여 존재로부터 벗어고자 하는 정당화의 시도인 동시에 타자의 잉여존재 역시 정당화하는, 서로의 주체성을 유지한 채 '우리-주체'의 형상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여긴 사르트르에게 이 계약결혼은 평생에 걸친 사랑의 실험과도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쌍방이 주체성의 상태에 머무는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여러차례 파경의 위기를 맞았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었으나 기어코 반세기 이상 관계를 지켜냈다. 그들에게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사상, 학문, 일생의 동지.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관습에 저항하고자 했던 노력이었을까.
p.87 사르트르의 사유 체계 내에서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는 존재관계에서 한 인간의 주체성과 다른 인간의 주체성의 결합을 전제로 하는 사랑과 언어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1929년 계약결혼을 맺으면서 설정했던 목표는 바로 이처럼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랑과 언어를 실패로 끝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반세기를 자신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사실에 대해 끝없이 도전을 감행했다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그 자신들의 학문적 위업뿐만 아니라 세기의 이슈가 되었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라는 사상 기반을 공유하면서 각자의 길을 개척하고 또 목소리를 내기를, 혼란한 시대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두 참여자들의 사랑. 둘 간의 연대, 같지만 다른 길을 가며 주고받았던 영향과 작품세계를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은 지난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최악이자 최대의 규모로 다시금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체험했던 세대에 속한다. 실제로 그들의 현실참여적 면모는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진성을 띄기도 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 절대성 혹은 본성의 선함에 기댈 수 없는 존재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들은 그저 대상의 의미를 고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투의 존재인 인간이 그 자신과 타인에 대해 지는 책무, 객체로서만 존재했던 여성의 존재 의미, 그들의 작품에서 나타난 현실의 수치심 등을 표현하고 그를 통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p.107 아울러 이런 '대자-즉자'의 융합이 바로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후의 목표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이 대자이면서 동시에 즉자인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지향성을 발휘하고 있는 대자가 사물의 존재 방식인 즉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살아 있는 생명체와 동시에 주검일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인간은 ”무용한 열정“이라는 결론에 함축된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보부아르는 『노년』을 통해 이렇게 묻는다.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이 작품은 노인을 중심으로 논하지만, 나는 보부아르가, 그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사르트르 또한, 이렇게 묻고싶어했다고 믿는다.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취약해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되는가?"
p.303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할 것이다.
(…)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을 완전히 다시 만들어내야 하고,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이 말년을 빈손으로 고독하게 맞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화가 일단 형성된 후에 곧바로 잊어버리는 무기력한 지식이 아니라면 (…) 인간은 모든 나이에서 능동적이고 유용한 시민일 것이다. 만일 인간이 어린 시절부터 (…) 자기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본질적이고 집단적인 삶에 참여한다면, 그는 결코 유배를 겪지 않을 것이다.

여담으로, 사르트르에 큰 애정을 지닌 저자께는 죄송하지만 읽는 내내 이놈의 사르트르!!하고 한 대만 쥐어박고 싶었어요... 사실 세 대쯤... 아니 솔직히, 나만 그래? 아닐걸요? 이거 보고 누구 하나쯤은 몰래 두 대 쥐어박고 갈걸요?
