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문항 킬러 킬러
이기호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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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거는 시험. 단 한 번의 기회에 지금껏 살아온 시간을 송두리째 평가받는 날. 그 하루의 성적에 과거와 미래, 현재의 모든 가능성이 평가받고 더 나아가 그 개인의 존재가치증명을 대리하는 이름, 수능. 그 이름의 본질은 수학능력, 극히 일부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사람 자체의 등급이 되어버린 것. '고급'과 '폐급' 인생을 가르는, 수능.

모든 시험이 그러하듯 수능 또한 공정성을 내세운다. 노력과 실력으로 평가받는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 정말 그럴까? '성실하고 바른 학생'은 '좋은 성적'과 동의어인가? 단 하루, 시험장이라는 곳에서 일률화된 문제를 푸는 자리에 모두가 같은 기회를 갖고 오롯이 스스로의 '능력'을 펼쳐보이는가?

p.35 "공정한 경기라는 건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어. 오늘 고사장에 들어가는 수십만 명 중에는 너처럼 과외식 특강을 받으며 준비한 아이도 있고, 학원비가 없어서 학교 수업만 받아야 했던 아이도 있어. 그리고 지금 진짜 네 경쟁자라고 할 만한 애들은 이 약을 다 먹었을 게다."

p.63 반에서는 잘하는 축에 들고 일부 선생님들은 나를 똑똑하다 평하기도 하지만, 엄마와 언니의 평가는 단호했다. 나는 "해도 안 되는 애"였다. 그리고 내 머릿속을 점령하는 것은 언제나 엄마와 언니가 내리는 평가의 말이었다. 해도 안 되는 애, 열심히 하는데 요령을 모르는 애.


그 하루의 기회를 위한 과정인 입시는 가히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증거로, 이미 입시전쟁이란 말은 시장에 목매인 누구에게도 위화감이나 경각심을 주지 않게 되어버리지 않았나. '제때' 응시한 스물 남짓의 젊음들은 전쟁터로 내몰리며 무엇을 증명해내는가.

입시 자체는 아무것도 담보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성적이 아니라 인성이다. 수능성적과 학력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수험 '실패'는 인생의 실패다. 좋은 대학에서 고임금 직장, 사회적 지위로 이어져 행복의 탄탄대로를 달려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변질된 걸까.

p.36 "정부는 이거 못 잡아. 안 잡아. 대한민국이 자주 그래. 지킬 수 없는 규정을 발표하고 다 같이 뭉개지. 그런 풍토를 이해하고 위선자가 되어야 하는 순간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된다. 규정을 다 지키며 사는 사람은 경쟁에서 점점 밀려나 나중에는 아예 게임에 끼질 못하게 돼."

p.151 "아저씨, 저는요. 실수도, 실패도 싫어요. 그런 게 쌓이면 낙오자가 되는 거랬어요. 가난하게 살 거랬어요. 불행할 거라고요."
실수와 실패가 앞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을 다른 조각인간들을 통해 지켜봤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결국 스스로 구해야 하는 답이었다.


영화와 만화, 드라마 등에서 다뤄졌던, 상상을 초월하는 사교육 시장에 대중은 경악하지 않았다. 놀라긴 했지만 '저걸 몰랐다니'에 가까운 평가였을 뿐, '왜 저렇게까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할 수만 있으면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밀려나니까, 남은 인생 전부가 '패배'와 '을'로 점철될 테니까. 다른 길을 꿈꿀 여유 따위 없으니까.

놀랍게도, 사실 딱히 놀랍지 않게도, 대부분의 '부모'와 사회는 '입시지옥'의 당사자들을 상처입힐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들 자신조차 그 일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다른 길을 꿈꿀 여유는 없다. 유일하게 '허락된' 길, '안전한' 방법은 그뿐이라, 자기를 위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라 믿을 뿐이다.

p.54 진정한 사교육이 무언지. 최후의 승자가 되는 법이 뭔지 모르는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서빈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밀려와 수연은 핸들을 힘주어 꽉 잡았다. 결국 그녀 역시 자본의 힘을 굳게 믿기에 아등바등 살지 않는 것뿐이라는 비릿한 깨달음이 한 치도 비어져 나오지 못하게끔. 다른 이들이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믿는 것만큼이나 그녀 역시 그렇다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면서.

p.101 엄마는 아들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면 누구도 아들과 경쟁하려 들지 않을 테고, 아들도 경쟁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없으리라 믿었다. 아들에겐 그만한 자질도 있어 보였다. (...) 엄마는 초격차 유지에 집착하며 아들의 선행 학습 강도를 높였다. 그럴수록 아들은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다른 학생과의 학습 격차가 좁혀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행복을 가르치는 교육, 사람이 되는 길,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 모두가 무색해진 이 사회에 과연 정말 '행복한 사람'이 있기는 할까.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이들의 도전에 응원과 격려를 보내며, 마음껏 사랑을 보내고 행복을 기원하는 방법이 오직 무한 경쟁과 입시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행복과 웃음을 모조리 제쳐놓은 사람을 찍어내는 것이었을까.

