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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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상은 현실에서 출발한다. 만일 혹은 만약에-를 가능케 하는 것은 지독한 갈망 혹은 희망 어딘가의 지점일 것이다. 그 위에서 떠돌고 주저하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어느 존재의 물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미래 혹은 어느 시점의 세계를 그려낸다. 그러므로 상상은 현실 속의 어떤 것보다도 현실을 충실히 반영해낸다.

짧다면 짤고 길다면 긴, "얼음"을 테마로 한 단편들을 읽고 조금, 울고싶어졌다. 이 글은 수많은 '왜'에 답하고자 했던 시간들의 자국이다. 어째서 이렇게 쓸쓸해야 하는걸까. 어째서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는 일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쉽고 아름다울 수 없을까.

p.12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사람 목숨이 중요한가요? 그 많은 별과 은하계가 생기는 데도 몇십억 년의 세월이 필요한데요. 그것들을 모조리 다 없애도 기분이 언짢지 않으세요?"
p.47 나는 여기 붙들려 삶도 죽음도 모르는 채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내가 그들의 삶을 보장해야 하는가. (...) 내가 바란 적 없는 제물을 들고 와 앞에 늘어놓는 걸로 멋대로 계약을 맺으며, 신의 뜻대로......를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제 뜻과 맞갖지 않으면 신을 원망하거나 부정하기 일쑤인 이들아.


이따금 그런 말을 한다. 사람은 바이오동력 음식물 쓰레기통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러나 아직은 사람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누군가가 최초의 살인을 저지를 때, 언젠가는 최초의 포옹이 일어났을 것이며, 누군가 굶주린 자를 내버렸다면, 어디선가는 제 입에 든 것조차 내어주는 사랑 또한 존재했을 것이라고.

실소도, 고소도 웃음이며 실낱같은 희망도 희망이다. 희망과 절망은 "望"을 공전하는 쌍성과도 같다. 사람이 사람을 해친다면, 파괴되는 인간성은 모순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괴테는 말했다. Lieben belebt, 사랑이 살린다. 오래된 종교들은 사랑할 의무를 말한다. 진부한 표현이다. 그러나 진부한 만큼 끈질기게 살아남은 말이다. 사랑이 열쇠가 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쓰고 시리고 막막한 이야기에서 눈물을, 눈물에서 반짝임을 찾아낼 수 있다.


p.55 그런데 어쩌면 얼음이 녹아 예전의 문명을 모두 휩쓸어 갔다는 얘기는,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의 추측에 불과하지 않을까? 실제로는 얼음이든 무엇이 됐든 서로 더 차지하려다가 절멸을 불러온 게 아닐까?
p.65 당신이 그 안에서 너무 춥지 않기를... 언젠가, 이 세계가 그때까지도 무사하다면, 당신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과 만날 행운을 누리기를...
p.71 어머니에게 남편은 영혼과 분리된 살덩어리, 단백질 보충원에 지나지 않았다. 비난해서는 안 된다. 당연한 일이니까. 죽은 자를 먹는 것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정한 규칙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행복은 내리막길, 고통은 오르막길과도 같다. 빠져들고 지나치기에는 그저 웃으며 눈을 감고 만끽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는 막막한 경사와 터질듯한 심장을 마주해야만 한다. 행복의 고지에서 미끄러뜨리고 고통의 밑바닥에서 바닥을 밀어차고 버텨내게 하는 힘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절망의 정점, 균열의 가장자리 혹은 행복의 구렁텅이에 놓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어떤 순간도 등을 떠밀고 발밑을 흔드는 선택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택은 온점이 아닌 반점이다. 선택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며, 선택하는 이와 그가 남기는 시간에 따라 흔적을 남긴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이며, 절망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는 까닭이다.

p.78 왜 어떤 이는 규범에 순응하고, 어떤 이는 규범에 저항하며, 어떤 이는 규범에 군림할까.
p.192 운조는 로타의 투명한 몸통 너머로 보이는 숲과 푸르고 붉은 혈관, 쉼 없이 뛰는 심장을 보았다. 그것은 낯선 세계, 누구도 본 적 없는 세상의 진짜 모습이었다. 세상은 타인의 몸에 담긴다. 운조를 지나쳤던 모든 이의 몸을 통해 운조는 세상을 보았다. 참혹하고, 아름다우며, 고귀하고, 추악하나 그 누구도 드넓고 평온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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