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설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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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논리적인 동물이다. 이것은 부정할 데 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발달한 사고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환경에서조차 이유를 쥐어짜내 납득하려 한다. 어떤 일에든 원인이 있다. 설령 그것이 완전한 허상일지라도, 누구를 위한 배제인지 모를 선동이라 할지라도, 파멸과 자멸로 향할 끝이 볼 보듯 뻔할지라도. 논리는 합리의 동의어가 아니다.

"미국인을 위한 미국"이란 기치 아래 미국 전통문화 보존법, 이른바 PACT가 시행된 언젠가의 뉴욕, 그곳에 한 소년이 있다. 버드, 상상과 사랑이 가득한 시절을 빼앗긴, 그의 이름과 기억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파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 그의 '피'에 중국이 있기 때문에, 아니,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방인인, 이제는 '노아'여야 하는 소년.

p.19 그의 어머니가 파오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어떤 애들은 쿵파오라고 불렀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버드의 얼굴만 봐도 누구나 알았다. 얼굴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고, 특히 광대뼈 기울기나 눈 모양에서 티가 났다. 당국에서는 파오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는 아니라고 늘 주지시켰다. PACT는 인종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애국심과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라고 대통령은 늘 말했다.

p.110 중국을 연구하거나 일본 설화를 찾는 일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그처럼 생긴 외모는 늘 위험했다. 그의 어머니의 자식이어서 여러 방식으로 위험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늘 알았고 늘 대비했고 자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늘 예민한 상태로 있었다. 아버지가 두려워한 것은 어느 날 누군가 버드의 얼굴에서 적을 보는 일이었다. 혈통이든 행동이든, 누군가 그를 어머니의 아들로 보고 빼앗아가는 일.


미국은 여전히 미국이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위기"가 있었다. 길고 익숙한, 설명할 수 없이 체제 자체에 내재된 침체. 어쨰서인가. 논리적인 동물, 인간은 이유를 찾았다. 아니, 누군가 말했고, 그것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깔고 앉은 권력 때문이 아니다. '우리' 중에 '우리가 아닌 자'가 있다. 그들이다.

마땅히 하등할 '그들'이 감히 불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은 원흉이자 적이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불행할 리가 없다. 어제의 세계가 이렇게 무너질 리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좀먹고, 훔쳤기 떄문이다. 사악한 자들. 본래적이고 선명해야 할 경계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오래된 혐오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애국시민을 위한 정의로운 국가'라는 믿음이 정의를 집어삼켰다.

p.81 아니야, 우린 책을 불태우지 않아. 여기는 미국이야, 그렇지? 그녀는 그를 보며 눈썹을 추켜세운다. 진심일까, 아니면 비꼬는 걸까? 버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우린 우리 책을 태우지 않아, 그녀가 말한다. 재생지 재료로 만든단다. 훨씬 문명화된 거지, 안 그래? 갈아서 재활용해 화장실 휴지를 만들어. 여기 없는 책은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의 엉덩이를 닦는 데 쓰였을 거야.

p.229 우린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 알아,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봐. 우리가 불황을 겪으면서 제일 잘사는 게 누구지? 사람들은 단호히 동쪽을 가리켰다. 중국의 GDP가 얼마나 올랐는지,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보라고. (...) 누군가 '위기'는 중국 짓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조작과 관세와 환율 하락 때문이라고. 그들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싶어한다고. 우리 조국을 빼앗고 싶어한다고.


순수하고, 단일하며, '국가'가 모든 믿음과 가치를 독점하는 사회. 그것이 PACT의 이상이자 유일하게 허용되는 '정상'이다. 그를 위해 '무해하고 충성스러운' 이들을 '위험분자'로부터 격리한다. 의심스럽지 않기 위해 서로를 경계해야 한다. 복종하라. '우리'는 다시 위대하고 강해질 것이다. 모든 분노와 두려움을 '그들'에게 쏟으라.

