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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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해 주로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말, 낡아빠진 옷을 걸친, 후줄그레한 남자들이 술집에 모여 떠드는 모습, 광활한 자연에서의 낭만적인 (웩...) 사랑, 타는듯이 내리쬐는 태양,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 강가에 늘어서서 목을 축이는 짐승 때와 야생의 잔인함... 무엇이든 간에 미디어의 환상을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고립된 사람, 몸도 마음도, 사람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자기만의 세계로 처박혀버린 사람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를, 멀리서 봐야만 아름다울 수 있는 생의 면면을. 헛되고 또 헛되니 진실되고 본질적인, 뜨겁게 맥동하고 차게 얼어붙어, 숨쉬고 죽어가는 야생의 강렬함에 매료되는 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p.304 ”자네 신세는 자네가 망쳤어. 자네와 자네 같은 인간들이. 자네가 살면서 매일 하는 일이, 자네가 하는 모든 일이. 아무도 자네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했어. 그러지 않았어, 죽인 사냥감들의 악취로 땅을 뒤덮으며 제멋대로 살아왔지. (...) 자네는, 자네들 모두는 내 말을 귀담아들었어야 했어. 자네들은 자네들이 죽인 짐슴들보다 나을 게 없어."


조금쯤 서럽기도 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겠느냐고. 크고 텅 빈, 어디에도 의지하고 숨을 수 없는 자연에 홀린 듯이 숨어들고 싶은 적이 없었겠느냐고. 나라고 몰라서 그랬겠느냐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은 잔인하다. 동시에, 잔인한 것은 아름답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자유로워 보이나 자유로운 것의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표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읽는 순서와는 반대로 한바퀴 빙 둘러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다. 숨을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땅에 마주한 존재들. 모든 것을 주변으로 두고 단지 겨누는 곳, 단박에 숨통을 끊고 주저앉힐 수 있는 그곳만을 응시하는 사람.

p.98 무감각은 매일매일 슬금슬금 파고들어 마침내는 그 자신이 된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개성도 형체도 없는 땅처럼 느껴졌다. 때로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를 마치 없느 존재인 양 쳐다보거나 살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인다는 걸 직접 확인하려고 고개를 급히 젓거나, 팔이나 다리를 들어 올려 쳐다보았다.

p.170 사냥의 끝 무렵에 밀러는 움직이는 들소 무리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자동 기계 장치처럼 보였다. 그리고 밀러의 들소 사냥은피에 대한 굶주림, 가죽 또는 가죽이 가져다줄 무언가에 대한 욕망, 또는 심지어 ㅁ;ㄹ러 안에서 음울하게 작동하는 맹목적인 분노가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외롭구나, 외롭고 잔인하구나. 순간순간 중얼거리게 한다. 사실 시대상으로나 상황적 맥락으로나 서부극을 좋아하지 않아 안티-서부극이라는 설명을 수차례 보아도 그러려니, 싶다.

다만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작가의 이력에서 무언가를 간신히 짐작해볼 뿐이다. 대체 무엇을 보고 돌아왔기에 살아있는 존재를 이토록 무력하고 나약하게 여기는 걸까. 뜨거운 맥동에서 웅혼함과 끓어오르는 투지가 아닌 비참과 허무를 느끼는 걸까.

p.78 "그래요, 돌아오겠죠.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옝쇼. 젊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졌겠죠."

p.307 "서부는 오래 있을수록 감당이 안 돼. 너무 크고 너무 텅 비었어. 그리고 거짓이 자네에게 찾아오게 하지. 거짓을 다룰 수 있기 전에는 거짓을 피해야 해. 그리고 더는 꿈같은 건 꾸지 말게. 난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밖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


단순한 줄거리에 비해 지극히 무겁게 쓰여진 작품이다. 읽는 이마저 침묵하게 만든다. 마치, 수십 번쯤 살아본 사람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처받을 구석이 남아있는 사람처럼.

어떤 결단, 혹은 만용이라고 볼 수도 있을 시도와 고립된 시간을 거쳐 주인공은 부처스 크로싱에 갓 도착할 때의 예민하고 생생한 젊은이에서 굳은살이 배기고 죽은 피 냄새에 절여진, 부서진 인간이 되어간다.

생을 마주하는 경험, 대등하지 않다면 곧 살육이다. 주고받을 수 없었던 폭력은 곧 학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독자를 놓아준다. 아니, 놓아버린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내려놓아져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게 된 독자는 다시금 외로워진다.

처음으로 돌아갈 것인가, 차마 마주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한 인간이 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비극이나, 결국 독자의 몫이다. 어떤 순간은 영혼의 깊은 곳을 뒤흔들어 평생을 바꿔놓기에.

p.336 맥도널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태어났던 곳, 자기의 과거 모습과 겨우 깨닫기 시작한 조건으로 자신을 키웠던 곳,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게 황야로 몰아 낸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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