p.54 또한 인간들 사이에는 정말로 말하기 부담스러운 내용도 있기 마련이다. 가령, 사르트르는 자신이 다른 여자들과 맺었던 관계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까지 보부아르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보부아르는 그런 얘기를 사르트르에게 하지 못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말한다는 계약조건은 남자인 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그녀는 이 조건을 남자에게만 유리한 '알리바이'였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이 조건이 지켜지지 못했음을 실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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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정치 - 안티페미니즘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나
신경아 지음 / 동녘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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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동녘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상에 대한 명백한 또는 암묵적인 반대"를 의미한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여성운동의 특정 이슈나 의제, 성과를 둘러싸고 일시적이거나 비교적 단기간에 격렬하게 진행되는 형태인 '일시적 반격으로서의 백래시'이며, 둘쨰로는 특별한 계기 없이 여성 정치인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개인적인 괴롭힘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상적ㆍ지속적 공격으로 나타나는 백래시'이다. 이를 통해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가부장적 질서와 성별 불평등 체계를 기본적인 구조로 살고 있으며, 여기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차별과 억압을 정당한 규범으로 유지해가려는 힘"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조막만한 한반도 땅에서 소위 '모던걸'의 등장 이래로 자유롭고 안전할 권리, 동등한 사회적 주체로 살아갈 권리를 외치는 여성에 대한 공격은 중단된 적도, 그 기세가 약해진 적도 없다. 때와 장소에 따라 모습과 범위를 달리해가며 지치지도 않고 끌어내리려 애쓰는 이들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백래시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는 여성이 존재한 이래로 사라진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 성취를 보이는 곳에는 언제나 백래시가 존재했다.
p.28 백래시는 정확하든 아니든 여성들이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는 지각에 의해 촉발된다. 페미니스트의 성취에 직면한 이들이 그에 맞서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재강화하려는 태도나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백래시는 권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분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토대로 한다. 누가 권력을 갖거나 갖지 말아야 할지, 가질 수 없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을 포함한다.

때때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래, 극심하게 시달리는 바람에 많은 이가 지쳐버린지 오래인) 설전의 기록을 쭉 읽노라면 어쩌면 명확한 목적성을 띄거나 나름의 합리적인 논리 체계가 있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는 백래시 사례는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설전까지만 가도 다행인 수준이다. 그렇다면 일종의 알고리즘처럼, 당연한 무언가로 자행되기까지 하는 한국의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는 왜, 어떻게 물리적이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형태로까지 발달해왔으며 또 그들을 어떻게 개념화할 수 있을까.
p.11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은 훨씬 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고, 그들의 감정은 불안이나 공포 쪽에 가깝다. (...) 불안은 우울이 되고, 좌절은 분노가 되면서 감정의 전이가 발생한다. 나의 분노를 투사활 누군가로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 제공자로서 '그들'이 지목된다. 우울은 혐오로, 분노는 적대로 심화된다.
혐오와 적대의 감정에서 형성된 타자에 대한 상징폭력은 일시적인 쾌락을 주며, '우리'의 결집된 힘을 확인할 수 있는 효과의 도구로 체험된다. (...) 백래시는 이런 감정들에 편승해 사회적 세력을 확대해간다.
p.16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갖고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실천이다. 만약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바로 이런 민주주의 사회를 거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작금의 사회가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수차례 말했듯이 행정부의 수장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제1임무는 성원의 보호이다. 필수라거나 기본이 아닌 굳이 '제1'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는 그것조차 해내지 못하는, 자국민 외의 일시거주자를 포함해 자국 영역 내의 성원의 기본적인 안전과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상실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p.45 한 사회에서 백래시가 전개되는 양상은 절망의 정치의 모습을 띈다. 매우 부정적인 감정 기제들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운동에 대해 여러 형태의 백래시가 이루어져왔다. 노골적인 힘의 행사, 폭력이나 위협, 운동의 연대를 분열시키는 '분할 정복' 같은 의도적 전략들 외에 조롱과 낙인찍기, 침묵시키기, 부드러운 억압 등도 있었다. 이는 상징적ㆍ물리적 폭력이 동원되고,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는 공격을 자행한다는 점에서 가장 부정적인 형태를 띈 힘의 행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국가권력이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에게 적극적인 폭력을 가하고 또 방조하는 나라이다. 앉은 자리에서 하루가 모자라도록 실사례를 들 수도 있다. 판례만 가지고도 하루가 모자란다. 이런 분노에 타오르는 이가 과연 하나 뿐이겠는가. '이만하면 감사한 줄 알라'는 말은 가해자 혹은 방관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분노와 절망은 평등하지 않다.