짧지만 묵직하고 아픈 이야기들이다. 모든 것에는 금이 가있다. 빛은 거기로 들어온다던 시인의 말처럼, 우리 금 간 사람들은 영영 깨져버리지 않기 위해,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수지 않을 수 있을까. 행복을 응원할 수 있을까. 희망은 멀고 연약하다. 모든 곳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멈출 때다. 길을 바꿔야 할 때다. 익숙한 고통을 떠안기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p.164 아빠가 나약한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더 강한 상대와 경쟁해서 이겨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가난하고 게으르고 약한 것들과는 어울리지 말라 하셨죠. 그런데 엄마는 작고 약한 것을 사랑하라고 알려줬어요. 생명이 있는 모든 것,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달, 뺨을 스치는 바람에 경탄하라면서.

p.225 행복을 뒤로 미루지 마. 지금 행복하고 싶으면 지금 행복해지는 일을 해.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건 자기한테 하는 소리였고. 그런 말을 하고 난 직후의 체육 얼굴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 얼굴은 내가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만난 얼굴이었으니까.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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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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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총동원해 독자를 악몽의 세계로 에워싸는 이야기들. 깜빡, 잠들었던가. 깜빡, 오래된 등에서 타는 냄새가 나던가. 쿵,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던가. 어둠 너머로 새빨갛게 응시해오는 것, 그것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끼쳐오는 냄새는 어디에서 불어온 바람인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나는, 누구였더라? 땀에 젖은 이마와 메마른 입술, 텅 빈 눈으로 돌아본 곳엔 끝없는 '무'가 펼쳐져 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허무다. 공허다. 모든 것이다. 일상이다. 숨 쉴 틈도 없이 밀집되고 달라붙은 것이다.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다. 권태다. 낯섦이고 체취와 뒤섞인 숨결이다.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 살그머니 다가오는 어둠. 도시의 불빛. 뒤엉킨 지도.

p.20 토끼들은 우선 날카로운 앞니로 새의 목덜미를 공격했다. 그러고 나면 떨리는 주둥이와 가는 수염이 눈 색깔과 똑같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살점을 다 뜯고 나면, 녀석들은 마른 나뭇가지가 분질러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한동안 뼈를 갉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토끼들은 심지어 부리까지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런 다음, 털이 다시 하얗게 될 때까지 부지런히 몸을 단장했다.

p.34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고 싶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과정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이제는 연필을 쥐고 있기조차 힘들다. 마치 연필로 무언가 쓰려는 것이 손이 아니라, 귀에 매달려 있는 발인 것처럼 말이다. 모든 일이 너무나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무더운 낮과 마른 먼지가 날리는 땅, 짜고 비린 냄새를 풍기는 바닷바람 냄새가 가득한 곳의 시간이 담긴 글은 그곳의 풍취를 그대로 담아내기 마련인 걸까? 그림동화처럼 차락,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가고 이어지는 듯한 11편의 작품을 모두 읽고 나면, 길고 긴 악몽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기분이 든다.

그곳은 탈출구인가? 아니다. 막다른 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끝인가? 그 또한 아니다. 갑작스레 끊겨버린 길, 끝없이 펼쳐진 바다 앞 모래밭과도 같다. 산을 따라 굽이굽이 빽뺵하게 들어찬 지붕들의 지평선을 보는 것과도 같다. '갈 곳이 없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p.37 주인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여자도 그를 쫓아 달려간다. 여자는 그를 놀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히잡값을 치르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자는 뛰어가는 중에 왜 남자를 뒤쫓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남자가 먹잇감처럼 보인다. 그는 그레이하운드처럼 날씬하다. 하지만 여자는 그보다 더 빨리 달린다.

p.101 나는 지금 미셸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내 평생 단 한 번도 그를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내 기억에 조금도 남아 있 지 않을 것이다. 소와 양을 본 기억은 있다. 심지어 보도에 초록색 침을 뱉은 기억도 난다. 하지만 미셸은 전혀 기억 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갑자기 그에게 소리 지르고 웃고 싶다. 그것은 무시무시하면서도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는 냉정함이다.


