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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완전한 정착을 말하기엔 멀고, 그렇다고 불가능을 못박자니 가까운데다 제법 가능성은 있어 오래도록 SF 장르의 무대로 사랑받아온 곳, 화성.
이를테면, 화성에 독립적인 행정기관이 수립된다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면, 포기하자니 간절하고 수급하자니 영 요원한 음식이 그리워진다면, 시공간의 벽이 어렵지만 투과(정복이 아니다) 가능한 것이 된다면, 그 모든 만약에 ‘지구인들’이 고개를 쭉 빼고 기웃거리고 있다면.
요컨대 나의 고민은 이런 것이다. 화성에도 사랑이 있을까요. 화성의 노을은 푸르다던데, 붉은 땅에서 바라보는 푸른 노을에도 여전히 눈물짓는 사람이 있을까요. 시간과 중력을 공유할 수 없는 행성에서도 여전히 사람은 사람의 삶을 살까요.
p.10 가혹한 환경과, 화성 표면에서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유 같은 것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여기서는 서로가 서로의 신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럼 우리는 이미 다 끝장난 게 아닌가, 하고 지요는 생각했다.
필요가 정착을, 정착이 토대를. 자연발생이 아닌 모든 것이 계산되고 통제된 형태로 생산되는(설사 그것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우리는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정상을 구축하게 될까요.
개인적 감상이기는 하나, 수록작에 이전 작품들에 비해 쓸쓸함이 크게 묻어난다. 이미 이주가 시작된, 그것도 허허벌판 꼴은 면한 어색한 환경을 굳이 부정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래서일까. 표지의 홀로 선 사람이 너무도 외로워보였다. 지구는 푸른 별, 그곳의 노을은 붉은데 정반대로 뒤집힌 붉은 땅의 푸른 노을이기 때문일까. 띠지의 “이 행성에서는 지구에서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가뿐히 초월하기를”, 기원처럼 느껴지는 이 문장마저 쓸쓸하게 느껴졌다.
p.40 ‘다음 날 아침에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발견되는 것. 이 행성에는 그게 사건이야. 여기는 차가운 지옥이지만 우리는 매일 그 사건을 일으키고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공동체의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서 아침마다 일으키는 기적이지.’
배명훈이 그려내는 화성은 결핍되고, 척박하고, 어떤 때엔 쫄쫄 굶을 지경인데다 살인을 저지른 자조차도 도망갈 곳 없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속된 말로 좁아터진 곳이다.
마음도, 공간도. 이 넓은 우주의 한 행성에 바글바글 몰린 지구인처럼, 그 넓은 행성의 기지 어딘가에 이리저리 낑겨있는 화성인들.
낯선 곳에서의 빈곤한 상황, 우리가 본디 유래하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고 나아가 환경 자체를 구축하는 것. 어쩌면 이 모습은 지구에 처음 문명을 건설할 때의 인류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러니, 또한 어쩌면, 작가가 그려내는 화성의 척박함, 설움, 권태, 고립과 무용은 지구인이 수차례 겪어 무뎌진 고통일지도 모른다.
p.60 “쓸모 있는 사람들만 보내서는 100년이 지나도 사회가 완성되지 않아요. 쓸모 있는 인간이란 결국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사람들이니까요. 문명이 완성되는 건 다른 목적이나 임무를 지니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화성으로 건너가는 순간부터입니다.”
한 번도, 그러니까 그 개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기존의 것을 삭제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개념도, 존재도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불가능에 맞닥뜨린다. 상상은 쉽지만 말살은 어렵다는 것. 아주 작은 기억만으로도 불씨가 당겨진다는 것.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아주 새로운 곳의 새 문명에서도 어떻게든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배척하려 드는 존재인 동시에 어디선가는 기어코 사랑을 발명해낸다. 그 또한 지구-유래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라 할지라도.
그렇기에 때때로 슬프고, 자주 외롭더라도 옆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 아닌가. 마치 사는 일이 그러하듯이. 새로운 곳에서 이제까지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기를, 더이상 이렇게 슬퍼하지는 않기를. 화성과 나, 낯선 곳의 외로운 이가, 깊은 우주의 공백을 건너.
p.180 미사일은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안전장치가 부착되지 않은 지하철 자동문처럼 인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미사일은 키스가 뭔지 몰랐다. 인간의 마음이 왜 움츠러들거나 황홀해지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