특히나 '일베'로 대두되어 사회 전반의 정서로 확산되고 국가 정책에서까지 모습을 드러내는 백래시는 참담한 몰골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는 최근의 '이대남'과 '여성가족부폐지논쟁'을 중심으로 하는 담론에서 크게 드러난 바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p.137 페미니스트 공격이 확산된 사회적 배경으로 김보명은 젠더 이분법에 토대를 둔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신자유주의 사회의 탈맥락화된 능력주의와 결합해온 현상을 지적한다. 성차별의 오랜 논리이자 방식인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경쟁과 불안 속에서 성장해온 청년 남성들의 '공정성' 담론과 결합하면서 여성혐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누적된 구조적 불평등과 문화적으로 일상화된 여성혐오는 이미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차별'로 인 지되지 않는 데 비해,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시성을 획득하면서 '역차별'의 감각을 생산ㆍ확산시켜왔다는 설명이다.
p.168 이런 결과를 고려해보면, 여성정책연구기관을 사회 복지기관으로 통합하는 것은 결국 여성정책을 지우고, 지자체 정책에서 성평등 가치를 배제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진흥', '복지가족' 등 어떤 논리성도 찾아보기 어려운 간판을 달거나, 일반 연구원으로의 흡수통합, '양성평등' 운운하는 개편은 모두 지자체 정책에서 '여성'과 '성평등'을 삭제하고, 여성정책을 최소한의 사업으로 국한하려는 의도를 명백히 보여준다.

이 책은 백래시의 정의부터 각 국가별 현항과 양상, 무엇보다도 한국의 백래시에 동원되는 정동과 사회적 요인, 현재 한국의 '젠더 갈등'과 실질적인 차별 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풀어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연구에 그치지 않고 '지침서'로 불리기 바라는 이유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알지 못하고 그저 분노하는 것으로는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p.176 성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시정 요구로서 여성주의 실천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반발을 '젠더 갈등'이라고 한다면, 백래시는 이러한 젠더 갈등이 젠더 정치의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맥락에서 반격으로 조직되고 세력화하는 양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현실은 ‘젠더 갈등'이라고 부르기에는 정치적 함의가 훨씬 더 크고, 국가권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현상이 되어버렸다. 개인들 사이의 젠더 갈등이 정치권력에 의해 정치적 백래시로 확대되면서 국가권력의 통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젠더 갈등' 사회에서 '백래시'의 시대로 깊어져가는 위기에 직면해있다.
p.236 성평등 정치는 여성운동이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베를루는 "기존의 헤게모니는 서발턴 또는 헤게모니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위한 공간이 있을 때만 도전받을 수 있다"는 프레이저의 말을 빌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여성운동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정치사회적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성운동 없는 성평등 정치,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젠더 불평등에 대한 도전은 불가능하며, 여성운동 없는 성평등 정책은 공허한 것이 될 뿐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을 여성주의의 새로운 도전과 백래시 대응전략으로 맺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확장하고 오래, 지치지 않고,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이 일반적 가치로 굳어진지는 오래이나 그렇지 못한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 길을 찾고 있다. "우리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러니, 어느 책의 제목을 빌어 오늘도 침묵하지 않기를, 살아남기를 다짐한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p.12 소수자들이 제기하는 정의에 대한 요구를 묵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지우며, 사회 변화의 방향을 뒤로 돌린다. 더 깊은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적 실천을 공격하며, 그런 공격성을 힘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힘이 아니라 폭력이다.
p.240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가 전개되는 탈민주화 사회에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하층계급과 빈곤층, 이주민, 장애인 등 '그들'로 분리되는 인구집단에 대한 혐오ㆍ차별ㆍ폭력이 공존하기 쉽다. 그러므로 백래시에 대응할 때도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사회적 맥락을 일고, 그 안에서 다각적 연대를 통해 조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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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멜랑콜리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장문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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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결국에 우리의 도시는 본성상 멜랑콜리하다."