이 이야기의 가장 끔찍한 점은,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주위를 둘러보고, '일어난 일'을 되짚기만 해도 선명히 드러난다. 과거가 반복되고 있다. 여전히 유일한 동력이 되는 혐오, 배제, 위기의 촉발 혹은 재점화-방화.

p.227 Krei는 분리하다라는 뜻이래, 그녀가 읽는다. 판단하는 거지. 체와 비슷하네, 이선이 말했다.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떼어내는 거니까. 그래서 krisis는 더 좋든 나쁘든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뜻한대.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섬세한 흉골 라인을 따라가 목 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서 원을 그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지 결정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p.305 처음 있는 일인 줄 알았어요? 늙은 여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거릿은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배우기 시작했다. 태양 아래 새로운 일은 없다. (...) 오랜 의사를 가진 아동 납치는 각각 핑계는 다르지만 이유는 같았다. 가장 소중한 것의 몸값을 치르는 일이 가장 큰 처벌이 될 수 있으므로. 닻과 정반대되는 개념이었다.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을 뿌리 뽑으려는 시도, 어떤 이질성은 침범하는 잡초처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인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사라진 엄마의 흔적을 찾아 나선 노아는 균열에 도달한다. 허름하고, 형편없이 연약한 시도에. 해야할 일이 있어. 돌아오기 위해 떠나야 해. 말하기 위해, 들어야 해. 어떤 말은 심장에 가닿는다. 머리보다도 먼저, 부서짐과 빼앗김의 감각으로. 추천사처럼, 이것은 단지 소설이 아니다. 혁명이다. 동시에, 실패이자 현실이다. 좌절이다.

허구가 현실을 좀먹을 때, 현실이 허구로 검열되어야 할 때, 시대는 경고가 된다. 응답하라고, 지금이어야 한다고. 들어봐. 일이 벌어졌고, 난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들어봐. 내가, 생각해봤어. 그들이 이곳에 있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증언하기 위해.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을.

p.371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래야 한다고 뼛속 깊이 느낀다. 반드시 직접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증언. 임종 지키기.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기. 어떤 것들은 목격되어야 한다.

p.374 그녀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이름보다 더 많은 걸 기억해주길 원한다. 그들의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일어난 일보다, 그들이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간단한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 각자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명단 속 이름이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다른 한 명의 사람으로.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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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푸른 벚나무
시메노 나기 지음, 김지연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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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딸로. 3대째 이어져온 그 곳은 언젠가는 호텔이었고, 또 언젠가는 레스토랑이었고, 지금은 카페가 되었지만 변함없이 찾아오는 이를 기다리고 맞이한다. 시대도, 사람도, 모습도 달라졌지만 여전한 환대로 기다리는 곳, 누군가가 머무르고 떠나는 그곳에 한 그루 벚나무가 있다.

사람보다도 더 오래도록 그곳에 뿌리 내리고 땅과 사람을 지켜온 늙은 나무 한 그루. 이 이야기는 묵묵하고 고요하게 존재해온 그의 말로 전해진다. 야에, 사쿠라코, 히오. 벚나무의 이름을 가진 세 여성의 나날로.

p.9 해가 드는 쪽은 따뜻하지만 실내에는 아직도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습기를 머금은 목조 건물 특유의 향긋한 나무와 흙 냄새가 코끝에 닿은 순간 히오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카페 체리 블라썸이 오랜 세월을 견디며 만들어낸 냄새다. 히오는 이 공간을 둘러싼 공기를 온몸으로 흠뻑 마시고 나서 "자!" 하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p.54 만개한 꽃이 아니라 서서히 지기 시작한 꽃잎. 겉으로 드러난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고상하게 잎사귀에 싸여 있는 흰색 떡. 그런 것들이 삶을 여유롭게 해주고 아름답게 해준다고, 어떻게 하면 전할 수 있을까.


