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마음 - 나를 돌보는 반려 물건 이야기
이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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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는 마음, 혹은 살아가는 마음. 살-다와 사-다 사이에는 수많은 물질과 시간이 자리할 테다. 이미 안 쓰고 안 사는 게 그나마 에코인 세상이라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나요. 살다보면 꼭 필요하지는 않은 줄 알면서도 기어코 사버리고는 또 쓰레기 만들었다고 자괴감에 머리를 뜯기도 하고, 별 생각 없이 산 물건을 기십년씩 끼고 살기도 한다. 혹은 역시 사길 잘했다고, 일년에 몇 번 입지도 못하는 코트, 모셔만 두는 찻잔, 애물단지라고 한숨을 쉬어도 쉬이 버리지 못하는 책들. 삶을 함께하는 존재들, 반려인간, 반려동물이 있다면 삶을 함께하는 것들을 반려 물건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
미니멀리즘이 대세라지만, 여전히 도통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가하면 확신과 기대에 차 장만한 물건을 떠나보내는 마음도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소유하는 것을 넘어 나를 돌보고 존재를 사유하게 되는 반려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p.85 사람이나 관념이 아닌 물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늘 경계하고는 있지만 내가 정성스럽게 돌보아 더욱 사랑스럽게 된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물건에 대한 애정이 꼭 그렇게 경계해야 할 대상인가 싶다.

시인 김춘수는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비로소 나에게 와 꽃이 된다고. 물건도 다르지 않다. 단순한 사물에 불과한 것에 마음과 시간이 쌓여 비로소 '나'의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홀로 선다는 것이 나를 아껴 준 사람의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라면 곧 나를 아껴 준 사람의 영혼과 작별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어떤 물건은 나의 자아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물건은 세상에 녹아들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의태이며, 또 어떤 물건은 몸을, 시선을 옥죄는 규율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p.55 물론 가발은 불편할지언정 군중 속에 숨을 수 있게 해준다. (...) 암 환자가 무수히 많은 병원 암 센터에서도 스카프를 쓰면 쳐다보는 사람이 많다. 대개는 가발을 쓰거나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산업은 이처럼 다양성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용한다.
p.63 하지만 특정한 이미지로 비치고 싶다는 욕구보다는 특정한 이미지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목차의 "내가 돌보는 물건, 나를 돌보는 물건"부터 "충동이 없으면 지불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사고, 사기 위해 산다"까지 저자의 삶에 오간 반려-대상의 목록을 따라가노라면 공간이라고 생각했으나 물건인 것, 물건이라고 생각했으나 가치관, 관념 혹은 주입된 편견이었던 것들을 만나게 된다. 머무르는 공간, 책, 집, 가방, 식물, 자동차까지. 만족과 단념을 오가는 여정에서 저자 개인의 경험뿐만 아니라 촘촘한 혐오와 억압이 어떻게 개인은 짓누르는지, 집단과 산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얼마나 둔감하게 살았는지, 세대를 건너 오래도록 머무는 물건들에 대한 애정이 어떤 것인지를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p.141 인간은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배설을 해야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기계에 끼이면 팔다리가 잘리고 높은 데서 떨어지면 죽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 취급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은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우리와 남을 구분해서 착취를 합리화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이 상품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사람이 사람과 사는 까닭에 타인의 시선을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물건을 사고 물건과 함께 살아가고, 물건에 사람을 맞추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파편화된 개인으로서의 소비자로 전락한 동시에 역설적으로 동시에 서로가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 혹은 개체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책을 대상, 물건에 대한 사적 기록으로 읽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p.178 남녀를 '떠나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외모에 대해서는 더더욱 남녀를 떠나서 말할 수 없다. 내가 신발 가게에서 신발을 살 수 없는 이유는 내가 겁쟁이라서가 아니다. 여전히 큰 발은 알아서 숨겨 주는 것이 미덕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p.224 나를 들여다보는 일, 남의 말을 듣는 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 이 모든 것은 목청 높여 간결한 구호를 외치는 일보다 복잡하고 어렵다. 단시간에 끝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유하고 행동하는 능력은, 인류 모두에게 주어졌는지 도통 의심스럽기는 해도, 우리 중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도 없이 주어진 귀중한 특권이다.