"핏빛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이 도시에서는 "갈등과 무질서를 통한 질서의 창출, 다양한 소요와 효율성 사이의 충돌"이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그런 창조와 파괴의 어지러운 반복은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반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멜랑콜리, 한동안 제법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단어로 기억한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는 채로 모든 것이 멜랑콜리-로 수식되는 편이었지만. 그러나 본디 "멜랑콜리"란 그러하지 않은가. 어쩐지 느리고 무겁고, 열기가 가신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감정과 언어의 한가운데에서는 조금 비켜난 느낌. 솔직한 심정으로 "멜랑콜리 피아노"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는 지금도 명확하게 설명할 언어를 찾아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역시 있는 힘껏 느껴보는 수밖에.
p.9 "결국에 우리의 도시는 본성상 멜랑콜리하다." (...) "이 도시의 본질적인 성격은 멜랑콜리이다." (...) 한낮인데도 황혼녘처럼 느껴지는 잿빛 도시 토리노의 특징을 멜랑콜리하게 드러내고 있다.
p.16 자유는 진공상태에서는 자라날 수 없다. 충분한 공기와 물, 따뜻한 햇빛이 없다면 덕과 자유의 나무는 생장할 수 없다. 그러나 토리노에서는 모든 것이 과잉이었다. 충분한 공기와 물은 거센 폭풍과 세찬 급류였고, 따뜻한 햇빛은 뜨거운 열기였다. 100년 동안 토리노에서 벌어진 자본과 노동의 투쟁은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진 환경에서 살아남은 식물들이 강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는 슬픔의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혼동되곤 한다. 그러나 스크리브너의 말을 빌자면 "멜랑콜리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며, 노스탤지어가 '상실'에서 비롯된다면 멜랑콜리는 '결여'에서 유래한다."
p.200 바꿔 말해, 노스탤지어가 한때 소유했으나 상실한 대상을 그리워하는 감정인 반면, 멜랑콜리는 실제로 가져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느끼는 슬픔이다. 따라서 노스탤지어적인 주체는 상실한 대상을 다시 획득하려고 하지만, 멜랑콜리적인 주체는 상실한 대상에 원래부터 있던 결여를 응시하며 "자신이 실패한 장소들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강하다고 한다.

현대 사회상이야 어떻든 한때 이탈리아는 강국이자 파시즘이 발흥하고 또 세를 떨쳤던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민중이 있었고, 반파시즘과 자유를 외치는 이들이 존재했다. 토리노는 용광로같은 공업도시이자 노동으로 뭉친 이들의 혁명정신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몽테뉴에게는 "몹시 축축한 곳에 서투르게 조성되어 호감이 안 가는 소도시"였으나 한 세기 반쯤 후의 몽테스키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주지"였으며 이후 니체에게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곳"이었던 도시. 이 책은 물러설 수 없는 사상들이 충돌하는 격전지로서의 20세기 토리노, 현대에 이르러 멜랑콜리에 에워싸인 토리노와 그곳에 존재했던 이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p.202 토리노의 20세기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까? (...)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토리노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이 투쟁이 직설적이고 단호하게 벌어진 공간이다.

뜨거운 투쟁과 열정으로 끓어올랐던 멜랑콜리의 도시, 토리노. 상실과 애도 이후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트라베르소의 말처럼 “역사가 기억으로 치환되면서 어떤 것은 기억되지만 다른 것은 망각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를테면 혁명과 반파시즘에 대한 망각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기억들을 역사로 변환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p.201 특히 역사학자들은 “목격자"이자 "망명자” 라는 이중적 위치에서 한편으로 상실을 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 전투성을 회복하여 기억을 역사로 다시 쓰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역사가 기억으로 치환되면서 어떤 것은 기억되지만 다른 것은 망각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를테면 혁명과 반파시즘에 대한 망각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기억들을 역사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만일 멜랑콜리가 결여를 응시하며 실패한 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강하다면, 결여를 채우고 실패한 지점을 기억하려는 욕구가 그런 작업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글을 맺는 지금까지도 이 책을 고작 3천여자의 글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답을 내리기 어렵다. 때때로 시간을 들여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이 있다. 안개 너머로 햇살이 무르고 느리고 묵직하게 비칠 때의 낯선 곳으로의 그리움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실제로 가져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느끼는 감정이 멜랑콜리라면, 투쟁으로서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멜랑콜리하다. 그러니 결여를, 부재를 응시하며 실패를 기억하려는 욕구, 빈 자리를 더듬는 움직임은 비극의 반복을 막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느릿한 그리움에 젖어 물들어가기만 하지 않을 그 도시에서.