카페 체리 블라썸의 나날은 거의 비슷하다.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그날의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문을 연다. 손님이 찾아온다. 이웃 주민이기도, 낯선 사람이기도, 삶에 지쳐 도망쳐왔거나, 썩 달갑지 않은 소란이기도 한 이들이. 서른 살에 가게를 물려받아 이제 막 3년차인 풋내기 사장 히오의 하루는 여전히 서툴고 어려운 것 투성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친절은 너무도 쉽게 버려진다. 온통 번쩍이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에서 속삭이는 고요함은, 휴식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마음 따위는 번번이 실망하고 상처받기 마련이다. 오래된 땅의 낡고 작은 공간은 그 마음을 아는 이들이 머무르고 오롯이 자기 안에 잠겼다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

늙은 나무는 말할 수 없다.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품에 안고 다독여줄 수도 없다. 그는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찰나를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의 곁에, 그저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풍경처럼 존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곁에 서서. 온몸으로 계절을 견뎌내며.

p.160 말로 위로하기는 쉽다. 행동으로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생각하지 않고 한마디 쉽게 내뱉으며 타인을 위로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 머리로는 이해하고 스스로를 타일러보기도 했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갈 곳을 잃은 진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쓸쓸하다는 마음의 소리만 끝없이 메아리쳤다.


생의 끄트머리에 선 인간은 그를 보며 유한한 삶을 절감한다. 봄 꽃, 여름 그늘, 가을 낙엽을 지나 죽은 듯이 앙상해지는 겨울 가지. 나무의 사계절은 인간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느 것 하나, 어느 순간 하나 버릴 것도, 쓸모 없는 것도 없다는 것조차도.

시속 0km와 시속 4km의 존재가 자라고 늙어온 곳, 낯선 이가 머물고 쉬었다 가는 카페 체리 블라썸의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서툴고, 어렵고, 아쉬울 것이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죽은 듯이 겨울을 보내고도 새로운 싹을 틔우는 오래된 나무처럼, 하루를 하루만큼 충실히 살아낸다면. 긴 여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다가올 가을을 본다. 살아가야지. 그렇게.

p.132 얼핏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이는 벌레조차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른다. 커다란 나무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생물이 겨울을 나고 편히 쉬는 보금자리의 역할을 한다.

p.242 외할머니가 지켜낸 벚나무가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꽃을 피운다. 나는 끝이 없는 이 순환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다.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는 재생의 기적. 그때 부드러운 빛이 방 안을 빙 둘러쌌다. 시선을 들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장지문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도서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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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하이드어웨이
후루우치 가즈에 지음, 민경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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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동물이다. 상처입고 병든 동물은 도망쳐 숨어든다. 몸을 숨긴 채 아픈 곳을 핥고 문지르고 꽁꽁 웅크린다. 인간은 짐승이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무리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한없이 연약하고 나약한 짐승. 이 무른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저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살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을, 사람을 가장 많이 해치는 존재는 다름아닌 그들 자신이 되었다.

사람은 사람에 상처입고 상처입히며 다치고 병든 사람 사이에 살아간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본질이자 떼낼 수 없는 성질이 되어버린 지 오래. 여기 이 삭막한 도시에서 제각기의 이유로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은신처가 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겹겹의 가면을 벗어두고 마음껏 취약해질 수 있는 곳.

p.59 왜 그렇게 잘난 척을 해야 하는데? 본인은 그걸로 충분할지 모르겠으나 남은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 이후 나는... 기리토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른다. (...) 아버지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고생해서 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게 아닐까.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을 감쌌지만 내게는 변명으로만 들리더라. 다시 약한 게 가슴에 닿는다. 기리토는 짜증이 나 있는 힘껏 던진다.

p.128 도망치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라는 말인가, 집에도 학교에도 숨을 데가 없는데. 무엇보다 아무 것도 안 한 내가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도망까지 쳐야 한단 말인가. 도망치라고 하기 전에 말도 안 되는 녀석들을 지금 당장 어떻게 좀 해달라고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궁지에 몰린 인간 대다수는 눈앞의 고양이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약한, 관계도 없는 존재에 이를 드러낸다.


낯선 이들의 도시. 이방인과 타인으로 이루어진 사회. 그 말은 곧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또한 서로에게 낯설고 차가운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게들 적응하며 살아가는, 도시화된 사람들. 스스로에게도, 세계에도 소외된 이들. 매일 똑같은 하루를 오간다. 이변이 없다면 내일도 모레도 그저 그럴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장소의 평범한 사람들.

