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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출판사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존버"가 당연한 삶의 태도로 자리잡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일은 쉽지 않다. 오히려 도망칠 용기를 내는 것부터가 별스러운 일로 취급되기 때문일까.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 풍파에 아등바등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네 사회에서 가진 것을 내려놓거나 정해진 길 밖의 삶을 상상하는 일이 그저 철없고 배부른 소리로 여겨지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현실과 상상에서 대다수가 그런 삶을 동경하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제법 이른 나이에 부를 축적하고 월급쟁이 노선을 탈피한다고 하면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애를 태우는 동시에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일을 그만두는 이들을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물어뜯고 깎아내린다. 부럽지만 부러워하고 싶지 않은 걸까. "본 투 비 럭셔리"가 아닌 너와 나의 차이에서 어쩐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눈꼴시려움"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걸까.
p.123 꿈 옆에는 자유, 사랑, 평화 같은 말들이 어울린다. 인류가 가슴에 한 번쯤 품었을 거창하고 아름다운 말들, 오랜 세월이 물음표를 지워버린 가치가 담긴 말들 말이다. 물음표가 필요 없는 소중한 가치들로 삶을 채우면 물음표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은 늘 그렇다. 후회 없이 불태우고 후련하게 돌아서고 싶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미련 없이 털어내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옳은 것은 옳다고 소리내어 일어서고 싶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다.
마음같지 않다. 세상은 냉정하고 나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아무리 싫다고 울어제껴도 해는 뜨고 출근을 해서 대체로는 의지 밖의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다. 잘 시간에 자투리 휴식까지 싹싹 긁어 모아 쏟아붓지 않는 한 자기계발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바쁜 때엔 퇴근해서 숨만 깔딱깔딱 쉬다 정신 차려보니 도로 출근 준비할 시간이었던 날도 허다하다.
잘하고 있는 게 맞나? 매 순간이 자기의심으로 점철되는 마음은 건강하지 않다. 의심은 불안을 부르고, 불안은 힘이 세다. 순식간에 마음을 좀먹고 잡아늘린 입꼬리에 쥐가 나게 한다. 살다 보면 당장 털고 일어나 등돌려 달아나지 않으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순간이 온다. 평생을 의심해본 적 없는 가치가 부정당할 때, 희망의 따귀를 후려치는 세상에 턱이 울리고 머리가 멍해질 때, 그 때가 바로 도망쳐야하는 순간이다.
p.59 긍정이 무력해지는 순간은 부당함을 마주할 때다. 긍정 회로를 아무리 돌려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 세상이 긍정의 뺨을 아주 세게 후려치는 순간 말이다.
이따금 "저 이단아들"이 충분히 고통스럽게 호소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해진 길에 순응하며 애써 묻어둔 상상을 벼락같이 던지고도 태평하게 살아가는 게 밉고 미워 저러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신들린 것처럼 아득바득 살아내지 않으면 현대인은 커녕 옳은 사람도 되지 못하는 것처럼 닦아세우는 세상, 모든 감정은 뒤켠에 쑤셔박고 활짝 웃으며 긍정! 행복!을 피워내지 않으면 제 몫을 못 하는, 그저 공사구분도 못 하는 어른답지 못한 사람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갓생"은 "미라클 모닝" 만큼이나 멀다. 꿈은 좇아야 할 것이 아니라 기상 알람 소리와 함께 털어내야 할 무언가가 되지 않았나.
p.53 감정을 포장한다는 건 감정에 방부제를 뿌리는 일 같다. 유통기한이 지났으면 썩어야 하는 데 좀처럼 썩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견고히 박제되는 SNS 속 감정의 모양새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p.114 갓생은 현대사회에 적합한 대단히 효율적인 인간상이 되자고 부추기는 것만 같아서 괜히 싫다. 모르긴 몰라도 신은 이렇게 절박하게 살지는 않을 것 같아서 열심히 사는 게 ‘갓’ ‘캡’ ‘짱’인지 의문이다.
이 책은, 저자 김수민이 세상 하나뿐인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 자신으로 살아남기 위해 "쌩쇼"도 해보고, 서러운 날엔 길바닥에서 펑펑 울어도 보고, 겁을 내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이어진다고 말하는, 그런 내용이다. 그러니 "그래도 너는 나보단"과 "다들 그러고 산다"를 애써 뿌리치고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의 고군분투한 여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말하는, 아등바등 정해진 길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글이 아니꼽지 않았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이다. 그러나 사는 일이 힘들었다고, 모두가 부러워하고 부모에겐 자랑스러운 딸이었던 탄탄대로의 삶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고, 꿈을 찾아 자리한 곳이 생각과는 달랐다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나를 믿어달라고 말하는 저자를 미워할 수 없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부딪혀 얻어낸 곳에서 도망치고 그것을 인정하기까지의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귀하기 때문에.
삶은 이어진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틈틈이 숨을 쉬어야 한다. 잊지 말기를,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쉬어가면 좀 어때서.
p.145 원래 옷 갈아입을 땐 잠시 나체다.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의 답이 당장 나오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너무 박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