p.200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멜랑콜리는 애도를 통해 상실의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해소되지 않은 멜랑콜리란 곧 "완료되지 않은 애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토리노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는 애도의 과정이 필수적일 수 있다.
p.207 이 오랜 충돌의 역사는 포아가 말하듯이 “오늘은 너, 내일은 나라는 투의 승리와 설욕의 정신 상태"를 조장했다. 동의와 지도의 순간은 짧았고, 강압과 지배의 시기는 길었다. 안정된 헤게모니는 토리노 어디에도 없었다. 따라서 실은 진정한 승자도 없고 진정한 패자도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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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혼 오로라 -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기록한 오로라의 모든 것
권오철 글.사진, 이태형 감수 / 씨네21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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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때로는 그 순간의 감동이 인생의 길을 바꿔놓기도 한다. 안정적인 삶을 내던지고 찰나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자연으로 떠나는 것처럼.
그러나 때로는 바로 그 순간이 평생을 살아내게 하는 힘을 주기도 한다. 뜯어보자면 딱히 엄청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태양에서 날아온 입자가 행성의 대기와 충돌하면서 잠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위치와 때에 따라 그다지 드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감동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경로를 바꿔놓기도 한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힘, 사람을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p.222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운명의 해였던 2009년, 12월 초에 오로라 여행을 다녀왔고, 중순에 사직서를 냈고, 말일 자로 자유인이 되었다.
p.231 오로라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일한 모습은 단 한 순간도 없다. 희미한 날도 많지만 오로라 폭풍과 같이 온갖 색의 빛이 밤하늘 전체를 물들이며 휘몰아치는 순간을 맞으면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절정의 순간은 한 번 찾아오기도 하고 하룻밤에도 여러 번 반복되기도 하고 정말 운 좋은 날은 밤새 난리를 치며 사람의 진을 빼놓는다.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절정의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빛, 오로라는 누군가에게는 정령들의 춤, 누군가에게는 신의 계시 호은 하늘의 촛불, 혹자에게는 망자를 천국으로 이끄는 여신의 증거로 이해되어왔다. 드물지만 조선에서도 관찰된 기록이 있다. 지구 자기장의 중심이 지금과는 다르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먼 훗날 어느 밤에는 하늘을 뒤덮는 장관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을지 모른다.
p.17 오로라는 사진으로만 보아도 환상적이지만 실제로 보면 훨씬 신비롭다. 우선 그 장대한 규모에 놀라고, 너울거리는 움직임에 빠져든다. 오로라는 정적인 현상이 아니다.
p.25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로라를 '정령들의 춤'이라고 불렀으며, 중세유럽에서는 신의 계시로 여기거나 하늘에서 타오르는 촛불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바이킹족의 전설에서는 전쟁의 여신 발키리가 전사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때 방패에서 반사된 빛이 오로라라고 전해진다.

태양계 내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행성은 아마도 지구 하나 뿐이라고 추측된다. 그나마 생명이 존재했으리라 추측되는 곳은 아마도 화성 하나 뿐이다. 식어버린 땅, 붉은 모래가 날리는, 오래 전에 죽어버린 행성. 그곳에서는 오로라를 볼 수 없다. 대체 저게 뭔가 싶은 덩어리에 가까운, 목성과 토성에서도 관찰되는 오로라를. 먼 옛날 태양계 생성 초기에는 화성에도 대기와 자기장이 존재했을 것이고, 신의 영혼 내지는 정령의 춤이 하늘을 뒤덮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차게 식어 자기장은 사라지고 희박한 대기는 태양풍에 흩어지고 만다.
