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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최태현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평점 :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민주주의에는 희망이 없다. 민주주의는 더이상의 효용을 갖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이상일 뿐이고 당장의 현실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독재자일지라도. 너무도 익숙한 말이 아닌가.
명목상이라고 할지라도, 민주주의 외의 체제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서조차 심심찮게 들려오는 반-민주주의 구호들이다.
나또한 평생을 민주주의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으나 그 효용성보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더딜지라도 부당하지 않으려 애쓴다는 장점이자 핵심보다는 폭력적일지라도 빠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미는 독재자를 원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때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p.49 멋진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 역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우리의 마음과 작음에 초점을 두고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p.105 누군가가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언가에 의해 대표된다는 것은 그것들 간의 어떤 연결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주권이 여전히 자신들은 정치로부터 멀다 느끼는 민중에게 있을 때, 권력이 한 명에게 집중되지 않을 수 있는 견제장치로서 자리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가장 조용하고 무력한 것처럼 보이나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정치형태이다. 무엇에? 퇴보에, 독재에, 권력의 폭력에. 설령 그것이 와닿지도 않는 한 줄짜리 문장으로나마 존재할지라도.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요즘이다. 멀게만 느껴진다. 일개 시민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수천 명이 모여 외친들 권력의 손짓 한 번에 함구할 수밖에 없지 않은지 회의적으로만 느껴지는 시대이다. 나날이 그러하다.
정치분야 뉴스에 한숨 한 번 쉬어보지 않은 자만이 이 책을 보지도 않고 밀어둘 수 있다. 아니, 그런 이야말로 더더욱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 주권자로서의 민중이 영원히 일치단결될 수 없는 권력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p.198 우리가 리더에게 ‘우리만의’ 이익을 기대하는 것을 리더나 리더가 되려는 권력추구자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이러한 마음에 호소함으로써 사회적 검증 시스템을 지나 우리의 리더가 되고, 그의 무능력과 무책임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결단코 말하건대, 민주주의는 단 한 번도 모두가 만장일치로 박수치며 환영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쉽고 빠르고 편한 길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는가. 어째서 포기하지 말아야할까.
제목만 보면 절망하고 지쳐버린 이들에게 위로를 줄 것만 같다. 희망차고 즐거운 구호로 다시금 우리를 똘똘 뭉쳐 약진하는 세계로 이끌어줄 것만 같다. 그렇게 “철인왕”을 바라는 나약하고 은밀한 인간의 습성을 마주하게 하는 것도 효과라면 효과일 것이다.
그러나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이것만 믿고 따라오시라는, 희망의 청사진이나 등불 따위를 안겨주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다고, 그것만이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단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제목의 참된 의미이다.
p.225 민주주의에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가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유입니다.
p.362 우리는 우리가 놓인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헛된 철인왕과 독재의 꿈으로 이어집니다.
희망이 있어야 절망이 있다. 기대하고 노력하지 않은 자는 실망하고 아파하지도 않는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가능성이다. 상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키는 대로만 살다 죽으면 그만인 삶이 전부가 아님을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 절망은 희망의 존재를 증명한다.
민주주의는 허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다. 모든 정치체제가 그러하고,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 대체로 그렇다. 상호간의 관습적이고 암묵적인 합의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만이 허상이 아니며, 민주주의 사회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허상이 아니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고민해보자고, 우리가 절망하는 바로 그 지점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마음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낙관이 아닌 희망을, 끝이 아닌 절망을, 내가 나이고 네가 너이기를 포기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p.370 우리는 절망과 구분되는 희망을 품는다기보다는 절망하기에 희망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절망이 틔우는 싹이자 꽃일 것입니다. 하찮은 절망이 아닌 운명적 절망은 우리가 순진한 낙관에 빠지지 않게 하는 희망의 방부제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은 생명의 방부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