문학 도서라면 저자 소개부터 추천사까지 전부 제치고 본문으로 돌진하는 버릇 탓에 에세이면서도 저자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소비하는 마음, 그러니까 아무래도 값싸고 빠르게 소비되는 물건을 사들이는 마음에 대한 단상일까, 했던 짐작이 부끄러웠다. 등장하는 '물건'들이 일회용품이 아니라거나, 저자가 '젊은이'가 아니라서가 아니다. 반짝거리거나, 부럽거나, 나를 '럭셔리'의 세계를 이끌어줄 것만 같은 물건들이어서도 아니다.
저자 이다희의 글을, 사람 이다희의 시간을 만날 수 있어 고마운 시간이었다. 읽는 내내 많이 울고, 많이 웃고, 많이 부끄러웠다. 아마도 읽지 못할 저자에게 이렇게나마 감사를 전하는 마음은 어쩌면, 낡은 책들을 모아 담고 맞지 않는 옷을 버리거나 노트를 사고 가구를 들이는 때에 문득 떠오를 것이다.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은 물건들과의 연대의 기억"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살며(live) 왜 사는가(b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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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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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빛소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따금 노년기의 삶을 상상해보곤 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머리가 세고 허리가 굽어지고 살결이 부드럽게 늘어지는 그 때가 되면 지금껏 바라마지 않던 것처럼 고요한 시간을 보내게 될까. 하루에 한두마디쯤, 많아야 잠깐의 담소 정도, 새벽녘에 깨어 해가 넘어갈 때쯤 잠이 드는 그런 삶, 뜨겁게 끓어오르던 피나 호승심따위의 감정들은 지나간 시간의 것으로 남겨두고 이따금 추억에 잠겨들게 될까. 젊을 때와 다름없이 활기와 욕망이 넘치는 생활이 이상적인 노년이라면, 정확히 반대를 사는 지금의 나는 이상적인 청년이라도 된단 말인가.

한 삼사십년 후, 그러니까 내 부모가 기억 속의 조부모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을 때 쯤, 그때의 삶을 그려보는 것은 모호하고 흐린, 이상과도 같은 이미지와도 같다. 결코 닿은 적 없고 살아낸 적 없는 시간의 것, 그러면서도 향수를 자아내는, 희한한 성질의 것.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상상의 끝은 늘 비슷하다. 막상 그 때가 되어서는 지금 이 순간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것이라고, 그러나 세상과 삶의 열기에 숨이 벅찰 때는 어김없이 똑같은생각을 할 것이라고, 너무 오랜 시간을 탈진과 비슷한 상태로 살아왔다고.
p.19 젊었을 때는 누구나 그렇게 마음이 급하단다.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사랑 없이 잃어버리는 하루하루가 마음을 찢어놓지.
p.29 만약 그들이 자신의 젊음이 되살아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그들은 공포에 질리거나 제 젊은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 앞을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랑, 저 꿈, 저 불이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저렇게 낯선 것이?” 자신의 젊음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어떻게 남의 젊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한 다리 건너 친척, 두 다리 건너 사돈인 조용한 시골 마을. 이야기는 어느 노년기에 접어든 "나", 실비오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정적인, 그러나 끔찍하지는 않은 고독 속에 일상을 보내는 이. 한때는 자유와 방항을 꿈꿨으나 지금은 젊은 날의 이상이었다고, 반복되는 일상 속 식어가는 열기를 품고 고요히, 고요히 침잠하는 이. 이러나 저러나 좁디좁은 바닥인지라 굳이 척을 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가깝게 지내는 이라고는 사촌과 그의 남편, 더해봐야 그들의 딸 정도. 이따금 찾아오는 이들, 오래 알아 편안한 사람들,잠깐의 담소. 그정도면 충분하다.
p.34 "그렇긴 하지만, 무엇을 수확하게 될지 미리 안다면 누가 밭에 씨를 뿌리겠어요?”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실비오. 다들." 엘렌이 나를 지칭할 때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름으로 나를 부르며 말했다. "기쁨과 눈물, 그게 삶이잖아요. 모두가 살고 싶어 하죠. 당신만 빼놓고.”
p.49 금방 식어버리는 피의 뜨거움. 그 꿈과 욕망의 화염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늙어버렸고, 너무나 차갑게 식었고, 너무나 철이 들었다고 느꼈다.

