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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서 ㅣ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평점 :
여기 미친 여자가 있다. 그 이름은 언제, 어떻게 붙여졌을까. 가엾게도 여자를 밝힌 탓에, 아니, 밝혀진 여자이기 때문에, 아니, 여자가 밝은 탓에, 별다른 도리가 없이? 다시 생각해보자. 미친 여자가 있다. 날 때부터 미쳐있었는지, 어느날 갑자기 360도에 18도쯤 더 돌아버린 건지, 나름 숨 쉬고 살 붙이며 잘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미친 여자로 "지정된" 탓에 그렇게 된 건지 알 도는 없지만, 마치 "저것은 해로운 새"처럼.
어느 작가가 있다. 너무도 음란하므로 '18세 이하 열독 금지'라는 가림막 너머로 보내진다. 숱한 이가 묻는다.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비정상"을 굳이 드러내서 얻는 게 대체 뭔지. 아, 그러니까,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이해는 하지만 "굳이 드러내는 건 싫다 "뭐 그런 뜻이지. 또다른 숱한 이가 물었다.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는지. 작가는 말한다. 나한테도 없는 걸 어떻게 달란 말씀이신지. 수많은 복간 요청 끝에 30여년의 세월을 지나 금서가 돌아왔다.
p.26 "나는 글을 써.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줄곧 내 몸 안에 닫힌 자아가 하나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힘이 그걸 닫히게 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건 도대 체 어떤 모습일까? 알 수 없었다. 내가 희미하게 느낀 것은 겹겹이 봉쇄된 무거운 상태와 불안한 소란, 그리고 내 왜곡되고 변형된 꿈 속에, 내가 아주 허약할 때의 잠꼬대 속에, 깊은 밤 억제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드러나는 그 외롭지만 뭔가를 갈망하는 자신이었다.
p.49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웃을 때는 몹시 방자하고 오만하면서도 우렁찼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면 모든 남자가 그녀에게로 눈길을 던졌지만 그녀의 눈은 나만 주시하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반복적으로 훑고 있었다. 눈빛으로 내 옷을 한 겹 한 겹 다 벗겨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눈빛에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심하게 뛰어 손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네 편의 이야기, 어쩌면 회고 혹은 어떤 밤의 기억에는 하나같이 글 쓰는 작가, 또는 그의 이름에서 갈라져나간 또다른 천쉐가 등장한다. 그는 사랑한다. 욕정한다. 파괴하고, 방황하며, 글을 쓴다. 마치, 어느 세계에서든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는 듯이. 어떤 환상과 환각의 가능성에서도 '쓰지 않는 자신'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듯이.
탐하고, 전율하고, 찢어발기고 무너지는 몸, 더없이 질척하고 뜨거운 소리, 그리고, 글, 쓰는 사람, 쓰여진 것. 이 작가에게 그것은, 그 가능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p.27 "차오차오, 꼭 완성해. 그리고 내게 살아갈 기회를 줘." 아쑤는 펜을 내 손에 쥐여주면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나를 안고는 가볍게 책상 앞 의자에 앉혀주었다. "자신의 천재성을 두려워하지 마. 이게 네 운명이니까." 나는 악마의 가면을 쓴 천사를 보았다. 비틀비틀 더러운 진흙탕 위에서 몸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문자의 긴 사다리를 향해 파리하게 마른 두 팔을 뻗었다. 그렇게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p.63 "내게는 이야기가 없어" 그렇게 지리멸렬하고 더없이 황당무계한 잠꼬대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타오타오. 지나친 호기심은 고양이 한 마리를 죽일 수 있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과다하게 긴장했던 상황은 결국 지나가고 그저 전율과 공포... 혐오만 남아. "나는 듣게 될 거야, 네가 반드시 말해줄 테니까"
그의 세계에서 욕정하는 여자, 여성의 정욕은 결코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독한 폭력으로 덧칠된다. 잘못 자란 풀, 있어서는 안 될 것처럼, 네 편의 이야기, 그 이상의 환상 혹은 기억에서 그들은 언제나 숨어든다. 달아오른 숨을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지만 마주치는 시선 바깥,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들이 함께 존재할 자리는 없다.
작가는 끊임없이 묻는 듯하다. 어떻게 욕망하지 않을 수가 있지, 생각만 해도 뺨이 달아오르고 다리를 꼬게 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 있지, 입 맞추고 가슴께로 글어당겨 젖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그의 글과 사랑, 욕정(혹은 정욕)은 모성애와 닮아있다. 아니, 모호한 경계로 뒤얽혀있는지도 모른다.
p.75 "나는 이 세상이 싫어." (...) 그때 나는 그 애가 내 몸 깊숙이 죽음의 뿌리와 싹을 심어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싹은 내가 직접 물을 주고 키워야 했다. 내가 만신창이가 되어 부서지고 쇠잔하면 그 싹이 다시 나를 산 채로 집어삼킬 것이었다. 나는, 구차하게 살고 있다. 그 애가 버린 세상, 그 애가 떠나버린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p.190 그녀는 여자라 월경이 오는 것이 당연했다. 월경이 오면 나처럼 몸이 아팠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게 아주 창피한 일인가? 여자인 게 잘못이란 말인가? 왜 우리는 여자임을 인정하는 일이 그렇게 부끄러운 것일까? 서로를 사랑하는 두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현실과 환상을 그늘처럼 오가는 이야기에 평온하고 달콤한 휴식, 서로의 내일에 당연히 얽어넣어지는 희망 따위는 없다. 도리어 죄악감과 불안의 냄새를 풍긴다. 마주친 눈동자에는 서로만 가득한데, 대낮같은 세계의 규범 아래서는 아무리 끌어안고 몸을 겹친대도 그것은 "없는 일"이다. 편견과 혐오가 아닌 이름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이는 절망의 흔한 기록인가. 그렇지 않다. 독자는 짓눌린 고백, 단절되지 않는 환희와 열락의 틈새에서 어떤 가능성을 본다. 언제나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결코,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처음으로 돌아가 묻는다. 여기, 미친 여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p.228 나 쉐가 네 눈앞에 있잖아. 확실히 존재하고 있잖아. 과거보다 더 강인하고 더 용감해져 있잖아. 나는 나 자신의 창작과 인생이 세상의 온갖 질의에 직면해 있다는 걸 잘 알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어. 영혼을 잃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으니까. 더 이상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방향을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p.237 우리가 『악녀서』에서 볼 수 있는 여성 동성애 감정들은 거의 전부가 의도적으로 사회적 맥락을 피하지만 사회적 간섭을 피하려 할수록 오히려 사회의 노예로서의 일면을 드러내고 만다. 천쉐의 작품에서 모든 여성 동성애의 정욕은 죄악의 느낌으로 가득하다. 사실 이러한 느낌이 호소하는 것은 배후에서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사회적 제약으로서 이야기의 주인공들과는 아무런 필연성을 갖지 못한다.
*도서제공: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