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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왜 사랑하는 것들은 나를 울리나... 사랑하는, 사랑을 하는, 내가 혹은 나를 사랑하는. 애정을 갖는 것, 마음을 빼앗기고 고통마저 끌어안도록 하는 그것은 어쩌면 운명에 새겨진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들은 운명의 꼭두각시가 된다.
사랑! 참 이상한 것이다. 대단찮은 이유에 모든 인생을 걸게 하고, 다시 없을 운명적 만남이라 생각했던 이가 한때의 착각에 불과한 허깨비가 되기도 한다. 오로지 사랑이라고 믿는 마음 하나 때문에.
사랑에는, 설령 자기 자신을 향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둘 이상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것. 그러나 사랑의 종결에는 변심 혹은 존재의 소멸이랄지, 아무튼 사랑의 관계를 부수고 나가버리는 단 하나의 이탈만이 필요하다.
p.330 결정적인 순간들 이후 우리는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난도질 당한 삶들, 그림자의 피조물들.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운명의 꼭두각시들. 우리는 유령이 되었다.
세상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다. 대체로 세상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러나 사랑의 기억이 삶을 무너뜨린 시간에 이어져있다면, 때문에 스스로가 차마 마주할 수 없다면...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에 절망에 몸부림치다 끝내 도망쳐버리기를 택했다면, 차마 함께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1차대전 이후 파국에 치달아버린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빛바랜 사진처럼 흘러간 시간 속 풍경에는 누군가가 뜨겁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웃음짓는 이들이, 세상을 물들이는 사랑으로. 그것이 무너뜨린 세상을 오직 그것 하나로 버텨내거나 혹은 무너지지도 못해 지워버리기를 택하며.
p.193 당신은 영국인인 나를 경멸한다, 라는 생각이 몇 번이고 끈질기게 나를 강타하며 사라지길 거부했다. 영국인들이 당신 집에 불을 지르고 당신 가족을 파괴했다. 당신 어머니가 스스로에게 불러온 죽음은 그 비극의 일부였다.
당신은 나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은 나의 유년이고 마지막으로 온전했던 기억이다. 모든 것이 비명과 잿더미로 사라진 지금, 기억은 악몽이 되고 돌아갈 곳은 폐허가 된 지금 나의 사랑은 곧 고통, 그것도 차마 마주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러니 당신의, 나의 사랑을 부숴버리지 않고서는, 나의 세계 전부를 지워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나의 사랑은 죄책과 파멸이었다고, 차마 용서조차 구하지 못한다고 속죄조차 바라지 못하는 나를 끝내 용서하지 않기를.
p.168 “당신에게 킬네이를 보여주면 좋읉 텐데.” 당신은 미소 지으며 그러고 싶지만 당신에게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다. 당신과 함꼐면 슬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소개와는 다르게 사랑은 재앙의 씨앗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사랑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의 많은 이들이 사랑을 잃어버린 고통,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기에 포기할 수 없는 고통으로 무너져버리거나 무너지지 않기를 택했다.
먼지 쌓인 시간의 반짝이는 기억들,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마저 끝내 끌어안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 울게 하소서, 슬퍼하는 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있었으니. 무너진 땅에도 잊혀져가는 사랑이 있으니. 때로 순간의 기억은 평생을 살게 하나니.
p.262 난 당신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려 애썼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당신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난 지금 나의 선택을 당신이 비난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우리 둘이 어디에 있든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