작가는 말한다. “외곽, 변두리, 경계…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 당신은 시선의 변두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거리와 색을 가지고 선명하게 인식되는, '제대로 인식되는' 영역이 아니라 시선을 옮기고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야 알 수 있는 영역의 흐릿한 상이 머무는 곳 말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그 이미지들을 닮았다.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지 못하는 것들. 아니, 틀렸다. 실체가 인식의 경계에 흘러들어오며 늘어지거나 일그러지고 얽히는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아니,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의 진짜 모습일지 모른다.

p.236 나는 조개껍데기를 해양생물의 집이나 해변에 널린 장신구라기보다, 항상 해골로 생각해왔다. 다양한 조개껍데기와 소라고둥으로 만든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린 해안 산책로 기념품 가게 또한 뼈를 파는 곳처럼 보였다. 저 낮은 납골당에 귀를 대고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바닷소리가 아니라 연체 동물의 영혼, 그러니까 조개껍데기 안쪽 진주층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영혼의 소리가.

p.266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여자가 몇 달 동안 고민하던 생각과 딱 들어맞았다. 얼마 남지 않은 믿음이 사라지고, 이 게임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마저 떨쳐버렸을 때, 메시지가 기적적으로 도착했다. 믿을 만하지 못한 연인의 마지막 약속 같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기적과 점술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지 못할 뿐이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초현실이라 불리는 극도의 현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시공과 주제, 화자를 달리하나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범람, 혹은 침투하거나 스며들어오는 초현실적 세계라는 뿌리를 공유한다. 그것은 존재 자체로 불안이다.

인식 바깥의 세계와 뒤섞이는 경험은 차라리 오염, 부패, 환각... 다른 이름으로 불려 다시금 깊은 금 너머로 밀어내져야 안심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일까. 어쩌면, 비정형의 세계가 고스란히 되비추는 이 세계의 이면 때문일까. 뒤집혀 다리를 바둥대는 갑충, 벌어진 틈 사이로 살덩이를 날름대는 조개를 들여다 볼 때처럼.

독자들은 이 괴이하고 섬뜩한 세계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되는가. 더럽고 끔찍한 폭력의 세계의 발밑을 침식하는 무의식과 생경함의 공포, 초월보다는 원시에 가까운 것들에게서. 절망, 무력, 전복, 소외... 그 끝에서 다다를 곳은 어디인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이 경계 없는 경계-바깥의 세계에서.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그곳엔...

p.185 여자는 동시에 도처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것처럼 그 꿈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여자가 수천 개의 조각으로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자기 마음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지엽적인 내용만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모든 꿈은 여자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여자는 자기 꿈속으로 밀고 들어온 타인의 꿈에 의해 파멸되었다고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차분했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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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머더 클럽
로버트 소로굿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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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란 과연 무엇을 이르는가? 있지만 없는 존재. 숨처럼 공기처럼 그 존재가 희미해 말해도 들리지 않고, 있어도 없는 듯이 여겨지는 탓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존재. 이름 없는 배경이 되는 존재. 주체가 아닌 배경, 일상의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나이 든 여자. 수수한 망토를 두른 작달막한 여자, 휠체어를 탄 여성 노인과 그 보호자, 수수한 중년 여성. 언뜻 보고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는 이는 장담컨대, 아무도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무해해' 보이는 여자들이기 때문에. 아줌마, 할머니. 알아봤자 뭘 얼마나 알겠어요? 해봤자 뭘 하겠어요?

p.21 그녀는 얼굴 앞에 태블릿을 들어 올렸지만 이 멍청한 기계는 인식할 수 없다며 잠금 해제를 거절했다. 주디스는 나이 든 여자로서 겪곤 하는 수모를 또 한 번 당한 것 같아 못마땅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현대의 세상은 주디스를 마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대했고 망할 컴퓨터조차 그녀가 자기 자신과 충분히 닮아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했다.

p.73 오랫동안 그녀는 가정주부, 아내, 그리고 엄마로 살았다. 모두 훌륭한 역할이었고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축복받은 것은 행운이라고 스스로 되뇌어 왔지만, 사실 그녀의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정의된 것임을 계속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엄마, 〈신부〉의 부인, 그리고 〈가정〉의 주부였다.