변하는 것이라고는 철마다 바뀌는 풍경이나 일과 정도, 그마저도 매 해 반복되는 것이니 새로울 것도 없고 일상이려니, 늘 그랬듯이 권태에 가까운 마음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던가, 손바닥만한 마을에서. 그래, 그게 문제다. 손바닥만한 마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서로가 서로를 훤히 꿰고 있는 그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다. 아니 뭐, 살다가도 죽고 죽다가도 살고 하는 건 맞지만, 문제는 그 대상이 장, 엘렌의 딸 콜레트의 남편이라는 데 있다. 그렇게 금슬 좋던 부부가 젊은 나이에 사별이라니. 아니, 그것마저도 제법 담담히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이 나이에 기함할 일이 몇이나 된다고... 사건이 일어나던 그 밤의 찜찜한 광경은 차치하고라도, 구태여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 혼자 묻고 가면 되려니, 싶으면서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오래된 지혜와도 같은 위로와 함께 모두가 그럭저럭 일상으로 돌아가던 와중에 충격적인 목격담을 듣고야 만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날 밤, 각자의 자리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p.81 그랬다, 자신만만했다. 그것은 한 번도 나쁜 길에 빠져 방황해 본 적이 없는, 한 번도 헐떡이며 약속 장소로 달려가 본 적이 없는, 한 번도 죄스러운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발길을 멈춰본 적이 없는 여자의 걸음걸이였다.
p.103 “그렇게 열렬하게 예찬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단다. 우리가 극도로 분개하며 경멸해야 마땅한 사람도 없고...” “너무나 큰 애정으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도 없고요…”

짧은 분량, 더 짧은 제목이 무색하게 읽는 데 한참, 잊는 데는 더 한참 걸렸다. 결국 잊지 못해 재차 펼쳐들고 나서야 다른 책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2차대전기, "순수하지 못한 인종들"은 모조리 수용소로 끌려가 살해당하던 시기, 광풍에 휩쓸려 사라진 작가의 반토막으로 출판되었다 겨우 온전하게 출판된 작품, 이라는 생각에 조금 더 마음이 쓰였다면 너무 멀리 간 걸까.

뜨거운 피, 출간 예정 목록에서는 "불타는 피"였던가. 한참 곱씹어보고야 제목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화인처럼 찍힌 자리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뜨거운 피. 타오르는 피, 끓어오르는 피. 그리고, 식어버린 자리에 남는 재 같은 것.
터지기 직전의 긴장감, 모두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심 털어놓고 싶으면서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라고 여기는 무언가를 숨기는 좁디 좁은 마을. 무심하고 고요한 곳에서도 타오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리.
p.128 나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p.131 우린 이십 년 전에 죽었어. 우린 이제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p.151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마음, 사랑하고 절망하고 어떤 불로든 타오르길 갈망하는 마음이 문제다. 우리가 원했던 건 그것이었다. 타오르는 것, 우리 자신을 불사르는 것, 불이 숲을 집어삼키듯 우리의 나날을 집어삼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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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토리 이야기 - 400년 전통 명화와 함께 읽는
이애숙 옮김, 고지마 나오코 감수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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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날개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낸 영화 중 좋아하는 건 아주 많지만, 개중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몇번을 보고도 잊지 못해 울먹이며 본 작품이다. 재미 없기도 힘든 내용 아닌가. 신비한 출생, 비범한 재능(외모 또한 포함된다면...), 범인과는 차원이 다른 삶 등.
옛말에(그러니까, 내가 전부터 하던 말에 따르면) 어지간한 설정이나 소재, 전개는 다 고전에 있다고 했다. 찾아보면 나온다. 정말로. 누군가는 다 해봤어! 그래서 재밌어! 사람 사는 일 다 똑같다! 원래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니까요?

자 들어보세요. 내가 이런 얘기 하난 끝내주게 잘 한다. 들어봐요. 가까이 오세요. 지금부터 일본 최초의 소설, 달나라 공주님 이야기 갑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야.