'평범' 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평범하다. 무력하거나, 고요하거나.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며, 매일을 살아낸다. 대다수가 그렇게 하니까. 평범하니까. 정말 다들 그렇게 사는 걸까? 주어진 조건에 그럭저럭 부합하며, 자리와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p.80 알면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아니, 그보다는 자기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계약 사원인 마도카에게는 부조리함을 강요하고 직장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나오야는 무난하게 대한다. 이게 정말 자신의 '역할'일까.

p.251 생각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우연하게 닿은 먹이를 먹으며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떠 있을 뿐이다.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이게 가장 살기 쉬운 생태라면 나도 앞으로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찾아오는 역할을 맡아 살아간다. 누가 나를 비웃을 수 있는가.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상처를 끌어안고 산다. 흉터에 가까운, 오래된 상처의 무게는 때때로, 벌겋게 드러나 피를 흘린다. 영원할 것처럼. 그들을 상처입히는 것은 세상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다. 상처를 핥고 또 핥아 덧나버리는 것처럼. 설명하기도 피곤하고, 이해받으리란 보장도 없다. 굳이 그래야 하나 싶고. 나 하나 애쓴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보통, 정상, 평범... 익숙한 압박과 피로들. 팍팍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는 삶에도 그들을 위로하는 것, 아니 곳이 있으니. 도심 속 은신처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동물이다. 다치고 병든 동물은 숨어들 곳이 필요하다. 도시의 동물들에게는 도시에서의 은신처가 있기 마련이다.

p.196 무엇보다도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야"라며 이해하는 듯 행동 하는 걸 보는 것도 우울하고 싫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그 마음이 그대로 이해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혹시 털어놓아도 거기에는 다시 "왜?" "어째서?"라는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의문부호가 달릴 것이다.

p.255 커다란 흐름을 거스르려 해봤자 소용없어. 직장 내 괴롭힘도 끈질긴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절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어. 처음에만 조금 소란스럽다가 결국은 또 흐지부지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야. 저항하면 피곤해질 뿐이야. 세간의 관심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다고 후쿠시마는 당연한 듯 말했다. 상대는 어차피 그 정도 일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다수다. 세상의 흐름은 다수가 만든다.


좀처럼 견디기 어려운 날이 있다. 마음에 짓눌려 숨이 막히는 날이 있다. 살기 위해 도망치고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몸을 숨기고 눈을 감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언제든 물러설 수 있다는 위로이자 모든 휴식처는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라는 현실이기도 하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눈물을 닦고 해야 할 일로 돌아와야 한다. 다만 그 울음 끝에서, 외로움의 한가운데서 사람을 일으켜세우는 것, 그것을 응원이라 부르고자 한다.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혹성에서 사니까(348)".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354). 책을 빌어 도시의 익명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오아시스는 어디인가요. 오늘의 당신을 쉬게 하는 그곳은.

p.285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사람은 요시오카와 후쿠시마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목소리가 큰 놈들을 너무 쉽게 따르는 자신 같은 무기력한 인간이야말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빠져나갈 수 없는 흐름을 만들고 말았다. 절대로 딸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더럽고 거친 세상의 파도를 만든 사람은 모든 걸 포기해온 자신이었다. 딸을 포기시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348 "간바야시 씨는 본인을 불완전하다고 하는데 완전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기리토의 질문에 리코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 세상은 우리와 관계없고 지구는 흔들리고 있고... 제대로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래도 난 아직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 (...) 흔들리는 별. 지구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도서제공: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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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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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전쟁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나라, 아니, 전쟁이 끊이지 않게 함으로써 권력을 쥐는 이들의 나라에서 내몰린 사람이 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으며, 직장인이었고, 가족의 일원이며... 빨갱이. 불순분자. 그러므로 망명자가 된, 빠리의 택시운전사, 세계평화를 이름에 담은, 삶의 궤적이 곧 역사인, 이방인이 있다. 이방인의 이방인, 이방인 중에서도 또다시 낯설고 다른 자.

