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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약시대 - 과학으로 읽는 펜타닐의 탄생과 마약의 미래
백승만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3년 11월
평점 :
*출판사 히포크라테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마약청정국, 적어도 나는 그렇게 듣고 자랐다. 우리나라는 마약 사용자가 거의 없으며 유통 단속에 엄격하다고. 그래서 어쩌다 한 번씩 마약사범 관련 뉴스가 떠도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 당장 코앞에 닥친 일이 될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니 세대와 계보를 잇는 미국의 마약 중독 사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마약이라고 하면 단순한 환각제, 기껏해야 수면제 정도를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제까지 무심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갈수록 의문이 든다. 이제는 확신에 가까울 정도다. 그렇게 단속과 처벌이 엄격했다면 이름만 달리할 뿐, 하루가 멀다하고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이야기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근래에는 “마약”이 최상급 수식어로 칭해지지 않았던가? 그것은 어디에든 붙어, 종류를 가리지 않고 광고부터 개그까지, 말그대로 전국을 도배하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이전부터 수없이 제기된 지적이 있다.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우리 사히는 마약으로부터 안전한, 순수한 청정지대가 아니다. 알지 못하고 알아도 쉬쉬했을 뿐, 묵인과 무지로 덮였을 뿐이다. 코앞에서 사건이 벌어져도 태반은 무슨 일인지도 모를만큼.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대참사로 기억되는 2001년 9.11 테러 사망자는 약 2,980명이었다. 그렇다면 최근 CDC 통계 기준 오피오이드 남용으로 인한 사망자는? 무려 일평균 약 220명, 전자의 약 두 배다. 그 끔찍했던 대량사망이 한 달에 두 번 꼴로 일어나는 셈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충돌과 달리 마약 중독자의 사망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조용히 죽는다. 그들은 말을 잃고, 사회적 지위에서 밀려나며, 쉽게 잊힌다. 원인과 해결책을 모르는 이 없으나, 너무도 큰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개인의 부도덕, 공포심 조장, 뒷골목의 어둠으로 밀려난다. 정말 큰 일이 나기 전까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 사회 전체를 뒤덮을 때까지.
p.6 대마약시대가 왔다. 연예, 스포츠,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에서 마약 관련 뉴스를 접할 수 있다. 검사를 시행한 모든 하수처리장에서 마약이 검출됐고, 다크웹과 SNS를 이용한 마약 거래가 늘어나면서 마약 사용자의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마약류 사범의 수는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우리 사회의 약물 중독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비난과 처벌에 머물러있다. 중독을 개인의 일탈로 보는 시선이 지배적인 탓이다. 물론 그런 사례를 배제할 수 없다. 쾌락범죄자를 왜 세금까지 들여가며 치료하고 사회 복귀를 도와야 하느냐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독성 약물, 특히나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펜타닐의 기원은 처방약물이다. 제약회사가, 전문가가 안전성을 토대로 제조하고 처방되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중독장애를 초래했다. 이것은 재난, 그것도 인재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결과는 의도만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비난이 해결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좋은 이유로 만들어낸, 적어도 처음부터 중독을 야기할 목적으로 개발되지는 않은 약물이 도리어 평균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지금의 펜타닐 중독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현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하고 더 큰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지적인 치료 환경과 낙인찍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p.75 펜타닐이 마냥 나쁜 물질도 아니다. 약에 무슨 좋은 약, 나쁜 약이 있겠는가. 효과적으로 쓰는 약과 그렇지 않은 약이 있을 텐데 펜타닐은 제대로 쓰기만 하면 이보다 더 좋은 진통제도 찾기 어렵다. (...) 양날의 검이다. 극도로 위험한, 그래서 제대로 알고 써야 하는 기적의 진통제가 바로 펜타닐이다.
엄청난 손실을 겪으면서까지 중독성 물질에 손대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을 때, 불운한 경우로 중독에 이르러도 얼마든지 안전하게 회복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당연해진 때에 비로소 사욕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는 이들에 대한 처벌을 논할 수 있다.
대마약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약이 꼭 필요한 사람 외에는 선택지에 들지 않는 것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 수준이 마약 사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하고 행복해야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마약중독을 외부의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이전의 방관을 그만두고 긴장해야 할 때이다. 환자, 처방에 관여하는 의료진 뿐만 아니라 사회정책에 책임을 지는 모든 이들과 시민까지도.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p.255 중요한 것은 예방 교육이다. (...) 처음부터 마약류 시장이 작다면 펜타닐이 발붙일 여지가 없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 펜타닐 사태의 처음 원인이었던 공급을 억제하면 더 좋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약류 중독자를 줄여야 하고, 그래서 예방 교육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