옛날옛날 대나무 장수 다케토리 부부가 있었습니다. 한평생 자식 없이 살아온 노부부에게, 어느날 아이가 생겼지 뭡니까. 그날로 나무 하나 벨 때마다 온갖 은금보화가 쏟아져 나오니 삽시간에 부자가 되어 장중보옥 키운 아이는 석달만에 절세가인으로 자랐다네요.
히메, 아리따운 아가씨라 이름이 붙으니 온나라에 소문이 나더라. 지체높은 공자가 다섯이나 몰려와 따님을 제게 주십사(으...!) 청하니, 늙은 아비가 얘야, 우리는 늙었고 자식은 너 하나뿐이니 어서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니, 혼자 남겨둘 수는 없단다, 간곡히 설득해도 절레절레, 고개만 젓더라. 어찌 낯도 보지 못한 분이 소문만 듣고 찾아와 나를 달라 청하느냐고. 아무래도 맞는 말이긴 하지...

밤낮으로 어르고 달래봐도 싫습니다. 안됩니다. 퇴짜만 놓던 가구야히메가 결국 양친의 설득에 못이겨 조건을 걸었지 뭡니까. 이 세상엔 진귀한 보물, 말로만 전해지는 전설의 보배를 가져다 주세요, 그것으로 나에 대한 진심을 증명하세요, 라고. 다들 투덜대면서도 그래, 그거면 된다 이거지? 호기롭게 나섰으나 그게 어디 쉽던가요. 뚝딱하면 얻어질 것이었으면 진작에 보물 실격이지.
그래서 다들 꾀를 냈다 이거야. 돈으로, 힘으로 사람을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기도 쳐보고, 새끼 들어있는 둥지도 뒤져봤으나(얻은 건 똥이었지만...) 의도가 불순하니 어디 끝이 좋을 수가 있나요. 제각기 망신살만 얻어 털레털레 돌아갔다지.
그 꼴을 지켜본 가구야히메가 아이고, 적당히 해야겠고나, 하겠어요? 굳건한 거절의 의지를 다지고야 마는데... 결국 황궁에까지 소문이 들어갔다네, 천황이 명을 내려도, 심지어 상궁을 내려보내 당장 짐 싸들고 봉행하여라 하여도 싫습니다. 딱 잘라 거절하니, 요 괘씸한, 어디 네 높은 콧대 한 번 보자꾸나 몰래 찾아갔다가 도리어 미모에 납작코가 되어 편지나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지요.

시간은 흐르고 흘러 몇 해가 지났을까, 어쩐지 하늘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 밝아오는 달을 보며 눈물짓는 가구야히메. 어찌 그러느냐, 어인 일로 수심이 들어 그러느냐 안타까이 물으니 세상에, 사실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네. 달나라 사람으로 죄를 지어 인세로 유형에 처해졌으나 이제는 때가 되어 돌아가야 한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비보인가. 안된다. 달나라가 아니라 어디서 온대도 너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황궁에서는 천군을 보내고 저택을 철통같이 둘러싸는 것도 모자라 규방에 딱 지키고 앉았으되, 소용없고 부질없다네.
어느덧 보름달이 휘영청 뜨는 밤이 되어 하늘에서 기이한 무리가 내려오니 잠긴 문은 열리고 창칼은 풀씨만도 못하더라. 자, 이 땅의 모든 연과 미련을 잊게 하는 옷을 걸치고 우리와 함께 가시오. 달나라 시종이 권하니, 가구야히메, 기다리라, 내 편지 한 장 남기고 가노라 슬픔을 담아 말하더라. 시종이 이러실 때가 아니다 재차 재우치되, 히메 왈, 조용히 하라. 눈치 챙겨라(이렇게는 안 했지만 딱히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갈하고 몇 자 써내리고는 이제 가자, 나 가거든 보소서, 하고 저 하늘로 훌훌 떠나가더라.
