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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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 또 사람 죽는 이야기로 돌아왔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파괴하는 이야기에 이렇게 반색해도 되는가 싶긴 하지만, 단순한 스릴에 그치지 않을 것을 믿기에 다시금 펼쳐들지 않을 수 없었다, 고 하면, 나름대로 근거 있는 신뢰가 아닌가.

그의 전작과 수록작들의 배경이 되는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일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비단 '기록된 역사' 뿐만 아니라, 이 사회는 대체 어떤 꼴로 돌아가고 있는지, 성원 간의 신뢰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세계를 지탱한다고 믿어온 어떤... 근본 따위가 얼마나 일그러지고 썩어 있었는지.

p.11 13년 동안이나 다녔던 회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하니 여러 감정이 북받쳤다. (...) 그전까지는 정치나 사회, 인간관계 등, 아무튼 무언가가 나를 지켜 주고 있다는 근거 없는 안도감을 품고 있었다. 최소한의 신뢰조차 성립하지 않는 살벌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p.192 "미조로 박사님은 전시에도 줄곧 제국대학에 계셨습니까?" "아뇨, 육군 군의관으로서 대륙에 가 있었습니다. (...) 제국대학 의학부 학자는 총을 잡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전염병 예방을 연구해 달라는 군대의 요청을 받아 갔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초현실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아니, 어떤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현실을 그리는 걸까. 기존에도 써낸 적은 있으나, 꼭 그렇게 해야만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낸 전적이 있음에도. 어쩌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할 세상을 봐버렸기 때문에, 무언가를 깨달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평생 발소리에 쫓기며 공포에 시달릴 셈"이냐고 설득 아닌 설득을 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한 사람을 죽인 걸로 사형까지 내려지지는 않"기 때문에. 그렇기에 더더욱 심령, 유무형과 믿음의 경계를 넘는 존재를 소환할 필요를 느꼈을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모조리 비극이다. 어떤 것도 통쾌하지 않고, 어떤 일은 영영 없던 일이 되지 못한다.

p.47 녀석의 집 안에서 울리는 발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발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인 채 울리다가 다니무라의 비명을 지워 버리며 덮치려고 했다. 내가 밤길에 들은 것은 한 사람이 반복하여 지나갔던 발소리가 아니었다. 부츠를 신은 여러 사람이 잇달아 통과하는 소리였다.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여태껏 여자를 몇 명이나 죽인 거야?"

p.107 요네무라는 그럴 작정이었다. 이미 도망칠 방도가 없기에 형량을 최대한 줄이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자백하여 반성의 기미를 보인다면 유기징역만 받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한 모든 계산을 미야코의 유령이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형벌과는 다른 공포가 치밀었다. 지벌 말이다.


이것은 좌절인가? 어느정도는 그렇다. 일어난 일은 없던 것으로 되돌려질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우연과 그 때, 그 곳의 순간이 얽힌 결과물인 이유로, 어떤 파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어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고,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며,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외치게 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일까. 수록작 전체에 단순한 긴장으로 충격으로 치부할 수 없을 짙은 분노가 배어있다. 같은 인간종이라는 사실에 대한 끔찍한 무력감. 절망은 반복될 것이며, 악은 도처에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꼴로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좌절에서 끝나지 않는다. 질문이 이어진다. 이 작가에 질릴 수 없는 이유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p.230 "과학적 탐구 앞에서 인간의 생명 따윈 아무렇든 상관없어. 페스트균에 감염된 인간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 살아 있는 임산부의 태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핵폭발로 인간을 얼마나 죽일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거든 뭐든지 실험하면 그만이야.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연구하고 싶다면 실제로 사람을 죽여 보는 게 제일이지. 그것도 되도록 처참한 방법으로 말이야."

p.236 "이 나라는 바뀌어 가겠지. 풍경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맞아." 하야미는 수긍한 뒤 술잔을 입으로 옮기면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이매망량을 골똘히 생각했다. 사람의 모습을 띤 괴물들이 시대와 이름을 바꾸어 언제 다시 이 나라에 발호할지, 그걸 감시하는 것이 펜을 쥔 자의 소임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결국 이 책에서 신비로움과 반전은 대체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가는,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를 여전히 묻고 있으며, 이 책의 이야기와 문장들은 그 고민의 흔적인 동시에 다음 행보의 어떤 씨앗과도 같은 단서일 따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세계의 경계가 우리의 이해 바깥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무형을 현실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고 해도 좋겠다.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 혹은 끊임없이 이어질 무언가가 있다는, 아주 작고 연약한 믿음을 포함하여. 사람의 마음을 부수고 무너트리는 것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버둥치는 존재도 모두 인간이라는 어떤, 사실, 진리, 확신.

p.125 '나'를 낳게 한 우연한 만남은 부모님에게만 찾아오지 않았다. 조부모와 그보다 윗세대에서도 면면히 반복되어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았다. 더욱이 그 기적은 '나'에게만 벌어지지 않았다. (...)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기적이면서도 굉장히 진부한 일이기도 했다.

p.319 "당신은 특별한 인간이 아냐. 인간은 모두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세계에 있는 존재야. 모두가 제로의 상태에서 태어나. 그리고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서 계속 살아가. 그게 인간의 일생이야. (...) 이 세계도, 현재라는 시간도 결코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들 살아가고 있어. 당신도 지금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 자신이 누구냐는 답이 없는 문제에 현혹되지 말아 줘."


*도서제공: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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