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로동 헤리티지 - 공단과 구디 사이에서 발견한 한국 사회의 내일
박진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디 사세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내게는 이 질문에 답할 말이 없다. 없다기보단, 만족스러운 답은 내놓을 수 없다. 오래 산 곳도, 좋은 기억으로 가득한 곳도, 익숙하다못해 눈 감고도 찾아다니는 길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곳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적이 있느냐 하면 그저, 아니요. 사는 곳이 그냥 사는 곳이지, 밖에.
어쩌면 지레 겁을 먹고 마음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수도 없이 마주했던 아름다운 동네, 곳곳에 정 붙인 골목들에 추억과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여 끌어안는 순간, 변화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사라지기 마련인 것들에 오래도록 슬퍼할 것이다.
나는 그런 슬픔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이라고 오래 생각해왔다. 연습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남의 동네, 거주가 아닌 방문의 장소로 여길 수 있는 곳만을 조금 떼어내 모아두며 살아왔다.
그러나 가까이서, 오래,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해도 뜨기 전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한낮의 버스 안에서 피로에 지친 얼굴로 졸고 있는 사람, 같은 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조금씩 달라지는 옷차림, 척 봐도 멀리서 온 티가 나는 사람(과 짐가방), 사라지는 건물들, 바뀐 주소와 골목 등.
곰곰이 생각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어떤 장소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곳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배경으로 밀려난 공간을 전경의 지위에 놓는 것과도 같다. 뭉뚱그려진 장소와 사람의 시간을 살며시 펼쳐보이는 일과도 같다.
어떤 동네는 이름만 들어도 다 안다. 혹은 이름만 들어도 혐오 섞인 우려가 튀어나온다. 어쩌면 회상으로의 여행에 동참할 수도 있겠다. 저자의 ‘구로’는 그런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공단, 어떤 이에게는 디지털단지, 또 다른 이에게는 “그 중국인 많은 동네”.
그저 다니기 싫은 곳일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곳일까. 수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한, 낡고 어두운 곳일 뿐일까. 위험하고 후줄근한 곳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곳은 역사의 중심이었고, 변화의 중심이었고, 탄생과 성장이 있는 곳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우수하다”거나 “이제는 더 이상 나쁘지 않다”가 아니라, 그런 역사가 있었고 여전히 누군가가 태어나 자라 살아가는 곳이기에 마찬가지로 특별하다고, 다른 곳이 그러하듯 이 도시 또한 경이와 매혹으로 가득한 삶의 터전이라고.
여기서 멈춘다면 이 책은 어느 날의 소묘, 정도로 일축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도시의 경계를 넘어서는, 현대 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보기를 요구한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니,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이 문제는 당신에게 이 도시가 그러하듯 ‘남의 것’으로만 남을 수 없다고.
구로는 오래된 도시다. 필연적으로 가난하고 바쁜, 선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가득했다. 그렇게 성장했다. 구로에도 일하는 사람이 산다. 첨단기술과 부의 중심인 어떤 곳과는 사뭇 다를지언정, 구로에는 노동의 역사가 있다. 삶의, 쉼 없는 변화의 역사가 있다.
이 도시를 아시나요? 이 곳의 시간을 아세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자라 빛이 바래고 낡아가시는지, 낯섦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는지 들어본 적이 있나요?
구로의 역사와 개인의 추억을 직조해가며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
면, 그 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독자 또한 저자의 ‘구로‘를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궁금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당신의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그 동네는, 당신의 ‘곳’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나요. 당신의 장소와 시간을,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가 닿을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