대작이든 기념비적 흥행작이든 간에, 잘 알려진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들의 대부분은 현실을 반영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신성한' 임무에 대체로 성실하게 임해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격 드센 기지배, 허영 많은 아가씨들이 '철'이 들어 '정상가정'의 부품이 되거나, 어디서나 흔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없는 셈 쳐지는 데 이골이 난 나머지 그들 자신조차 이상한 줄을 모르고 살도록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온갖 여자들을 이름도 없이 냅다 '아줌마', '할머니'의 틀에 가둬놓는 일에.

그러므로 까탈스럽고 해괴한 태도는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의 고유한 속성으로 낙인찍히는 그야말로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현실에서도, 창작물에서도, 그 안의 여성들에게서도.

p.229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이름도, 방향성도 없이 떠도는 느낌이었다. (...) 자신의 인생에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였기에, 그녀는 현재 아는 유일한 진실에 매달렸다. 자신은 가정주부이며, 이 상황에서 자신이 정신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주부들 중 최고의 주부가 되는 것뿐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잔혹한 사회 고발 같겠지만, 이건 의외로 꽤나 영국식 정통파 탐정소설이다. 달가워하지는 않아도 일단 말을 걸면 대답은 하는 떨떠름 매너와 차와 술은 거절하는 법이 없는 '점잖은' 사람들.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사건에 기꺼이 덤벼드는, 매력적이고 선하면서 괴짜인 주인공. 그의 비범한 관찰력과 추리력, 은둔을 좋아하는 성격까지.

차분한가 하면 짓궂은 구석이 있고, 정의감 30에 흥미 70 정도의 희한한 동기로 종횡무진한다. 숨기려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의 두뇌싸움, 사랑스럽고 능청맞은 동시에 때로는 거짓말처럼 대담해지는 동료들에 폭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툭, 찔러주는 섬뜩함 한 스푼. 빠진 것 없이 꼭꼭 챙겨담은 뉴클래식이라니. 마카롱김치찌개 같구나... 근데 이제 희한하게 맛있는...

p.33 주디스는 천성적인 낙천주의자였다. 이런 본성은 그녀를 정의하는 주된 특징이었지만, 그녀는 또한 최대한 모든 것에 솔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말로가 여전히 활기차긴 하지만, 영국의 다른 모든 마을처럼 지난 10년간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사람들의 선함은 그대로였다. 이것이 바로 주디스가 중심가 끝에 다다랐을 때 자전거를 벽에 기대 놓으면서 스스로에게 상기시킨 사실이었다.

p.59 벡스가 벽장을 나오자 왠지 난감하고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쪽이 벽장에 숨은 상태로 처음 만난 중산층 여성 둘이 그 만남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 정해진 에티켓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있지만 없는, 말해도 들리지 않고, 있어도 없는 존재가 빈틈을 찌르고 판세를 뒤집는 쾌감을 더한, 그야말로 이제 와서 만난 게 억울할 정도로 유쾌한 탐정소설이다. 거기에 섬뜩한 뒷맛 한 스푼까지. 시작부터 차기작을 기다리게 하는, 우아하고 유쾌한데다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평에 손색이 없다.

첫 장편으로 평화로운 마을을 단박에 대형사건의 늪에 빠트렸으니, 다음 목적지를 기대할 수밖에. 웃자니 맵고, 울자니 웃긴 구석이 있는 젠틀하고 괴팍한 영국식 유머와 함께, 다음 탐정의 등장을 기다린다. 다음엔 어느 동네의 범인과 괴짜가 온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게 될까. 즐거운 마음으로 뛰어드는 독자를 어떻게 따돌리고 도망칠지.

p.13 만일 누군가가 바로 그 순간 강가에 있었다면, 그리고 저택을 올려다봤다면, 아주 작고 풍만한 몸집에 마구 헝클어진 흰머리를 한 70대 후반의 여성이 맨몸에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망토를 두르고 거실 창 앞에 선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여러 면에서 주디스는 슈퍼히어로가 맞았다. 아직 그녀 자신만 모를 뿐이었다.

