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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에 그럴 수도 있지, 가 어디 있을까. 위험요소가 있는 현장에서 노동하는 것과 노동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위해를 입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전자에 동의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후자에까지 동의한 것은 아니다. 목숨을 빼앗기는 일에는 그 누구도 동의할 수 없다.
사례, 라고 감히 부를 수 있다면, 아무리 건조하게 서술하려 애를 썼대도, 얼마 읽기도 전에 그 규모와 참혹함에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다. 먹고 살려면 못 할 일이 없다지만, 먹고 ‘살려고’ 하는 일에 목숨을 빼앗기는 일처럼 어처구니 없는 게 또 어디 있겠는가.
p.18 사고 나기 전에는 내도 솔직히 산재에 대해서 신경 많이 못 썼습니다. (...) 뉴스 나오면 남의 일이죠. 그러다가 이게 어느 날 갑자기 내 가족이 피해를 당하면 내 일이 되더라는 거죠.
수백명이 오르내리는 지하철, 그곳에서 사람이 깔려 죽었다. 먹고 자고 일어나는 집이 지어지는 곳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달콤한 빵을 만드는 반죽 기계에 사람이 갈려 들어갔다. 사람이 목전에서 머리가 으깨져 죽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뼈가 부서져 죽고, 짐덩이에 차에 철판에 온몸이 으스러지고, 맨몸으로 올려진 전신주에서 숯덩이가 되도록 타죽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동료 노동자들은 애도는 커녕 침묵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았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이 매일같이 일어난다면, 그러고도 내가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오히려 해고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해야 한다면.
p.114 법이 보호하기로 한 노동자 집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회사가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떤 조처를 했으면 사고가 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회사가 노동자의 건의 사항을 무시한 사실과 현장을 훼손한 행위에 대한 사법적 책임도 묻지 않았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서, 애도는 커녕 수습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곳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 사실을 어디에 말할 수도 없다. 당장의 생계는 물론, 고액의 소송비용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다. 위험한 일에 밀어넣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현장의 요구는 돈이 되지 않으므로 묵살된다. 마음처럼 쉽사리 박차고 나올 수도 없다. 내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데, 나의 생계는 내가 아니면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항의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다. 말해봤자 듣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이 모든 일이 예방 가능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최초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대책을 세우고, 개선방안이 나왔을 때 고쳐나갈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돈이 되지 않아서, 사람이 가장 싸기 때문에. 절차보다도, 기계보다도, 하다못해 소모품 조각 하나보다도 사람이 위험으로 내몰리는 것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p.157 노동자의 자기 보호 의무는 수없이 강조되지만 사업주가 노동자를 보호할 의무와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365일, 한 해에 2천 223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에 여섯 명 꼴이다. 자 지금부터 매일 여섯 명씩 죽이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려니 넘기는 이가 몇이나 될까. 다치는 일은, 간신히 죽지만 않은 사람까지도, 아직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우리 사회는 왜 같은 이유 벌어지는 죽음을 막지 못하는 걸까. 왜 법정에조차 명확한 과실을 유야무야 넘기는 걸까. 우리는 이 문제의 답을 모르지 않는다. 방법부터 길까지 알고 있다. 적어도, 그것을 실현되게 할 책임이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p.241 수사도 판결도 결국 피해자의 아픔을 덜어주고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국가의 노력이다. (...) 정부가 소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가로부터 버려졌다’ 혹은 ‘국가가 나를 재난 속에도 돌보고 있다’는 상반된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 벌어지는 일은 사고가 아니다. 사건이다. 하물며 안전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고의로 방치하는 것은 살인시도에 준해 다뤄져야 한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안전한 노동현장을 바란다. 어쩔 수 없이 위험한 곳에 놓인 이들이 위험하지 않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노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노동자와 관계맺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죽기 위해 일하러 가는 사람은 없다. 일터에서, 일 때문에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이야기는 몇 번이고 여기서 출발되어야 한다.
p.293 재해를 안다는 것은 (...)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마음 깊이 추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터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온몸을 쭈뼛 세워 받아들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몇 줄의 속보로만 전해지던 이름 없는 죽음들이 저마다 맥락을 가진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우리는 그들을 추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