그간의 사정을 풀어놓는 편지에 가구야히메를 안타까이 여긴 천황이 훗날 손수 어찰을 내려 많은(富) 신하(士)로 하여금 하늘 가까운 산 타오르는 정상에서 태워보내게 하니, 그곳을 후지(富士)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 끝! 재밌지요? 이야기라는 게 그림까지 곁들여서 보면 실감이 곱절로 나지 않겠어요? 이 판본에 사용된 삽화는 릿쿄대 소장본 에마키, 그림 두루마기입니다. 얼마나 오래되었고, 희귀한 물건인지보다 시대를 보여주는 묘사를 통해 수백년전의 복식, 인물상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보세요.
뿐만아니라 문장마다, 장면마다 새겨진 시공을 넘는 보편정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우스꽝스러운 허위의식과 탐욕에 대한 경계, 인세를 넘어선 초월적 세계에 대한 인식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권말의 작품해석이 보다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겠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에게 모두 즐거운 시간이기를, 당대에는 '달나라 사람'이라는 초월적 지위를 통해서만 꿈꿀 수 있었던 주체적 여성상을 조금은 슬프고 기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난히 달 밝은 밤, 무심한 얼굴의 가구야히메를 떠올려 보기를 바라며, 진짜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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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피, 열
단시엘 W. 모니즈 지음, 박경선 옮김 / 모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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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모모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단편집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수록작들의 제목에 숨겨진 의미와 그들을 관통하는 전체 주제를 생각하는 데 있지 않을까. 이 책도 다르지 않다. 한참을 음미하듯 굴려보고서야 알았다. 분노구나, 어떤 형태로, 어떤 감정을 동반하든 간에, 이것은 분노구나.
모두가 분노에 차있다. 늘어붙은 바닥처럼, 파글거리며 튀어오르는 방울처럼. 어떤 것은 터져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깊은 냄비 안 걸쭉한 액체의 바닥처럼 푹, 하고 주저앉아버리기도 하고. 억눌린 분노와 굴종, 순응, 교묘함과 회피를 동반하는 그 모든 감정들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여성, 약자, 소수자로 경험하는 삶에 관련된 분노, 혹은 권력 우위에서 밀려나 당혹스러워하는 이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사치스러운 야만을 목도하면서도 숨죽이고 내리눌러야 하는 구역감을 속삭이듯 무심하게 풀어놓는다.
p.301 저녁 식사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맨얼굴이었다. 모임 회원들은 우리를 힘 없는 사람들처럼 대하면서도 우리를 알고 싶어 했다. 우리는 우리가 힘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를 사이에 두고도 마치 공기를 통해 이야기하듯 대화를 나눴고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주 가까이서 알아버렸다.
p.295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변한다. 그는 그저 아를로일 뿐이고, 숨 막히는 어른 특유의 머스크향 같은 체취가 나를 압도한다. 쟤네는 섹스를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를로의 손이 내 배 위에서 메마른 열기를 뿜는다. 그럴 때면 내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자궁처럼 품는다. 잠잠하면서도 의식적인 그의 손에는 그 나름의 심장박동이 있다. 나는 착한 딸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나는 그의 손처럼 잠잠하지만 어둠은 어김없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런가하면 여성 또한 사람인 까닭에 여성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흑인 여성, 어린 여성, 혹은 어린 흑인 여성,
p.70 제이는 목사가 하는 말을 듣고 그 이면에 감춰진 뜻을 이해한다. 자신은 머리에는 털이 있어도 되지만 겨드랑이에 있어서는 안 되고, 팔에는 털이 있어도 되지만 다리에 있어서는 안 되며, 다리 사이의 털은… 남자 취향에 달려 있다는 것. 구경당할 수는 있어도 구경할 수는 없다는 것.
p.282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몸이 기능하느라 내는 냄새를 감추려 애쓰기는커녕 그걸 이용해 돈을 벌기도 할 만큼 자기 육체 안에서 편안한 삶은 대체 어떤 걸까 궁금해하느라 정신이 너무 없어서.