p.245 「우린 안 보여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말한 그대로예요. 우리는 〈늙은〉 여자들이잖아요.」 「마흔 넘은 여자들은 아무도 신경 안써요.」 (...) 「사실 우리가 아니라 나머지 세상이 문제인 거예요. 사회는 나를 그냥 작고 늙은 여자로만 생각하죠. 내가 말한 대로 우리는 보이지 않아요. 그걸 이용하면 돼요.」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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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인터넷 - 지구를 살릴 세계 최초 동물 네트워크 개발기
마르틴 비켈스키 지음, 박래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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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독보적인, 동시에 생물이기에 갖는 특성 중 하나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왜, 어떻게, 어째서... 기존 지식으로 이루어진 '당연한' 세계를 재구축하고 뒤집어엎어 확장하는 것은 결국 의문사다. 궁금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아름다움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기 때문에 인간은 무언가를 이해하고 알아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자연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여기저기 씨앗을 비축함으로서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아구티. 어미나무로부터 씨앗을 이동시키기 위해 아구티를 필요로 하는 나무, 나무 그늘에 씨앗을 비축하는 아구티, 아구티를 잡아먹어 옮겨둔 씨앗을 먹지 못하게 하는 오실롯처럼.

인간 또한 이 순환에서 예외가 아니다. '인간을 입양한' 황새 한지의 사례를 보건대, 인간과 동물,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주도적으로 상대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의 생태에 적응하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은 '태초부터 정해진' 유일하고 일방향적인 힘의 부품으로 기능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다방면적으로 긴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 적어도 원시 이후의 인간은 대체로 정주동물이다. 유목민족이라고 해도 상대적으로 좁은 영역을 오가며, 무작정 떠돌지는 않는다. '문명'을 구축한 종인 탓에 우리의 거주지는 제한적이며, 특정 조건들에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동물도 그러한가? 계절과 바람, 먹이를 따라 움직이는 동물들의 이동은 어떠한가?

만일 그들의 전생애, 태어나 자라고 돌아오는 흐름을 알 수 있다면,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에 의해 전지구적 자연환경이 극단적으로 바뀌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세는 더이상 돌이킬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자연'에서 하늘과 땅, 바다를 오가는 동물들의 생태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인류 역사에, 또다른 전쟁이 발발한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것을 '군수물자'로 취급하는 총력전의 시대에 비인간동물이라고 예외일까. 차마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소동에서, 우리는 책임을 읽어내야 한다. 전쟁의 세계에서는 어제의 의심이 오늘의 전략이 되기도 하므로.

생물인터넷, 좁게는 추적의 역사에서부터 넓게는 자연과 인간의, 인간을 포함한 생물 간의 영향 관계까지 큰 그림을 그려나가다보면, 다시금 부분으로서의 인간, 전체의 일부이자 곧 거대한 영향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간 존재를 마주할 것이다. 선택은 현재에, 결과는 미래에 있으니,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도서 발췌 가제본 제공: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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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동남아 - 동남아시아의 어제와 오늘을 이끈 16인의 발자취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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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다섯 글자도 길어 세 글자로 줄여 부르는, 손발을 다 꼽아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나라와 더 많은 섬과 강으로 이루어진 곳, 동남아시아. 그 이름에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것은 으레 과일이나 관광지나 독특한 울림을 갖는 여러 언어들일 것이다. 관광지로서의 동남아, 수입품에서 자주 본 이름들.

식민지배 및 독재정권 청산과 경제발전이라는 과제를 양 어깨에 짊어진 곳. 한때는 수많은 식민지 중 하나였다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국에게 원조국이었음에도 수십 년 사이 업신여김의 대상이 된 나라들. 수많은 유적지를 간직한 동시에 세계적 종교지도자가 나고 자란 곳. 수많은 섬과 산, 강과 바다만큼이나 굴곡진 역사를 거쳐온 나라들.

p.22 토론 중에 말라야(말레이시아 성립 이전 명칭)는 "중국인을 길러준 땅"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영국은 제국주의의 성공을 위해 '상상된 공동체'로서 말라야를 언급했지만,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자신들을 받아주고 품어준 나라로 받아들인 것이다. 페낭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이보다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은 찾기 힘들 것이다. 이때의 논쟁과 단발론의 승리는 당시 말레이반도 중국계 이주민들의 지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p.66 도시와 농촌, 산간 지대와 해변 등을 그린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는 덥수룩한 수염에 수척한 얼굴을 한 자화상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그의 자화상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이다. 슬픈 눈빛이 특히 인상적이다. 어느 평자는 "시대의 슬픔을 드러낸 얼굴"이라고 했다. 베트남의 굴곡진 근현대사는 바로 파이의 삶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들의 역사를 이끌고 눈부신 발자취를 남긴 이름들을 말할 수 있는가?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사는 우리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망국부터 전쟁, 학살과 독재, 채 세대를 거치기도 전에 격변해온 한국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 독립, 근대화와 민주주의 체제의 정착 등 격동의 20세기를 거쳐왔기 떄문이다.