언젠가 이 책이 필독서인 동시에 불온서적인 때가 있었다. 여전히 "이 땅에서 조용하기를, 나이 먹고 철들기를 거부(6)"하는 그는 빨갱이요 이단아였다. 시대의 참어른이었던 그를 기억한다. 만난 적은 없지만 낯선 '어른'에서, 무지의 부끄러움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학생운동이 소멸한 도시의 교육과정에서 나는 내내 부끄러웠다.

p.81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씹어 삼켰다. 서글픔이 앞섰다. 만약 내가 돈이 많거나 혹은 학위라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모함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의식도 규정하였다. 내가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의식이 있었기에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실제 모습이었다. 이른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렇게 나는 삼중의 이방인이었다.

p.193 "한국에서는 이 모든 좌파가 빨갱이가 될 수 있소. 침묵하지 않을 때 말이오. 그러므로 극우가 아닌 실존주의자는 모두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오. (...) 내가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네 나라의 '앙가주망'이라는 말을 알았기 때문이오. 우습지 않소?"


불과 몇 년 새에 그의 이름을 낯설어진 젊은이가 많을 것이다. 나 또한 학창시절 썩 주류가 아닌 이들 외에는 그의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다. 언젠가 제법 교양서의 영역(?)으로 넘어온 그의 이름에 설핏 웃었던 적도 있다. 잊혀지는가, 했다. 나아가는 시대다.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이 지난 해의 끝자락에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그날 밤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믿음과 관용, 다양성을 다시 한 번 말소하려는, 드디어 아가리를 드러낸 퇴행에 맞닥뜨렸다. 수많은 이들이 저항했고,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급격히 확산되는 저항과 연대의 문화에 비해 여전히 장벽은 여전히, 아니, 새로이 공고하다. "우리 편"일 때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지만, 한 끗 차이로 "그들"의 혐오와 증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p.217 한편 마을사람들은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곳에 계속 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부도 그곳에 살았고 작은아버지도 그곳에 살았다. 내가 그곳에 갔던 날도 살고 있었고 그 뒤에도 계속 살았다. 마을사람 모두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옛날처럼 살았다. 죽은 사람만 죽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p.343 나는 바보였다.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한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바보였고 또 그 바보스러움을 자랑스럽게 껴안았던 바보였다. (...)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한 번도 군부독재를 경험하지 않고 그저 민주주의의 토양에서 안락히 자란 세대로서 마주한, 겉보기로나마 잠시간이었던 내란이 이러할진대, 군부정권이 말 그대로 성원의 목숨줄을 쥐고 있던 사회에서 이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절절한 그리움과 생존의 공포, 신념을 배반하고 동지를 외면했다는 뼈아픈 자괴감이 스스로를 얼마나 좀먹고 무너뜨렸을지,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한다. 아주 조금.

여전히 우리 사회에 관용은 멀고 연대는 확장이 아닌 고립으로 치닫는다. 혐오는 불어나고, 단단해지며, 너무도 쉽고 강력한 유혹인 반면에 연대와 관용은 "지금 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다"는 말 앞에 나중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저자가 간절한 심정으로 말하고 또 말했던 '똘레랑스'란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여전히 간절하게 외쳐져야 하는가.

p.306 나는 교수학생간담회장을 나서며 세 번째의 개똥이 나의 차지라는 것을 인정했다. 한편 교수들은 개똥을 먹는 대신에 곧 장관과 국회의원이 되었다. (...) 학문이 미쳤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미쳤던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학문도 나도 미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의식이 없던, 혹은 문제의식을 기피했던 교수들의 개똥 먹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p.375 '당신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바로 이것이 똘레랑스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당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에서 스스로 벗어나길 요구하고, 당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에 반대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똘레랑스'가 있는가. 우리는 진정 나아가고 있는가. 달라진 듯도, 여전한 듯도 하다. 희망은 멀고, 환멸은 도처에 있다. 어쩌면 이것이 독선과 폭력의 진정한 동력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 이후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려온 데에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한 설움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 그대로의 독재와 배제가 민주사회를 침범하는 지금, 한국사회는 제자리와 퇴보를 오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갔어도, 가르침은 여전하다. 차별과 혐오가 관용과 차이의 숨통을 틀어막는 지금, 과거에서 또다른 과거일 현재를 묻는다. 그를 영영 이방인으로 묶어둘텐가. 그것은 지금에 달렸다. 그 책무의 무거움에 몸을 맡긴다.