생명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물과 대기라지. 어쩌면 오로라는, 빛나는 그 춤은 생명 혹은 어딘가에서 눈물짓고 있을 삶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94 사막과도 같은 광대한 우주, 그 변두리 어딘가의 작은 별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행성에서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졌다. (...) 오로라의 황홀한 빛은 지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생명이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증거다. 먼 훗날 다른 우주에서 생명체를 발견한다면, 그 행성에서도 오로라가 보일 것이다.

이 책의 반 정도는 오로라 화보집, 반 정도는 과학지식으로서의 오로라, 나머지 반 정도는 사진가 권오철의 생생한 오로라 관측 가이드라고 할 수 있다 (도합 150%의 힘으로 평생의 장관을 쟁취해보시라). 어느 쪽에 관심이 있어도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환상을, 누군가에게는 위안을, 누군가에게는 언제일지 모를 꿈의 씨앗이 될 셈이니 (그 환상이 191쪽 같은 '순식간에 얼어붙는 소변'이라면 시도하지 마시라. 라면이나 소변이나 몇 시간은 걸린단다).
잠들지 못하는 밤, 알지 못하는 낯선 땅의 겨울바람과 새하얀 달, 산과 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휘감아도는 색색의 춤을 떠올려보라. 어딘가에 존재하는 하늘의 파도, 빛의 장막, 보이지 않는 것들의 춤. 광대한 우주 변두리 어딘가를 맴도는 작은 행성의 아주 작은 존재인 우리를 살아내게 하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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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윌북 클래식 호러 컬렉션
브램 스토커 지음, 진영인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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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윌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공포의 원형'에는 무엇이 있을까. 죄책감이나 원한 따위의 응보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하면, 기원을 알 수 없거나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에 대한 생물적인 두려움도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낯선 것', 그 중에서도 '낯설고 사악한 존재의 침입' 또한 그 뿌리가 깊지 않은가. 대개 그 둘이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 점에서 더더욱. 결국 공포의 대상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위세와 의미를 달리하며 인간과 함께해왔다고 할 수 있겠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유럽의 오랜 흡혈귀 신화를 대중문학의 영역으로 끌어온 첫 성공적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멀고도 낯선 이교도의 땅에서 온 사악한 죽음의 존재, 적어도 그 이름을 대치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니 말이다.

인외 존재 중에서도 '흡혈귀'에 대한 공포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 유래에 대한 철학적, 문화적 연구 대신, 오늘은 이렇게 묻기로 하자. 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가? 신의 눈과도 같은 태양과 낮, 생명을 벗어나 우리 인간이 극도로 취약해지는 밤, 말도 길도 알 수 없는 '이교도'의 땅, 생명과 삶을 벗어난 존재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의. 문명시대 이래로 강자를 자처해왔던 인간이 피식자도 아닌 '먹이'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지위의 역전.
『드라큘라』는 흡입력있는 내용과 긴장 넘치는 전개를 제하고 전문이 일기 및 서간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데에서 형식적으로도 독보적인 작품이다. 낯선 곳에서 사악한 계략에 휘말려 쫓기던 이가 의로운 이들과 힘을 모아 악당을 퇴치한다는 뻔한(적어도 출간 당시에는 나름 참신한 소재였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클리셰라는 '보장된 맛'으로 흥행하니 된 것 아닌가.) 스토리를 누가 700여쪽이 넘는 대서사로 풀어낼 수 있겠는가.
p.77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짐승처럼 핥았다. 혀로 하얗고 날카로운 이를 핥는 동안 달빛 아래 붉은 입술과 혀가 촉촉하게 빛났다. 여자가 고개를 더 숙이자 얼굴이 내 입과 턱 근처까지 왔는데 내 목이 목표인 것 같았다. (...) 내 목 피부가 달아올라 욱신거리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간지럼 태우는 손이 가까이 왔을 때처럼 피부가 곤두섰다. 달아오른 목 피부로 부드럽게 떨리는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두 치아의 끝이 목 피부에 가만히 닿았다.
p.241 “잠들고 싶지 않나요?”
