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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평점 :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집에 관한 이야기이자 집을 둘러싼 마음들의 이야기. 라는 소개를 보았다.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언젠가 스쳐지나간, 혹은 옆자리에 잠시 머물렀던 어떤 사람의 곁을 따라 여행하는 독자는 유령이다. 그렇다면 머무르고 숨쉬고 부서지고 휘청이는 이는 무엇이라 불릴 수 있는가? 그는 말할 수 있는가? 서술하시오.
문학에서까지 구질구질한 현실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도리어 묻고 싶다. 어째서 상상이 현실보다 언제나 낫다고 생각하는지. 구질구질하고 평범하고 가난한 삶은 안타까운 눈물을 자아내는 소문 너머,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누군가의 어떤 현실은 재현되기를 제한당해야만 하는지.
끝없이 작고 상냥하게, 은근하게 이어지는 굴욕, 선뜻 주어지는 동정, 말하고 싶지도 들키고 싶지도 않은 치부가 까발려지는 마음, 삶, 몸, 돈, 공간, 집.
p.87 그것이 만옥을 두렵게 했다. 금방 허물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이 집이 지금껏 이렇게 건재하다는 사실. 재개발을 기다리며 허비한 시간이 7년에 달한다는 사실. 자꾸만 되살아나고 번듯해지는 이 집과의 싸움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는 사실. 다시금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이 책에는 온전히 ‘내 것’을 가진 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얼마간 물러서 있다. 마치 현실에서, 악다구니를 쓰고 아쉬운 소리와 미움을 피로처럼 매달고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처럼.
한국에서 집은 생활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제 힘으로 돈 벌어본 사람 치고 ‘내 집 마련’ 한 번 꿈꿔보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로. 집은, 적어도 이상적으로나마, 거주공간이자 돌아갈 곳이고, ‘나’가 존재하는 곳이다. 안전을 보장받는 곳이다. 내 몸과 나의 물건이 거하는 곳이다. 뽑히고 밀려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내 집’이다.
여덟 편의 수록작에서 주인공들은 ‘주인’이기도, 세입자이기도 하다. 숱한 광고처럼 안락하고 품격이 넘치지 않는다. 저마다 억울하고 사는 게 팍팍하고... ‘그래도 나 정도면’과 ‘정말 이래도 되나’를 오간다.
p.130 어느 순간이 되자 홍 사장이 소유했던 집들을 차례로 열거하기 시작했고, 각자 짐작하는 구체적인 액수를 떠들어댔다. 집을 소유하고 유지하고, 그러는 동안 홍 사장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는지 또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홍 사장에 대한 애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홍 사장은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였고 피해야 할 좋지 못한 선례에 불과했다.
읽는 내내 꼭 선물상자를 열어젖히는 것만 같았다. 혹은 예쁘장한 케이크를 갈라 단면을 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가. 자세히 들여다보라. 구겨지고 찢어진 포장, 눅눅하게 얼룩진 상자와 예의상 입꼬리를 끌어당겨야만 하는 물건. 갈라지고 주저앉은 크림, 쉰내가 날 것 같이 퍼석퍼석한 빵.
희망찬 선전처럼 가난하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는 ‘소박한 추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른 누룽지 긁듯 억척스러운 ‘의지’를 뽐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애를 쓰고 있다. 안간힘을 쓴다. 밀어내기 위해, 밀려나지 않기 위해. 각자가 최소한이라 믿는 것을 위해.
묻고 싶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이에게. 안 힘든 사람 없다는데, 그렇게나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끼리 실망하고 미움받고 소리내어 문을 닫는 세상이 정상이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래야만 하나요? 이미 알고 있잖아요. 잘 알고 있잖아요.
p.166 아무리 오래된 집이라지만 사람이 살 수는 있게 해주셔야죠. 그러고 나서 월세를 달라고 해도 해야죠. 그렇잖아요.
사는 게, 너무 힘들다. 현실을 봐야한다는데, 자꾸만 세상 밖으로 떠밀린다. 그것이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이라면, 구질구질하게 살다 고만고만하게 죽을 ‘팔자’라면.
적어도 너는 꽃향기를 좋아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상냥한 한 마디를 품을 수 있겠지. 작은 미래, 초라한 희망을 알사탕처럼 가만히 굴려볼 수 있겠지.
이러면 안 되는 거니까. 누구든 할 수 있으니까. 살그머니 내디딜 수 있겠지. 아껴먹을 수 있겠지. 어떤 행복처럼. 어떤 삶은 있는 줄도 모를테니까.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락스 냄새에 절어 돌아갈 수도 있겠지.
그렇게, 집에. 내 집에. 나의 집에. 나의 ‘ ’에. 즐거운 곳에서 나를 오라 하여도 내 갈 곳은 내 집 뿐이리.
p.201 방향을 바꿀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순식간에 균형을 잃을 것 같다. 곧장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 그녀는 다만 넘어지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고 사력을 다한다. 그래서 생각을 더 이어나갈 수도,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도 없다.
p.238 그 순간, 그는 분명 미지의 존재다. 그녀가 짐작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속한 인물이다. 힘껏 기대하고 바라야만 겨우 가닿을 수 있는 근사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