p.6 그렇다. 세상을 혐오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혐오하기보다는 분노하라. 분노하기보다는 연대하고 동참하라, 이 책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젊은 벗들과 계속 만나고 싶은 궁극적인 이유다. 설령 잘 보이지 않지만, 희망의 보금자리들이 곳곳에 있음을 안다.

p.386 권력은 항상 강력하고 더욱더 강력해지려는 관성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는 속성 또한 갖고 있음을 역사는 가르쳐줍니다. 이에, 약자인 개인이 권력에 대하여 똘레랑스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바로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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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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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임신, 출산, 정체성. 혹자는 이 주제 시작부터 진절머리를 낼 지 모른다. 지겹게 알려진 주제가 아니냐고, 자기가 더 잘 안다며 숫제 마이크를 이리 내라고 재촉할지 모른다. 많은 경우에 그는 모른다. 만일 당사자성이라는 것이 자리처럼 점찍혀 있다면, 그곳에서 가장 '애매하게 먼' 이들이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당신은 틀렸어요. 내가 알기로는-으로 시작하는 익숙한 연설을.

모든 이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일단은 귀기울여 듣는 게 먼저라는 보편도덕적 명제는 이 익숙한 가로채기에 번번이 힘을 잃는다. 주인공 리즈를 보라. 그의 탐닉적 일상은 자기파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이를 원한다. 사랑하고 싶다. 안정적이고 싶다. 누군가에겐 너무도 당연한 것이 그의 정체성과 맞물리는 순간 "변태적 퇴행"으로 이름지어진다. 그의 욕망은 매끄러운 정상 사회의 벽 앞의 실패로만 존재할 수 있다.

p.19 트랜스 여성을 뮤즈로 삼을지언정 예술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트랜스 여성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트랜스 여성들은 미래 없는 삶에 갇히게 되지만, 또 어떤 트랜스 여성들은 그러한 삶의 아이러니와 기쁨을 자축하다가 트랜스 여성들이 종종 서둘러 들어서곤 하는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그들이 남긴 아름다운 시신이 통계적으로 확률 높은 죽음(타살)이 아닌 본인의 처절한 선택(자살)일 때. 미래 없는 삶은 훨씬 더 화려해 보였다.

p.288 "변방의 여성들, 그들은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어요. 하지만, 아이를 원해선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진 않았죠. 아이를 원하는 것이야말로 전세계의 모든 여성에게 허용된 일인 것 같아요. 트랜스만 예외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트랜스에겐 상황이 달라요. (...) 시스 여성들한테는 그게 자연스러운데, 내가 그걸 원한다고 하면 변태로 보잖아요. 마치 '드레스 입은 남자'가 아이들 옆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는 결코 좋은 것일 리가 없다는 듯이."


다른 주인공 에임스를 보자. 어떤 독자에겐 가장 큰 혼란일 그를. 디트랜지션으로 "정상성에 복귀한" 그의 연인 카트리나가 임신했다. 그는 아이의 아버지를 원한다. 안정적인 미래를 그린다. 선택해야 한다. 그가 될 수 없는 것과, 줄 수 없는 것과, 그럼에도 원하는 것들 사이에서. 혹자는 물을 것이다. 숨기면 되지 않냐고, 말만 안 하면 지금처럼 아무도 모를텐데, 참고 살면 되지 않냐고.