대항해시대에는 미개인의 땅, 원시림과 천연자원의 보고인 동시에 '항로'의 일부였다가 팽창하는 제국주의 시기에는 그야말로 쥐어짜일 대로 착취당했던 곳. 그러나 기어코 독립국가와 민주주의 정부 정착을 이뤄낸 수많은 국가들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들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선진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저임금 이주노동자 지위, 어려운 교육환경과 낮은 국민소득 등을 이유로 쉽게 무시하지 않는가. 그들에게도 역사가 있음을, 격동의 세기를 헤쳐온 장대한 이야기가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이유다.

p.244 결국 혁명의 열풍이 전국으로 번지던 12월 30일 호세 리잘은 스페인 정부에 의해 사형당한다. 그의 사망 소식은 (...) 필리핀 독립 및 공화국 성립 선언으로 이어진다. 필리핀인들이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선언이었다. 여기에는 호세 리잘의 소설과 활동, 비극적 죽음이 깔려 있었다. 비록 무장 투쟁에 동의 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조국을 사랑했다. 필리핀인의 삶과 문화, 역사,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 책은 문인, 사업가, 화가, 승려, 혁명가, 의사, 왕족 등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20세기, 격동의 세기에 활동해온 인물들의 업적과 그들의 생애를 통해 동남아시아 각국의 발전과 변화를 살핀다. 그들의 이름부터, 현대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개중에는 전쟁통의 한반도에 머물며 고통받는 우리 민중에게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본 이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을 위해 힘쓴 이도, 말 그대로 온 삶을 바쳐 독립을 일궈낸 이도 있다. 동시에 시작은 혁명가였으나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학살자와 애써 이뤄낸 평화를 독재의 발판으로 이용한 자, 지금에 와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자도 있다.

p.40 다라랏사미는 주변 시선에 굴하지 않고 란나 제국의 후계자로서 자기 소명을 이어나갔다. 근대식 병원 설립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 전통 무용극(라콘)의 대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의 질서에 운명이 좌우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강인한 여성이 등장한다.

p.160 목타르는 한국 전쟁과 관련한 보도가 대부분 승전 소식에 치우쳐 있음을 아쉬워했다. 실제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한국 주민들의 이야기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 목타르가 전하는 기록에는 전쟁 당사자로서 겪은 인간적인 고통이 담겨 있다. 그는 인간적인 눈으로 전쟁을 기록하고자 했다. 이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현된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인류애는 문학가이자 기자로서의 삶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위인전이 아니다. '선진국 못지않은 훌륭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 혹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의 모범으로서 이들을 주목하자는 거창한 뜻은 없다. (…) 누구에게는 소소한 교훈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다. 타인의 삶이 곧 내 삶이 되지는 않겠지만 위안은 될 수 있다" 라고.

모든 국가, 모든 문화권, 모든 지역이 그렇듯 동남아시아 각국들 또한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불완전한 민주주의제와 독재정권의 탄압, 차별과 사회갈등, 세계정세에서의 약소국 지위 등. 우리의 역사를 그들에게서, 그들의 역사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를 권한다. 멀고도 가까운 곳, 낯설지 않은 이름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보기를 기대한다.

p.110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의 건국 이념인 판차실라를 요란하게 앞세웠는데, 역사학자 진 테일러는 이를 두고, 수카르노의 판차실라가 인도네시아인을 하나로 묶는 '감정을 자극하는 선언' 이었다면 수하르토의 그것은 '통제와 순응을 위한 곤봉'이었다고 평가했다. 수하르토의 독재 정권은 국민을 탄압했다. 집권 32년간 정권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약 80만 명에 이른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p.169 목타르는 훗날 한국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 라몬 막사이사이상(저널리즘 부문)을 수상한다. 기자로서 그가 보여주었던 용기 있는 보도와 인류애가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것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적대 관계에 있는 세계적 강대국들의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나라가 어떻게 파멸의 길에 이르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 《호랑이! 호랑이!》의 한 대목이다. 어쩌면 목타르는 전쟁 보도를 통해 자국민들에 교훈을 남기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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