p.299 우리는 가입조차 못 했을 거야. 가입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들의 아버지들, 더 올라가서는 그들의 할아버지들로부터 부를 넘겨 받아 우리에게 건네주고 검은 육체와 갈색 육체의 삶과 죽음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한들 우리 가운데 이런 끔찍한 풍요에 가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람이라는 까닭에 죽어가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생생한 욕망에 타오르고 흔들리는 여성이 있다. 관계의 역전, 혹은 일탈의 문턱에 선 여성은 얼마나 찬란한가. 버림받을 것, 혹은 불만족의 대상이 될 것을 예견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이전의 "주체"는 얼마나 초라하고 또 우스꽝스러운가. 소리내서 웃고 얼빠진 새끼, 넌 아무것도 몰라, 비웃고 싶었다. 세상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고 정숙과 위안을 요구하는 여자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응원하고 싶었다.
p.95 글로리아는 울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지나치는 거리 풍경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어. 그냥 전부, 그냥 방 안에서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눈 게 다였다고."
p.98 글로리아의 몸을 끊임없이 갉아먹으며 무언가를 빼앗아가는 대가로 글로리아에게 일종의 신성한 앎을 선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프레드는 글로리아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들이 빛을 흠뻑 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아홉 살 아래인 글로리아가 응당 자신을 돌보리라 생각했는데 역할이 뒤바뀌어버린 데 대한 프레드의 분노도. 그리고 최악의 가능성도.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해 프레드가 느끼는 극도의 공포와 수치심은 글로리아의 혀끝에서 녹으며 씁쓸한 맛을 냈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곁에 없으면 프레드가 겁쟁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프레드는 글로리아가 그런 생각을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다고 믿었다.

비단 개인의 분노만을 그려내지는 않는다. 지킬 것이 없는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이 스스로가 되었든, 피와 살로 빚어진 자식이 되었든. 사람 대 사람으로 공유하는 분노, 광기, 복수. 감히, 내 아이를, 한때는 나를 세상으로 여겼으나 이제는 나를 경멸하는 내 딸을 네가 감히, 네 행복을 너의 이로, 혀로 부수는 고통을. 웃는 얼굴과 담배 한 개피로 이어지는 홀가분함, 인간으로 마주하는 여자의 존재를 그려낸다.
또다른 단편에서는 대립하는 존재로서의 모성을 그려낸다. 희생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모성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 어느 여성이 지극한 사랑을 타고나겠는가. 엄마에서 딸로, 다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이가 존재를 요구하는 이물-자녀에게 느끼는 분노와 부담과 거부감을 당사자가 아닌 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널 사랑하지만 가끔은 네가 하나도 좋지 않아, 증오스러워.
p.162 엄마는 분명 세상이 원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프랭키의 모습 이 갑자기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단지 엄마가 아니라 한 온전한 인간으로. 두려움 가득한 별개의 존재. 나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엄마에게도 지구상에서 처음 보내는 시간이라는 걸 마고는 문득 깨닫는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고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진다.
p.229 콜레트는 몸을 숙이고는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는 열기 같은 목소리로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난 너를 사랑해, 하지만 가끔은 네가 하나도 안 좋아. 빌리는 엄마가 이 일을 기억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디로 들어가 가라앉았을지 궁금했다.
p.247 빌리는 이 아기가 자신을 부숴버릴 것임을 알았다. 이 모든 이유들이 참일 수 있으며 타당하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끼어든 혼란 뒤에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엄마가 되는 일이 어떤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은 주머니에 돌 하나를 더 집어넣는 일과도 같다는 설명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기는 훗날 온전한 사람으로 자랄 것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도리어 내가 망가뜨린다면? 물론 모두가 엄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습적인 의미로는 더더욱 아니다. 만일 여자들에게 궁금해할 자유가 더 많이 허락되었더라면 세상은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이따금 "미친 여자"라는 단어를 곱씹어본다. 미친 여자, 미쳐버린 여자,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헝클며 발을 구르지는 않지만 광기로 휘몰아치고 끓어오르는, 혹은 완전한 폐허에 맨발로 존재하는 그런 존재. 그럴 때면 늘 어느 향수 광고를 떠올린다. 잘 차려입은 여성이 격식있는 연회장을 떠나 발을 구르고 머리를 헝클고, 춤추고, 파괴하고, 뛰어내리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각각의 시공에서 이야기를 플어내는 열한 개의 단편들 내내 여성이 자기-것을 조각내고, 들여다보고, 파괴하거나 저항하는 과정들이`불합리 혹은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재현된다. 이를 미치거나 미쳤거나 미쳐갈 여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좋다. 조금 더 미쳐도 좋겠다.
