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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문항 킬러 킬러
이기호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평점 :
인생을 거는 시험. 단 한 번의 기회에 지금껏 살아온 시간을 송두리째 평가받는 날. 그 하루의 성적에 과거와 미래, 현재의 모든 가능성이 평가받고 더 나아가 그 개인의 존재가치증명을 대리하는 이름, 수능. 그 이름의 본질은 수학능력, 극히 일부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사람 자체의 등급이 되어버린 것. '고급'과 '폐급' 인생을 가르는, 수능.
모든 시험이 그러하듯 수능 또한 공정성을 내세운다. 노력과 실력으로 평가받는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 정말 그럴까? '성실하고 바른 학생'은 '좋은 성적'과 동의어인가? 단 하루, 시험장이라는 곳에서 일률화된 문제를 푸는 자리에 모두가 같은 기회를 갖고 오롯이 스스로의 '능력'을 펼쳐보이는가?
p.35 "공정한 경기라는 건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어. 오늘 고사장에 들어가는 수십만 명 중에는 너처럼 과외식 특강을 받으며 준비한 아이도 있고, 학원비가 없어서 학교 수업만 받아야 했던 아이도 있어. 그리고 지금 진짜 네 경쟁자라고 할 만한 애들은 이 약을 다 먹었을 게다."
p.63 반에서는 잘하는 축에 들고 일부 선생님들은 나를 똑똑하다 평하기도 하지만, 엄마와 언니의 평가는 단호했다. 나는 "해도 안 되는 애"였다. 그리고 내 머릿속을 점령하는 것은 언제나 엄마와 언니가 내리는 평가의 말이었다. 해도 안 되는 애, 열심히 하는데 요령을 모르는 애.
그 하루의 기회를 위한 과정인 입시는 가히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증거로, 이미 입시전쟁이란 말은 시장에 목매인 누구에게도 위화감이나 경각심을 주지 않게 되어버리지 않았나. '제때' 응시한 스물 남짓의 젊음들은 전쟁터로 내몰리며 무엇을 증명해내는가.
입시 자체는 아무것도 담보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성적이 아니라 인성이다. 수능성적과 학력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수험 '실패'는 인생의 실패다. 좋은 대학에서 고임금 직장, 사회적 지위로 이어져 행복의 탄탄대로를 달려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변질된 걸까.
p.36 "정부는 이거 못 잡아. 안 잡아. 대한민국이 자주 그래. 지킬 수 없는 규정을 발표하고 다 같이 뭉개지. 그런 풍토를 이해하고 위선자가 되어야 하는 순간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된다. 규정을 다 지키며 사는 사람은 경쟁에서 점점 밀려나 나중에는 아예 게임에 끼질 못하게 돼."
p.151 "아저씨, 저는요. 실수도, 실패도 싫어요. 그런 게 쌓이면 낙오자가 되는 거랬어요. 가난하게 살 거랬어요. 불행할 거라고요."
실수와 실패가 앞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을 다른 조각인간들을 통해 지켜봤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결국 스스로 구해야 하는 답이었다.
영화와 만화, 드라마 등에서 다뤄졌던, 상상을 초월하는 사교육 시장에 대중은 경악하지 않았다. 놀라긴 했지만 '저걸 몰랐다니'에 가까운 평가였을 뿐, '왜 저렇게까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할 수만 있으면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밀려나니까, 남은 인생 전부가 '패배'와 '을'로 점철될 테니까. 다른 길을 꿈꿀 여유 따위 없으니까.
놀랍게도, 사실 딱히 놀랍지 않게도, 대부분의 '부모'와 사회는 '입시지옥'의 당사자들을 상처입힐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들 자신조차 그 일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다른 길을 꿈꿀 여유는 없다. 유일하게 '허락된' 길, '안전한' 방법은 그뿐이라, 자기를 위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라 믿을 뿐이다.
p.54 진정한 사교육이 무언지. 최후의 승자가 되는 법이 뭔지 모르는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서빈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밀려와 수연은 핸들을 힘주어 꽉 잡았다. 결국 그녀 역시 자본의 힘을 굳게 믿기에 아등바등 살지 않는 것뿐이라는 비릿한 깨달음이 한 치도 비어져 나오지 못하게끔. 다른 이들이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믿는 것만큼이나 그녀 역시 그렇다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면서.
p.101 엄마는 아들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면 누구도 아들과 경쟁하려 들지 않을 테고, 아들도 경쟁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없으리라 믿었다. 아들에겐 그만한 자질도 있어 보였다. (...) 엄마는 초격차 유지에 집착하며 아들의 선행 학습 강도를 높였다. 그럴수록 아들은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다른 학생과의 학습 격차가 좁혀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행복을 가르치는 교육, 사람이 되는 길,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 모두가 무색해진 이 사회에 과연 정말 '행복한 사람'이 있기는 할까.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이들의 도전에 응원과 격려를 보내며, 마음껏 사랑을 보내고 행복을 기원하는 방법이 오직 무한 경쟁과 입시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행복과 웃음을 모조리 제쳐놓은 사람을 찍어내는 것이었을까.
짧지만 묵직하고 아픈 이야기들이다. 모든 것에는 금이 가있다. 빛은 거기로 들어온다던 시인의 말처럼, 우리 금 간 사람들은 영영 깨져버리지 않기 위해,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수지 않을 수 있을까. 행복을 응원할 수 있을까. 희망은 멀고 연약하다. 모든 곳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멈출 때다. 길을 바꿔야 할 때다. 익숙한 고통을 떠안기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p.164 아빠가 나약한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더 강한 상대와 경쟁해서 이겨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가난하고 게으르고 약한 것들과는 어울리지 말라 하셨죠. 그런데 엄마는 작고 약한 것을 사랑하라고 알려줬어요. 생명이 있는 모든 것,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달, 뺨을 스치는 바람에 경탄하라면서.
p.225 행복을 뒤로 미루지 마. 지금 행복하고 싶으면 지금 행복해지는 일을 해.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건 자기한테 하는 소리였고. 그런 말을 하고 난 직후의 체육 얼굴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 얼굴은 내가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만난 얼굴이었으니까.
*도서제공: 한겨레출판