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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동남아 - 동남아시아의 어제와 오늘을 이끈 16인의 발자취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동남아'. 다섯 글자도 길어 세 글자로 줄여 부르는, 손발을 다 꼽아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나라와 더 많은 섬과 강으로 이루어진 곳, 동남아시아. 그 이름에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것은 으레 과일이나 관광지나 독특한 울림을 갖는 여러 언어들일 것이다. 관광지로서의 동남아, 수입품에서 자주 본 이름들.
식민지배 및 독재정권 청산과 경제발전이라는 과제를 양 어깨에 짊어진 곳. 한때는 수많은 식민지 중 하나였다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국에게 원조국이었음에도 수십 년 사이 업신여김의 대상이 된 나라들. 수많은 유적지를 간직한 동시에 세계적 종교지도자가 나고 자란 곳. 수많은 섬과 산, 강과 바다만큼이나 굴곡진 역사를 거쳐온 나라들.
p.22 토론 중에 말라야(말레이시아 성립 이전 명칭)는 "중국인을 길러준 땅"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영국은 제국주의의 성공을 위해 '상상된 공동체'로서 말라야를 언급했지만,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자신들을 받아주고 품어준 나라로 받아들인 것이다. 페낭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이보다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은 찾기 힘들 것이다. 이때의 논쟁과 단발론의 승리는 당시 말레이반도 중국계 이주민들의 지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p.66 도시와 농촌, 산간 지대와 해변 등을 그린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는 덥수룩한 수염에 수척한 얼굴을 한 자화상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그의 자화상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이다. 슬픈 눈빛이 특히 인상적이다. 어느 평자는 "시대의 슬픔을 드러낸 얼굴"이라고 했다. 베트남의 굴곡진 근현대사는 바로 파이의 삶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들의 역사를 이끌고 눈부신 발자취를 남긴 이름들을 말할 수 있는가?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사는 우리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망국부터 전쟁, 학살과 독재, 채 세대를 거치기도 전에 격변해온 한국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 독립, 근대화와 민주주의 체제의 정착 등 격동의 20세기를 거쳐왔기 떄문이다.
대항해시대에는 미개인의 땅, 원시림과 천연자원의 보고인 동시에 '항로'의 일부였다가 팽창하는 제국주의 시기에는 그야말로 쥐어짜일 대로 착취당했던 곳. 그러나 기어코 독립국가와 민주주의 정부 정착을 이뤄낸 수많은 국가들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들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선진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저임금 이주노동자 지위, 어려운 교육환경과 낮은 국민소득 등을 이유로 쉽게 무시하지 않는가. 그들에게도 역사가 있음을, 격동의 세기를 헤쳐온 장대한 이야기가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이유다.
p.244 결국 혁명의 열풍이 전국으로 번지던 12월 30일 호세 리잘은 스페인 정부에 의해 사형당한다. 그의 사망 소식은 (...) 필리핀 독립 및 공화국 성립 선언으로 이어진다. 필리핀인들이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선언이었다. 여기에는 호세 리잘의 소설과 활동, 비극적 죽음이 깔려 있었다. 비록 무장 투쟁에 동의 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조국을 사랑했다. 필리핀인의 삶과 문화, 역사,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 책은 문인, 사업가, 화가, 승려, 혁명가, 의사, 왕족 등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20세기, 격동의 세기에 활동해온 인물들의 업적과 그들의 생애를 통해 동남아시아 각국의 발전과 변화를 살핀다. 그들의 이름부터, 현대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개중에는 전쟁통의 한반도에 머물며 고통받는 우리 민중에게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본 이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을 위해 힘쓴 이도, 말 그대로 온 삶을 바쳐 독립을 일궈낸 이도 있다. 동시에 시작은 혁명가였으나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학살자와 애써 이뤄낸 평화를 독재의 발판으로 이용한 자, 지금에 와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자도 있다.
p.40 다라랏사미는 주변 시선에 굴하지 않고 란나 제국의 후계자로서 자기 소명을 이어나갔다. 근대식 병원 설립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 전통 무용극(라콘)의 대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의 질서에 운명이 좌우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강인한 여성이 등장한다.
p.160 목타르는 한국 전쟁과 관련한 보도가 대부분 승전 소식에 치우쳐 있음을 아쉬워했다. 실제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한국 주민들의 이야기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 목타르가 전하는 기록에는 전쟁 당사자로서 겪은 인간적인 고통이 담겨 있다. 그는 인간적인 눈으로 전쟁을 기록하고자 했다. 이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현된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인류애는 문학가이자 기자로서의 삶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위인전이 아니다. '선진국 못지않은 훌륭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 혹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의 모범으로서 이들을 주목하자는 거창한 뜻은 없다. (…) 누구에게는 소소한 교훈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다. 타인의 삶이 곧 내 삶이 되지는 않겠지만 위안은 될 수 있다" 라고.
모든 국가, 모든 문화권, 모든 지역이 그렇듯 동남아시아 각국들 또한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불완전한 민주주의제와 독재정권의 탄압, 차별과 사회갈등, 세계정세에서의 약소국 지위 등. 우리의 역사를 그들에게서, 그들의 역사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를 권한다. 멀고도 가까운 곳, 낯설지 않은 이름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보기를 기대한다.
p.110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의 건국 이념인 판차실라를 요란하게 앞세웠는데, 역사학자 진 테일러는 이를 두고, 수카르노의 판차실라가 인도네시아인을 하나로 묶는 '감정을 자극하는 선언' 이었다면 수하르토의 그것은 '통제와 순응을 위한 곤봉'이었다고 평가했다. 수하르토의 독재 정권은 국민을 탄압했다. 집권 32년간 정권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약 80만 명에 이른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p.169 목타르는 훗날 한국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 라몬 막사이사이상(저널리즘 부문)을 수상한다. 기자로서 그가 보여주었던 용기 있는 보도와 인류애가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것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적대 관계에 있는 세계적 강대국들의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나라가 어떻게 파멸의 길에 이르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 《호랑이! 호랑이!》의 한 대목이다. 어쩌면 목타르는 전쟁 보도를 통해 자국민들에 교훈을 남기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