미친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미친 여자는 낯설다. 미친 여자는 힘이 세다. 미친 여자는 예측 불가와 괴력과 이질성과 보이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상징과도 같다. 미치지 않으면서 미칠 것을 요구받는 존재들. 미친 여자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미친 여자는 당신을, 세계를 부술 것이다.
p.25 골반 한쪽을 삐딱하게 기울여 선 채로 에바에게 말하는 엄마의 모습이 마치 방의 모든 빛과 공기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에바는 엄마의 거대한 존재감에 둘러싸여 협박당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더 우쭐해졌다. 엄마의 따스한 갈색 얼굴에 입 맞추고 싶었다. 손바닥이 얼얼할 때까지 후려치고 싶었다.
p.57 "도대체 언제쯤에나 흘려보낼 수 있는 거야? 우리 원래 대로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건데?" "흘려보내?” 나는 한밤중의 별처럼 불꽃이 번쩍 튀고 갑자기 감정이 울컥한다.
(...) "그게 뭐였는지 우린 알지도 못했잖아." 나는 알고 있었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보드라운 꽃잎들, 내 딸아이. 그리고 나는 히스가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길 원했다.
p.84 제이가 말한다. 다음에 또 내 동생한테 좆같이 굴면 네 침실로 찾아가서 이걸 쥐어뜯어 놓을 거야. 제이가 뱉는 말에는 어떤 그림자도 숨어 있지 않았다. 그 탁 트이게 열린 곳에서 녀석은 스르륵 열려버렸고 허세와 유산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두려움이 녀석의 얼굴 위로 떠오른다. 제이는 그 두려움을 뚫어져라 본다. 그리고 그 시답잖음을 음미한다. 그래 내 말 알아들었어? 제이가 묻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둠 속에서도 제이는 뜨거운 빛을 뿜어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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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날들의 기록 - 철학자 김진영의 마음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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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아침의 피아노』로 삶을 정리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던, 김진영이 그간의 저작을 거쳐 단상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의 글이 다시금 독자에게 말을 건다. 『조용한 날들의 기록』이라는 제목처럼 고요 속에서 솟아오르고 침잠하고 벼려진 짧거나 아주 짧은 사유들을 모은 이 책은 따스한 봄빛의 표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조용한 날들의 기록이다. 홀로 웅크리고 조용히, 오래 울어본 이가 남겨둔 시간들. 새벽 어스름에서, 한밤의 불빛 너머에서,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오래오래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다 다시금 사랑을 다짐해본 자만이 써낼 수 있는 글들. 스스로를 아주 많이 부끄러워하고 세상의 어떤 면모를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 김진영의 글이다.
김진영의 글은 매번 나를 울게 한다. 그의 글은 고개를 떨구게 하고, 오래오래 고요히 울게 만든다. 그의 다른 책을 소개하는 글은 이렇게 말한다. "호주머니에서 죽음을 꺼내면서도 삶을 말하고, 아픈 이별을 떠나보내면서도 사랑을 껴안았던 철학자"라고. 그런 까닭에 그는 아프고 처절하게 묻는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p.79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 줄을 덧붙인다: 그런데 빛이 있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어떤 빛이 있다. 이 빛은 무엇인가?
p.408 『애도 일기』에서 바르트는 말했던가: "사랑이 끊어진 자리에서 타오르는 문장들이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런 한 줄을 생략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만이 문장이다’

공교롭게도 근래 여러 사람으로부터 비슷한 고민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노력하는 사람을 다그치지 말라고 답하며 으레 "무릎을 꿇은 자의 등에 채찍을 때려서는 안 된다(신철규, "마비" 중)"던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그저 안타깝다가도 감히 내 주제에 할 말인가 싶어진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는 과연 어디에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김진영의 글에서 나는 떠나보낸 이와 그의 상실로 무너져내린 세계를 떠올린다. 현존의 부재가 부재의 현존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그 어딘가에 놓인 시간들을.
p.47 자꾸만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아니라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뭔가 빗나가고 틀렸다는 생각. 그런 자기검열 뒤에는 언제나 초조함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비록 그것이 애를 쓰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모자라는 일이고, 그래서 더 무언가를, 더 많은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그런 강박.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기를 용서하지 않으려는 불쌍한 자괴감.
p.74 한 사람이 죽었다. 그의 사진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고 머리를 숙인다. 이 잠깐 사이에 혼란을 느낀다. 그건 부끄러움일까, 죽은 자들 앞에서 산 자들은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그 어떤 본질적 패배에 대한 부끄러움.