정말 그럴까.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걸까. 나로 산다는게 뭔지, 그 자신조차 알지 못한 채로 내던져졌던 그 시간들은, 어째서, 어떤 이름으로 불린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나 쉽게 지울 수 있는, '진정한'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선택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는 의문했다. 내 고통은 진짜일까. 스스로와 주변을 파괴했던 상처에도 의심했고, 물었고, 울었다. 그리고, 지금에 도달해있다. 지쳤으니까. 이 또한 삶의 방식이고 선택이니까.

p.55 트랜스 여성으로서의 삶은 너무도 고달프고,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포기한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성전환 환원의 가능성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트랜스 여성들이 모두 환원하기를 바라는 편파적인 사람들의 광기에 희망을 준다는 점이다. 그들은 트랜스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 앞에 나서면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단해주기를 바란다.

p.163 트랜스 여성들은 트랜스 여성이 무엇인지 알고 트랜스 여성이 되는 법도 알지만, 트랜스 여성으로 살아가는 법은 알지 못한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트랜스들 간의 싸움만 보아도 그렇고, 그들이 시스 여성들과 벌이는 논쟁만 보아도 그렇다. 전부 다 트랜스 여성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혹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정의할 뿐이다. 막상 트랜스 여성이 되면, 트랜스 여성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혹자는 이 파괴적이고 자해에 가까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히기를 자처하는 이들을 지겨워하다 떠나버릴지 모른다. 그 사이에서 어떤 피해자, 그래, 이혼한 여성으로 살아온, "트랜스들" 사이에서 "피해자가 된 여성"을 동정할지 모른다. 그의 말과 행동에 나라도, 이 정도는, 그럴 수밖에... 속삭이며 안전한 무리로 돌아가고 싶어할지 모른다.

어쩌면 조금쯤 억울할지 모른다. 결코 선택한 적 없이 요구되는 '여성성'에 분노하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여자-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위협이자 퇴보일지 모른다. 그런데요, 어떤 삶은 삶이 아닌가요. 건실하고 발전적으로 정상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부적격자들"은, 자기 자리마저 파괴하는 충동과 열정과 자해와 혐오가 뒤범벅된 삶도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질 수는 없는 건가요.

p.359 그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듯 트랜스들을 존중하면 될 일인데. 그러다 보니 어떤 여자는 즉석에서 트랜스젠더 표본 집단을 구성한 다음 트랜스가 아닌 사람들의 문제였다면 당연히 알았을 대처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또 어떤 여자는 에임스 자신이 원했을 직접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로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가 없어서 성중립 화장실 문제를 엄한 데서 떠들고 다닌다.

p.481 그러나 분명히 얘기하는데, 에이즈와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명칭의 탄생은 불가분의 관계다. 트랜스젠더는 질병의 매개체를 확인하기 위해 선택된 명칭이다. (...) 상처는 치유된 적이 없었다. 그저 상처 위에 건물을 세우고 상처를 지나쳤을 뿐이다. 그들은 고급화(젠트리피케이션)되었다.


이 답답하고 출구 없이 맴도는 이야기, 타협 불가능으로 지저분하게 얽힌 설움과 질투와 거짓의 관계를 이끄는 것은 "규격 외"의 존재들이다.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는, 남성으로 "돌아온", 스스로가 여성임을 의심치 않는, 제1성원이 아닌 여성들이다. 이 혼란하고 "불결"하고 단일하지 않은 존재들이 새로운 관계와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오롯이 그려낸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그 과정은 물론 험난하다. 좀 참고 살아라, 너도 노력을 좀 해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참는다고 참아지면 그게 존재던가요. 어떤 삶은 존재만으로도 선을 넘지 않나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리즈, 에임스, 카트리나, 마야. 모든 자격없고 적당하지 않은 모든 존재들과 함께 경계를 넘나들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가 선례 없고 이름 없는 이들과 서로를 초대하는 물음이 되기를 바란다.

p.367 "난 당신에게 뭘 주겠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에요. 나와 함께해보자고, 함께 책임지고 함께 노력해보자고 당신을 초대하는 거예요. (...) 저건 당신이 만들어가는 광경이지 다른 사람한테서 빼앗아 오는 광경이 아니에요. 저게 내가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싶은 광경이에요. 아이들과 엄마들과 함께."

p.526 "혹시 이게 우리의 해결책은 아닐까? 이게 우리가 지금 무언가를 재창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만의 독창적인 해결책을 상상해낸 건 아닐까? 그래서 너무 기괴하고, 딱히 선례도 없는 건 아닐까? 우리가 어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발을, 신발을, 입고 있는 바지를 본다. "어떤 종류의 여성들이건 말이야."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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