“네, 두려워요.”
“잠이 두렵다니! 왜죠? 다들 잠을 자고 싶어 하는데.”
“제 입장이 되어보면 다르게 생각하실 거예요. 잠이 무서운 일의 징조라고 생각해보세요.”


자 여기까지는 점잖게 남겨보려 애쓴 부분이고. 이하로 솔직한 감상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치겠어요 정말. 나도 이렇게 읽고 싶지 않은데 분명 호러고 공포로 점철된 글인데 아무리 노력해봐도 외국서 온 성격 좋은 젊은이를 욕망하는 고리짝 드라큘라 노백작 같아서 웃겨죽겠다고요. 이건... 호러 문학이죠? 독자를 웃기려고 넣은 장면은 단 하나도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등골이 오싹해지고 절망감에 눈물을 떨굴 수 밖에 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작품이란 말입니다. 공포와 맞서싸우는 선한 의지, 용기에 감동해서 읽던 때도 있었지요, 물론.
그치만 생각해보세요. 삼백도 넘은 양반이 요 젊은이 한 번 어떻게 해보겠다고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마부에 시종 노릇을 하질 않나, (들키진 않았지만) 헐레벌떡 뛰어들어가서 밥 차려주지, 잠자리 봐주지, 날이면 날마다 하루종일 얼굴 맞대고 얘기 좀 하자고 붙잡아놓지를 않나... 태워줘, 먹여줘, 재워줘, 내보내줘 살려줘...!
자고로 생각없이 읽으면 웃다 숨 넘어가는 날도 있는 법입니다. 뭐, 그렇게 되면 피는 안 빨렸으니 흡혈귀의 수하가 되지는 않겠군요. 그러니 내 무덤에 마늘만은 놓지 말아줘요 (정 불안하거든 바싹 구운 걸로 부탁해요... 그건 맛있으니까)...
p.38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하오. 자유로이 들어왔다가 안전히 돌아가시오. 당신이 안고 온 행복을 조금만 남겨놓고 가면 좋겠소."
p.78 “감히 너희 셋이 이자를 건드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눈독을 들이다니, 물러나, 셋 다! 이 자는 내 것이야! 이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 나도 사랑할 줄 알아. 옛날과는 다르다고.“

물론 집필 시기가 시기인만큼 여성관이 영 구식이긴 합니다. 어쩌겠어요. 무덤에 대고 잠깐 나와보시라고 들볶을 수도 없고. 아무튼 한국에선 무리입니다. 마늘을 좀 덜 먹어보세요, 곰의 자손들아. 근처에도 못 오게 생겼잖니.
그러니 최선을 다한 새번역에 힘입어 읽어보세요. 포식자 앞의 인간, 동물적인 위협을 관능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내는 문장과 쫓고 쫓기는 여정,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위협과 말 그대로 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인간의 연대를.
p.458 우리가 싸움에서 진다면 그가 결국 승리를 거둘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결말은 어떨까? 사실 목숨이 문제가 아니야, 목숨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닌 거야. 우리가 진다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는 상황에 놓이게 될 거야. 우리도 그자와 같은 부류가 되겠지. 밤의 추악한 괴물이 되어 마음도 양심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사냥하겠지. 우리에겐 천국의 문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고. 누가 우리에게 문을 다시 열어주겠나? 우리는 영원히 혐오스러운 존재로 살 거야.
p.665 오늘 아침 우리는 불안하게 일출을 기다렸다. 반 헬싱은 최면을 거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을 감안하여 평소보다 일찍 시작했다. 그렇지만 원래 최면에 걸리는 시간에 이르렀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갖은 애를 쓴 끝에 하커 부인이 최면에 빠졌지만 해가 뜨기까지 겨우 1분이 남았다.

덧, 오래된 명작인만큼 타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이 여럿입니다. 각각의 문체 차이와 일부 대사를 방언으로 번역한 문장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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