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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지음 / 래빗홀 / 2023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올해가 관동대학살 100주년이라고 했던가. 해방 직후 난리통에 언론통제까지, 제대로 알려질 기회조차 없었다.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일, 누군가가 존재했던 흔적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박해가 없었음을 주장하는 가해자의 진술은 박해당한 존재들의 증거가 된다고.
식민지배기, 땅이 갈라지고 세상이 붕괴되는 대재난의 혼란 속에서 지배국의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처지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어제까지의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권리도, 실낱같은 도덕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을런지.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 수 배가 넘는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최신식 설비와 시스템을 갖추고도 지진은 국가적인 재난이기 마련인데 1923년, 당시의 혼란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는 말은 잠시간의 위로일 뿐이다. 일시에 끊어지지 않은 삶,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나긴 일상을 치러내고 복구해야만 한다. 최소한의 울타리, 몸을 가리고 바람을 피할 곳, 당장 입에 넣을 쌀 한 톨조차 남지 않은 사회는 더이상 이전의 문명과 질서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기 마련이다.
이제 와 한순간에 야만 이하의 야만으로 내던져진 이들의 기록을 살피다보면, 필연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만일 그 때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단 하나의 무언가라도 바꿀 수 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과연 나는 그 참극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가’.
이것은 필사적인 희망이자 애도의 일환이다. 단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면, 익숙한 얼굴을 두려워해야하는 참극 속에서 잊혀져버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살아달라고, 미안하다고,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으나 누군가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고, 그렇게 전하고 싶은 마음일테다.
2023년, 가상의 도쿄 카타콤베, 각각 한국인과 일본인인 이들이 모종의 임무를 띠고 관동대지진의 현장에 파견된다. 한 명은 어딘지 비장한 반면에 다른 한 명은 적대적이다 못해 분노에 찬 태도인 상황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그들은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직접 보고, 기억해 돌아와야 한다.
누가 어디서 얼마나 용을 쓰든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시간과 사건의 기록이다. 사람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손을 벗어난 것이기도 하다. 필연적으로 과거를 들여다보게 되는 그것은, 달라질 수 없으나 작은 요소에도 크게 변화한다. 과거는 현재 안에 존재한다.
혼란, 비명, 피흘리고 부서지는 것. 한계와 무력함을 알면서도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와 강자의 논리에 부재했던 갇힘, 극한의 수동성을 경험하는 이를 통해 독자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 새로 디뎌 일어서야 할 지점을 목도할 것이다. 목격, 닿을 수 없음, 그저 들여다보기, 산 사람이 남아 할 일을 찾기, 그것이 과거를 마주하는 현재-후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빈 자리가 그곳에 있던 존재의 흔적이 되듯이 어떤 부정은 가장 강한 긍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 지배되고 흡수되어 정체성을 박탈당한 ‘우리-아님’의 존재는 지배국의 사회 체계가 피지배국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흡수하는 데 실패했음을 역설한다.
이미 있었던 것, 이미 일어난 일을 지우는 일은 선을 긋고 덧칠하다 종내에는 종이를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흔적이 남는다. 사람은 사람으로 흔적을 남긴다. 공간에 남은 기억과도 같다.
속 시원히 해결된 것 없는, 결국 처음과 다르지 않으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달라진 현재로 돌아와 작가는 다시 묻는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냐고, 그러고도 여전히 이전으로 돌아가 그린듯한 과거를 펼쳐보일 셈이냐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당신의 현재는 과거의 무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