세상의 추악하고 괴로운 부분을 직시하는 일은 분명 어렵다. 그 꼴을 보고도 여전히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힘없이 눈물을 떨구는 자기연민이 아닌, 바닥의 바닥을 짚어내는 사유와 글은 분명 그에게 일종의 사명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김진영의 글이 쉬이 잊히지 않아 밤을 지새우게 하고, 부옇게 동이 트는 하늘을 보며 되뇌는 까닭이다.
수많은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에는 끈질긴 사랑의 의지가 있다. 얼어붙은 땅에서 기어이 고개를 드는 풀빛의 생명들과도 같은 그것. 이따금 그것을 숭고함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눈물은 얼굴의 굴곡을 기억한다(신철규, "어둠의 진화" 중)"던 시인의 말처럼 슬픔은 삶에 궤적을 남긴다. 슬픔을 이해하는 자 또한 세상에 그러하다. 어쩌면 애도와 사랑은 잊지 않음, 아니, 잊지 못함에서 자라나는 감정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슬퍼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했던가, 애도의 무게, 사랑의 책무를 아는 이에게는 이해가 남는다. 그 자신과 타인과 삶 자체에 대한 이해가. 나는 그것을 품위라고 부른다.
p.157 사유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아니. 말을 고치자. 부여가 아니라 ‘수여‘다. 수여 안에는 부여에는 없는 특별한 태도가 있다. 그건 존경심이다. 혼란을 배척하지도 제압하지도 않기, 오히려 혼돈을 응시하고 발견하고 존경하기. 그것이 사유의 질서, 아니 사유의 품위다.
p.314 착한 것들은 부드럽다. 그러므로 당연히 부드러운 것들은 착하다. 그런데 그런가? 부드러운 것들이 반드시 착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점점 더 수긍하게 된다. 그것이 몹시 슬프다.
p.384 "혁명이란 뿌리에 도끼를 대는 일이다"
(…) 뿌리에 도끼를 대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 중에는 애도를 중화시키려는 정치도 있다. "나쁜 사회는 슬픔을 슬퍼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다" 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 혁명이란 그러니까 제대로 슬퍼하고 제대로 애도하는 일이다. 역사 안에서 '애도의 정의가 구현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마지막 기록을 담은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서, 꼭 잡으면 잠자는 물고기 한 마리가 손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김진영, 『조용한 날들의 기록』"는 이답지 않은가.
한 권의 책을 채우는 짧은 글에 바위와도 같은 고뇌가 있다. 적막한 가운데 소란한 마음의 기록이 있다. 아마도 나는 또다시 쉬이 잊지 못할 문장을 되뇌어 볼 것이다.
p.140 마음이 늘 불편한 건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건, 아마도 아니 거의 분명히, 마음껏 사랑하지 못해서, 그럴 수가 없어서인지 모른다.
p.445 약한 사람은 더 약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강해지려고 한다. 그 강함이 약자들의 연대, 연민 혹은 사랑이다. 사랑은 본능도 천성도 아니다. 사랑은 약한 사람들이 긴 세월을 통해서 발견한 생존의 필연적 논리다. 그런데 이 논리를 생존술이 아니라 통치술로 이용하는 두 영역이 있다. 나쁜 종교와 나쁜 정치가 그것들이다. 그들은 약함을 강함과 생존의 논리가 아니라 순응과 순종의 논리로 더럽힌다. 타락한 종교와 정치가 그 끝에서 사랑과 정의가 아니라 법과 형벌로 귀결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 법으로부터 마침내 벌받고 추방당하는 이들이 약한 사람들이라는 건 더더욱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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